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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
‘한국의 슈바이처’, ‘사랑의 의사’, ‘무소유의 삶’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장기려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평전 《장기려, 그 사람》이 출간되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으로 활동했고, 우리 사회의 개혁적 지식인들(홍세화, 진중권, 김규항, 고종석, 오한숙희, 박홍규 등)을 꾸준히 인터뷰해 온 저자 지강유철은 장기려에 대한 이전의 연구서나 책들이 간과하거나 에둘러 갔던 문제들―고신교단이 선생을 조기 은퇴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의사들 사이의 폭력사태, 고신대 의대생들의 대규모 유급과 교단에 저항했던 교수들의 재임용 탈락을 불러왔던 학내사태, 제도권 교회를 떠나 말년에 몸을 맡겼던 ‘종들의 모임’과 다시 받은 세례, 함석헌과 장기려의 관계, 선생의 신앙과 사상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후지이 다케시․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영향, 평양 산정현교회의 분열과 기독교의 변절 등―까지 포용력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 그를 다룬 문헌에만 의존하지 않고 장기려의 일기, 노트, 잡지 등에 기고했던 글들, 무엇보다 그를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인물과의 인터뷰를 통해 ‘가공된 장기려’가 아니라 ‘참 장기려’를 그려내고 있다.
--성산 장기려(聖山 張起呂, 1911-1995)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아버지 장운섭, 어머니 최윤경의 차남으로 출생.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평양 연합기독병원(기홀병원) 원장,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 교수,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부산아동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에 성공했으며, 부산외과학회를 창립하여 의학 연구에 공을 남겼다.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 병원, 간질 환자들의 모임 ‘장미회’ 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협동조합 ‘청십자의료보험’ 창설 등은 그가 평생 동안 무엇에 소망을 두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증언해 준다.
아내 김봉숙과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으나 6․25전쟁 때 둘째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게 된 뒤, 북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을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 국민훈장 무궁화장,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등을 수상했다.
-저자 소개- 지강유철
1958년 강원도 화천 출생. 총신대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20여 년 동안 여러 교회에서 전도사와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
교단장 금권선거에 대한 양심선언을 계기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및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했으며, 지금은 월간 <인물과 사상> 객원 인터뷰어와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요셉의 회상》(홍성사), 《안티 혹은 마이너》(우물이있는집)가 있다. www.yuche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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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머리말
감사의 말
프롤로그
1부 어린 시절과 거듭남
한국의 갈릴리 ‘평안도’
성경 이야기를 듣고 자란 유년 시절
장기려의 선친들
장기려를 있게 한 사람, 이경심
민족의식을 느꼈던 의성소학교 시절
송도고보 시절의 회심
장기려와 연애
2부 의사로서의 준비기
의사되기를 결심할 당시의 조선 의료계
공부밖에 모르던 경성의전 시절
두 가지 중요한 선택
눈동자요 손과 발이었던 여자, 김봉숙
첫 수술을 경험한 전문의 수련과정
이광수 소설 속 주인공과 장기려
한평생 기억해 온, 스승 백인제 박사
장기려와 노래
장기려와 스포츠
3부 평양 기홀병원 시대
이해할 수 없는 침묵
‘대전’을 등지다
기홀병원에 천거해 준 이용설 박사
외과 과장이 되다
의사들의 텃세
‘성서조선 사건’에 연루되다
더럽혀진 교회를 등지고
사면초가가 준 값진 선물
삶과 신앙의 스승들 1-야나이하라 다다오, 함석헌, 후지이 다케시
4부 공산치하의 평양생활
충돌하는 기독교와 공산주의
“건국하다 죽어야지”
북한 땅의 보이지 않는 최고 통치자
장기려와 평양 산정현교회
6.25전쟁과 장기려
삶과 신앙의 스승들 2-오정모, 주기철, 손양원
5부 복음병원 시대
“나의 세계는 나의 사랑하는 곳에 있다”
부산에서의 첫 생활, 제3육군병원
용공혐의로 체포되다
의사로서 행복했던 복음의원 시절
능력껏 일하고 필요만큼만 가져가는 무료 병원
복음의원의 정체성 진통
의학도로 알찼던 부산의대 교수 시절
행려병자에게 펼친 사랑의 의술
첫 세계 일주
성서연구를 위한 소그룹 ‘부산모임’
장기려의 글쓰기
6부 청십자의료보험 시대
“사랑의 동기가 아니거든” 언행을 삼가라
공동체에 대한 꿈
간질 환자들의 평생 친구
복음간호전문대학의 설립
청십자의료보험의 태동
‘청십자’ 창립 주역, 김서민과 채규철
청십자의료보험의 도약
7부 평화운동 시대
두 번째 소명
복음병원의 수난
‘청십자’의 열매들
원칙을 고수하는 용기
장기려의 눈에 비친 미국
우정으로 극복한 내면의 위기
갑자기 날아든 북한 가족 소식
분단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8부 진리 안에서 누린 자유
다시 받은 세례
“여기만 진리입니까?”
‘종들의 모임’의 기본 정신
‘종들의 모임’을 선택한 이유
평생 이어진 교회 개혁의 열망
9부 말년의 나날들
장기려, 그 사람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영원한 안식
에필로그
성산 장기려 선생 주요 연보
찾아보기
내용발췌
나의 세계는 나의 사랑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왕국이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라. 우리는 자진해서 사랑하자. 그러면 사랑을 받는 자보다 더 나은 환희로 충만하게 되리라. (254쪽)
만일 누가 나에게 삶의 목적을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기독교 이상주의로 살고 싶다고 대답하리라. (153쪽)
하늘을 찌를 듯하다는 고딕의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하는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 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474쪽)
십자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세워 두거나 달아 놓거나 달고 다닐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유형적 십자가를 표방하는 것은 자기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답답한 표정이다. 희생적 사랑은 세계평화를 이룩하고야 말 것이다. 너희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 (나는 이 말씀이 세계 평화의 열쇠임을 체험하며 강조한다.) (382~383쪽)
예수님의 부활은 나에게 있어서 최대의 영감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나의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빛나는 생각이 넘치게 됩니다. 이 생각은 부활절에 자연의 찬미에 합하여 최고조에 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너무도 고상하고도 아름다운 경험이어서 입과 붓으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한 떨기의 풀이나 꽃 또는 한 곡조의 음악에 무한의 기쁨을 느끼며 아무에게나 그 실감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를 경험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경험의 이상적인 것이 곧 부활에서 내가 받은 영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부활의 영감도 또한 불완전한 육체에 있어서 이것을 표현하는 일은 성질상 불가능한 일에 속할 것입니다. 부활의 적당한 찬미는 부활 후에야 나오게 될 것입니다. (151쪽)
평화에 관한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를 청결케 하는 일이다. 믿음 생활을 다시 살펴,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일이다. 참 하나님을 두렵게 섬기며,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이다. 예수님의 복음의 뜻을 잘 살펴 헌신하는 일이다. 그것 없이는 개인에게도 국민에게도 세계에도 참 평화는 없다. (386쪽)
경건한 인격자가 되라. 하나님으로부터 진실하다고 인정받는 자, 자기 양심에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자만할 수 있는 자가 되자. (4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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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교보문고
종교인을 뛰어넘는 '성자' | colasarang | 2007-03-12 |
-장기려라는 분을 막연히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수식어가 붙은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책에서도 그저 훌륭한 성자로서의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또 한명의 위인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이책을 읽어 나가면서 '위인'이나 '훌륭한분'으로만 여기고
대충 생각했던 한사람이 이 세대의 그 누구도 할수 없었던
예수의 삶을 몸으로 실천했다는 사실에 놀라다 못해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가난한 환자를 위해 자신의 피를 뽑고
월급으로 치료비를 대신내주고
돈이 없어 퇴원을 못한다고 사정하는 환자에게
병원 뒷문을 열어 도주시켜준 이..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 올 걱정없게 하기 위해.. 오직 그 하나의 이유로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을 시작하신분
또 한가지..
비공식적으로 북에 두고온 가족을 만날수 있었는데도
수많은 이산가족들은 만나지도 못하는데 혼자 특혜로 상봉할수 없다고
단오히 거절한 분..
해외의 의학수준을 체험하기 위해 간 여행에서 경비로 받은
돈은 한푼도 쓰지않고 매일 가장 싼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받은 경비는 전부 돌려주신분..
이런 성자의 모습뿐 아니라
의사로서의 능력도 그당시 최고였던거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간절제수술과 각종 어려운 수술을 집도하셨고
6.25전 북측 최고의 의사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부분을 보고
진실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겐 하나님이 큰 영광을 거저 주신다는 걸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해방후 기독교를 심하게 탄압했던 공산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북측 관료들앞에서 '주일이면 예배드려야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셨다는 합니다.
과연 나와 이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 및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정의와 자신의 신념을 지켜낼수 있었을까..
공산치하에서 가장 악조건인 기독교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당시 최고의 의사대우를 받았다는건 한 종교인의 종교적 승리로만 볼수 없는거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자'소리를 듣는 분이
학비가 가장 적게 들기때문에 외과를 선택하였고,
그저 그렇게 생겨서 썩 마음에 내키지않던 분(예쁘지않아서)과
남이 등떠밀어서 얼렁뚱땅 결혼했다는 얘기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이 70이 다 되신분이 당뇨때문에 음식을 절제하는게 힘들다는 얘기와
초콜렛 먹는걸 핀잔주는 아들에게 섭섭해 하시는 모습을보고
'성자'또한 우리같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이 사람과 나는 이렇게 삶이 다를까..
하얀거탑 드라마가 이슈가 되면서
이기적이고 권력을 위해 선보다 악을 택하는게
더 인간적이고 똑똑하다는 추앙을 받는 이 어처구니 없는 세상에
이렇게 바보같고 멍청하기 까지한 분이 계셨다니...
그의 존재가 고맙고 나의 존재가 초라하다못해 부끄러울 뿐입니다.
*갓피플
[이태환] '이 시대 또 하나의 신앙 모델' 장기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본서가 앞으로 청년들의 필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으나 많은 물질과 권력의 유혹에 초연한 그분의 신앙심은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적절한 모델이 되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가치 판단기준을 이 땅에 두는 자들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아니 우리가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기 보다 잘못으로 인한 혹은 탐욕과 성숙지 못한 모습으로 세상과 교회 안으로부터 난타당하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장기려. 그분의 삶은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순례자들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처소는 이 곳이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곳이 좋사오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신자들이 오히려 복음의 걸림돌이 됩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의술과 물질로 혹은 진심어린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셨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거할 곳은 심판받아
마땅한 세속의 세상이 아닌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하신 천상의 세계임을 분명히 인식하며 사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장기려, 그 사람"은 세속에 물든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경종"의 소리로 들려올 것입니다.
장기려! 그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들을 거룩케 하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이 많은 분들에게 읽혀졌으면 합니다. 이 시대의 미래를 이끌어 나아갈 저와 같은 청년들의 필독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정석] 바보같은 사람....나도 바보가 되고 싶다...
-책을 고를 때 고민하지 않고 집어드는 책들이 있다.
그것은 신앙전기 책이다.
물론 요즈음에는 현대판 전기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참 신앙의 전기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장기려 박사는 신앙을 떠나서라도 모든 사람이
알고 기억하고 있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중 한사람이다.
아니.. 어쩌면 숨겨진 사람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숨겨지길 원했던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쨋든 그는 우리가 인정하는 한국의 슈바이쳐이다.
조건으로 보아도, 상황으로 보아도 자신의 길만 찾아 갈수 있음에도
묵묵히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한길을 달려간 사람....
그는 어쩌만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아내를 끝까지 잊지 않는 바보...
돈이 없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 바보...
세상의 이득을 취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예수님을 닮아가길 원했던 바보...
그러나 오늘 이 장기려, 그 사람이라는 책을 통해
주님께서 사랑하신 바보를 만납니다.
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장기려 박사님의 삶이
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생각해 본다.
아직은 읽고 있는 중이지만
나도 장기려 박사와 같이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감동하시는 바보가 되었으면...하고 바래봅니다.
그 어떤 책들보다 이 책을 먼저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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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장기려에게서는 영원을 느낍니다. -기용숙(전 서울대 교수)
그는 자유한 삶을 사셨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속에 있어서 그를 지배하고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김서민(전 청십자사회복지회 이사)
그가 종사한 병원이나 교회나 대학의 대형화, 자본화, 권력화를 철저히 경계하고, 일제 때의 신사참배는 물론 해방 후 미국 자본주의에 굴복한 점을 철저히 비판한 그의 목소리는 지금에야말로 더욱 절실하게 들려온다. -박홍규(영남대 교수)
신앙생활 자체가 현실이고 삶이었던 분입니다. -김관선(서울 산정현교회 담임목사)
“금년엔 날 좀 닮아서 살아 보아” 하시기에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 되게요” 하였더니 크게 웃으시면서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니?” 하셨습니다. 알쏭달쏭한 선생의 이 한 말씀이 늘 귓전에 쟁쟁합니다. -손동길(부산 삼성병원 이사)
그분의 약점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 본 바도 없고, 내 스스로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 같은 분을 ‘성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충분히 장기려 박사도 성자라 부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손봉호(전 서울대 교수)
장기려 선생은 나의 교육 철학의 모델입니다. 선생님은 항상 맨손으로 시작하지만, 얼마 안 가 조직적․창의적 노력과 결부되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안병영(전 교육부총리)
그의 성경연구는 단순한 관념적인 사유에 의해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사색과 실천을 통해 육화(肉化)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인정받기를 원하셨던 분입니다.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선생은 다른 의학자들이나 병리학자들과는 색깔이 다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반드시 원리가 있고 그래서 그 원리를 찾으면 치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건오(한동대 선린병원 원장)
한국 교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를 지적해 주고 그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상규(고신대 신대원 교수)
마음 놓고 내 친구라고 감히 부를 수 있는 지극히 적은 수의 친구 중 한 분입니다. -함석헌(민중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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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정보
중국 당나라 때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몸[體貌]과 말씨[言辯], 글씨[筆跡], 판단[文理]을 인물 평가 요소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미국의 주식투자가 워런 버핏은 ‘정직한가’, ‘지적인가’, ‘에너지가 넘치는가’를 사람 평가의 기준으로 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과거의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 걸까? 도덕적인 깨끗함일까, 그가 남긴 업적일까?
성자(聖子) 장기려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할 때 별 문제없이 일생을 살아간 사람들이 꽤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평범한 소시민일 경우가 많다. 반면 업적에 우선을 두어 평가하면, 악덕 경영자가 영웅이 될 수 있고 정경유착에 따른 기회주의자가 큰 산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간혹 이런 두 기준에서 조화를 이룬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럴 때 우리는 그를 ‘성인’(聖人) 혹은 ‘성자’(聖子)라고 일컫는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인도 사회를 이끌었던 간디가 그렇고, 빈민 봉사에 헌신한 마터 테레사가 그렇다. 동덕여대 총장을 지낸 손봉호 교수는 장기려 선생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약점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 본 바도 없고, 나 스스로 발견하지도 못했다. 우리가 사도 바울 같은 분을 ‘성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충분히 장기려 박사도 성자라 부를 수 있겠다”고 증언했다.
인간(人間) 장기려
장기려(張起呂, 1911-1995).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 성공, 북한이 수여한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자(1948),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모태가 된 청십자의료보험 설립(1968).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 교수,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그는 일일이 이력을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은 그를 이런 업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오직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 자기를 위해서는 죽어서 묻힐 땅 한 평도 마련하지 않고 무소유로 살다간 사람, 돈이 없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환자를 위해 피를 뽑아 주고 입원비를 지불할 수 없는 환자가 밤에 몰래 도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인간 장기려’로 기억한다.
‘참’ 장기려를 찾기 위한 노력
우리 사회의 안티 혹은 마이너로 남아 있는 개혁적 지식인들(홍세화, 진중권, 김규항, 고종석, 오한숙희, 박홍규 등)을 꾸준히 인터뷰해 온 저자 지강유철은 장기려 평전 집필을 제안받고, 장기려가 “우리 시대 성인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지고 깨물어 그 맛을 느끼고” 싶었다. 이런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인지 《장기려, 그 사람》은 다른 전기나 평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웅 만들기가 없다. 저자는 장기려 선생의 일기,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기고했던 글들, 그리고 장기려 선생에 관한 문헌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장기려를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골고루 만나 허상이 아닌 ‘진짜 장기려’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장기려 곁에서 그를 도왔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들까지 취재하여 서술했다.
(인터뷰에 응해 주신 분들: 손봉호 동덕여대 총장,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김용준 학술협의회 이사장, 서재관 전 고신대의대 교수, 최중묵 서면 복음외과 원장, 이건오 한동대 선린병원장, 김서민 전 청십자사회복지회 이사, 박영훈 전 고신의료원장, 양덕호 전 청십자병원 원장, 이충한 고신대 복음병원장, 강현진 성형외과 원장, 태영숙 전 고신대 간호대학 학장, 윤여형 전 청십자병원 임상병리과 과장, 정기상 전 고신의료원 행정원장, 박광선 부산 산정현교회 원로목사, 김관선 서초동 산정현교회 목사, 권상석 부산 산정현교회 담임목사)
저자는 이 평전을 쓰면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가장 먼저는 시대와 역사 속에서 장기려를 보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삶과 사상은 결국 그 시대 가운데서 형성된 것이므로, 저자는 생애와 사상을 나누지 않고 행간 행간에 녹여 서술했다.
둘째, 아무런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고 장기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전의 연구나 전기에는 빠져 있거나 에둘러 갔던 문제들, 이를 테면 고신교단이 복음병원을 장악하기 위해 선생을 조기 은퇴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의사들 사이의 폭력사태, 고신대 의대생들의 대규모 유급과 교단에 저항했던 교수들의 재임용 탈락을 불러왔던 학내사태, 그리고 제도권 교회를 떠나 말년에 몸을 맡겼던 ‘종들의 모임’과 다시 받은 세례, 함석헌과 장기려의 관계, 선생의 신앙과 사상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후지이 다케시․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영향, 평양 산정현교회의 분열과 기독교의 변절 등도 깊이 있게 다루었다.
셋째, 최대한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게 쓰려는 노력이 자칫 허구나 사실에 대한 추측으로 비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인용의 출처를 꼼꼼히 밝히는 논문식 글쓰기를 빌려 왔다. 이는 선생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평전으로서 다음 연구자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다시 찾은 장기려
저자 지강유철은 이번 책을 통해 장기려를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가장 먼저 “이면과 표면의 경계를 허문 사람”이었음을 강조한다. 장기려는 감출 것 없는 삶을 살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으며, 거짓을 저주받을 짓이라고 여기고 정직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의료 사고가 일어날 때는 직접 경찰서에 찾아가 본인의 과오를 인정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장기려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의 집에 구걸 온 거지와 겸상을 하고, 입고 나갔던 코트를 거지에게 벗어 주며, 권력이나 돈이나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생명 있는 ‘존재’로서 사람을 대했다.
장기려는 “아마추어리즘을 고집했던 의학도”였다. 평생 공부밖에 몰랐던 사람, 없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더라도 “실력 있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가 되려고 공부한 것은 아니”라면서 전문의 자격증을 거부하고 외과학회 명예회원을 고집했던 사람이다.
장기려는 “교회 개혁을 열망했던” 사람이다. 70여 년을 교회 안에 머물렀지만, 1974년에 남긴 글에서 그는 “기독교는 새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제도권 교회에서 집사로 장로로 봉사하다가, 77세에 교회 개혁을 실천하는 작은 무리, ‘종들의 모임’을 선택했다. 공식 이름도, 총회도, 직영 신학교도 없이 160여 개국에 산재해 있는 이 모임에서 그는 말년에 영적 평안을 누렸다.
장기려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장로교 고신 측에 속해 있으면서도 한국 교회가 거의 이단시하던 무교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부산모임’을 32년이나 이끌었고, 기성교회에서는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함석헌과도 교제를 계속했다. 선생은 사랑이 없다면 이념은 쓰레기라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러기에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다.
장기려에 대한 오해와 진실
○장기려는 이광수 소설 《사랑》 속 주인공이다?
인터넷에 들어가 ‘장기려’를 쳤을 때 춘원의 소설 속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소설 속 주인공과 선생이 많이 닮았을 뿐 아니라 당시의 정황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말한다.
“나를 두고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이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좀 어긋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춘원이 입원하고 있었을 때 ……나는 개를 대상으로 위와 알레르기에 대한 동물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사랑》 속에 안빈이 개, 토끼, 고양이를 대상으로 해서 공포의 감정 실험으로 ‘안피노톡신 제1호’를 발견했다는 구절이 있다든가, 안빈의 인간상에서 나를 연상케 하는 점이 많다는 등의 이유로 동료들 중에는 내가 안빈의 모델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작품 인물들도 저자가 창조해 낸 인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98~101쪽)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선생의 아내 김봉숙은 희생과 절대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며, 결혼할 때 선생과 한 모든 약속을 지키며 살았다. 선생은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하고, 1950년 12월 월남한 이후로 북에 두고온 아내를 기리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선생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던 간호사가 시도 때도 없이 선생 사택으로 쳐들어 올 때도, 그동안 조국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할 만큼 일했으니 이제 미국으로 건너와 여생을 편하게 지내자는 돈 많은 여성의 청혼도 끝끝내 이겨냈다. (92쪽)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
김일성 주석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는 소문은 선생이 북에 있을 때부터 있었다. 선생은 1988년에 쓴 글에서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김일성을 세 번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다. 맨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보건부 부국장 이성숙과 소련 고문관을 따라 김일성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두 번째 만남은 1948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를 지낸 김용범의 수술 경과를 알아보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선생을 부른 것. 세 번째는 김윤범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이날은 서로 대화는 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김일성은 머리 뒤의 혹을 떼어 내고 싶었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수술을 못 맡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기려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텐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194~196쪽)
○전두환 대통령의 식사 제의를 거절했다?
신군부가 광주를 피로 진압하고 철권 정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 때문인지 전두환 대통령이 부산에 내려왔고, 저녁식사 자리에 선생을 초대했다. 하지만 선생은 주례를 서 주기로 한 예비 신랑․신부와의 저녁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초대를 거절했다. 예비 신랑이 혹 선생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을 하자, 선생은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그렇지. 당일 전화해서 오라가라 하는 경우가 어딨어”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415~417쪽)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날 수 있는 방북기회를 놓쳤다?
정부 당국이 북한에 있는 아내를 만나게 해 줄 테니 방북 신청을 하라고 제안하자, 선생은 “이산가족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이 얼마나 가고 싶겠소. 그 사람들도 다 보내 준다면 나도 갈 생각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절하겠소” “나는 매일같이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는 사람이오. 육신으로 며칠 만나고 오는 것이 내 나이에 무슨 득이 있겠소.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곳에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데리고 남한에서 살 수 있다면 평양에 가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사양하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417~419쪽)
왜 지금 장기려인가?
의료법 개정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집단 휴진, 공약만 있고 실천은 없는 정치, 예언자적 목소리는 없고 오직 ‘축복’만이 넘치는 교회, 대중 사회 속에서 고립감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어 가는 젊은이들, 비전 없이 전공을 택하고 젊은 날 동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만 하는 세대들, 맘몬에 빠져서 돈이라면 뭐든 오케이인 사회, 가족을 지키려는 노력 없이 성격 차이라는 이유로 갈라서는 부부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 이리저리 방황하는 지금 이 시대에 장기려 선생이 살아 계시다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장기려의 삶은 정신적 지주를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사표가 되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