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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體同觀分 第十八(일체동관분 제 십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肉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肉眼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天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天眼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慧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慧眼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法眼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佛眼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說是沙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甚多니다 世尊이시여
佛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라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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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6월 14일 염화실 인터넷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벌써 장마가 시작됐다 해서 부산에도 비가 많이 오고 있습니다. 이시간요. 세상은 요즘 뭐 이렇게 어떤 승부의 야욕에 사로 잡혀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정신을 잃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런데 유독 이 염화실이 이렇게 성인의 그 말씀을 공부하면서 정말 성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그걸 이렇게 더듬어보고, 우리가 상고해보고 또, 그 나름대로의 그 소견을 가지고 아는바대로 의논해보는 이런 시간을 우리가 갖는다고 하는거 참으로 수보리가 얘기했듯이 希有(희유)한 일이고, 모두가 희유한시간에, 희유한분들이 라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을 만날 수 있고 , 수보리를 만날 수가 있고, 또 많은 천이백 성인들을 만날 수가 있고, 또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고, 거기서 또 우리가 하나씩 배우고 또 건질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죠. 그런데서 우리가 하나씩 하나씩 지혜를 건져 올려서 우리들의 삶에 어떤 그 밝은 등불의 역할을 한다면은 그것이 불교공부를 하는 보람이고 , 부처님을 만나고, 수보리를 만난그런 그 소득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이시간 해 봅니다.
오늘은 십팔분 一體同觀分(일체동관분)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일체. 일체로 본다고 그랬어요. 일체로 동일하게 본다 글자만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이세상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여기서 중생이라고 이렇게 이런 표현을 씁니다만은 뭐 사람이라는 말을 저는 잘 쓰니까 그냥 사람이라고 하죠. 얼마나 사람이 많습니까? 우리가 뭐 그 다른 생명은 그만 두더라도 지구상에 60억 70억에 가까운 그런 그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이 하루에 생각만 하더라도 그 숫자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럼 60억생명의 그 하루에 백가지 생각한다하면은 이건 뭐 어마어마한 그런 많은 생각이 있을 것이고, 그 생각은 곧 달리 표현을 하면 마음입니다. 사람 많고 많은 사람들, 많고 많은 생각들, 그걸 여기서는 이제 한량없는 중생들의 한량없는 마음들, 이런말을 했어요. 그것을 일체로 동일하게 본다 그랬습니다. 일체라고 하는것은 空性(공성)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空(공). 텅빈 것으로 본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의 많고 많은 생각들이 있어요. 그것은 이제 있음을 표현한 말이죠. 그러나 그것을 공성으로 본다고 하는것은 없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이 늘 공존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봐야 우리가 제대로 보는 것이죠. 그것을 中道正見(중도정견)이다, 중도의 바른소견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공성으로 본다는것도 중도로 본다는것이고, 중도로 본다는것도 공성으로 본다는것이고... 그럼, 거기서 이제 그럼 왜 있느냐?
우리사람들의 많고 많은 생각들이 왜 있느냐? 그건 이제 因緣(인연)에 의해서, 緣起(연기)에 의해서, 假設(가설)ㅡ> 거짓설립 되어있다. 또는 假有(가유)ㅡ>거짓으로 잠깐 그 세력이 있는동안만 잠깐 유효하다. 그런이제 표현이죠. 그래서 (연기)다 (중도)다 (공성)이다 이렇게 이제 늘 같이 따라 다닙니다. 바로 그 중도, 공성의 그 한몸으로 동일하게 본다, 이뜻이 이제 一體同觀(일체동관)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이제 다섯가지 눈이 나오는데요,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이제 다섯가지 눈입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그 사람으로써 이르러 갈수 있는 극한단계에 이른, 최고의 어떤 경지에 이른 분을 우리는 부처님이라고 이렇게 설정하죠.
그럼, 부처님은 우리 보통 사람들보다 안목이 훨씬 뛰어나다 이렇게 봅니다. 그랬을때 구체적으로 이제 다섯가지 안목이 있다, 다섯가지 눈이 있다, 그렇게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사람들의 마음, 사람들의 숫자를 아는것과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것은 뭐 상당히 많이 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이제 얼마 안된다고 생각 할 수가 있고 우리보다 안목이 뛰어난 다섯가지 눈을 갖춘 부처님이 볼때는 정말 한량 없는 중생과, 한량없는 마음들을 알수가 있겠죠. 그래서, 그 뛰어난 부처님만이 갖춘 다섯가지 눈이라야 다 알 수 있는 한량없는 사람들의, 한량없는 마음을 전부 空性(공성)으로 텅빈 것으로 동일하게 본다, 뭐 이런 뜻입니다.
이제 십팔분의 내용은요, 간단합니다. 그러니까 그 금강경에 일체를 無相(무상)으로 이해하고, 무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그 무엇도 빠뜨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 그 많은 생각, 어느것 하나도 무상아닌것이 없다 이런 뜻이예요. 空(공)아닌것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五眼(오안)을 이제 거론하게 됩니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肉眼不(여래유육안부)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육안이 있는가?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有肉眼(유육안)이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그랬어요. 육안은 이제 우리도 있죠. 또,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天眼不(여래유천안부)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천안이 있는가?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有天眼(유천안)이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천안이 있습니다.
천안이제 뭐 天眼通(천안통)이라 해서 六神通(육신통)중에 하나로 이제 들어가는데, 지금 뭐 TV같은거 다 이런거 천안에 해당되죠. 그런데 그것은 어떤 과학적인 기술을 동원한 천안이고, 한 인간의 어떤 수행력에 의한 천안은 스스로 혼자 공유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지금 TV같은것은 공유할 수가 있지만은 개인이 수행에 의해서 얻은 천안은 혼자만의 것이죠. 그래서 크게 높이 사는것은 아니지만은 그래도 이제 수행의 과정에서 천안도 있을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에서 물론 부처님은 천안도 다 갖추셨죠. 천안이란, 뭐 한마디로 말해서 아무리 멀리 있다 하드래도 내 생각만 거기에 두면은 환히 본다는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앉아서 우리 법우님들이 방에서 어떻게 TV를 보고, 어떻게 컴퓨터 모니터를 보시는지 뭐 그런 모습을 다 볼수 있다는 거죠. 산하석벽이 장애가 없다 그런 표현을 합니다. 아무리 가려봐도 다 그것을 꿰뚫어 본다는거죠.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慧眼不(여래유혜안부)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혜안이 있는가?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여래)가 有慧眼(유혜안)이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혜안은 지혜의 눈이죠. 깨달은 사람이라야 갖출 수 있는 그런 혜안입니다. 불교공부를 이렇게 우리가 사량분별로, 의식으로 이렇게 해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항상 지혜의 말씀이기 때문에 조금은 이제 그 혜안을 갖출 수가 있어요. 빌릴수가 있습니다. 내가 크게 깨달아서 혜안을 얻을 수도 있지만 , 아직 그러기전에는 우리가 그 혜안을 갖추신 이 지혜의 가르침을 자꾸 가까이하고, 습득하고, 또 사유하고 이 경전에서 배우고 함으로 해서도 어느정도의 혜안은 갖춰질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거죠, 그게. 그것이 뭐 완전한 혜안이냐? 그렇게 말하면 대답할 길은 없지만은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혜안은 그것이 최선이예요.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에 아주 소중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지혜의 가르침은 자꾸만 우리가 가까이 하고, 익히고, 불교공부란 바로 이 깨달은 분들의 혜안을 나의 혜안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런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주 제일 값진 일이죠.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法眼不(여래유법안부)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법안이 있는가?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有法眼(여래유법안)이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법안이라고 하는것은 진리를 볼줄 아는눈 이렇게 보면 됩니다. 진리를 볼줄 아는눈. 뭐, 혜안이라고 하는것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그런눈이라고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법안은 아주 그 가르침, 또는 진리, 진리의 가르침, 여기 조금 이제 국한 시켜서 말할 수가 있는거죠. 그다음,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佛眼不(여래유불안부)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부처의눈이 있는가?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有佛眼(여래유불안)이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부처의눈이 있습니다.
부처의 눈, 이것은 부처님만이 갖출 수 있는 그런 그 눈을 불안이다 그렇게 하죠. 금강경은 이 불자들의 교과서입니다. 다 외우지는 못한다 하드래도 입에는 익숙해야 돼요.그리고, 여기에 뭐 글자 반복되는 글자 다 빼버리고나면은 새로운 글자가 漢字(한자)라 하더라도 불과 몇자 안됩니다. 한 삼사백자 될까말까 하는 그런 정도이거든요. 최소한도로 오늘날 우리 불자들은 이 금강경정도는 그 아무리 漢字(한자)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다 습득을 해야 합니다. 일년만 작정하고 이것쓰고, 익히고, 해석해 버릇하면은 이까짓것 누구라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반복되는것은 그냥 서당에서 한무 읽듯이 또는 강원에서 하듯이 그런식으로 이제 합니다. 우정 좀 훈련시키는 그런 마음으로.
佛眼(불안)이 있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五眼(오안)이야기가 왜 이렇게 이런 이야기를 했는가 ,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이렇게 완벽한 안목을 갖추신 부처님이 한량없는 중생들을 보고, 또 그 한량없는 중생들 한사람 한사람들, 또한 한량없는 마음들이 있어요. 그런 마음까지 다 빠뜨리지 않고 다 살펴서 볼줄 안다.
그러니 금강경에서 말하는 無相의 理致(무상의 이치), 相(상)이 없는 본래 어떤 그 개체로서 어떤 실재 하는 그런 것이라고 고집하지 마라.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중생들의 어떤 좋은 마음, 좋은 생각도 無相(무상)에 속하지 아니한것은 없다. 空(공)에 속하지 아니한것은 없다. 전부가공이다 공이면서 妙有(묘유)고 , 그래서 眞空妙有(진공묘유)고.
그러므로 중도의 원리 에 속하지 않는것이 없다. 이런 뜻에서 이렇게 말씀 하시는거예요. 그 뭐 어떤 저 뒷전에 있던 한중생이 아무리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그 나의 이마음정도는 못살필거야,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거예요. 아무리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나의 이 아주 기발한 이 생각을 아마 못 살필것이다 , 이런 그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은 천만의 말씀이라는거죠. 부처님은 전체적으로 원론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 뭐 일일이 그 살펴 알아서 아는것이 아니라 다 아는거죠. 여기서는 五眼(오안)을 동원해서 그 많은 사람들의, 그 많고 많은 생각들을 다 안다, 이런뜻에서 오안을 거론 했습니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恒河中所有沙(여항하중소유사)를 佛說是沙不(불설시사부)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항하강에 있는 그 모래를 부처님이 이 모래에 대해서 얘기 한적이 있느냐? 그랬어요.
부처님은 항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교화활동을 펴셨습니다. 그 항하강 맨처음 初轉法輪地 鹿野怨(초전법륜지 녹야원) 도 그 항하강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곳이예요. 의레히 그 녹야원을 참배하게 되면은 녹야원 참배하고 바로 그 이웃에 있는 항하강에가서 강의 모래도 만져보고, 부처님이 모래 이야기를 했는데 그 모래가 얼마나 가는가, 그리고 또 거기서 항하강 간지스강이라고 그러죠. 간지스강에서 성수라고 그 더러운 물을 성수라고 목욕하는 힌두교인들도 보게되고 뭐 그게 이제 인도 전통종교의 관습이니까 뭐 그게 이렇다 저렇다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만은 부처님이 처음 설법도 항하강 유역에서 했고 교화의 평생교화의 활동이 거의 항하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런 그 활동이 있습니다.그래 자주 말씀 하셨죠. 항하강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래서 경전에 자주 나옵니다. 그래서 이시간에 이제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항하강에 있는 모래에 대해서 이야기한적이 있느냐? 그러니까,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說是沙(여래설시사)니이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이 모래 항하강의 모래에 대해서 말씀한적이 자주 있습니다. 그랬어요.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一恒河中所有沙(여일항하중소유사)하야 有如是沙等恒河(유여시사등항하)어든
하나의 항하강에 있는 모래가 얼마나 많으냐 그렇듯이 그 항하강 한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이 많은 또 항하강이 있다고 하자 그랬을때 그 많고 많은 항하강의 그 많고 많은 모래들, 그런 말이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가
그와 같은 모래숫자와 같이 많은세계, 그런 세계에, 세계가,
如是寧爲多不(여시영위다부)아
이와같은것이 얼마나 많다고 하는가?
그러니까 뭐 하나의 항하강 하더라도 그 참 이루말할 수 없이 많은데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이 많은 항하강이 있고, 그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세계가 있다, 그랬을때 그 세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대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하대
以所國土中所有衆生(이소국토중소유중생)의
그러한 국토, 앞에 항하강의 예를 든 그러한국토가운데 에 있는 소유중생-있는바중생들의
若干種心(약간종심)을
많고 많은 마음들, 여기서약간종심이라는것은 우리가 보통 약간이라는 글자가 같은 글자지만 아주많고 많은 마음들을,
如來悉知(여래실지) 하노니
여래가 다 안다. 내가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수많은 중생들, 거기서 수많은 마음들, 이런것들을 부처님이 다 안다 . 여래가 다 안다.
何以故(하이고)오 如來(여래)가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여러 가지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닌 것일새
어째서 그걸 다 아느냐? 신기하죠. 우리는 한사람마음만 알려고해도 정말 어려운데, 평생 수십년 같이 살면서 알려고 해도 모르는게 또 사람 마음이죠. 여기서 부처님이 안다고 하는것은 우리가 그 생각하는 그런식으로 안다는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아는거냐? 空性(공성)으로 아는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공성으로. 다 텅빈 것이고 없는 마음이다. 텅빈 마음이다. 그거야 우리도 짐작하면 알 수 있죠. 부처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모든 존재를 공성 으로 보니까
마음인들 뭐 그까짓것 공성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들에 어떤마음이라 하더라도 공성의 원리에서 벗어난것은 없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교의 안목은 요, 대단히 뛰어난것이거든요. 우리가 꼭 불교공부하면서 명심해야할 문제입니다.
앞에서 뭐 먼지이야기, 세계이야기, 부처님세계, 중생의 세계, 별별 그 어떤 그 존재들의공성 을 이야기 해 왔습니다. 여기와서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공성을 이야기하는거죠. 왜 그러냐? 여래가 말하는 여러 가지 마음, 여러 가지 사람들의 , 여러 가지 마음 이라는것이 개위비심일새, 다 마음아닌것이 될새,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라
이 이름이 마음이라는것이다.
그래 공성이라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는 이런 수많은 그마음들은 뭐냐? 그건 이제 緣起(연기)에 의한 마음, 잠깐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런 그 말하자면 , 없는 가운데서 묘하게 이렇게 작용하는 마음이죠. 그러니까 중도라고 말하는거죠.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있음과 없음이 공존하는, 있음도 있고 없음도 있는, 없음도 있다는 말이 참 재밌는 표현이지만은 있음도 있고, 없음도 있는, 그런 그 없음과 있음이 공존하는 그런 상태가 우리 마음이고, 따라서 모든 존재인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은 우리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것, 뭐 재산, 명예, 가족, 온갖 그동안 수십년동안 쌓아올린것, 그리고, 내가 애지중지하던것, 이런것들 참 아까운 생각이 들죠. 아깝지만은 공성입니다. 어쩔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음이 서늘해져야 돼요. 부처님의 이런 가르침을 듣고 우리가 정말 애지중지하던 모든 것, 명예, 지식, 뭐 부귀, 온갖것들이 다 공성이라고 하는 그런 어떤 그 생각에서 뭔가 마음이 텅빈듯한, 그런 그 느낌을 우리가 비록 確澈大悟(확철대오)는 아니더라도 자주자주 그런것을 생각하고, 느끼는것이 좋습니다. 느끼는게 이게 바람직한거예요. 그렇다고 뭐 어떤 허무감, 내지는 절망감에 빠져 버리고 무슨 뭐 인생을 포기하는 뭐 그런것은 또 아니예요. 그것은 또 잘못 이해한거죠. 공성을 또 잘못 이해한것입니다. 중도를 잘못이해한것이고, 眞空妙有(진공묘유)를 잘못 이해한것이죠.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라. 크~으 아주 소중한 마음들, 우리가 정말 텅빈 마음이라 하더라도 뭐 미워하는마음, 사랑하는마음, 기뻐하는마음, 슬퍼하는마음, 도저히 제거할래야 제거 할 수 없고, 가슴에 말이죠, 큰 쇠뭉치 하나 콱 박혀가지고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런 그 없는 가운데서 그런것을 우리가 느끼는데 이게어떻게 없는거냐? 없는거냐? 그런 생각이 들죠. 그렇지만 없습니다. 본래 없었던 것이고, 또 언젠가 없었던것이 또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존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공성으로. 이건 우리가 뭐 그 세상을 많이 산 여러 법우님들이 더 잘 아실거예요. 허망하다는거. 참 五眼(오안)으로 볼때, 부처님의 다섯가지 안목으로 볼때, 이세상은 참중생들의 그 얼마나 많고 많은 마음들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그 마음으로서 이 세상에 주인노릇을 우리가 하고 있고, 우리 각자는 또 자신의 주인 노릇을 하는것이 결국은 그 마음인데 그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세요. (如來(여래)가 說諸心(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일새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라) 어쩝니까? 사실이 그런걸요.
가끔 비유를 들지만은 전문가의 눈에서 보면은 그게 신라 뭐 고려청자라고 애지중지하고 있지만은 전문가의 눈으로 보니까 모조품인걸요. 그 몇만원짜리도 안되고, 몇천원짜리도 안되는 참 가지고 있었다는것이 부끄러울 정도의 모조품이었다는것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비전문가라서 그것이 대단한것인양, 수억짜리의 그 무슨 보물이나 되는양, 애지중지하고 있는거죠. 우리의 감정들을요. 그래서 이 세상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이렇게 여기고 살아가지만은 정말 그 부처님과 같은 또 조사스님들과 같은 그런 그 존재의 실상을 보는데, 정말 전문가의 안목을 가진 분들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중도로 봐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포기하라는것이 아니고 중도로 보라는것입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過去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이며 現在心不可得(현재심불가득)이며 未來心不可得(미래심불가득)이니라
수보리야 왜그런가하면 과거심도 찾을수 없고 , 현재심도 찾을 수 없고, 미래심도 찾을수 없느니라.
우리의 마음 하지만은 내 결론적으로 마음이 왜 마음이 마음이 아니라 이 이름이 마음이라 하는가? 마음한번 우리 잠깐 생각해보자이거죠. 과거심이라고 하는게 뭐 있냐? 벌써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도대체가 그거는 없는거 알죠. 현재심이라고 하지만 현재심이라는게 뭡니까? 지금 금강경공부하는게 이게 현재심인데 현재라고 딱 잡는 순간이 이미 과거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그리고, 미래심은 아직 안 왔으니까 없는거구요.
그러니까 過去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이요 現在心不可得(현재심불가득)이요 未來心不可得(미래심불가득)이니라. 과거심도 찾을 수 없고 현재심도 찾을 수 없고 미래심도 찾을 수 없다, 여기서 뭐 얻을 得 자를 편리하게 해석하셔도 좋습니다. 과거심도 볼수가 없고, 이렇게해도 좋아요. 현재심도 볼수 없고 미래심도 볼수없다.
어~ 이대목에는 꼭 그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야할 대목이죠.옛날에 덕산스님이라고 유명하죠. “임제할” “덕산방” 이렇게 이제 선가에서 아주 알아주는 덕산스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본래 이 금강경을 그 숭상을 했습니다. 아주 많이 숭상하고 연구를 너무너무 많이 해가지고 금강경은 뭐 본문이야 그까짓거 얼마 안되지만은 여기에 따르는 온갖 참고서라든지, 온갖 자기가 지은 그 논문들이 한걸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기 다른 지방에, 남방에 무슨 선법을 가지고 진짜 불교다 라고 이렇게 큰소리친다고 해서 내가 이 금강경공부한것을 가지고 가서 그 외도들을 뭐 그 不立文字(불립문자) 敎外別傳(교외별전)뭐 이래하는거, 뭐 문자를 세우지도 아니하고, 교밖에 따로 그런그 전하는 그런법이 있다 이런 그 돼도 않는 소리하는 사람들을 가서 한번 가르쳐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해서 이제 남쪽으로 남쪽으로 禪(선)이 성행하는곳으로 가다가 우리 범어사에서도 떡장수노파가 있습니다만은 떡장수 노파를 만나서 잠깐 이제 점심을 하고 갈려고 점심이라는게 그대로 점찍을占자 마음心자 그거는 이제 중심에다가 마음을 찍는다, 하루 중간에다가 점을 찍는다, 그거는 점을 찍는다해서 그 중간에 먹는 음식이다, 그래 형식때가 아니고 잠깐 그 때 사이에 정식 그끼니사이에 중간에 이제 요기를 한다 그런뜻에서 점심이라고 하는거죠.
그래서, 떡을 사서 점심을 할려고, 잠깐 요기를 할려고, 이렇게 걸망을 내려놓고 떡장수 할머니에게 가서 이제 떡을 사먹을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할머니가 노보살님이죠. 노보살님이 처~억 이렇게 떡을 팔다가 보니까 스님이고, 큰 걸망을 지고 이렇게 내려놓는데 떡은 그 둘째치고 “그 스님지고 있는것이 뭡니까? 그러니까 아~ 내가 금강경 연구를 평생해 가지고 금강경대한 논문이 내 걸망속에 들어 있다고,” 그래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아~그러냐고!” 그럼 금강경에 대해서 내가 궁금한게 있는데 그 궁금한것을 설명해 주면은 내가 떡을 그냥 드릴테니까 좀 가르쳐달라는거죠. 그러니까 아주 신이 났습니다.
덕산스님이 평생 금강경공부 하신분이니까 만약에 대답을 하지 못하면 어~ 떡을 팔지도 않을뿐더러, 이 동네에서는 스님이 떡을 사 자실수 없습니다. 약속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니까 더 신이 나가지고 “좋다고!” 그래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떡장수 노보살님이 묻는거죠. 바로 이구절입니다.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이란 말이 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치렵니까? 占心(점심).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렵니까?” 점심이라는 말을
이용해서 그렇게 이제 질문을 했습니다. 不可得(불가득)이라고 했으니까, 찾을 수 도 없고, 볼 수 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마음은 없다 이거야.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도 마음은 없는데, 그럼 마음에다가 점을 친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 그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그런것은 경전에 뭐 금강경 다 뒤져봐야 금강경 과거 해석한 사람들 다 봐 봤자 거기에 대한 대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덕산스님은 이제 안절부절하고 대답을 못하고 있었어요. 당신 논문도 그런게 없고, 뭐 어디에도 거기에 대한 마땅한 대답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대답을 결국 못하고, 하~아 이 스님은 아주 대단한 그 기개가 있는 스님인데 그런데, 그 노보살님, 떡장수 보살님, 길거리 아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그런 노보살님인데 그만 코가 납작하게 되어 버렸죠. 그래서 떡도 못 얻어 먹고, 또 점심도 못먹고, 쫄쫄 굶은 상태로 그 노보살님인데, 가까이에 이제 용담숭신선사 아주 훌륭한 선사님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한번 참배를 하면 아마 소득이 있을겁니다. 그렇게 이제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그래서, 덕산스님이 용담스님에게 가 가지고 아주 재밌는 이야기가 있죠. 뭐 용담이니까 용龍(용)자, 못 潭(담)자이름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법당에 떡 들어서면서 마당에 이렇게 들어서면서 아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 용담이라고 하더니 용도 보이지도 않고 못도 없는데 아~ 무얼 가지고 용담이라고 하느냐?” 이렇게 큰 소리 쳤어요. 그러니까 마침 용담 스님이 법당뒤에 있다가 그말을 알아 듣고는 스윽 나와 가지고는 “그대가 진정 용담에 왔네. 용이 사는 못에 이르렀네.” 이렇게 이제 안내를 했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방에 들어가 가지고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밤이 이슥해서 객실로 이제 돌려 보내야 했어요. 그래서 “이제 객실로 돌아가서 객실에서 주무시지요, 쉬시지요.” 하고 용담스님이 덕산스님을 내 보냈는데, 문을 열어보니까 너무 캄캄해, “ 스님! 여기 저 어두우니까 촛불을 좀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래서 용담스님이 이제 촛불을 붙여가지고 밖에 있는 덕산스님에게다 건네주죠. 건네줄때 막 받을려고 합니다. 받자마자 당신이 건네준 촛불을 확~ 꺼버렸어요. 그러니까 금방 환하게 밝았는데 불을 끄니까, 불을 보고 있다가 불을 껐으니까, 갑자기 불이 없어졌으니까, 얼마나 캄캄 했겠습니까? 캄캄해진 그 순간 덕산스님께는 정말 큰 광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하는것입니다. 덕산스님 마음이 그때 비로소 밝아 가지고 다시 들어와 가지고는, “하~아 내가 참 남방에 선사스님들을 내가 무시하고 살았는데 오늘날 비로소 그것이 진실이라 하는것을 듣던바 대로 그것이 진실이라 하는것을 알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자신의 깨달음을 피력을 하게 되죠.
그 이튿날 아침에 대종을 치고 대중들을 모아놓고는 말하자면, 용담스님이 덕산스님을 이제 소개를 합니다. 하~아 여기 아주 근기가 대단한 사람이 오늘 여기 왔다고 소개를 했는데, 덕산스님이 있다가 자기가 짊어지고 간 그 금강경과 금강경의 논문들, 한걸망이 되는 그 천하의 아주 뭐 장문같은 그런 체격을 타고난 덕산스님이 한 줌 짊어지고 갔던 자기의 애지중지했던 논문을 법당앞에서 쌓아놓고 불을 태웠다는 거죠. 유명한 얘기입니다. 불을 다 태워 버리면서 세상에 아무리 뛰어난 그 중요한것을 다 가졌다 하드래도, 무슨 뭐 대통령이 되고 뭐가되고, 성인이 되고 뭐가되고, 하여튼 이 세상에서제일 중심이 되는 그런그 높은 자리를 다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저기 태허공에다가 먼지 하나를 날리는것과 같다.
또 온갖 설법을 다 한다 하드라도 아무리 어렵고 어려운 진리의 가르침을 다 설파한다 하드라도 그거는 뭐 저 바다에다가 물한방울 던지는거나 다를 바가 없다, 이런 그 표현을 했죠. 아주 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 앞에서 應無所住而生基心(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고 하는 그 대목에서 육조혜능스님이 깨달음을 얻었고, 또 여기서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에서 떡장수 노보살님으로부터 말하자면, 벌써 어떤 큰 충격을 받게 된것입니다.
여기서 깨닫지는 못했지만 여기서 일단 일차 충격을 받고 그 다음 에 용담스님께 가서 제대로 이제 깨닫게 되는 그런 그 인연이 있는 그런 그 구절이죠. 아주 참 금강경은 많은분들에게 愛誦(애송)되지만은 굽이굽이에 이런 사연들이 또 묻어 있어서 더욱 아주 금강경공부가 재밌죠.
여기에 그 이야기가 중요한게 아니고, 이 십팔분의 뜻은 그많은 사람들의, 그 많고 많은 마음들, 그 어떤 마음도, 우리가 그렇게 그렇게 소중한 조국을 위하는마음, 나라를 위하는마음, 이기고자하는마음, 무슨 원수 갚고자 하는마음, 사랑하는마음, 미워하는마음, 다 우리 버리지 못하는 마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고보면 그 모든 마음들이 궁극적으로 지혜의 눈으로 보면은 텅비어 없다는것입니다.
그런데, 한순간 구름이 일어나듯이 , 어떤마음이 미워하는 마음도 일어나고, 좋아하는 마음도 일어나고,뭐 충성심도 일어나고, 국가에 대한 마음, 뭐 이런것들이 일어나 가지고 무엿무엿 그것들이 불어나요. 불어나고불어나서 이제 그게 하나의 자기의 짐이 되죠. 가슴속에 응어리가 되고 그렇습니다. 뭐 조국을 위한 마음도 그렇고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그렇고,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도 그렇고, 어디에 뭐 어떤 승부심, 승부욕이 강해 가지고 꼭 이겨야 되겠다 하는 그런 그 집착심, 이것도 다 그래요. 똑같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사실은 가만히 꿰뚫어 보면은 어느순간 이렇게 서서히 서서히 생겼다가 그 어떤 인연에 의해서 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그 실체는 空性(공성)이라는 것입니다. 공하다는것이죠. 전문가의 안목으로 보면은 그래 텅비어 공한것이예요. 공한데 잠깐 그렇게 참 구름이 스쳐가듯이 슬렁슬렁 그냥 스치고 지나 가듯이 그렇게 지나가는것인데, 거기에 그만 우리들은 집착하고, 애착하고, 목을 매고, 그래서 그냥 거기에 몸부림을 치고, 이런 그 삶을 삽니다. 결국은 그런 병을 고치자는게 금강경의 목적이죠. 참 이 대목도 우리가 눈여겨 볼 그런 대목입니다. 五眼(오안) 을 그 앞에서 소개한것은 사람들이, 그 많고 많은 마음을, 한마음도 빠뜨리지 않고 내가 다 본다, 그런 의미에서 오안 을 열거했습니다.
法界通化分 第 十九(법계통화분 제십구)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有人이 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多不아 如是니이다 世尊이시여 此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이 甚多니다 須菩提야 若福德有實인댄 如來가 不說得福德多어니와 以福德無故로 如來가 說得福德多니라
그 다음에 법계통화분인데요. 십구분. 온 법계를 , 通化(통화)는 통자는 전체라는 뜻입니다. 전체적으로 교화한다, 그래요. 교화한다 化 자인데, 이건 이제 뭐 교화한다 그런뜻이니까 여기서는 이제 無相(무상)으로 본다 그런 뜻입니다. 무상으로 본다 , 무상으로 볼줄 알면 그게 교화죠. 금강경에서 소위 교화는 무상으로본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법계 전체를 전체적으로 전체로 변해 버린다, 化(화) 될 化 자니까 변하게 변화시킨다, 교화한다, 무상으로 본다, 이런 의미로 보면 되겠습니다. 아주 간단 했어요.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若有人(약유인)이 三千大千世界七寶(삼천대천세계칠보)로 以用布施(이용보시)하면 是人(시인)이 以是因緣(이시인연)으로 得福多不(득복다부)아
수보리야 뜻이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에 사용했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복을 얻은것이 많은가? 그랬습니다.
如是(여시)니다 世尊(세존)이시여 此人(차인)이 以是因緣(이시인연)으로 得福(득복)이 甚多(심다)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인연으로 복을 얻은 것이 많습니다.
그렇겠죠. 그거야 당연하죠, 상식적으로. 삼천 이 지구위에다 금 은 보화를 가득이 채워서 보시에 사용했다면 뭐 그 따르는 복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 이야기죠.
須菩提(수보리)야 若福德有實(약복덕유실)인댄
복덕이 많다 많이 있다 한것이 그 있음이 실다운 것일진댄, 실재한것인진댄,
如來(여래)가 不說得福德多(불설득복덕다)어니와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거니와
以福德無故(이복덕무고)로 복덕이 없기 때문에
如來(여래)가 說得福德多(설득복덕다)니라
여래가 말하기를 복덕을 얻은것이 많다고 한다.
이것은 뭔 말인고 하니, 결국은 모든 것은 없다 , 없음으로 많다, 그런 말입니다. 없음으로 많다. 그러니까, 이것도 福德의 無相(복덕의 무상)입니다. 복덕의 무상. 아무리 복을 많이 쌓았다 하더라도 그게 뭐 유루복이 됐든, 무루복이 됐든요, 복덕을 많이 쌓았다 하더라도, 우리 그 애지중지하는 , 그 소중한 마음도 , 그 애지중지하는 우리 마음도 없는데, 뭐 복덕이야 더 말할 것도 없죠. 마음이 더 소중하죠, 사실은. 우리 마음이 더 소중하지.
그런데, 여기 그렇게 많은 복덕도 결국은 空性(공성)이다 , 이런 내용입니다. 다른 내용 없어요. 금강경은 無相爲宗(무상위종)이라 하는 그게 금강경을 여는 열쇠예요. 금강경을 이해하는열쇠가 바로 無相(무상)입니다. 그렇게 알면 되는데 금강경은 해석하면서 엉뚱한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이 지구상에다 칠보를 쌓아 가지고 보시를 했는데, 거기서 얻는복덕, 이게 이제 사실은 그 금강경의 논리대로 다 이야기를 안해서 그렇지 다 이야기하기로 하면 어떻게 이제 이야기가 되는고 하면 (복덕이 복덕이 아니라 이이름이 복덕이다) 이렇게 돼야 되겠죠.
그런데, 여기는 말을 좀 바꿔서 이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게 이제 온 통째로 온 법계전체를 모두 한꺼번에 변화 시켰다, 변화시켰단말은 濟度(제도)했다 , 교화했다, 그건 이제 공성으로 이해 시켰다, 공성으로 깨달았다,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離色離相分 第二十( 이색이상분 제이십)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佛可以具足色身으로 見不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如來를 不應以具足色身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具足色身이 卽非具足色身일새 是名具足色身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를 可以具足諸相으로 見不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如來를 不應以具足諸相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相具足이 卽非具足일새 是名諸相具足이니다
이색이상분이다 그랬어요. 역시 이제 금강경은 뭐 사실은 원리가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그 無相(무상)이라는것이, 무상이라하는것이, 얼마나 우리가 이해가 되고, 마음에 와 닿느냐 하는거 이게 중요한거지 그 어느것도 무상에서 제외 되는것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점을 우리가 유념하면은 다 이해 하면 됩니다.
여기는 色(색)이라고 하는 말은 色身(색신)을 말하는것이고, 相(상)이라고 하는것은 색신의 그 相好(상호), 뭐 어떻게 생겼다, 어떻게 생겼다, 부처님으로 이야기를 한다면은 삼십이상 이라든지, 팔십종호라든지, 하나하나 그 눈은 어떻고, 코는 어떻고, 입은 어떻고, 뭐 정상육계상은 어떻고, 머리카락은 어떻고, 이런것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이야기할 때, 그걸 이제 相(상),이래요. 삼십이상 이렇게 이야기하죠. 色(색)은 具足色身(구족색신)이라고 경전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이건 전체적인 이 부처님몸을 전체적으로 볼때입니다. 그래서 離色(이색), 전체적으로 봐도 無相(무상)이고 無色(무색)이고, 또 하나하나 그 삼십이상 을 뜯어놓고 봐도 역시 無相(무상)이다 離色離相(이색이상) 이나 無色無相(무색무상)이나 똑같은 말입니다. 색도 떠났고, 색신도 떠났고, 諸相(제상), 제상도 떠났다, 글자대로 해석하면 그렇죠.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佛可以具足色身(불가이구족색신)으로 見不(견부)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님을 가히 구족색신으로써 보는가?
구족색신이라는것을 말하자면, 제대로 갖추어진 그런 어떤 몸의모습, 그걸 말하는것입니다. 구족한 색신으로 보는가? 전체적으로 이렇게 볼때, 아주 그 제대로 갖춘 그런 몸의 모습을 가지고 여래라고 , 부처님이라고 보느냐 이런 말이예요.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여래)를 不應以具足色身(불응이구족색신)으로 見(견)이니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색신으로서 (제대로 갖춘 몸의 모습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何以故(하이고)오 如來(여래)가 說具足色身(설구족색신)이 卽非具足色身(즉비구족색신)일새 是名具足色身(시명구족색신)이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구족색신이 즉 구족색신이 아닐새 이이름이 구족색신이니다
이게 금강경 특유의 어떤 문형이죠. 그렇습니다. (아주갖춘 제대로 갖춘 몸의 모습이 제대로 갖춘 몸의 모습이 아니라 이 이름이 제대로 갖춘 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낱낱이 상으로써 볼때 뭐 뒤에 , 저 앞에서 있었죠. 삼십이상이라는 말도 있었고 합니다만은 뒤에 또는 삼십이상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는 이제 여러 가지 상 이렇게만 말하고 있어요.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를 可以具足諸相(가이구족제상)으로 見不(견부)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가히 구족제상으로써 가히 갖춘 제대로 갖춘 여러 가지지 상모로써 보느냐?
不也(불야)니다 世尊(세존)이시여 如來(여래)를 不應以具足諸相(불응이구족제상)으로 見(견)이니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갖춘 제대로 갖춘 상으로써 보지를 않습니다.
何以故(하이고)오 如來(여래)가 說諸相具足(설제상구족)이 卽非具足(즉비구족)일새 是名諸相具足(시명제상구족)이니다
왜냐? 여래가 말씀하신 제상구족이 곧 제상구족이 아닐새, 이 이름이 제상구족입니다. 여러 가지 상을 구족하신 것입니다.
32상 80종호를 갖추었다고 하는것도 편의상 표현하자니 하나하나 뜯어가지고 발가락은 어떻고, 발바닥은 어떻고, 발등은 어떻고, 종아리는 어떻고, 허벅지는 어떻고, 뭐 낱낱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뭐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게 고정불변하게 딱 그렇게 있는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여래라 볼 수 없고, 그걸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볼 수 없는거죠.
그래서 거기에 대한 집착이 사람들이 제일 많기 때문에 뭐 엇비슷하게 키만커도 아이 저사람 부처님처럼 생겼다 그러고, 또 눈썹사이에 뭐 까만점만 있어도 저사람 부처님처럼 생겼다 그러고, 또 이제 정상육계상 , 머리 정상위에 불쑥 이렇게 올라와 있으면 아~ 저사람 부처님처럼 생겼다, 우리가 이제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 어떤 틀을 우리 마음에 다가지고 있어요. 그렇게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는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려버리는 그런 말씀입니다. 부처님 그런분이 아니다 라는거죠. 그런 형상에 固隸(고예)된분이 아니다. 사바세계중생은 특징이 相見衆生(상견중생)이라, 어떤 그 형상을 봄으로 해서 마음이 생기고, 뭐 좋다, 나쁘다 하는 그런 그 생각들이 먼저 일어나니까요. 뭐 見物生心(견물생심)이라는말도 있고, 또 사람을 평가하는데도 신언서판이라 그런말을 하죠. 身(신) , 외모가 첫째 어떻냐 하는거 가지고 사람을 일단 판단을 하려는 그런 그 병들이 있습니다. 이게 사람들의 그 약점이기도 하고 한데 그러다보니까 부처님비슷하게 생기면 그만 부처님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상이 아니거든요. 여래는 그런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상을 깨뜨릴려고 이렇게 열 번, 스무번, 백번,천번, 이렇게 거듭 거듭 거듭 이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런 가르침을 우리에게 내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이제 이런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 상 때문에 생긴 그 병들이 좀 나아서 좀 편안하고 , 가볍고, 훨씬 더 자유로운 그런 그 삶이 돼야 되겠죠. 바로 그것이 우리가 경전을 공부하는 목적입니다.
오늘 금강경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법문녹취:法寶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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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 중지 하는 마음도 없는데 무엇이 있다고 하리오 _()_
_()()()_ 공성, 많이 듣고 , 마음,...많이 듣고 귀 박히도록 또들엇지만,확실한 사유가 어렵습니다....? 공부가 부족함 때문 이겟지요......계속 정진 해야 되는데 공부해야 할것은 너무 많고, .....늘늘 부족합니다..........
걈사합니다....._()()()_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고맙습니다.._()()()_
잘 배웠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고맙습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배운만큼 전하고 가진만큼 베풀겠읍니다
훌륭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 -덕운합장-
감사합니다.
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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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은 물질이 텅비었다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불변성 고정알맹이가 없이 인연으로 지수화풍이 사람과 나무로, 규소와 산소가 모래로 각각의 인연되는 성분이 언제나 변화하면서 생주이멸,성주괴공하는 과정중에 있다는 뜻이고 마음현상도 인연이 합하여 일어나고 흩어지는 현상으로서 연기중도현상 즉 공성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물질 외경을 볼때는 단지 연기현상으로서만 보고 마음에 유무의식을 두지 않는 것이 마음의 공성을 유지하는 길이고 진공묘유로 사물과 세상을 보는 길이라고 봅니다.
세상의 지식을 얻되 그 지식이라는 것이 모두 인연그물의 연기현상을 조금더 깊이 따지고 정리한것으로 불변의 진리가아니니 상을 두고 집착하여서는 아니된다.그래서 공성의 마음으로 그런 집착을 걷어버리고 오직 찰나변화대로 받아드리고 버려야한다.
감사드립니다...금강경 공부하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합니다_()()()_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_()()()_
五眼(肉,千,慧,法,佛)過去 現在 未來心不可得===空性이다. 오늘도 삼귀의하옵고 비원하옵니다.
오늘도 삼귀의하옵고 비원하옵니다.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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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수십년 동안 애지중지하여 온 몸, 재산, 명예, 가족 .... 온갖 소중한 것들(有)이 모두 空(無)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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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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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과거심불가득,현재심불가득,미래심불가득,
늦게나마 스님 법문 만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듣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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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體同觀 --- 中道, 空性의 그 한몸으로 동일하게 본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우리가 정말 애지중지하던 모든 것, 명예, 지식, 뭐 부귀, 온갖것들이 다 공성이라고 하는 그런 어떤 그 생각에서 뭔가 마음이 텅빈듯한, 그런 그 느낌을 우리가 비록 確澈大悟는 아니더라도 자주자주 그런것을 생각하고, 느끼는것이 좋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_()_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