저희 집 아침 식사 시간은 불규칙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들어오는 시간이 불규칙 하다 보니 저희 아이들이 아빠 기다린다고 늦게까지 안 자는 날은 아침이 늦어지기 마련이구요... 어떤 날은 여러가지 일 걱정 때문에 갑자기 새벽에 정신이 말똥말똥 해 져 버리는 날도 곧잘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저 혼자 일어나서 주섬 주섬 채려입고 아침밥도 별 생각 없이 집을 나오는 경우도 있죠.
오늘은 아침상에 두 아이들과 같이 앉아 아내가 급하게 채려주는 밥을 대충 떠 먹고 있었습니다.
제 아이는 사진으로 보신 분들이 계시겠지만 첫째는 5살 예림이구요, 둘째는 3살 예지입니다.
둘째 예지는 참 떼쟁이입니다.
아빠 무릎에 앉아서 밥을 먹겠다고 버티다가 바쁜 아침 시간이라 제가 안 받아 주니 드러누워 바동 거리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참 그치지 않고 오래도록 울지요.
그런데 참 뜬금없이 옛 생각이 하나 나더군요.
예전에 제가 새카만 코흘리개였던 시절.... 저희 집에는 친척 누나가 한분 계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아마 6살 쯤 되었을 것 같구요... 그 누나 나이가 그때 한 9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집에 불이 나서 가족이 다 죽고 혼자 남은 고아 처지였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잠결에 까묵 까묵 졸다가 문득 문득 들리는 얘기가 주변에 거둬 줄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우선 우리가 데리고 있자 하시는 부모님들 말씀이 들리더라구요.
그래서 그 누나가 저희 집에 한 1년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몇달 이었는지... 몇 일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생각에 한 1년은 안 되고 그래도 6개월은 넘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촌수로 따져도 계산 안 나오는 아주 먼 친척이었던 듯 합니다.
그 당시 저희 아버지는 교사로 재직하고 계셨고 한 해가 멀다 하고 옮겨 다니는 전셋방 시절이었으니 한 식구 더 거둔다는 것이 부모님에게는 참 쉽지 않은 노릇이었을 듯 합니다.
그렇지만 워낙 딱한 처지에 놓인지라 저희 부모님께서 나서신 듯 해요.
저와는 세살 터울이니 매일 장난치며 지냈죠. 그때 아마 학교를 다닐 나이였을 텐데 학교도 안 다녔던 듯 합니다.
기억이 많이 나지는 않아요. 지금도 그 누님 성함도 모르고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후 부모님에게도 한번 여쭤본 적이 없어서... 까마득히 제 기억에서 지워지다시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 그 생각이 나는지....
그 누나는 생면부지 알지도 못하는 집에 와서 지내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참 힘들었을텐데... 어두운 표정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매일 같이 놀면서 깔깔대고 웃었던 얼굴이 기억 나네요.
그런데 가슴 아픈 기억이 딱 2가지 있어요.
하루는 그 누나가 밥 그릇에 밥을 담아서 저와 제 동생에게 쥐어 주고 길 거리에 나와 같이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저희 어머니께서 무척 화가 많이 나셨어요.
무슨 동네 거지도 아니고 밥그릇을 들고 나와 길거리에서 먹는다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어려운 살림살이에 숟가락, 밥그릇, 밥상만 들고 달랑 분가하여 셋방 살이를 전전긍긍하는 와중에 저희 어머니께서는 심적으로 매우 지쳐 있었던 듯 합니다.
시집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팔바지로 서울 명동 거리를 쓸고 다니셨다고 하는데 시골 촌 구석에 시집와서 3년 시집 살이 호되게 치르시고 그나마 셋방 살이일지언정 분가하여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아야 할 시기에 덜커덕 한 식구가 더 늘어 셋이서 집안을 어지럽히니 마음이 좋지는 않으셨겠죠.
어머니는 그 누나에게 불호령을 하셨습니다. 아마 매질도 했을런지도....
어머니는 양반 가문을 들먹이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엄청난 예절 교육을 받으셨던 분이시라 도저히 그런 일은 견디질 못하기도 하신 듯 합니다.
왜 우리 애들까지 거지꼴을 만드느냐... 그러셨던 것 같아요.
우리는 같이 재미있게 놀았던 것 뿐인데 어머니께서 화를 내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누나 혼자서만 혼나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혼나도 같이 혼나야 하는 것 아닌가 싶구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우리는 혼나지 않고 누나만 혼나는 것이 저윽이 안심이 되었죠.
그래도 그날 기억이 나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는 않았던 듯 합니다.
그 날은 그렇다고 치구요....
그 이후 얼마쯤 지났을까요?
하루는 제 동생이 돼지저금통을 흔들며 누나와 저에게 왔습니다.
동전을 꺼내 보고 싶다는 거죠.
동생 나이가 5살이니 동전을 꺼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 보다도 그냥 동전을 넣다 뺐다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동전 욕심 보다는 달각달각 거리는 것 꺼내 보고 싶었죠.
제가 안 되니 누나가 달려들었습니다.
쇠젓가락으로 안을 쑤시며 동전을 꺼내려고 애를 썼죠.
그 누나도 돈 때문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냥 동생이 동전을 꺼내고 싶어하니까.. 도와 주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신 어머니께서 그 광경을 보셨습니다.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누나가 도둑질을 하려는 것으로 오해를 하셨습니다.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서 같이 사먹자고 저희를 유혹한 것 정도로 보셨겠죠.
그날 누나는 참 많이 혼났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어야 했지만 어머니의 기세에 눌려서 저희 둘은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누나는 오래도록 손 들고 서 있어야 했구요...
그 이후로 얼마 지나니 않아서 누나는 다른 집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 일 때문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모르지만 어린 마음에 저는 그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참 묘하죠.
제가 나서서 변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누나는 억울한 일을 당했고...
결국은 모든 일이 제 잘못이라고 생각은 했던 것 같은데.... 저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십수년이 지난 오늘까지 제 머리속에서는 그 누나에 대한 기억이 없었네요.
언뜻 기억의 편린이 스쳐 지나갈 법도 한데... 그닥 신경쓰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무 계기가 없어서였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 머리가 부끄러운 기억이니 지워야 겠다 싶었는지 다 지워 버린 듯 합니다.
아예 잊었으면 좋으련만... 갑자기 오늘 아침에 둘째가 떼쓰며 우는 모습을 보다가 그 기억이 고스란히 생각나고 말았네요.
왜 그때 누나가 도둑질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고 한 마디도 못 했을까요?
그렇게 즐겁게 지내던 누나가 그냥 아무 말 없이 집을 떠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요?
지금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계신지도 모르고..
얼굴도 이름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너무 가슴 아프고.. 죄송하고...
오늘 마지못해 내린다 싶을 정도로 애를 먹이던 첫눈이 내렸습니다.
좋은 기억만 살포시 간직하고 살면 좋으련만...
첫눈 오는 날은 항상 기분이 좀 그렇네요.
불현듯 생각난 이 기억이..
어쩌면 깨작 거리다 만듯 물러간 첫 눈 속에...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너무 미안해서요....
탁구 클럽에 와서 탁구이야기만 눈에 불을켜고 읽다가 defunct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읽으니 저의 어린 시절도 생각이 나는군요. 저도 옆집에 사는 동생이 잠시 저희집에 며칠 언혀 살았던 기억이 있는데 잘 해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괜히 핀잔주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지금 생각나는 군요. 은영이였습니다. 만약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때 미안했었다고 말하고 싶군요^^
아침 나절 잠깐 눈발이 비치더니 저녁이 되니 추적 추적 겨울비가 내립니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참 이기적이어서 안 좋은 기억은 잊고 사나 봅니다. 왜 이렇게 오래동안 잊고 지냈을까요? 덕분에 그 누나 이름도 모르고 저랑 어떤 친척관계였는지, 지금은 하나도 아는 것이 없네요. 언제건 뵙게 된다면 그때 정말 잘못했노라고 빌어 보고 싶습니다. 하루 종일 가슴 한 구석이 왜 이렇게 아린지....
첫댓글 가슴이 찡 합니다. 그렇게 밝은 분이셨다니 지금도 좋은 곳에서 잘 살고 계실겁니다. 아름다운 글 읽고 갑니다.
탁구 클럽에 와서 탁구이야기만 눈에 불을켜고 읽다가 defunct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읽으니 저의 어린 시절도 생각이 나는군요. 저도 옆집에 사는 동생이 잠시 저희집에 며칠 언혀 살았던 기억이 있는데 잘 해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괜히 핀잔주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지금 생각나는 군요. 은영이였습니다. 만약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때 미안했었다고 말하고 싶군요^^
이승환의 "당부" 라는 곡과 같이 들으며 읽었는데 지금 막 살짝 눈물나려고 하네요.ㅠ.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침 나절 잠깐 눈발이 비치더니 저녁이 되니 추적 추적 겨울비가 내립니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참 이기적이어서 안 좋은 기억은 잊고 사나 봅니다. 왜 이렇게 오래동안 잊고 지냈을까요? 덕분에 그 누나 이름도 모르고 저랑 어떤 친척관계였는지, 지금은 하나도 아는 것이 없네요. 언제건 뵙게 된다면 그때 정말 잘못했노라고 빌어 보고 싶습니다. 하루 종일 가슴 한 구석이 왜 이렇게 아린지....
누님도 어린 동생들과 지냈던 그 짧은 시간을 행복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누님과 해후하셔서 추억을 나누시길 기원합니다. 마음속에 난로가 지펴지는 것 같은 따뜻한 글이네요 ^^
20-30년전에는 적지않은 사람들이 다른집에 들어가서 ..생활 많이 했죠...뒹굴고 잘논 기억이 있고 그런데 지금 기억이 지워지고 ...잊고 삽니다.누님, 누이도...
맞아요. 예전에는 참 어려운 시절, 그런 경우가 많았었죠. 저도 고등학생 때 하숙 겸 친척 집에 잠시 있었는데.. 참 마음이 불편하더군요.
가슴을 촉촉히 적시고 갑니다..저도 첫눈이 내리면 가슴한켠이 저릿한게 왜그런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