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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강
그럼 어떨 땐 그런 이야기도 있죠. 이 안에 보면 별별 이야기 많아요. 아주 이름 있는 선사를 아주 고관대작이 불러다가 한 턱 잘 먹이고, 그것도 여럿이 불러다가 한 턱 잘 먹이고는 “너거 마음대로 선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봐라. 토론해라.” 그리고선 자기는 딱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을 다 듣고는 몇 시간 그것 듣고는 됐다 이거야. “난 선 다 알았다.” 이런 식으로 하는 풍조까지 있었다는 거여. 뭐 그것도 있을 수가 있겠죠. 선을 모르면 지식인층에 못들어 간다는데, 요즘 서양처럼. 그래서 그 당시 송나라 때도 선사들을 불러서 한턱 잘 먹이고는 선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해서 얼른 배운다 이거야. 다 배웠다고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거지. 그런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는 겁니다.
不知錯了也(부지착료야)하야 却謂無事省緣(각위무사성연)하야 靜坐體究(정좌체구)하야 爲空過時光(위공과시광)으론 不如看幾卷經(불여간기권경)하고
不知錯了也(부지착료야)라.
속효를 구하는데 참 크게 잘못된 것을 알지 못한다.
却謂無事省緣(각위무사성연)하야
그럴러면 도리어 무사성연, 아무 일없이 인연을 다 들어서
靜坐體究(정좌체구)해서
고요히 앉아서 아주 깊이 궁구한다. 깊이 궁구해서
空過時光(공과시광)으로
시광을 공과, 헛되게 보내는 것으로 하는 것 보다는, 아까 내가 이야기했죠? 그렇게 하는 것 보다는, 공부 안되니까 그 말이죠. 그게 무사성연, 공부하는 것이 무사성연이죠. 그리고 정좌체구죠. 그 참 세월 많이 보내니까 공과시광이라. 이 시간 인생 헛되이 보낸 게 아닌가? 차라리 그럴 바에는
不如看幾卷經(불여간기권경)
경전이나 몇 권 보고
念幾聲佛(염기성불)하며 佛前(불전)에 多禮幾拜(다례기배)하야 懺悔平生所作底罪過(참회평생소작저죄과)하야 要免閻家老子(요면염가노자)의 手中鐵棒(수중철봉)이라하나니 此是愚人(차시우인)의 所爲(소위)니라
또 念幾聲佛(염기성불)
또 몇 소리로 부처님이나 외우고
또 佛前(불전)에 多禮幾拜(다례기배)
몇 번의 절이나 좀 하고 말이야
懺悔平生所作底罪過(참회평생소작저죄과)
평생 지은 죄과나 참회하고 그래서
요컨대 閻家老子(염가노자), 염라대왕이 철방망이를 손에 잡고 있는데 그 손에 들고 있는 철방망이나 맞는 것을 좀 면하는게 차라리 참선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거여. 지금도 많죠. 지금은 오히려 더 많죠. 그야말로 인생 이거 이러다가 깨달음 좋지만 깨닫지 못하면 인생 망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 이런 생각을 하나니
此是愚人(차시우인)의 所爲(소위)라
이건 참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짓이다.
而今道家者流- 全以妄想心(이금도가자류-전이망상심)으로 想日精月華(상일정월화)하며 呑霞服氣(탄하복기)라도 尙能留形住世(상능유형주세)하야
今道家者流- (금도가자류)가
이게 활구참선에 대한 가치관을 이런데서 확립을 해서 소신을 좀 가져야 되거든요. 도가자류가, 도가에 공부하는 사람이
全以妄想心(전이망상심)으로
온전히 망상심으로
想日精月華(상일정월화)라
태양의 정기, 또 달의 어떤 빛, 달의 정기죠. 이것을 자꾸 생각하는 거라. 아침에 해 뜰 때 벌겋게 떠오를 때 거기에 나가서. 승려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보면. 선방에 잘 살펴보면 해 뜰 때 해를 보고 해의 정기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이게 도가에서 나온 일이거든요. 그렇게 해서
呑霞服氣(탄하복기)야
라고 흔히 이런 말 써요. 안개를 삼키고 어떤 기운을 빨아들여서 단전에 넣는다. 그게 도가 사람들이 장생불사하는 그런 비법으로서 하는데, 설사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尙能留形住世(상능유형주세)라
오래 산다 이거야. 몇 백 년 산다 이거야.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주세,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오래 사는 그런 수가 있다. 그리고
不被寒暑所逼(불피한서소핍)이온 況回此心此念(황회차심차념)하야 全在般若中耶(전재반야중야)아
不被寒暑所逼(불피한서소핍)이라
춥고 더운데서 오는 핍박을 입지 않아. 추워도 그만, 더워도 그만. 그전에 여기 어떤 스님 구리 먹는 스님도 있고 그랬어요. 별별 스님들 다 있죠 뭐. 이런 성향을 가진 스님들이 간혹 있어요. 불교가 이런 것을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죠. 뭐 어쨌거나 이런 일을 해서 말하자면 수명을 연장시키고 춥고, 더움을 타지 않고 그런 능력이 있는데
하물며 이 마음, 이 생각을 돌이켜서
온전히 반야 가운데 두는데 거기에 대한 공덕이 없겠느냐? 이거야. 그 힘이 없겠느냐? 이거야. 그야말로 설사 투기라고 생각을 하더라도 이 몸이 다한 뒤에는 그 강화된 정신력, 화두만 골똘히 들었다면, 정말 골똘히 들었다면 설사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강화된 정신력이 다음 생에 태어나서 큰 아주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이거야. 또 바로 공부하는대로 연결이 되기도 하고. 그 말이예요.
全在般若中耶(전재반야중야)
온전히 이 마음, 이 생각이 반야 중에 있는 것이겠는가?
先聖(선성)이 明明有言(명명유언)하사대 喩如太末蟲(유여태말충)이 處處能泊(처처능박)호대
先聖(선성)이 明明有言(명명유언)하사대
먼저 성인이 분명히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喩如太末蟲(유여태말충)이
태말충, 파리죠. 파리가 곳곳에 다 붙어 임금 밥상에 까지 붙지만
唯不能泊於火燄之上(유불능박어화염지상)커든 衆生(중생)도 亦爾(역이)하야 處處能緣(처처능연)호대 唯不能緣於般若之上(유불능연어반야지상)이라하시니
唯不能泊於火燄之上(유불능박어화염지상)이라
불꽃위에는 그게 못붙는다 이거지. 화염이면 금방 타버리죠.
衆生(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處處能緣(처처능연)호대
곳곳에 능히 반연해, 어떤 뭐 생각 안하는 게 없습니다. 뭐 살펴보지 않는 게 없고, 여기 집적, 저기 집적 온갖 것 다 기웃거리고 집적거리고 그렇게 하는 거죠. 처처능연이라, 처처에 인연하지만
唯不能緣於般若之上(유불능연어반야지상)이라
오직 능히 반야위에는 인연을 하지 못한다 이거야. 거긴 붙지 못한다.
苟念念(구념념)에 不退初心(불퇴초심)하고 把自家心識(파자가심식)이 緣世間塵勞底(연세간진로저)하야 回來底在般若上(회래저재반야상)하면
진실로 생각 생각에 不退初心(불퇴초심)하고
초심에서 물러서지 말고
把自家心識(파자가심식)이
자가심식이
緣世間塵勞底(연세간진로저)하야
세간진로 반연하는 그것을 잡아서, 그러니까 화두 든 마음이 딴 마음이 아니죠. 세상사 좋아하는 그 마음이 화두 드는 마음이라. 세상사 좋아하는 그 마음을 딱 잡아서
回來底在般若上(회래저재반야상)
그것을 돌이켜서 반야위에 딱 둔다 이거야. 반야 위에 둘 것 같으면
雖今生(수금생)에 打末徹(타미철)이라도 臨命終時(임명종시)에 定不爲惡業所牽(정불위악업소견)하야 流落惡道(유락악도)하고
雖今生(수금생)에 打未徹(타미철)이라도
비록 수금생에, 금생에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臨命終時(임명종시)에
죽을 때 가서는
定不爲惡業所牽(정불위악업소견)하야
결정코 악한 업에 끌려가는 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流落惡道(유락악도)라
악도에 유락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來生出頭(내생출두)에 隨我今生願力(수아금생원력)하야 定在般若中(정재반야중)하야 現成受用(현성수용)하리니 此是決定底事(차시결정저사)라
來生出頭(내생출두)에
내생에 머리를 낼 때, 태어날 때
隨我今生願力(수아금생원력)하야
나의 금생 원력을 따라서, 중첩혈처니까 무거운 곳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빚잔치 할 때도 돈 제일 많이 빌려준 사람이 권한이 제일 세듯이, 우리가 금생에 무엇에 관심을 가장 많이 갖고 살았느냐? 그것 따라서 내가 그 일 하도록 태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 일 하도록 태어나게 되어 있어요. 빚잔치하는 것 보면 딱 알아요. 어떻게 불교 교리 알고 하는지 내가 참 신통해. 내생 태어나는 것도 빚잔치야. 사실은. 금생에 어디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느냐? 화두 들고 참선하는데 마음을 많이 기울였으면 틀림없이 그 길로 오게 되어 있어. 내생출두에 그렇게 한다고 되어있어.
난 그래서 서울에 와서 이렇게 다니면서 볼게 많아. 옛날엔 지방에 있으면서도 무슨 가을 되면 음악회다, 무슨 전시회다, 미술이다, 서예다, 조각이다, 뭐 이런 것 보러 일부러 돌아 다녔는데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철이 들어서 그런가 그런 게 눈앞에 많아. 인사동 쪽으로 가면 많지 않습니까? 그래 이렇게 보면 고개 돌려버려요. 여기도 있죠? 도자기 전시 있고. 여기도 그전에 큰스님 뭐도 하고 오며 가며 볼게 많아. 보면 딱 고개 돌려 버려. 아~ 나는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가 뭐 있느냐? 내가 하는 것 이것도 지금 바쁜데 언제 그것까지 내가 뭐 도자기 전문가가 되어서 어쩔라고? 내가 ‘니가 하는 일에 전문가냐?’ 이거여. 정말 전문가냐? 못되잖아요. 정말 전문가로서 자격이 없지 않느냐? 그러면 거기 신경 쓰는 시간에 여기 신경 더 쓰라 이거야. 그래서 고개 돌려 버려요. 서울 와서 근래에 고개 돌려. 옛날엔 찾아다녔는데 이젠 고개 돌려. 그래서 자기 하는 그 일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에 집중해야 된다고. 그래 내가 주의가 또 그거라. 옛날에 또 어릴 때는 부족한 것을 말하자면 보완한다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참 많이 기웃거렸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헛일이라는 것을 알았어. 자기가 강한 것에 대해서 더 강화하는 것. 자기 강한 것을 더 강화하는 것은 돈 적게 들고, 시간 적게 들고, 효과 100%야. 자기 강한 것을 더 강화하는 데는 익숙하니까 더 쉬운 거야. 그리고 잘 되고, 효과 있고. 그런데 자기가 부족한 것 많잖아요? 사람도 될라 하면 부족한 게 너무 많더라구요. 그래서 그것 부족한 것, 그것 될라 하려고 하니까 그건 서툴고, 잘 안되고, 힘만 들고, 그래봤자 그건 저기 남 뒤쫓아 가기도 바쁜 거야. 그래서 나는 편협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그동안 하는 것, 그것 더 잘 하려고. 여기 도자기 전시회 보고 싶어요. 보고 싶지만 고개 돌려 버리고 나는 거기에 신경 쓸 것 조금이라도 여기에 더 쓰자. 그래서 이것 더 잘 아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근래에 많이 합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그런 말이 있잖아요?
臨命終時(임명종시)에 定不爲惡業所牽(정불위악업소견)해서 流落惡道(유락악도)하지 않고 來生出頭(내생출두)에 隨我今生願力(수아금생원력)하야, 나의 금생원력을 따라서 定在般若中(정재반야중)하야, 결정코 반야 가운데 있어서 現成受用(현성수용)이라. 환하게 수용한다. 현성수용, 이건 드러나게 수용한다 이거야. ‘현’자는 그런 뜻입니다. 드러나게 수용한다.
이 창호 그 사람은 전생사지 그거 금생사 아냐. 일곱 살, 여덟 살 될 때..... 그건 틀림없이 전생사라고요. 그 현성수용이라. 태어나자마자 바둑에 그렇게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건 이게 현성수용이라 하는 것. 그런 식으로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것. 드러나게 수용하리니
此是決定底事(차시결정저사)라
이건 결정된 사실이다. 이치가 되어 있는 거죠.
無可疑者(무가의자)니라 衆生界中事(중생계중사)는 不着學(불착학)하야도 無始時來(무시시래)로 習得熟(습득숙)하며
無可疑者(무가의자)니라
가히 의심할 것이 없다.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다.
衆生界中(중생계중)에 不着學(불착학)하야도
衆生界中事(중생계중사)는 중생들의 세상사라고 하는 것은 크게 배우지 아니해도
無始時來(무시시래)로 習得熟(습득숙)이라
익혀온 것이 익숙해. 안가르쳐 주어도 잘도 안다.
路頭亦熟(노두역숙)이 自然取之(자연취지)에 左右逢其原(좌우봉기원)하나니 須着撥置(수착발치)어다
路頭亦熟(노두역숙)이라
그 길도 잘도 알아. 안가르쳐줘도 그 또한 익숙하다. 전생에 익힌 것도 익숙하고 금생에 와서 찾아가는 것도 익숙해.
自然取之(자연취지)에
자연스럽게 저절로 취하게 되고. 돈 좋은 것, 명예 좋은 건 왜 안가르쳐줘도 그리 잘 아는지. 기를 쓴다.
左右逢其原(좌우봉기원)이라
가나 오나 그 근원을 만나게 돼. 저절로 알아가지고 어떻게 아는지. 불법은 그렇게 가르쳐줘도 모르는데 그런 것은 한 번도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저절로 그렇게 알아가지고는, 가나 오나 그 좌우에 그 근원을 만나나니
須着撥置(수착발치)어다
모름지기 꼭 그건 밀쳐 버려라. 발치. 발치해버려. 밀어버리란 말야.
出世間學般若心(출세간학반야심)은 無始時來(무시시래)로 背違(배위)라 乍聞知識(사문지식)의 說着(설착)하면 自然理會不得(자연리회부득)하나니
出世間學般若心(출세간학반야심)은
세간을 벗어나는 반야를 배우는 마음은
無始時來(무시시래)로 背違(배위)라
이건 뭐 언제 공부를 해봤어야지. 어기고 살아왔다.
乍聞知識(사문지식)이 說着(설착)하면
선지식이 이런 이야기를 조금 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으면
自然理會不得(자연리회부득)하나니
저절로 이해를 못한다. 못알아 듣는다 이거지.
須着立決定志(수착입결정지)하며 與之作頭제(여지작두제)하야 決不兩立(결부양립)이어다
須着立決定志(수착입결정지)하야
모름지기 결정한 뜻을 세워서
與之作頭제(여지작두제)하야
그로 더불어, 반야와 더불어 주관, 주제를 지어라. 두제는 주제, 주관이라는 뜻입니다. 주제를 지어서
決不兩立(결부양립)이어다
결정코 양립시키지 마라.
此處(차처)에 若入得深(약입득심)하면 彼處(피처)는 不着排遣(불착배견)하야도 諸魔外道-自然竄伏矣(제마외도_자연찬복의)니라
此處(차처)에 若入得深(약입득심)하면
이곳에서 만약에 들어가는 것이 깊을 것 같으면
彼處(피처)는 不着排遣(불착배견)하야도
물리쳐 버리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힘써 밀어내지 아니해도
諸魔外道-自然竄伏矣(제마외도_자연찬복의)니라
제마외도를 저절로 항복받을 것이다. 저절로 고개 숙이고 들어올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 중에 일본에 <도연초>라고 하는 책, 책 제일 많이 팔아준 게 아마 <도연초>일거예요. 내가. 이사람, 저 사람에게 주고 요즘 같으면 더 많이 샀을 텐데. 한권씩 두 권씩 산 것만 해도 오십여 권 이상 샀으니까. 거기에 아주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스님이, 그 일본 교과서에도 나오는 책이라고 하데요. 연구를 많이 해서 그 <도연초>만 가지고도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여럿이예요. 한 사백여년 전, 1600년대 스님인가 그런데.
어떤 스님이 법사가 되려고, 법사 보니까 근사하거든. 말 타고 법문 하러 다니고. 일본은 그 당시는 그랬나 봐. 그리고 그 당시 일본 불교계의 사정을 잘 읽을 수 있는데. 또 뭐 근사한 파티에 초청도 받아가고, 노래도 하고 말이죠. 그런 걸 젊은 스님이 본 거야. 그래서 ‘나도 법사가 되어야겠다’ 이 생각을 하고는 말 타는 것부터 배웠다. 법사 되어서 초청받으면 말 타고 가서 법문해야 되니까, 말 못타면 안되겠다 싶어 말 타는 것 배우고. 또 근사한 연회에 가서 노래도 한 곡 척 뽑아야 되는데 노래도 해야 되는데 그 때 법사가 초청받아서 노래 못하면 어쩌나 싶어서 노래도 배우고, 말 타는 것 배우고. 그러다가 법사 노릇하는 것을 못 배운 거야. 그래서 세월 다 보내고 나니까 정말 해야 할 것을 하나도 못했더라는 거지. 아, 그런 이야기를 <도연초>에다 써놨어요.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인지. 교훈이 많이 돼요. 나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부처가 되어서 설법 못할까 염려하지 마라. 그런 이야기도 이 안에 있고 그래요.
그 <도연초>에 내가 자주 인용하는 내 생활에 반영해서 활용하는 게 있는데,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일은 대개 안하는 게 좋다. 아~ 기가 막히는 말이야! 꼭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 보세요. 이걸 할까? 말까? 갈까? 말까? 하는 것. 망설여지는 일은 아주 결단코 의심 없이 해야 될 그런 일만 하고, 그런 일만 가서 볼일을 보고, 그 외에 망설여지는 일은 안하는 게 대개 좋다. 거의 그래요. 틀림없어요. 놀러 가는 일도 오늘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가면 꼭 무슨 일 생기고, 별로 재미도 없고 그럴 수가 있죠. 심지어 그런 작은 일까지도 그렇습니다. 대혜 스님이 아주 잘 쓰는 소리,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소리가 여기 있어요.
生處(생처)는 放敎熟(방교숙)하고 熟處(숙처)는 放敎生(방교생)이 政爲此也(정위차야)니
生處(생처)는 放敎熟(방교숙)하고 熟處(숙처)는 放敎生(방교생)이니
생 숙, 숙 생. 글자 두 자예요. 생 숙, 숙 생.
생처는 내가 서툰 곳, 설어 있는 곳이죠. 여기에는. 공부하는 것, 반야 쪽. 이것은 아주 설어 있어요. 그걸 익숙하게 하라. 익숙한 것은 세상사 안가르쳐줘도 잘 하는 것. 그건 익숙하니까 그건 설게 하라. 설게 한다고 일부러 설게 할 게 아니죠. 이쪽을 열심히 하다보면 저절로 설게 되어 있어.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政爲此也(정위차야)라
결정코 이것을 위한 것이다. 생처는 방교숙하고 숙처는 방교생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니라.
日用做工夫處(일용주공부처)에 촉着패병(촉착패병)하면 漸覺省力時-更是得力處也(점각성역시-변시득력처야)니라
日用做工夫處(일용주공부처)에
일용 공부하는 그곳에
촉着패병(촉착패병)이면
정말 공부하는 길머리, 문리가 났다 이거죠. 패병을, 자루를 탁 잡았다 하면
漸覺省力時-更是得力處也(점각성역시-변시득력처야)니라
점점 깨닫게 될 것이다. 무엇을? 생역시, 힘이 덜 드는 곳. 하다보면 힘이 덜 들죠?
처음 운전 배울 때 얼마나 땀을 뻘뻘 흘리고 어깨 힘들어가고 그럽니까? 나중에는 농담하면서, 전화해 가면서, 옆에 사람 지나가는 것 다 봐가면서 힘 거의 안들잖아요? 그게 생력이야. 그걸 뭐라고? 운전하는데 득력했다. 변시득력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듯이 공부도 그래요. 공부도 익숙해져 놓으면 거의 힘이 안들어요. 그냥 재밌어. 책보는 것도 재밌고. 그 절 잘 짓는 사람들은 또 그렇대. 절 짓는 사람들도 문리가 나니까 그냥 뚝딱하면 절 한 채 짓고, 뚝딱하면 절 한 채 짓고. 득력이 되어서 그럽니다. 힘이 안들죠. 하나도 힘이 안들죠. 그래서 참선하는 것도 힘 드는 그때가 곧 힘을 얻는 것이다. 득력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득력처가 생력처고, 생력처가 득력처다!
이것도 대혜스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예요. 그리고
생처는 방교숙하고 숙처는 방교생!
이것도 자주 하시는 말씀이고. 그렇습니다. 여기는 무엇보다도 활구선에 대한 어떤 자기 확신. 이것이 일단 중요하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죠. 뭐 설사 지옥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일을 소신껏 한다, 하는 그런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아까 이야기 했듯이 중봉스님에게 어떤 수좌가 산방야화하는데서 딱 이런 대목하고 같죠. 아, 이러다가 깨닫지도 못하면 어쩝니까? 보니까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그 당시 백 명에 한 사람 꼴 될까 말까 인데 이러다가 못깨달으면 어쩌냐? 그래서 여기에 이야기했듯이 경이나 좀 보고, 염불이나 좀 하고, 부처님께 절이나 좀 하고, 그리고 참회도 좀 하고 이렇게 해서 염라대왕의 철방망이나 안맞는게 불법 만난 소득이 아닙니까? 이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죠.
하지만 이 공부는 그런 것하고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면서 來生出頭(내생출두)에 今生願力(금생원력)하야 定在般若中(정재반야중)하야 現成受用(현성수용)한다. 이거야. 차시결정처사라 무가이가라. 절대 의심할 것이 없다. 하는 이런 자기 소신이 제대로 서있어야 그래야 제대로 공부되는 거죠. 왜냐? 그리되면 공부가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는 게 할 게 없어져 버려요. 다른 게 아무것도 할 게 없어져 버려. 아무리 좋다 해봐야 참선하는 것보다 그야말로 하질의 일인데 저거 뭐 재미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일이 없어져 버려. 세상사에. 그래서 공부 밖에 안하게 되는 거여. 그 자기 소신, 자기 확신이 딱 서는 것. 이게 공부하는데 무엇보다 기초가 된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참정 하나 더 하겠습니다.
答 李參政 漢老 問書府 [欣謝指示 重請大法]
이참정에게 답한다. 했는데 그 옆에 問書附(문서부)했지요? 이건 문서예요. 묻는 글이다. 라는 뜻입니다. 답하는 것은 그 다음 장부터 답하는 것이고.
欣謝指示(흔사지시)
기꺼이 말하자면 감사히 여긴다. 지시해준 것을. 그리고
重請大法(중청대법)이라
그러면서 거듭 대법을 청한다.
우리 어릴 때 배울 때는 그랬어요. 앞에는 깨닫지 못한 사람의 대표로서 증시랑을 들었고, 깨달은 사람의 대표로서 이참정을 소개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邴(병)이 近扣籌室(근구주실)하사와 伏蒙激發蒙滯(복몽격발몽체)하야 忽有省入(홀유성입)호이다
邴(병)이 近扣籌室(근구주실)하야
병은 이참정의 이름이죠. 참정 벼슬, 대충 아시죠? 어느 정도인지.
近扣籌室(근구주실)하야
근래에 주실, 조실방을 주실이라고도 합니다. 왜 주실이라고 하는지 아시죠? 옛날 어떤 이가 깨달았을 때 마다 산까치를 하나씩 돌구로 된 큰 방에다 하나씩 넣었는데 거기 가득 찼다. 그래서 나중에 그 산까치를 꺼내어 그 스님 다비를 했다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조실방을 주실방이라고도 합니다. 주실을 두드려서
伏蒙激發蒙滯(복몽격발몽체)라
격발몽체, 몽체한 것을 내가 막히고, 답답하고, 어둡고, 못나고, 어리고 못난 것을 격발해준 것을 엎드려서 입어서
忽有省入(홀유성입)호이다
홀연히 살펴 들어갔습니다. 깨달았다는 뜻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대혜스님이 제대로 지도를 해서 이참정은 깨달았다. 그런 뜻이죠.
顧惟(고유)호니 根識(근식)이 暗鈍(암둔)하야 平生學解_盡落情見(평생학해-진락정견)이라
엎드려 생각해보니, 돌이켜 생각해보니
根識(근식)이 暗鈍(암둔)해서 平生學解(평생학해)라
평생 배우고 안 것이
盡落情見(진락정견)이라
전부 생각, 의식, 사량, 계교에 전부 떨어져 있더라. 그래서
一取一捨(일취일사)호미 如衣壞絮(여의괴서)하고 行草棘中(행초극중)하야 適自纏繞(적자전요)러니
一取一捨(일취일사)라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리고 하는 것이
如衣壞絮(여의괴서)하고 行草棘中(행초극중)이라
괴서- 떨어진 솜옷을, 의-입고
행초극중이라, 풀이나 가시가 잔뜩 무성한 그 속을 행하는 것과 같아서
適自纏繞(적자전요)러니
마침 스스로 얽히고 더 얽히고 그렇게 살았다 이거야. 왜냐? 알음알이 속에서 그냥 살았으니까. 그러다가
今一笑(금일소)에 頓釋(돈석)호니 欣幸(흔행)을 可量(가량)이릿가
今一笑(금일소)에 頓釋(돈석)호니
지금 한번 웃음에 몰록 다 풀어졌으니
欣幸(흔행)을 可量(가량)이릿가
그 기쁘고 다행함을 어찌 가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非大宗匠(비대종장)의 委曲垂慈(위곡수자)시면 何以致此(하이치차)리닛고
大宗匠(대종장)의 委曲垂慈(위곡수자)가 아니시었다면
何以致此(하이치차)리닛고
대종장의 아주 위곡한 자세한 자비를 드리운 것이 아니였다면 어찌 이러한 경지까지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自到城中(자도성중)으로 着衣契飯(착의계반)하며 抱子弄孫(포자롱손)하야
自到城中(자도성중)으로
거기서 깨닫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죠. 어찌 이런 사람은 이리 복이 많아가지고..... 성중에 돌아옴으로부터
着衣契飯(착의계반)하며 抱子弄孫(포자롱손)이라
옷 입고, 밥 먹고, 그 전과 같이 생활해.
포자농손이라, 아들도 안고 손자도 희롱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전에 깨닫기 이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어.
色色仍舊(색색잉구)호대 旣亡拘滯之情(기무구체지정)하고 亦不作奇特之想(역부작기특지상)하며
色色仍舊(색색잉구)야.
사물 사물, 행위 행위 마다 그대로야. 그대로 하고 있어. 그런데 그때는 손자 안고 이렇게 귀여워하는 그 정이 지금도 그대로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끈끈하게 좋게 보이더니 지금은 아니다 이거지.
旣亡抱滯之情(기망구체지정)이여.
자기를 구속하고 속박하던 정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이거야. 손자 좋은 건 여전히 좋다 이거야. 자식 좋은 건 여전히 좋지만 그렇게 끈끈하게 나를 구속하고 안보면 보고 싶고, 미치게 좋아하는 그런 정은 없다 이거야. 이게 깨달음의 효과입니다. 그야말로 도인의 마음은 거울과 같애. 거울에 가면 아주 샅샅이 잘 비쳐요. 샅샅이 잘 비치지만 떠나버리면 그 뿐이야. 떠나버리면 그뿐이라고.
拘滯之情(구체지정)하고 亦不作奇特之想(역부작기특지상)이라
또한 기특한 생각을 짓지도 아니해.
其餘夙習舊障(기여숙습구장)도 亦稍輕微(역초경미)하고 臨別叮嚀之語(임별정녕지어)는 不敢忘也(불감망야)니다
其餘夙習舊障(기여숙습구장)도
그 나머지 일찍이 익혀온 온갖 옛 장애들 그런 것들도 평생 벼슬하고 세상 정치하면서 참정 벼슬되기까지 살아온 험한 인생이라는 게, 불문가지죠. 그런데 그런 장애들이
亦稍輕微(역초경미)라
또한 점점점점 가벼워진다. 이걸 가볍게 하려고 해서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저절로 가뿐가뿐해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거죠. 참 얼마나 기분 좋을까요? 세상을 이런 자세에서 살면. 그렇다고 대충대충 사는 게 아니죠.
그래서 희로애락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어떤 좋지 아니한 일에 상하지 않는다 그랬어요. 그래서 “애이불상(哀而不傷) 낙이불음(樂而不淫)!”
깨달은 사람의 마음 자세를 간단하게 표현하면, 즐거운 것은 즐겨하되, 빠지지 않는 것. 도취하거나 푹 빠져버리지는 않고. 누구 못지않게 즐겨하고 좋아는 한다. 그러면서 거기에 빠지지 않는다. 대개 좋으면 빠져 버리지 않습니까? 빠져서 그 다음 분별 못하죠. 어떤 짓도 해버리죠. 뭐 술을 좋아하던지, 이성을 좋아하던지, 노름을 좋아하던지, 하여튼 자기 취미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다 빠져 버리죠. 중생들은. 낙이불음이야. 즐기되 빠지지 않는다.
그 다음에 애이불상이라. 아주 슬픈 일, 자식이 죽었다든지 부모가 죽었다든지 하는 극적인 일을 당해도 누구 못지않게 슬퍼하죠. 여기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자식이 죽었는데 슬퍼하지 아니할 부모가 어디 있냐? 그런 표현도 나와요. 참 이 <서장>이 일반 사회 생활하면서 정말 불교라는 문제를 앞에 놓고 양심적으로, 진실하게 자기 삶과 연관시켜서 드러내어 점검하는 그런 문제에는 <서장>이 더 덮을 수가 없죠. 애이불상이라. 가까운 사람이 죽었지만 상하지 않는다. 누구 못지않게 슬퍼하지만 상할 정도로 슬퍼하지는 않는다. 상한다는 것은 이성을 잃어버리는 거죠. 자기 자식 잃고 손들고 머리에 띠 두르고 보상금 얼마 타내려고 하는.... 이것 다 상하는 거여. 슬퍼하는 것이 잘못 그렇게 변형된 거죠. 또 우리가 더 안좋은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는 놔두더라도. 그런 게 다 상한 거요. 슬퍼하지만 상하지 않는다.
탄허 스님보다 연세도 높고 백운선승이라고 하는 아주 명리에 천하의 대가가 있어요. 자주 찾아와요. 그런데 그분이 목이 쉬었어. 왜 목이 쉬었냐?고. 농담도 더러 하고 그래요. 참 인생 초탈하게 살던 분인데 목이 쉬었어. 왜 목이 쉬었는가? 알아봤더니 젊어서 자식을 잃고 석 달을 울다가 울음이 그쳤는데 그 다음부터 목이 돌아오지 않더라는 거야. 석달이나 울다가 그 다음부터는 목이 안돌아오더라. 겨우 목숨은 건졌는데 그 만치 슬퍼했다는 거야. 그게 상한 경우라.
그래서 도인은 정말 이치를 아는 사람은 제대로 안다하더라도 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애이불상, ‘낙이불음 낙이불상’이라고 거울 같은 마음 등등 하는데 여기 보면 역시 유사해요.
포자농손하는 것이, 着衣契飯(착의계반)하며 抱子弄孫(포자농손)하는 것이 色色仍舊(색색잉구)호대 旣亡拘滯之情(기무구체지정)하고, 이럴 때는 ‘망’이라고 읽는 것보다 ‘무’라고 발음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미 拘滯之情(구체지정)이 없다. 또한 奇特之想(기특지상)도 없다. 夙習舊障(숙습구장)도 또한 輕微(경미) 해진다.
叮嚀之語(임별정녕지어)는
임별, 이별에 임해서 서로 헤어질 때 아주 당부하고 당부하던 그 말은
不敢忘也(불감망야)니다
감히 잊어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도 뒤에 다 나와요.
重念(중념)호니 得入門(시득입문)이나 而大法(이대법)을 未明(미명)하야 始應機接物(시응기접물)에 觸事未能無礙(촉사미능무애)호니
重念(중념)호니
거듭 생각하니
始得入門(시득입문)이나
아주 겸손해서 하는 이야기예요. 사실은. 비록 입문은 했으나
大法(대법)을 未明(미명)하야
큰 법을 밝히지 못해서
應機接物(응기접물)
근기에 응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제접하고 거기에 맞춰서 제도도 하고 그래야 되는데
觸事未能無礙(촉사미능무애)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 능히 무애자재하지는 못하다. 그러니
更望有以提誨(갱망유이제회)하사 使卒有所至(사졸유소지)시면 庶無玷於法席矣(서무점어법석의)일까하노이다
更望有以提誨(갱망유이제회)하사
다시 바라노니 제회, 이끌어서 가르침이 있기를 바란다 이거지. 그래서
使卒有所至(사졸유소지)시면
하여금 마침내 이르는 바가 있게 될 것 같으면, 더 이를게 있게 될 것 같으면
庶無玷於法席矣(서무점어법석의)리라
바라건대 법석에 큰스님의 법석에 하자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확실하게 될 것 같으면 더욱 더 큰스님을 빛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는 그런 뜻으로, 깨닫고 나서 돌아와가지고 대혜스님에게 대법에 대해서 보다 더 큰 가르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면서 깨닫고 나서의 자기의 감정이 가벼워지는 그런 이야기를 썼는데 귀담아 들을만한 내용입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世間塵勞底하야 回來底在般若上이 雖 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 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라....세상사 좋아하는 그 마음을 딱 잡아서 그것을 돌이켜서 반야위에 둘 것 같으면 비록 금생에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죽을 때 가서는 결정코 악한 업에 끌려가는 바가 되지 않는다.그래서 악도에 유락하지 않는다...불퇴지님 수고하셨습니다.._()()()_
<서장>녹취 한 강, 한 강 할 때마다 처음엔 평화로움이 몸과 마음을 감싸 안정을 취하게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젠 뭔가 머리속이 선명해지고, 나약하던 마음에는 힘이 생기는 듯 합니다. 제가 가야할 길이 보이는 듯도 합니다. 어젯밤에는 <술몽쇄언>을 두번째로 읽었는데 어찌나 가슴에 와닿던지 밤을 꼴딱 세우며 읽었습니다. 명상을 한 듯 피곤함도 잊었답니다. 뒤늦게나마 자신의 가야할 길을 발견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엎드려 머리 조아립니다. 고맙습니다.스님_()()()_
須着立決定志(수착입결정지)하며 與之作頭제(여지작두제)하야 決不兩立(결부양립)이어다 .........감사드립니다._()()()_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니...서툰곳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은 설게 하라...'설게 한다고 일부러 설게 할 게 아니죠. 이쪽을 열심히 하다보면 저절로 설게 되어 있어'...불퇴지님, 고맙습니다. _()()()_
日用做工夫處에 ?着패柄하면 漸覺省力時-更是得力處也니라... 평상시 공부를 짓는 곳에 놓아버리지 않으면 점점 힘이 덜림을 깨 달을 때가 문득 힘을 얻는 곳이니라.... 불퇴지님! 감사드립니다... _()()()_
生處(생처)는 放敎熟(방교숙)하고 熟處(숙처)는 放敎生(방교생)이 政爲此也(정위차야)니 ..고맙습니다._()()()_ 자기 소신, 자기 확신이 딱 서는 것. 이게 공부하는데 무엇보다 기초가 된다.
바른 스승을 만나야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자기소신 가지확신을 가질수 있다........감사 합니다._()()()_
감사합니다._()()()_
애이불상(哀而不傷) 낙이불음(樂而不淫)이라! 슬픈것은 슬퍼하되 상할정도로 슬퍼하지 않고, 즐거운 것은 즐겨하되, 빠질정도로 즐겨하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삼배 올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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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