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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인조
1595~1649년, 재위기간: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원종(추존1580-1619) + 인헝왕후 구씨(3남)의 1남
원종은 선조 + 인빈 김씨(4남5녀)의 3남
무력으로 광해군을 폐출 능양군
선조의 선위 교지를 받지 못하고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등극하자 곧 자신의 불안정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련의 왕권 강화책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임해군을 비롯하여 영창대군, 능창군 등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들과 그들을 떠받치고 있던 소북파와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618년 인목대비마저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그동안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고 역모를 도모하고 있던 세력들은 이 사건을 명분으로 무력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이것이 1623년 3월 12일 밤에 일어난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인물은 능양군이었다. 능양군은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이자 1615년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죽은 능창군의 친형이다. 여기서 그가 반정을 도모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광해군에 의한 동생 능창군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본질적인 원인은 광해군과 인빈 김씨의 관계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선조는 인빈 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을 총애했다. 그래서 한때 정철이 건저문제를 제기했을 때 선조는 광해군을 반대하고 인빈 소생인 신성군을 지목했다. 하지만 선조의 바람은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들은 신성군이 아직 어려서 국사를 논할 입장이 못 된다면서 인품과 학식이 뛰어난 광해군이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선조와 대신들의 이 같은 견해 차이로 한동안 세자 책봉이 미루어지다가 임잰왜란을 당하자 선조는 할 수 없이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을 세자로 앉혔다.
인빈 김씨를 비롯한 그녀의 소생들은 이것이 불만이었다. 때문에 광해군이 등극한 이후에도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게 되었는데, 광해군으로서는 당연히 이들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성군은 이미 죽고 없었지만 그 이외에도 인빈 소생의 아들은 셋이나 더 있었다. 특히 신성군의 동복아우인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왜냐하면 능창군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된 상태인 데다가 사람들로부터 군왕의 자질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인들의 평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제거해 왕권 안정을 도모했던 광해군과 대북파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고, 신경희 사건이 일어나자 능창군을 그들과 연루시켜 유배시키고 끝내는 죽여버렸다. 이때부터 능창군의 맏형 능양군은 광해군과 대북 세력으로부터 피해를입은 인물들과 접촉하면서 무력 정변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618년 인목대비 유폐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명분으로 역모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능양군과 함께 무력 정변을 도모한 인물들은 대개 서인 세력이었다. 서인은 정치, 외교적 차원에서 철저하게 대북파와 대치했다. 그들은 특히 외교론에서 극단적인 견해 차이를 드러냈다. 대북파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노선을 걷고 있던 반면에 서인은 철저한 대명 사대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또 서인 세력은 정치적으로 선조의 유명을 받들어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인목대비를 따르고 있었다. 이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대북파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결국 대북파와 서인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광해군 역시 서인의 척결 없이는 자신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폐출했던 계축옥사 때 서인의 중심 인물들을 정계에서 내몰았고, 이후 인목대비 유폐사건 때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서인 세력도 사형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정계에서 밀려난 서인 세력은 역모를 계획해 이미 능창군의 죽음으로 역모를 꿈꾸고 있던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능양군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귀, 김자점, 김류, 최명길, 이괄 등이었다. 이들 모두는 이이, 성혼의 문하였다.
이 역모에 군사를 동원하기로 한 사람은 이귀와 김류, 이괄 세 사람이었다. 이귀는 당시 평산부사로 재직 중이었고, 이괄은 함경도병마사에 제수되어 임지로 떠나야 할 입장이었다. 그리고 김류는 강계부사를 역임한 바 있으나 대간의 탄핵을 받아 정계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이들 세 사람 중 이귀와 김류는 오래 전부터 역모를 함께 도모해온 인물이었고, 이괄은 김류와 교분이 깊던 효성령별장 신경진에 의해 거사에 합류한 상태였다.
반정을 일으키기 1년 전인 1622년 이귀는 평산부사로 있었다. 이때 평산 지방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자 이귀는 범 사냥을 하는 군사들이 도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무장한 채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상소를 하였다. 이는 무장한 채로 바로 도성으로 밀로 올라갈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모의는 사전에 누설되어 연기되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정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버렸다.
상황이 이처럼 급변하자 능양군을 비롯한 역모 세력들은 이듬해인 1623년 3월 13일 새벽에 거사를 도모하기로 확정하고 12일 밤부터 홍제원에 모여 대오를 가다듬고 군사 행동 지침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이미 조정에서 그들의 거사 계획을 눈치 채고 훈련도감 이확으로 하여금 역모 가담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귀는 거사 시간을 앞당겨 출병을 서둘렀다.
출병 당시 반란군의 숫자는 겨우 7백 명 정도였다. 반란군 대장을 맡기로 했던 김류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반란군은 예상 인원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대로 눌러앉아 있어봤자 결과는 진압군에게 당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귀는 일단 이괄에게 대장직을 권유했다. 이괄은 대장직을 맡자 반란군으로 하여금 머리에 ‘의(義)’자가 쓰여진 띠를 두르도록 하고 군사를 지휘했다.
한편 김류는 거사 계획이 탄로났다는 소릴 듣고 주저하고 있다가 뒤늦게야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에 합류했다. 이때 이괄은 김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귀의 중재에 의해 합병하고 김류가 총지휘를 맡은 다음 궁궐을 향해 진격했다.
반란군이 창의문을 향해 진격했을 때 진압군은 문을 굳게 닫고 궁을 수비했지만 반란군은 곧 창의문을 뚫고 창덕궁에 도달하였다. 창의문 안에는 이미 능양군이 자신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훈련도감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 주위에 매복하고 있었으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반란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훈련대장 이홍립은 대궐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반란군에 내응하기로 약속한 터였기에 간접적으로 반란군 진입을 돕고 있었다. 그래서 반란군은 순식간에 인정전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에 이르렀다. 금호문 역시 수문장 박효립이 내응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쉽게 통과한 반란군은 돈화문에 이르러 불을 질러 승리를 알렸다. 광해군은 그제야 반란군이 대궐을 점거했음을 알고 몇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재빨리 궁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해서 반란군은 쉽게 궁궐을 접수해버렸다.
반란에 성공한 능양군은 대궐을 장악하자 곧 광해군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빠져나가고 난 다음이었다. 능양군은 먼저 서궁으로 달려가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찾았다. 능양군을 맞이한 인목대비는 반란이 일어나 광해군이 패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색을 하며 기뻐하면서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이유로 다음의 세 가지를 내세웠다.
첫째는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인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 둘째는 과도한 토목 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여 정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했다는 것 등이었다.
이 같은 폐위 이유는 곧 반정 세력들의 거사 명분이었다. 이 거사 명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반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광해군의 정사 운영을 악정으로 매도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이유로 내세운 것 중에 선왕을 독살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인목대비가 줄곧 주장해오던 것이다. 인목대비의 이 말은 곧 그녀 자신이 서궁에 유폐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세운 과도한 토목 공사는 궁궐 재건 사업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정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광해군이 궁궐을 개축, 신축한 것은 왕권을 바로 세우고 정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광해군이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그들 서인 세력이 자신들의 외교관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겨우 벗어나 안정기로 막 접어들 순간이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며 실리를 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서인 세력은 자신들을 정계에서 축출했다는 이유로 광해군이 겨우 다져놓은 안정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렸다. 이 사건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거사 이틀 후 광해군이 의관 안국신의 집에서 붙잡힘으로써 능양군의 계획은 완전히 성공하였다. 이로써 능양군이 조선 제16대 왕에 오르니 그가 곧 인조이다.
굴욕의 왕 인조, 끝없는 조선의 수난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그동안 득세했던 대북파 인사들에게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친명 사대주의를 표명하며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괄의 난, 청의 침입 등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결국 청과 군신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다. 이후 조선의 경제는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고 민간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빈 소생인 정원군의 맏아들이다. 광해군의 서조카이고 인목대비의 서손자인 셈이다. 그는 1595년에 태어났으며, 1607년 능양도정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군에 봉해졌다. 이후 1615년 막내동생 능창군이 광해군에 의해 죽자 역모를 도모, 1623년 3월 서인 세력과 함께 무력 정난을 일으켜 조선 제1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우선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했으며, 광해군 시절 정권을 독점했던 정인홍, 이이첨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대북 세력 2백여 명을 모두 숙청하였다. 그리고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에 유배 중이던 남인 이원익을 여의정에 앉히고 반정에 가담했던 서인의 김류, 이귀 등 33명을 세 등급으로 분리해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렸다.
그는 또한 광해군에 의해 희생된 영창대군,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을 신원하고, 나머지 희생자들도 대부분 관작을 복구시켰다. 이렇게 하여 조정은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이 되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여 그동안 광해군이 유지해오던 중립외교의 틀을 깨뜨렸다.
인조는 이렇듯 광해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조정과 사회를 안저시켜 자신의 정치사상을 펼치려 했지만 이는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반정 정권이 들어선 지 채 일 년도 못 되어 다시 한 번 반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사건은 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일으킨 것으로 1624년 1월에 문회, 허통, 이우 등이 인조에게 이괄이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간언을 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괄의 난은 인조가 한성을 버리고 도주했을 정도로 조선 조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내부 반란으로 국왕이 도성을 떠난 사건은 처음이어서 민간과 조정은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민간에 대한 사찰이 강화되어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게다가 이괄이 북방 주력 부대를 이끌고 내려옴으로써 변방의 수비에 허점이 생겨 후금의 침략을 용이하게 했다.
호시탐탐 내침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이 3년 뒤인 1627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을 일으키자, 후금의 기세에 위험을 느낀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때 후금은 조선측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들의 침략 이유 일곱 가지를 밝히며 조선의 만주 영토를 후금에 내놓을 것,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3만 군사를 지원할 것 등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이에 최명길 등이 강화 회담에 나서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으면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앞세워 약조를 성립시키자 후금은 철수하였다.
이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군신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그들은 다시 12만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때 척화론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함께 청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었던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인조는 삼전도에서 당한 굴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반청의 색깔을 더욱 짙게 드러내는 한편 망해가고 있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노선을 한층 강화시켰다.
인조의 그 같은 모화정책은 청에 인질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의 의견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소현세자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에 말려들어 급기야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 소현을 독살하는 극악한 일면을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현종 대의 서인과 남인 사이에 치열한 정쟁으로 비화된 예송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현종실록」에서 다루기로 한다).
조정은 이때부터 귀인 조소용 소생의 옹주를 손자 며느리로 맞아들인 김자점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횡포를 일삼아 조저에 대한 민간의 불신은 강해지고 정국은 더욱 혼란으로 치달았다.
인조는 이괄의 난 이후 계속된 조정과 사회의 혼란을 일소하고 한때 병권을 안정시키고 민생을 구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1624년에는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를 보강했고, 이 후 군역의 세납화와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을 발표했다. 이로써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1628년에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표류하여 왔는데, 그의 이름을 박연으로 고치고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 넣어 대포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 해 조선군의 화력을 증강시키기도 했다.
한편 민생 안정책으로 광해군 당시 경기도에 한정해서 실시하던 대동법을 1623년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해 징세의 이원화를 꾀하고 민간의 부담을 줄였으며, 1634년에는 삼남 일대에 양전을 실시하여 농경지의 면적을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세금 수입을 확대시켰다. 또한 농토세 징수 규범인 전세법(田稅法)을 폐지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화폐 사용을 위해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했으며, 청인과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여 북관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증강에 시장을 열었다.(경원개시, 중강개시)
이 같은 인조의 노력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또한 대부분의 정책들은 이미 광해군 대에 실시한 것들이어서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오히려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정두원과 소현세자가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경, 과학 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오고, 송인룡 등이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황극경세서』,『동사보편』,『서연비람』등의 책들이 간행되었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학자들은 현종, 숙종 대에 걸쳐 예송을 일으켜 조정을 일대 파란으로 몰고 가게 된다.
인조는 이처럼 굴욕과 고통으로 왕위를 유지하다가 1649년 재위 24년 만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를 비롯 5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를 낳았고, 능은 장릉으로 왕비 인렬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는데, 처음에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다가 영조 때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이괄의 '삼일 천하’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조선 사회는 한동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란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은 또 다른 반란을 염려하는 한편, 사분오열되어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각 계파들은 반대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계략 짜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급기야 역모설을 퍼뜨려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이 같은 계파간의 갈등이 빚어낸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는 등극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신세가 된다. 고전 끝에 가까스로 난은 평정되지만 이 사건으로 조선의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지고 사회는 극심한 혼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결국 왕이 무릎을 꿇고 청에 사죄를 하며 군신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으로 이어진다.
인조시대의 혼란과 국치의 전주곡이 된 ‘이괄의 난’은 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대한 이괄의 불만에 의해 야기된 사건이라는 것이 사관들의 통평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좀더 면밀히 분석해보면 이 사건은 이괄의 불만 때문이 아니라 서인들의 세력다툼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인조실록』의 한 사론은 이 사건을 이괄이 인조반정 때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2등 공신에 책록된 데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밀려난 것에 앙심을 품고 일으킨 변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론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감안하지 않고 기술되어 있다. 이괄이 평안병사로 부임하던 시기는 누루하치가 후금을 일으켜 명의 요동 지방을 함락시키고 조선에 위협을 가해오던 때였다. 이 때문에 친명정책을 쓰고 있던 조선은 변방 방어에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변방 방어의 주력 부대 지휘관인 평안병사 이괄에게 국운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인조가 이괄을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외직으로 내쫓아 그의 불만을 야기시켰다는 논평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오히려 인조는 그의 풍부한 전투 경험과 용병 능력을 높게 평가하여 그에게 북방 수비군의 주력 부대를 맡겼다고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 논리에 맞다.
당시 변방 수비를 책임졌던 사람은 장만이었다. 인조는 그때의 상황을 준 전시 상황으로 규정하고 전시에나 임명하는 도원수에 장만을 세웠고, 부원수에 평안병사 이괄을 임명했다. 사실 이때 부원수 물망에 오른 사람은 이서와 이괄 두 사람이었다. 인조는 두 사람 중 누구를 선택해야 될지 몰라 도원수 장만에게 부원수를 지명하도록 했는데, 이때 장만은 이괄을 지명했다.
북방 수비대의 병력은 1만 5천 명 정도였다. 그 중에 주력 부대 1만 명은 부원수인 이괄의 지휘 아래 영변에 주둔하고 있었고, 지원 부대 5천 명은 장만의 지휘 아래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편제는 곧 부원수가 변방 수비의 실질적인 총 책임자라는 것과, 따라서 도원수 못지않게 잔략에 밝고 통솔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괄의 부원수 임명은 신중한 논의 끝에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괄은 이러한 자신의 중요한 책무를 통감하고 임지에 도착하여 군사 조련, 성책 보수, 진영의 경비 강화 등 여진족의 내침 방어에 몰두했다.
이괄이 이처럼 변방 수비에 몸을 아끼지 않고 있을 때 중앙의 서인들은 이괄이 변방에서 군사 1만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남아 있던 북인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1624년 1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은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그리고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헌집, 이시언 등이 변란을 꾀하고 있다고 왕에게 고변했다.
이들은 모두 한때 광해군과 친분이 있던 인물들이었다. 기자헌은 영의정까지 지낸 정치 원로였고, 이시언은 훈련대장을 역임하고 인조 즉위 이후에는 순변 부원수로 재직 중이었다. 하지만 기자헌은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다 귀양을 갔고, 이시언은 인조반정 때 협조한 공로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이들은 비교적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서인들에게는 위협적인 세력일 수 밖에 없었다.
반란으로 집권한 인조는 역모에 대한 고변이 들어오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이괄을 신임하던 터라 쉽사리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조사관을 구성하여 엄중하게 조사를 진행시키도록 했는데, 조사 끝에 이 고변이 무고임이 밝혀졌다. 조사 담당관들은 조사 결과를 고하며 문회, 허통, 이우 등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조 역시 이들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서인 집권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김류, 김자점 등의 집권 세력은 자기편 당인들의 고변이 무고임이 밝혀졌는데도 이괄을 부원수직에서 해임하고, 중앙으로 소환하여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인조는 이괄을 국문하자는 의견은 묵살하고,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한명련 등을 중앙으로 압송하여 국문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또한 그 외에 기자헌 등 역모 혐의가 있는 40여 명의 중앙관료들은 하옥시켰다.
이전을 한성으로 압송하기 위하여 금부도사가 영변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괄은 몹시 분노하였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변방 수비에 전력을 쏟고 있는 자신을 역모자로 몰고 간 서인 세력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괄은 자신의 아들이 역모 혐의를 쓰고 압송되어 만약 고문을 못 이겨 거짓 자백이라도 한다면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했다. 기왕에도 중앙의 서인 관료들을 좋아하지 않던 그였다. 마침내 그는 아들을 잡아가기 위해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괄은 우선 자신과 함께 역모혐의를 쓰고 한성으로 압송되던 한명련을 구출해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 휘하에 있으면서 큰 전적을 올린 무신이었다. 출중한 용병력과 뛰어난 무인정신을 소유한 그는 당시 최전방에서 순변사로 재직하다가 불시에 압송되던 중이었다.
한명련을 합류시킨 이괄은 자신에게 항복하여 수하가 된 왜병 포로 1백 명을 선봉으로 삼고 전 병력 1만 명을 이끌며 영변을 출발하여 도성으로 진격했다. 이때가 1624년 1월 22일로 인조 즉위 10개월 만이었다.
이괄은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을 피해 곧바로 도성으로 향했다. 장만은 이괄에게 잡혔다가 풀려난 군관 남두방을 통해서 이괄의 반란 사실을 듣고 있었으나 5천 명의 지원 부대로 1만 명의 주력 부대를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일단 자기 휘하의 군졸들을 결집시켜 성문을 닫은 뒤 이괄 부대의 기습에 대비하면서 중앙에 반란 소실을 알렸다.
이괄 부대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거침없이 한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진군은 철저히 샛길을 통해 이루어져 황해방어사나 경기방어사의 부대도 미처 그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진압군과 처음으로 접전이 이루어진 곳은 황해도 황주였다.
그곳에서 이괄 부대를 가로막는 것은 정충신과 남이홍이 이끄는 부대였다. 그들 두 사람은 이괄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이괄은 가급적이면 정면 돌파를 피하고 급습을 통해 그들을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괄은 우선 부하 장수 허전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진압군에 투항하게 하여 적의 경계를 늦춘 다음 급습하였다. 결과는 이괄의 대승이었다. 진압군을 누른 이괄은 관군 선봉장 박영서를 죽이고 다시 도성을 향해 재빠르게 진군하였다. 그토록 도성 진입을 서두른 것은 아마 도성 내에 살고 있던 가족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성에 도착하기 전에 그의 아내와 동생 이돈은 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괄 부대의 두 번째 전투는 개성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평산에서 벌어졌다. 이때 관군은 방어사 이중로와 평산부사 이확이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여울을 경계로 삼고 이괄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잠복 정보를 입수한 이괄 부대의 급습으로 관군은 다시 대패했다.
세 번째 전투는 임진강 나루터에서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이괄은 한명련의 노련한 조언에 힘입어 관군을 대파하고 벽제로 진출했다.
한편 임진강 전투에서 관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와 서인 세력은 기자헌 등 옥에 갇혀 있던 수십 명의 대북 세력들이 반란군에 내응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하고 그들을 모두 처형시켰다. 그리고 한성을 버리고 서둘러 공주로 피난을 떠났다.
이괄 부대가 마침내 한성에 당도한 것은 출군 19일 만인 2월 10일이었다. 그들은 도성에 당도하자 우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반란군이 승리하여 새로운 왕이 즉위할 것임을 알렸다. 태조 이성계 이후 역사상 반란군이 도성을 점령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도성을 점령하면 승리한 것으로 간주했던 만큼 이괄 부대는 선조의 아들 홍안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곳곳에 방을 붙여 주민들이 생업에 충실하도록 민심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들의 한성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이 도성을 점령하자 곧 뒤쫓아온 장만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만과 정충신, 남이홍 등은 작전을 짠 끝에 북산의 길마재에 진을 쳤다.
이괄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관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반란군의 선봉장은 백전노장인 한명련이 맡았다. 하지만 지형상 유리한 지역을 고수하고 있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관군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자 이괄은 부상당한 한명련과 패잔병을 이끌고 급히 도성을 빠져나가 이천에 다시 진영을 조성했다. 하지만 2월 15일 이천에 도착했을 때 반란군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러자 전세를 회복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이괄의 부하들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투항해버렸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었지만 조선 사회의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내부 반란으로 왕이 쉽게 도성을 비우자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고, 이러한 정서는 난이 평정된 이후에도 조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또한 반란으로 인해 변방의 주력 부대가 상실되어 북방 수비가 허술해졌고, 이는 후금의 침략욕을 자극시켜 결국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정묘호란은 다시 병자호란으로 이어져 왕이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굴욕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정묘호란
이괄의 난이 평정된 지 3년 만인 1627년 1월 그동안 호시탐탐 내침을 노리던 여진족이 대대적인 조선 침략을 감행한다.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던 조선은 변변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임진강 이북을 점령당했다가 화의조약을 맺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있는 틈을 타서 건주위 추장 누루하치를 추대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 1610년 후금을 세웠다. 이후 그들은 비옥한 남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명나라를 침략하였다. 그러자 명은 10만의 대군을 조성해 후금을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하여 원군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명의 요청을 받고 출병하긴 했으나 명이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여 수세에 몰리자 광해군은 중립주의 외교 노선을 취해 강홍립으로 하여금 후금과 휴전을 맺도록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일단 전란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명과 후금의 싸움을 관망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국방을 강화시키고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광해군의 이런 전략 덕분으로 조선은 한동안 전란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출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친명배금 정책을 천명함으로써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조선은 대명 사대주의의 길을 걸으며 공공연히 명을 후원하며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퇴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을 보호해주기도 하였다. 조선의 이 같은 배금정책은 결국 후금을 자극하였고, 조선이 이괄의 난으로 국방이 허술해지자 후금은 3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기에 이르렀다.
후금의 장수 아민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은 것은 1627년 1월 중순이었다. 압록강을 넘은 그들은 순식간에 의주를 점령한 다음 주력 부대는 용천, 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했고, 일부 병력은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명의 모문룡 부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을 비롯 여러 곳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후금군을 저지하는 데에 실패했고, 모문룡 역시 가도에서 대패하여 신미도로 패주하였다.
이렇듯 후금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해오자 인조는 장만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대신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그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평산에서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던 장만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예성강 남쪽인 개성에 진을 치고 적과 대치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김상용을 유도대장에 명하여 한성을 지키게 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후금군은 후방의 위협을 염려한 나머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평산에 머무르며 조선에 화의를 제의하였다.
후금은 화의를 제의하는 서신에서 일곱 가지의 침략 이유를 대며 세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후금에 압록강 이남 변경 지역 땅을 할지할 것, 둘째 명의 장수 모문룡을 잡아보낼 것, 셋째 명나라 토벌에 조선 군사 3만 명을 지원할 것 등이었다. 후금은 2월 9일 후금의 부장 유해와 후금에 항복해 있던 조선 장수 강홍립을 보내 이 서신을 전달하고 화친의 뜻이 있음을 전했다.
조선 대신들은 이 서신을 받고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자와 이를 반대하는 척화론자로 갈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후금군을 상대할 여력을 상실했음을 실감한 대신들은 최명길 등 주화론자의 주장에 따라 그들과 화의 교섭을 하기에 이르렀다.
화친 과정에서 후금은 명나라 연호인 천계를 사용하지 않고, 왕자를 인질로 달라고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이에 조선은 왕자는 아직 어려서 보낼 수 없다며 종친 이구를 왕자라고 하여 후금 진영에 보내고 병조판서 이정구, 이조판서 장유 등으로 하여금 교섭을 진행하도록 했다.
조선의 화의 조건은 첫째 후금군이 평산을 넘지 않을 것, 둘째 맹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군할 것, 셋째 후금군은 철병 후에 다시 압록강을 넘어서지 않을 것. 넷째 양국은 형제국으로 칭할 것, 다섯째 조선은 후금과 맹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 것을 인정할 것 등이었다.
조선의 화친조약은 한마디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테니 더 이상 조선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후금이 조선의 이 제의를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이때 조선과 후금이 맺은 조약을 흔히 정묘약조라고 한다.
조선과 후금의 이 약조는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동안 야인으로 배척해오던 여진족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은 힘에 밀려 패전한 입장에서 취한 치욕적인 조치였을 뿐만 아니라 후금에 대해 세폐를 바쳐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마저 안게 되었고, 후금 역시 비록 조선과의 맹약으로 세폐를 통해 물자 조달을 약속 받았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궤멸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금 경향이 더욱 고조되어 여전히 배후에 불안의 씨앗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의 군사력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고 후금은 명과 싸움 때문에 섣불리 조선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런 양국의 내적인 어려움이 결국 양쪽 모두 불만스러운 정묘약조를 성립시킬 수밖에 없게 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병자호란
정묘약조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중강과 회령에서 각각 후금에게 세폐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깨고 식량을 공급해 줄 것을 강요하고 병선 및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해왔다. 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자 조선 내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관계’로 개약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 3천 필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폐를 요구하고, 정병 3만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이때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북경 부근을 위협하고 있었다.
후금의 요구 사항이 이처럼 터무니 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화의조약을 깨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던 중 그해 2월에 용골대, 마부대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리고 인조 비 한씨 문상을 겸할 요량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그들은 맹약을 바꿔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개약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이 후금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이에 분개하며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칠 것을 극간했고, 인조도 이에 동조하여 후금 사신이 가지고 온 국서를 거부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민가의 마필을 빌려 급히 본국으로 도주해 갔는데, 이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조선 조정이 평안관찰사에게 내린 유문을 그들에게 탈취당하고 만다. 이 유문은 전시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군비를 손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여차하면 후금을 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유문을 읽은 후금 태종은 조선을 재차 침략할 뜻을 비친다. 그리고 이 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였으며,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은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가한다. 하지만 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던 조선 조정은 그들의 제의를 묵살해버린다. 그해 11월 청은 다시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내세우는 인물들을 심양으로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이번에도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시해버렸다.
그해 12월 1일 청 태종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군사 1만 등 도합 12만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쳐내려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도원수 김자점과 의주부윤 임경업의 장계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이었다. 그리고 13일 오후 늦게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청군이 그렇게 빨리 밀고 내려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장계로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고, 도성 내의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4일 개성유수의 급보로 청군이 이미 개성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인조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에게 주사대장을 겸직시켜 강화도 수비를 명령했다. 또한 윤방과 김상용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가씨, 원손, 둘째 아들 봉림대군, 셋째 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도록 했다.
인조 자신도 그날 밤 도성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 불광동)을 통과했으며,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이를 포기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남게 되자 한성 주변의 관리들은 각기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집결하였고, 이에 총 병력은 1만 3천이 되었다. 이때 성안에 있는 식량은 양곡 1만 4천3백 석, 장 220항아리 정도로 약 50일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한편 청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청태종은 1월 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싸움 없이 40여 일이 경과하자 성안의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조선군들은 싸움에서 모두 대패하여 패주하고, 명에 청한 원군도 내부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이리하여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더 이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게 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다시 강화론이 대두되었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다시 한 번 심한 논쟁을 벌였고, 주전파가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군 진영에 화의를 청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이 국서를 작성하고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이 직접 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맹세하고 척화 주모자 3인을 결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내용이 너무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인조와 대신들은 청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서 다시 수일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가 전달되자 인조는 별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인조가 출성하여 항복할 결심을 굳히자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등은 적진을 왕래하며 조선측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고, 청군 진영에는 용골대, 마부대 등의 사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회담에 응하였다. 조약서에 명시된 청의 요구 사항은 총 열한 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는 한편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세폐(공물)를 보낼 것 등이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하였던 척화론자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심양으로 끌고 갔다. 청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단도의 동강진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청 태종은 패륵 아탁과 항복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으로 하여금 병선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선측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 조건에 따라 평안병사 유림을 수장으로 하고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으로 하여 청군을 도와 싸우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를 몰래 보내어 명제독 심세괴에게 피하도록 알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청군에 의한 군사적 피해 못지 않게 민간의 피해도 막심했다.
청군은 도적질을 일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철군하면서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을 끌고 갔는데, 이들의 목적은 끌고 간 여자들을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라 속가를 낼 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꽤 많았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후기의 유일한 법화 상평통보
인조 대의 경제 정책 중 주목할 만한 일은 상평처으로 하여금 명목화폐이자 동전인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한 것이다. 이때 발행된 상평통보는 숙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유일한 법화(法貨)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상평통보를 주조했던 상평청은 원래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비축 곡물이나 자금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이는 고려 성종 대에 설치되어 세조 대까지 이어졌던 상평창(常平倉)을 계승한 것이다. 세조는 상평창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운영 법규까지 제정하였으나 국가 재정의 궁핍으로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선조 대에 와서 상평청으로 격상시켜 각 지방의 구제곡물을 관장토록 하며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인조 대에 와서 대동법을 시행하던 경기청과 선혜청에 부속되기에 이른다.
이때 비변사에서 운영하던 진휼청과 병합되어 평소에는 상평청이라는 이름으로 곡물을 관리하고, 흉년이 들면 진휼청으로 개칭하여 구제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1633년에 마침내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된다.
상평통보 이전에도 조선은 이미 세종 대에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유통시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동전의 주조로 당시 법화로 규정해 놓은 저화의 가치가 폭락하는 현상이 일어나 저화의 퇴진을 가져왔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던 원료와 주조에 투입할 인력 부족으로 충분한 양의 동전이 생산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조선통보 역시 법화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인조는 법화가 실종된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심하다가 결국 신망을 잃은 조선통보를 거둬들이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보급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주조된 상평통보 역시 미처 신망을 얻기도 전에 크나큰 난관에 부딪힌다.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던 청나라가 1636년에 대대적인 침략을 자행함에 따라 화폐가 무용지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도 전란의 여파는 계속되어 시장에는 한동안 물품 화폐만이 유일한 교환수단으로 남는다.
하지만 효종, 현종 대를 거치면서 점차 경제적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숙종 대에 이르러 조선 조정은 다시금 화폐정책을 실시하여 법화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상평통보의 부활로 이어진다.
1678년(숙종 4년) 조선 조정은 상평통보를 유일한 법화로 채택하여 유통, 보급토록 공포하게 된다. 주조작업은 호조, 상평청. 진휼청, 정초청, 사복시, 어영청 및 훈련도감 등 7개 관청 및 군영에서 맡는다.
이후 상평통보는 1894년 고종에 의해 정식으로 주조 중단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조선의 공식적인 법화로 활용되는 것이다.
인조의 가족사
인조는 인렬황후 한씨를 비롯한 5명의 부인에게서 7명의 자녀를 얻었다. 인렬왕후 한씨가 소현세자,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등 4남을 낳았으며, 계비 장렬왕후 조씨는 후사가 없었고, 귀인 조씨가 승선군, 낙선군, 효명옹주 등 2남 1녀를 낳았다. 이들 중 두 왕후와 소현, 인평대군 등의 삶을 간단하게살펴보기로 하고 봉림대군은「효종실록」에서 다루기로 한다.
인렬왕후 한씨(1594~1635년)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딸로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 능양군과 결혼하여 청성현부인에 봉해지고 1623년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슬하에 소현, 봉림, 인평, 용성 등 네 아들을 낳고 1635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은 장릉으로 인조와 함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으나 영도 때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로 옮겨졌다.
장렬왕후 조씨(1624~1688년)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1635년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뒤인 1638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대비가 되고 1659년 효종이 죽자 다시 대왕대비가 되었다. 이때 그녀가 입어야 할 상복이 정치 문제화되어 서인이 만 1년만 착복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하여 그 절차대로 복상을 치렀다. 하지만 이듬해 남인 허목 등이 대왕대비의 복상은 3년을 착용해야 한다는 3년설을 제기하여 서인을 공격했다. 이에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고 둘째 아들이므로 복상은 1년만 착용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다시 주장했고, 남인 윤후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맏아들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하여 3년설을 주장했다.
결국 이 복상 문제는 양당 간의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고,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기년설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입지가 약해지고 서인의 입김이 강해졌다. 하지만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다시 이 복상 문제가 대두되어 남인은 기년설을, 서인은 대공설(9개월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때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1688년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능은 휘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소현세자(1612~1645년)
인조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왕, 어머니는 인렬왕후 한씨이다.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에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이후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그와 해결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이 같은 외교 솜씨를 발휘하는 한편으로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을 접하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소현세자의 이 같은 활동을 친청 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비난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청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소현세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가 조선 국왕으로서 부적격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조소용과 세자빈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소현세자가 9년 동안의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귀국하였을 때 인조는 그를 무척 박대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철저한 친청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였다.
입국 후 두 달 뒤인 4월 23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고, 와병한 지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그의 온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할자들은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34세의 혈기 왕성한 나이로 죽은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 가 두 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인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현세자는 죽은 후 경기도 고양시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이 무덤을 소현묘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인평대군(1622~1658년)
인조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요, 자는 용함, 호는 송계이다. 1630년 인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637년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심양을 다녀왔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했고 제자백가의 사상에도 정통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간 중구인 화가 맹영광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산수도」,「노승하관도」,「고백도」등이 있다. 이러한 미술품 이외에『송계집』,『연행록』,『산행록』등의 저서가 남아 있다. 사후에는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이다.
인조실록은?
『인조실록』은 초 50권 50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23년 3월부터 1649년 5월까지 인조 재위 26년 2개월 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50년 8월 1일에 시작되어 1653년 6월에 끝마쳤다.
편찬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총재관 이경여, 김육을 비롯하여 도청당상 3명, 도청낭청 25명, 일방당상 5명 일방낭청 7명, 이방당상 3명, 이방낭청 6명 그외 실무진 15명 등 도합 66명이었다.
인조시대의 세계 약사
당시 중국에서는 명이 서서히 몰락하고 청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서구와의 교역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일본 문화와 서구 문화의 접목이 시도되고 있는 시기였다. 또한 인도에서는 무굴제국의 힘이 약화되고 영국의 침탈이 가속화되었다.
유럽은 30년전쟁 및 종교전쟁 시대를 끝냈으며,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증대시키고 아메리카에 도시를 건설하고 뉴질랜드 등 남태평양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또 이 시기에는 데카르트의『방법서설』, 홉스의『시민론』, 밀턴의『언론의 자유』, 갈릴레이의『천문대화』, 뒤마 피스의『춘희』등의 저작들이 나왔고, 파스칼은 유체의 압력에 대한‘파스칼의 법칙’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