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남원(南原) 입향사(入鄕史)
조선 선조 때 이조판서인 옥계선생 노진(盧禛)은 슬하에 7형제를 두었다.
진의 본향은 경남 함양군 개평으로 선대로부터 여러 대를 살아온 곳이다.
그의 처가는 순흥안씨로 남원에 살고 있었으며
홍문관박사로 기묘명현인 사제당 처순은 장인이 된다.
진은 한 때 사제당 문하에서 잠시 수학한 일이 있어 연맥이 통하는 곳이다.
진의 여섯째 아들인 처사공 사첨(士詹)은 선조 때 대사헌을 지낸 희재 박광옥의 사위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1581년(선조14년)에 향년 19세로 타계하여 처가가 살고 있는 광주 삼양동에 장사하게 되었다.
처사공의 미망인 박씨부인은 본관니 음성으로 명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재조가 남달리 뛰어나 일찍이 학문을 배우고
가사범절과 부덕을 갖추었음은 물론 이인으로 이름이 났다.
새소리, 제비소리와 쥐소리를 듣고 무슨소리인지를 해득하였으며,
또한 풍수지리에도 밝았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박씨부인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제비 한마리를 잡아
도포 속에 넣어 놓고 지금 제비가 무어라 지저귀고 잇느냐 하고 물었다.
이에 박씨부인은 우불용 피불용 사지사지(털도 쓸모가 없고 가죽도 쓸모가 없으니 놓아 주시오)라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모두가 박씨부인의 기이함에 감탄하였다.
부인은 청상으로 슬하에 아들이 없어 둘째 시숙 익산공 사회(士誨)의 둘째 아들
철(?)을 입계하여 선조때 사간을 지낸 미능재 최상중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오랜 역사가 흐르는 동안 여러번의 병화와 난세로 많은 문적들이 소실되어
문헌상으로 고증할 수가 없고 다만 선대 때부터 구전에 따르면
박씨부인은 광주에서 400여리가 되는 함양 개평의 시댁을 자주 왕래하면서
자손발복지지를 늘 찾고 있었다.
한 때 남원의 주촌방에서 3개월 동안을 머물면서 주촌방 뒤에
병풍처럼 둘러 있는 월봉산을 이모저모로 관찰하였다.
월봉산은 지리산의 한가락 줄기로 그 밑에는 용담과 원천의 두 마을이 있는데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용담은 부는 있어도 귀와 벼슬이 없고
원천은 부는 없으나 귀와 벼슬이 있음에 이곳 원천에 새 터를 잡아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자손이 번창하고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이로 인하여 함양 개평에 살고 있던 시댁 식구들이 남원으로 이사를 하고 종가와 옥계사당도 이곳 호경리로 옮기게 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이 된다.
또한 전라, 충청, 경상 3도의 유림들이 남원 고룡에 서원을 세워
지난날 옥계선생의 높은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처사공 후손 일부는 순창의 아천에 새터를 잡아 살게 되었고
일곱째로 막내인 사과공 사심(士諗)의 후손들은 임실 옥전을 거쳐
뒷내에 새터를 잡아 30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세거하고 있다.
이곳 노씨들의 원향은 황해도 풍천이나
주로 옥계선생 후손들만이 원천, 아천 후천 등 내천(川)자가 붙은 곳을 찾아 살며
모두 번창하는 것이 기이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1873년(고종10년)에 익산공 사회 묘소는 함양 주곡에서 처사공 사첨 묘소는 광주에서
고룔 옥계선생의 옛 사당터에 이장하여 사과공 사심의 묘소와 함께 3형제의 분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