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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 최흥종 목사( 1880-1966 )의 공적 내용
이 고장이 낳은 한국 현대사의 큰 기둥으로서 사랑과 정의의 실천자요 봉사자였던 오방 최흥종 선생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운동과 불우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였다. 오방선생은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직전에 있던 독립투사들을 탈옥, 피신시켰으며 검거예정이 있던 독립투사들에게는 미리 정보를 주어 피신케하는 한편 자신 또한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오방선생은 일제치하에서 나환자 요양시설마련을 위해 전국에 있는 나환자를 이끌고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연좌농성을 벌여 시설을 확장시키는 등 아무도 돌보지 않던 나환자들의 자주하는 구라상을 확립하는데에도 심혈을 기울여 나환자의 아버지라 불리우게 되었다. 현재의 광주 전남지역의 나환자촌 중에서 그 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나환자들에 대한 오방 선생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한편 기독교 사회운동가로서 오방선생은 저 멀리 시베리아와 제주도까지 전도의 정열을 쏟았으며 광주YMCA를 창설하면서 문명퇴치운동을 위하여 야학을 세우고 시범농장을 만들어 농민들의 소득증대와 축산장려를 꾀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회와의 밀접한 협력아래 농촌실습학교를 세워 농촌운동에도 열정을 보이는 등 한국 YMCA운동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상해임시정부시설에는 백범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 동지들과 돈독한 유대를 가지면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지원하였으며 해방 후 백범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동지들이 오방 선생의 인품과 지도력에 경탄하여 선생의 정계진출을 끈질기게 권유하였지만 정치가로서 보다 오직 기독교 사회운동가로서의 길을 택하신 한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오방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 지역에서는 그 분의 높은 인품과 업적을 기려 해방 이후 처음으로 사회장이 치러져 나환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통곡했었다.
정부는 지난 1990년 그 분의 독립유공을 공인하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광주YMCA에서는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78년 오방장학회를 설립하여 음성 나환자와 그 자녀들을 돌보고 있다.
민족독립운동가로서의 오방
1. 3.1운동과 광주지역 총책임을 맡다. 1919년 2월 하순. 독립운동준비의 밀명을 받고 광주에 온 김필수 선생을 김철과 함께 만나 3월 8일 광주에서 3.1만세운동의 거사를 결정하고 총책임을 맡는다. 3.1광주거사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상경길에 나선 최흥종선생은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14개월간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어야만 했다.
2. 신간회 광주지회장을 맡다. 1927년 2월 15일 신간회가 창설되었는데 최흥종선생은 그 즈음 광주에서 신간회 광주지회를 창립하고 자연스럽게 지회장직을 맡아 1929년 시베리아지방에 선교사로 부임하기 위해 지회장직을 사임할 때까지 광주에서의 좌우 충돌을 방지하면서 화합을 강조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는 등의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3. 해방이 되자 전남 건국준비위원장이 되다. 1945년 8월 15일 오방 최흥종은 무등산에서 의제 허백련 선생과 함께 광복의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서 건국준비위원회가 생겼고 전남에서도 꾸준히 결성이 준비되었는데 광주극장에서 열린 건국준비위원회 임원선거에서 오방선생은 만장일치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위원장에 추대된다. 이어서 8월 25일에는 광주서중 교정에서 수 만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광주시민 해방축하대회”를 열었다. 이날 대회에서 오방선생은 “모두 단결하여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하자”고 역설하였다.
사회 운동가로서의 오방
1. 봉선동 나환자촌을 애양원 으로 옮기다 가족마저도 버려가면서 열정을 기울이고 월슨 제중원장의 도움을 받아 건설한 방림동의 나환자 수용소는 이내 몰려든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러나 불어난 나환자와 사회로 부터의 견딜 수없는 냉대와 멸시를 당하는 상황에서 광주 시민들의 반대요청을 받자 오방선생과 우월순은 유지들의 헌금기탁을 받아 순천과 여수 중간에 위치한 신풍리 바닷가에 15만평의 부지를 구입하여 나환자 집단촌을 건설하고 1926년 9월 나환자 60여명을 이주시켜 그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준다.
2. 나환자 400여명을 데리고 총독과 담판 최홍종 목사가 여러 차례 총독부에 진정서를 보내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는 나환자들을 도와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총독부에서 외면하자 오방선생은 나환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광주에서 150여명의 나환자와 함께 걸어서 총독부로 들어가 담판을 지을려고 서두르고 있는 중에 이 소식을 듣고 전국의 나환자 400여명이 이 항의단에 가세하게 된다. 오방선생은 이 400여명의 대표로서 조선총독과 담판함으로써 소록도 자혜원을 갱생원으로 확충하고 나환자들이 자력갱생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였다.
3. 조선나환자 근절협회를 조직하고 사무일 을 맡다 한국의 나환자들은 광주의 나병원을 중심으로 대구. 부산 등지에 집단촌을 건설하고 단체생활을 시작 하였으나 해외원조에 의존하던 이들은 미국에 대공황이 발생하자 생활이 어려워진다. 따라서 이들은 자구책으로 나환자 공제협회를 창설하고 모든 모금업무를 최홍종 에게 맡긴다. 그러나 나환자들이 조직한 공제회로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오방선생은 나환자들의 치유를 위한 근본책으로 ‘조선 나환자근절협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인 규모로 확장시켜 윤치호, 조병욱, 송진우, 김병로, 김성수 등을 참여케하고 총무를 맡긴다. 그러나 회장인 윤치호선생이 귀찮다는 이유로 회장에서 물러나자 곧바로 회장에 추대된다. 한편 이 협회에서 지원하는 가장 큰 사업은 소록도 갱생원 건설사업 이었으며 그밖에 대구지역에 있는 나환자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일도 중요한 일중의 하나였다.
4. 나주에 나환자 자활촌 호혜원을 설립하다. 1956년 오방선생이 호혜원의 설립을 서두르고 있을 때 치료 후 완치된 음성 환자들을 위한 대책이 시급 하였다. 병은 나았지만 사회의 냉대는 여전한 나병환자들을 위한 정착촌의 건립이 하루 빨리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오방선생은 전남도청의 보건과를 자기 집 문턱 드나들듯 하면서 나주에 부지를 마련하고 사회 각계로부터 성금을 모으고 또한 나환자들의 세계로 몸소 뛰어들어 함께 생활하면서 음성 나환자촌 호혜원을 창설하였다.
5. 노동공제회 전남지회를 설립해 초대지회장을 지내다. 조선인 노동착취가 계속되던 1920년 4월 박증화를 중심으로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당시 조선인은 일본의 노동자의 2분의 1도 안 되는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었음) 1921년에는 11월 광주향교에서 노동공제회 전남지회를 설립해 최홍종이 전남지회장을 맡음과 동시에 노동야학을 개학한다. 전국적으로 노동공제회는 공산주의 사상의 침투로 인해 당국의 끊임없는 검열과 와해공작에 견디지 못하고 해체되고 뒤이어 1922년 11월 광주노동공제회로 새롭게 태어난다. 한편 오방선생은 1925년 12월부터는 금정교회 목사직을 사임하고 광주의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인도하게 된다.
6. 농촌운동 및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다. 3.1 운동 실패 이후 우리농촌은 피폐화가 계속되어 자작농이 몰락하고 소작농이 농업노동자로 전환되어가던 시절이다. 이럴즈음 최홍종 목사가 광주YMCA 회장에 취임하여 농민을 교육시키고 개화시키는 사회운동에 앞장서는데 일제시대의 농촌운동은 YMCA가 그 중심에 있었다. 광주 YMCA는 1928년에는 장성군에 4개처, 광주군 임곡에 1개처의 농촌야학을 설립하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는데 이러한 운동은 곧바로 광주YMCA와 연결된 현지 주민들이 솔선하여 나주에 5곳, 영광법성, 익산웅포 등에서 농촌야학운동을 확산하여 전개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YMCA의 농촌운동은 지역의 교회와 연계되어 곧 바로 신용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야학과 함께 협동정신을 북돋우며 의식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다. 1930년에 이르러서는 호남지방 신용협동조합 사업은 조합수 19개처, 조합원 444명, 청년회. 농우회 등 단체는 38개처, 회원수 1,640명에 이르게 되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된다.
7. 빈민구제 사업에 전념하다. 초근목피로 생명을 연장하던 시절의 전국적 변사자의 통계는 1929년 2,900명 30년대 3,300명 수준이었다. 광주의 형편도 이와 다를바 없었는데 오방선생은 빈민구제를 위해 광주에 있는 8개 단체와 협동으로 광주YMCA에서 1,000여명의 사람을 모아놓고 조선기근구제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해 성금을 모으고 부동교 다리밑에 토막을 짓고 사는 가난한 형제들에게 달려간다. 보다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빈민구제활동들 위해 우가끼 총독과 면담도하고 도지사에게 도와달라는 간청도 여러 번 했지만 들어주지 않아 매일 광주의 유지들을 찾아 모금을 하는 한편, 중앙교회 앞에 대형 솥단지를 걸고 빈민급식을 시작하였다. 광주의 부자들이 대주지 않을 때는 교회 신도들이 집집에서 좀들이를 받아모아서 빈민급식을 계속하였다. 이후 경양방죽에 임시로 가설해 놓은 걸인수용소에서도 구제사업이 벌어진다.
8. 의제선생과 함께 농민지도자 양성을 위한 삼애학원을 설립하였다. 1955년 최홍종은 의제와 함께 증심사 입구에 삼애학원을 설립하였다. 삼애라함은 하나님, 민족, 땅, 세 가지를 사랑하는 정신을 나타낸 말이다. 오방과 의제는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려면 무엇보다 농업이 근대화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농촌의 중견지도자 양성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해 삼애학원의 문을 연다. 교장 오방과 부교장인 의제도 강의를 맡기로 하고 문을 열었는데 오방은 주로 성경과 정신교양을 강의하였다,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은 학원설립 목적대로 하나님과 이웃과 흙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선교운동가로서의 오방
1. 광주YMCA를 발족시키고 광주YMCA의 정신적 지도자로 서시다. 1920년대 접어들면서 일제의 통치 방식이 문화통치로 바뀌면서 정신적 퇴폐를 조장할 시절에 한국의 계몽운동은 YMCA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11년 이승만 박사가 광주를 다녀간 이후 숭일학교 고등부 학생들로부터 결성되어 시작된 YMCA운동이 감옥에서 막나온 최흥종 목사 주도로 1920년 7월 29일 정식으로 출범한다. 1924년에는 최흥종이 4대 회장으로 취임해서 광주YMCA 창립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잡게 된다.
2. 시베리아 선교사로 떠나 선교와 함께 민족운동을 하시다. 장로교회 총회의 결정에 따라 시베리아 선교사로 떠난 최흥종은 우선 러시아 당국자와 담판을 하여 토지를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온 동포들에게 일터와 한국 이민자를 위한 법적인 권리확보에 주력하면서 동포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치료를 위해 임시병원을 운영하기도 한다. 특별히 주목할 일은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위로하고 안의사의 생모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를 왕래하는 독립 운동가들의 피난처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김구선생과의 우정과 동지애를 키웠으며 김구선생의 개종으로 평신도와 목사의 두터운 정이 쌓이는데 이렇게 쌓인 두 분의 우의는 사랑과 존경으로 평생을 살게 한다.
五放 최흥종 선생의 연보
1880 최학신씨의 차남으로 광주에서 출생 1904 (24세) 김윤수씨의 권유로 기독교 입문, 유진 벨목사의 집회 참석 1905~1907 (25세~27세) 대한제국 광주경무청 순검 1909~1914 (29세~34세) 광주야소병원 의무원
1910~1914 (30세~34세) 나병환자에게 관심갖기 시작. 1912 (32세) ‘봉선리교회’(나환자교회) 창설. 1915~1918 (35세~38세) 평양신학교에서 수학 1919 (39세) 서울에서 3.1운동에 가담. 3년형을 선고 받음. 1920 (40세) 감형으로 1년 만에 출옥. 평양신학교 마지막 학기 에 등록. 광주기독교청년회(YMCA) 창립의 산파역.
1921 (41세) 광주 ‘북문외교회’(북문내교회에서 분립) 담임목사 로 부임.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취임. 1922 (42세) 시베리아 해산성 선교사로 부임
1923 (43세) 독립운동 혐의로 피검. 소학령 ‘게․페․우’에 수감되 었다가 추방되어 귀국. 광주노동공제회(조선노동공제회는 좌우분열로 해산) 창설. 회장에 취임하여 노동․농민운동을 맹렬히 전개
1924 (44세) 북문외교회 당회장겸 임시목사. 광주YMCA 회장 (제4대) 취임. 1926 (46세) 광주시민의 나병원 철거항의로 여수 애양원 설립.
1927~1929 (47세~49세) 신간회 전남도지부장 1929~1930 (49세~50세) 시베리아 선교사 (제2차) 1930~1935 (50세~55세)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연합회 임원피선. 광주YMCA 농촌 사업추진.
1932 (52세) 전국저명인사를 망라해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 창립. 회장에 취임. 1933 (53세) 계유구락부를 창립하여 영세민의 권익옹호운동 전개. 1935 (55세) 중앙교회(북문외교회 후신) 당회장 부임
1936~1945 (56세~65세) 은거.
1945~1947 (65세~67세) 전라남도 건국준비위원장 취임. 광주YMCA 재건 회장 취임.
1945~1947 (65세~67세) 미군정 전라남도 고문 회장 취임. 조선 나병환자 근절위원회 회장 취임. 여수 호혜원 임시원장 취임. 소록도 갱생원, 여수 요양원에 물자 경비 주선.
1948 (68세) 호남신문사 회장 취임. 1949 (69세) 삼애학원(농민지도자 양성)설립, 교장 취임. 1951 (71세) 사회사업협회 위원장 취임. 1958 (78세) 송등원(폐결핵 환자 요양소) 창설 1962 (82세) 국민훈장수상.
1966 (86세) 서거. 1990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95 대전국립묘지 안장.
○ ‘聖人’ 최흥종 목사를 아십니까 (중앙일보. 2000년 12월 30일 토요일)
성자의 지팡이 (문순태 지음, 다지리) 불우한 가족사로 인한 청년기의 방황, 그리고 고단했던 근현대사의 복판에서 나눔과 ㅅ랑의 삶을 보여줬던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목사의 삶을 송년 리뷰로 반추해 보는 것은 각별한 이유가 있다. 오방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큰 이름’이었으나, 오랫동안 사회적 익명상태로 남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일대기 형태로 재현한 소설가 문순태의 저작 ‘성자의 지팡이’는 오방의 애제자 이영생(전YMCA총무)씨의 구술을 중심으로 했다. 정확하게는 실명(實名) 전기소설, 이 책은 분명 우리 앞에 왔었던 이의 삶을 실물 크기로 그려내는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
◇진보보다 더 실천적인 보수=이념으로 또는 감정으로 갈라진 마음을 감싸 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삶은 더욱 값지다. 보수 기독교신학에 생각의 뿌리를 두면서도 진보적 이론가보다 더한 나눔의 실천으로 일관한 그의 삶은 20세기 초중반 정치적 리더들과 교계 지도자들의 높은 이름과 또 다른 변별성을 갖는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하는 것이 천리요 운명이다. 우주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에서 생로병사 行往) 좌오(坐臥) 환몽중(幻夢中)에 초로같이 춘몽같이 시들어지는 것이 인생인데 어찌하여 죄악 중에 멸망의 길로만 가는가.” 오방의 유언 첫 구절이다. 24세 때 처음 기독교를 접한 그는 무아(無我)의 보살행을 실천했음이 신간에서 드러난다. 그런 설득력은 전기소설에서 묘사되는 그의 삶 자체가 주는 무게에 힘입는다. ‘사일(死日)이 곧 생일’이라던 그는 늘 “한 사람이라도 굶는 자가 있다면 어찌 내가 먹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저자 문순태는 자신이 고등학생이었던 50년대 말, 오방을 먼발치서 실제로 보고 ‘간디의 모습과 흡사했다’고 회고한다. 66년 5월 광주공원에서 최목사의 사회장이 치러질 때 수 많은 나병환자들과 걸인들이 “아버지, 우리는 어쩌라고 이렇게 가십니까”하며 울부짓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저자는 술회하고 있다.
◇시대의 상징어 ‘문둥이’=오방은 나병환자와 걸인들의 아버지였다. 그의 헌신적 보살핌으로 말미암아 그가 살았던 광주를 포함하여 전라도는 문둥이와 걸인들의 고향이 된다. 소록도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과정, 함경도에서 태어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 전라도를 찾아가는 이유가 최목사의 일생을 통해 비로소 이해된다. 문둥병은 그 시절 망국의 현실과 조응되어 시대의 단면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통했다. 오방 최흥종 아호 오방(五放)이란 다섯 가지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가사에 방만(放漫), 둘째 사회에 방일(放逸), 셋째 경제에 방종(放縱), 넷째 정치에 방기(放棄), 다섯째 종교에 방랑(放浪)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는 본래부터 거룩한 위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외려 반대다. 젊은 시절 오방은 뒷골목의 ‘주먹’이었다. 주먹에서 목사로의 극적인 변신도 놀랍지만, 기독교에 귀의 한 후 이름도 영종(泳琮)에서 흥종(興琮)으로 바꾼 오방은 혈육과 사회 모든 종파를 넘어서 다섯 가지의 신조를 지키며 살았다. 나눔의 삶을 실천한다고 집안일에 무심한 그에게 반발하여 그의 장남이 한때 자신을 오취(五取)라 불렀다. 아버지가 버린 다섯 가지를 아들인 자신이 다시 갖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의 삶을 이해한 장남이 우방(又放)이라고 이름을 고친다는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그렇다면 오방이 살아온다면 그 나눔의 손길은 어리도 향할 것인가. 오늘의 ‘문둥이’를 부둥켜 안을 또 다른 우방(又放)은 누구인가. 아직도 스산한 시대, 오방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교사 희생정신에 감명 새 인생 일제시대 빈민운동·선교 앞장
최흥종 목사의 삶과 실천 젊은 시절 한때 ‘최망치’라는 별명으로 뒷골목의 주먹세계에서 악명을 떨쳤던 오방의 인생 행로가 결정적으로 반전되는 계기는 이 땅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자기 희생을 체험하면서부터다. 피고름이 엉겨붙어 얼굴의 형체도 알 수 없이 문드러진 문둥이 여인, 그녀를 끌어안아 자신의 나귀에 태운 선교사는 문둥이 여인이 땅에 떨어뜨린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마침 지나가던 최망치에게 부탁을 한다. 피고름을 묻은 지팡이, 재촉하는 선교사, 선입견 때문에 망설이는 최망치... 외국인보다도 동포애가 없는 메마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최망치가 지팡이를 집어주는 것으로 ‘성자의 지팡이’의 저자 문순태는 묘사하고 있다. 그 지팡이는 이후 가난하고 병들고 상처받은 이들의 몸과 영혼을 달래주는 성자의 지팡이가 된다. 신간 ‘성자의 지팡이’는 오방의 극적인 삶을 충실하게 전하고 있다. 선교자들에게 의술을 배워 직접 문둥이들을 수술하고,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 2개월의 옥고를 치르며, 5백 명의 나병환자를 이끌고 광주에서 경성의 총독부까지 ‘구라(救癩)행진’을 통해 일본 총독으로부터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을 이끌어내고, 농토를 빼앗겨 유랑하는 동포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시베리아로 두 차례나 선교사로 나간다. 나병환자들·걸인들과 생활하던 그는 55세가 되던 1935년 스스로 사망통지서를 돌리고 무등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진다. 독립만세를 외쳤던 자들의 변절과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결의에 실망한 그의 결단이었다. 스스로 거세하고 걸인과 병자들과 동고동락하는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랫동안 오방의 삶에 주목해왔던 사람 중의 한명인 신경림 시인은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세속적인 눈에 기인으로 보였을 뿐이었다”며 “이념이나 종교의 잣대 안에 가두어선 안되는 그의 삶은 농촌붕괴 시기 빈민운동의 효시였다”고 평가한다. 빈민 선교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오방의 말년은 사회활동의 의미를 함축한다. 이 점은 기독교는 물론 전통종교에도 두루 밝았던 다석 유영모와의 교북이 낙이었다면서 “기독교의 진리와 노자의 도가 다른 것이 아니다”고 언급한다. 그의 이런 말은 낮은 곳에서의 사회봉사와 저잣거리의 삶을 통해 외려 책상물림의 논리 이상의 통렬한 깨침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한국사회가 지구촌에서 흔치 않은 다종교 사회라는 점, 또 기독교 토착화라는 오랜 명제에 오방의 삶이야말로 무애(無碍)의 행동반경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문순태가 ‘오방=영원한 자유인’이라고 치송하는 이유도 설득력이 높다.
○ 추모사
오늘은 이 고장이 낳은 최고의 기독교사회운동가로써 사랑의 실천자요 참다운 봉사자였던 오방 최흥종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2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목사님께서는 1966년 5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평생 동안 사랑하시던 가난한 이웃과 어려운 형제들을 뒤에 남기신 채 이 세상을 하직하셨고 5월 18일 수 만명 동포들의 슬픔과 오열 속에 사회장으로 마지막 고별을 하셨는데,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렸읍니다. 생각해보건데 오방 선생님의 숭고한 뜻과 그를 실천하시던 정신은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일찌기 민족의 지도자였던 김구 선생께서 오방 선생에게 휘호를 써주신 그대로 “화광동진”하는 자세, 말과 행동을 한 가지로 하며 타인과 화해하는 삶을 이루셨습니다. 먼저 오방 선생님은 기독교 선교에 헌신하였고, 민족운동에 이바지 하셨읍니다. 이 고장 선교의 아버지라 할 배유지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를 마치신 최흥종 목사님은 북문밖교회를 창설하였고 광주YMCA를 창설하셨으며 동토의 나라 시베리아에 선교사로 두 번이나 파송되어 만리타국에서 외롭게 지내는 동포들을 위로하고 전도하였읍니다. 특히 그 곳의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히 연결하여 조국의 독립을 꾀하셨으며 3․1운동 때에는 여러 해나 옥고를 치르셨으니, 오방 선생께서는 뛰어난 민족주의자요 애국자였읍니다. 그 분이 교회에 입문하시기 전 광주 순검시절에 처형 직전의 열 두명의 의병을 몰래 도망가게 하고 당신이 곤욕을 치루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방선생님을 높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가 예수님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시고 사랑의 봉사를 생활화 하셨다는 점입니다. 오방 선생님은 제중원의 의료 선교사 포사이트의 영향을 입어 나환자 돕기에 뛰어들어 평생을 구라사업의 아버지로서 일하셨고, 걸인과 결핵환자를 돌보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 일생동안 헌신하셨읍니다. 사랑이란 말로 외치기는 쉬워도 행동으로 실천하기란 어려운 것이며, 더구나 평소에 이를 생활화 하기로는 극난한 일인데, 오방선생님은 이 일을 다하셨으니 얼마나 장하고 숭고한 일입니까 거리에서 헐벗고 있는 거지를 만나면 옷을 벗어 입혀주고 당시에는 불치병이라 하여 상종도 안해 주던 결핵환자와 나환자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고락을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의 참사랑이 아니고는 할 수 있는 성스러운 일입니다. 오방 선생님은 호혜원과 송등원을 설립하시고 전국 구라사업을 책임맡아 하셨으니, 숭고한 사랑의 실천가였읍니다. 끝으로 오방선생님은 일찌기 교회와 사회와의 연결을 깨달으시고 우리 YMCA를 창설하였으며 기독교 사회운동의 센터로 만드셔서 농민운동과 사회계몽운동에 앞장서셨고 호남신문을 간행하기도 하고 전남의대의 전신인 광주의전을 설립하는데도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방 선생님은 기독교 선교에 앞장선 전도인임을 물론 민족운동가요, 교육자요, 사회계몽가였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사랑의 실천자요 영원한 봉사자였음을 우리 후배들은 배워야겠읍니다.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동안 사랑과 봉사를 생활화하셨던 오방 최흥종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2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들도 모두 그 이름의 숭고한 뜻을 기리면서 살아가야되겠읍니다. 지금은 분명히 하늘나라에 계시면서 우리를 굽어 보실 오방 선생님이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기를 빌면서 추모의 말씀에 대신합니다
1986년 9월 15일 오방장학회 이사장 권 병 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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