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敎景)의 중국 전래의 근거
《대진경교유행중국비문(大秦景敎 流行中國碑文)
중국 당나라 덕종 2년(서기 781년)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西安)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문(大秦景敎 流行中國碑文)》
경교(경교(敎景)의 중국 전래의 근거
《대진경교유행중국비문(大秦景敎 流行中國碑文)
중국 당나라 덕종 2년(서기 781년)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西安)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문(大秦景敎 流行中國碑文)》
경교(敎)는 1400여 년 전인 서기 635년 당(唐)나라 태종 때 중국의 장안(長安, 서안西安)에 전래된 동부 시리아 지역의 기독교를 지칭한다. 동부 시리아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네스트리우스의 신학을 수용했기 때문에 네스토리우스교회로 불렸다.
네스토리우스교회는 동방교회(Church of the East), 페르시아교회, 동부시리아교회, 앗시리아교회 등으로도 불렸다.
한편, 아라본 일행의 중국 내도 이전인 5세기 중반부터 이미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황정욱, '예루살렘에서 장안까지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경교 문헌과 유물에 나타난 중국 종교의 영향에 관한 연구』 (한신대학교출판부, 2005)52-56.: 서원모, "당대의 경교와 동아시아 문화" 15.)
서기 635년에 아라본(阿羅本)을 단장으로 시리아교회 선교단이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에 이르렀다. 아라본 일행이 중국에 처음으로 내도(來到)한 해는 당 태종이 이(異)종교에 대해 포용정책을 펴고 있던 시기여서 아라본 일행을 크게 환영하였고, 그들이 중국에 온 지 3년이 되던 해인 638년에는 황제가 직접 조서를 내려 그들의 포교활동을 허용하였다. 이어서 장안의 의녕방에 토지를 내주고 대진사(大秦寺. 로마 교회)를 세워, 21명의 경교 사제(司祭)를 등적시켜 상주토록 하였다.
따라서 경교 사제들은 당 태종의 어진을 대진사 교당 내에 걸고 활발 하게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당 태종의 모친은 열심 있는 경교도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중국에 전래된 경교는 650년에서 841년까지 당나라의 12명의 황제 치세를 거치면서 중국 전역의 10도와 385주에 경교의 교당을 세우는 놀라운 중흥을 이루었다.
한편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에는 고구려가 멸망하여 통일신라가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삼국의 대당(對唐) 교류가 활발했던 때였다.
이처럼 당나라 황실의 도움을 받으며 활발하게 부흥하던 경교는 당 고종의 사후(死後),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박해(713년)를 시작으로, 도교 신봉 자인 무종(武)의 박해(845년), 황소(巢)의 난(879년) 등을 거치면서 극심한 탄압으로 경교 사제 6·7백 명이 환속되고, 교도 3만 여명이 학살되었다. 그 박해로 잔존 교도들은 중국 북방의 몽고(蒙古) 초원과 만주 등의 변경으로 흩어져 나갔다. 그 결과 몽고의 주변지역인 알타이 산맥 부근의 돌궐족, 헤프탈족, 위구르, 타타르, 케레이트족 등에는 칭 기스칸이 출현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경교가 전파되어 있었다. 당시 초원에서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케레이트의 군주 토오릴과 테무진(칭기스칸)의 부친은 의형제를 맺은 사이여서, 그로 인해 칭기스칸의 가문은 경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내몽고의 오르도스 지역에는 20세기 중엽까지 경교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Walter Heissig. 『몽골의 종교』(Die Religionen der Mongolei), 이평래역 22.8 Mostaert, A, Ordosica, Peking (reprint from Bulletin, No.9 (1934) of the Catholic University of Peking), 1934 )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볼 때, 고려 말기 7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공 시기에 한반도 지역에도 경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특히 고려 말 충렬왕 26년(1300년) 10월에는 원나라의 경교도로 알려진 할리길사(闊里吉思)가 고려의 정동행성(征東行省) 평장정사(
政事)로 부임 하였다. 당시 평장정사는 고려 후기 원나라가 설치하였던 정동행성(征東行省)의 관직으로 품계는 종1품, 정원은 2인이다. 원의 행성 관제에 의하면 장관인 승상의 바로 아래 관직이며, 특히 1320년(충숙왕 7)부터는 모든 행성의 승상이 혁파됨으로써 각 행성의 최고관직으로 되었다.
그는 대대로 내려온 고려의 노비제도를 혁파하려 시도하였으나, 고려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간 일이 있다.
오늘날 연구자들 중에는 이 사건을 경교의 고려 말기 전
래설의 중요한 단초로 보기도 한다.
고려 고종이 붕어하자. 1260년 3월,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세조)는 원나라에 가 있던 고려의 세자 왕전, (元宗, 재위 1259-1274년)을 고려의 왕으로 일방적으로 임명하여 귀국시켰다. 그 후 쿠빌라이는 자신의 딸과 고려 태자 '심'을 결혼시키고, 원종에게는 충경왕(忠敬王)이라 시호(諡號)했다. 이후 계속해서 쿠빌라이의 후손들을 고려의 왕들에게 시집보내어 고려의 왕을 사위로 삼고, '충'(忠)자 시호를 내렸다. 충렬왕(忠烈王, 1274년), 충선왕(王) 충숙왕(忠肅), 충혜왕(忠惠王),,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 1349-1351년)과 공민왕은 징기스칸의 가문의 여인들을 왕비로 맞았다. 이들 고려의 왕들은 모두가 몽고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어려서 몽고에 가서 몽고식 교육을 받고 자라며 몽고식으로 머리도 깎았다. 무려 1세기에 걸친 원나라 황실과 이와 같이 밀접한 관계로 미루어 고려말의 경교 전래설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조선왕조 말기인 고종 21년(1884년), 감리교회가 한국에 전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창간된 《대한그리스도인 회보 제145호(광무1년, 1897년 12월 8일)에는 중국의 당나라 때 정교가 중국 에 전래된 일에 대하여 서술한 기사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세교회가 동양에 들어옴.... 아시아에 처음으로 들어온 년도를 궁구하여 보건데, 당나라 정관(貞觀) 연호를 쓸 때에 예수 씨의 제자 니타리유(네스토리우스)라 하는 사람이 퍼시아(페르시아)국으로부터 구세 교회를 받들어 당나라에 들어와 장안(長安)에 우거할 새, 그때에 임금과 신하들이 존중히 대접하여 땅을 주어 집을 짓게 하고 그 교회 이름하되 경교(景敎)라 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다르나 실상은 그리스도의 교회라 지금 경교비문을 볼진대 확거(확거)가 분명하거늘..
(여기서 이 경교비문은 1625년에 한 사원 안에 있던 비석으로 그 비문을 통하여 이 비문은 638년에 세워졌고. 635년 중국의 당나라 때 경교가 중국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한국 개신교 전래 초기의 선교사들도 이미 경교에 대한 사적을 알고 있었다.(대한 크리스도인 회보,광무 원년(1897년 12월 8일)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은 경교를 '구세교회'라 이름했다
<오세종,경교비문역해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