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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사방 스크랩 채규철 산문집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
성헌 추천 0 조회 187 11.12.21 23: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0원짜리 인생' 이야기
채규철 산문집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이종찬(lsr) 기자   
▲ 채규철 <생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
ⓒ2004 명작
나 채규철은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다. 농담 같지만, 대한민국에서 나를 모르면 간첩(?)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른다. 학자로 이름이 나서 유명한 것도 아니고 돈을 엄청 벌어서 유명한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유명한가? 나는 좀 별나게 유명하다.

우선 내가 '10원짜리 인생'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화폐 가치가 절하되어 '100원짜리 인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유인즉, 이렇다. / 내가 다방이나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즉시 마담이나 종업원들이 다가와 숨 돌릴 틈도 없이 잽싸게 10원짜리 동전 한 닢을 주고는 제발 나가달라며 내 몸을 마구 밀어낸다.

이유는 내 모습이 다른 손님에게 혐오감과 불안감을 준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로는 나를 손님이 아니라 구걸하러 온 거지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는 10원짜리를 마다않고 받아 호주머니에 넣고는 기어이 안으로 들어가 손님 행세를 다한다. 그들이 준 10원짜리를 의외의 부수입으로 챙겨 넣으면서.

- 20쪽, '최대의 유산' 몇 토막


책꽂이 깊숙히 파묻혀 언뜻 눈에 잘 띄지 않았던 해묵은 책 한 권을 꺼낸다. 디자인이 촌스러운 표지를 펼치자 책날개에 '이미(E) 타버린(T)' 사람의 칼라사진이 나를 한껏 노려본다. 이리 뜯어 보고 저리 뜯어보아도 어느 한 곳 아름다운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흉측 맞고 무섭기만 하다.

이 사람이 바로 자동차가 뒤집어지는 사고로 온몸이 불에 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ET' 채규철(67)이다. 그때 그는 농촌운동에 큰뜻을 품고 덴마크에서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의 슈바이처' 혹은 '살아있는 작은 예수'라고 불리던 장기려(1911~1995) 박사와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의료조합이었던 '청십자조합'을 만든 꿈 많은 청년이었다.

1968년 10월 30일, 그날 김해에서 양계장 견학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일어난 사고는 그를 하루아침에 'ET'로 만들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살아난 것도 장기려 박사의 아낌없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머리칼을 떼내 눈썹을 심고, 어깨 피부를 떼내 눈꺼풀을 만들었다. 속눈썹은 겨드랑이 털로, 입술은 가슴 피부로, 오른쪽 눈은 의안을 박았다.

하지만 지금 채규철은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활기에 차 있다. 아이들에게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살갑게 가르치는 자연교사요, 기업체에서는 사원연수에 단골로 나오는 뛰어난 강사이기도 하다. "강연으로 폼도 잡고 학교(두밀리자연학교) 운영비도 버니 신난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이 세상을 누구보다도 신나게 산다.

"1970년 5월 24일, 부산에 있는 아들 진석이의 생일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가 지병이었던 결핵으로 몇 번의 각혈을 하다 매정하게 떠난 아내 성례의 핸드백 속에 고이 간직되었던 한 장의 유서 '나는 죽어도 채규철은 살아야 한다'고 한 그녀의 마지막 유언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 '머리말' 몇 토막

아이들에게 'ET 할아버지'로 불리는 채규철(67)의 <생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명작)를 다시 읽는다. 이 책은 2000년 4월 10일 초판 1쇄를 찍은 뒤, 2004년 1월 10일 초판 8쇄를 찍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판권 아래에는 깨알만한 글씨로 "이 책의 수입금은 자연학교와 장애인들을 위한 후원금으로 쓰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 책은 2001년 7월에 '내일을 여는 책'이라는 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채규철은 늘 이 초판본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그리고 강연을 갈 때마다 강연장 들머리에 이 책을 쌓아두고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한 권씩 판다.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다.

이 책은 모두 6장에 글쓴이의 기구하고도 당당한 삶과 독특한 생명의 철학이 소롯히 담겨 있다. 제1장 '최대의 유산', 제2장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 제3장 '그리운 사람들', 제4장 '그 사람을 가졌는가', 제5장 '제3의 공동체, 그룹 하우스', 제6장 '채규철과 두밀리자연학교'가 그것.

몇 년 전 꼬마들이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중에 '600만 불의 사나이'가 있었다. 전 우주 비행사 스티브 오스틴, 그는 양쪽 다리와 한쪽 팔을 기계로 대신하고, 실명한 한 쪽 눈에는 줌 렌즈를 달고 시속 60마일로 달린다. 그가 그렇게 재탄생하는 데 들어간 비용이 모두 600만 달러였나 보다.

채규철은 누구인가?
교통사고로 온몸의 절반이 불타

▲ 채규철, 교통사고 앞(위) 교통사고 뒤(아래)
ⓒ명작
"마침내 그는 암흑에서 광명을 찾았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습니다. 패배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최악의 운명을 최대의 영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사선을 넘어 생명의 소생과 기쁨을 찾았습니다"-안병욱(숭실대 명예교수)

두밀리자연학교 교장 채규철은 1937년 10월 10일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어나 1950년 12월 24일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동안 풀무농업기술학교 교사, 서울청십자의료협동조합 전무 등을 거쳐, 간질환자 진료사업 모임 <장미회>를 창립했다. 지금은 기업체, 새마을연수원 등에서 장애를 극복한 삶을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수기집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수필집 <사람은 두 번 죽지 않는다> , 마틴루터 설교집 <마틴루터 킹의 사랑의 힘> 마틴루터 연설집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가 있다. / 이종찬 기자
내 치료비는 비록 600만 달러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600만 원은 들어갔다. 그렇다면 600만 불의 사나이는 못 되어도 600만 원짜리 사나이는 되는 셈이 아닌가. 그러나 아무리 내가 600만 원짜리라고 큰소리를 쳐도 날 그렇게 봐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한 사람이 사회를 위해서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을 하느냐, 인격이 얼마나 높으냐, 학문을 얼마나 연마했느냐 하는 것은 따지지 않고, 단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느냐, 권력이 얼마나 있느냐, 자가용은 몇 기통을 타고 다니느냐 하는 것으로 한 인간의 가치를 속단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살다 보니 별 도리 없이 600만 원짜리 인생이 도매금으로 넘어가 10원짜리밖에는 안되었다.

- 21~22쪽, '최대의 유산' 몇 토막


하지만 채규철은 그런 잘못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아니, 그런 우리 사회의 뒷통수를 툭툭 친다. 그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다방에 들어갔을 때 마담이나 종업원들이 주는 10원짜리를 주저없이 받는다. 그리고 다방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즐긴다. 커피값으로 "남들은 500원을 내지만, 나는 이미 10원을 받았으니까 실은 490원만 내는 특혜를 누리는 셈"이라며.

농촌문화연구회가 주관한 강의를 하러 대천에 갈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서부역에서 대천행 기차표를 끊고 여유가 있어 사용료 5원을 받는 화장실에 간다. 그리고 용무를 마치고 나오면서 화장실 사용료 10원을 낸다. 그러자 뚱보 아주머니가 "아저씨, 먹고 살기도 어려운 주제에 무슨 돈을 내시오?"하면서 오히려 걱정스런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때 그는 속으로 "비록 얼굴은 험상궂게 생겼어도 한 달 강의료만도 대학 교수 수입을 능가하는 나의 재력(?)을 그녀가 알 턱이 없다"라며 헛웃음을 날린다. 이어 화장실 사용료를 받는 뚱보 아주머니가 자신을 거지로 오해하면서 천대를 하든 말든 "어쨌든 이날도 5원의 부수입"을 올렸다며 의기양양해 한다.

▲ 왼쪽으로부터 시인 이선관, 두밀리자연학교 교장 채규철, 녹색연합 공동대표 이병철, 화가 현재호(2004년 여름 작고), 어른들의 동요모임 <철부지> 남기용, 작곡가 고승하
ⓒ2004 이종찬
어느날, 그가 내 사무실에 들렀다. 그때 이미 목사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반가워 "유 전도사님, 오랜만이요!"하고 인사를 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나 목사 되었소"하는 것이었다. 나는 농담으로 "소록도 문둥이도 목사가 될 수 있소?"하면서 즉시 <한국일보>에 있는 친구 장달영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장달영 부장은 사회부 부장이었다. 내가 소록도 60년사에 처음으로 목사가 된 문둥이가 여기에 와 있다고 했더니, "그거 기사감이네"하면서 당장 기자들을 보낼 테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 얼마 후, 취재기자와 사진기자가 찾아왔다. 취재기자가 사진기자한테 어떤 사무실에 가면 문둥이가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만 찍으라고 한 모양이었다.

취재기자와 인사를 나누는데, 사진기자가 나를 향해서 열심히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던 것이다. "카메라 맨, 바로 이 분이 문둥이요!"했더니,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하면서 그제야 유 목사를 찍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돌아간 후, 유 목사와 나는 점심을 먹기 위해 명동으로 나왔다. 지나는 행인들이 나를 보고 저만치 피해 갔다. 그것을 보며 유 목사가 하는 농담이 걸작이었다.

"문둥이는 난데, 저 사람들은 왜 채 선생을 보고 도망가지?"

- 40~41쪽 '최대의 유산' 몇 토막


채규철은 지난 5~6년 동안 매년 8월이 되면 자원봉사자 100여 명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소록도로 간다. "소록도에는 2000여 명의 식구들이 살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 중 600여 명이 손가락과 발가락이 없는 식구들이다." 글쓴이와 자원봉사자들은 그들을 목욕시키고, 빨래도 해주고, 말동무가 되어 주기 위해 소록도에 가는 것이다.

그 소록도에는 유덕용이라는 글쓴이의 친구가 한 명 있다. 그 친구는 18살 때 문둥병이 들어 소록도에 들어가 18년 동안 문둥이로 살아온 친구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나병환자를 위한 약을 꾸준히 먹은 결과 마침내 음성환자가 된 뒤 신학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었다. 그 친구가 바로 소록도 60년사에 처음으로 문둥이 목사가 된 유 목사다.

"나는 요즈음 이 얼굴 때문에 유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 얼굴 때문에 돈벌이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래봬도 나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비싼 강사 중의 한 사람이다. 큰 기업체에 가서 두 시간 강의를 하면 평군 20만원은 받는다. 그런데 다방이나 식당에 들어가면 10원짜리를 던져주며 나가라고 밀어대니……. 아무튼 여러모로 그런 부수입도 챙기는 사람이다."(56쪽)

채규철의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를 꼼꼼하게 읽다 보면 생명의 소중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한 번 주어진 생명을 어떻게 이끌고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또렷한 해답을 알려준다. 주어진 현실이 고되고 절망스러울 때마다 "소나기 30분"이라는 글쓴이의 말이 더욱 뼈속 깊숙히 파고 든다.

2004/12/07 오후 2:21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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