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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陽洪氏 麻川公 宗會 (남양홍씨 마천공 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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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陽洪氏 宗中 게시판 스크랩 南陽洪氏(남양홍씨) 최초족보(族譜)를 처음 만드신 마천공(麻川公)
수동 홍성해 추천 0 조회 102 11.10.27 15: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http://blog.daum.net/perseush 순철(淳喆)

 

南陽洪氏(남양홍씨) 최초족보(族譜)를 처음 만드신 마천공(麻川公)

 

南陽洪氏(남양홍씨) 족보(族譜) 갑술(甲戌)보(譜)를 처음 만드신 마천공(麻川公) 님은

일동(逸童)으로 ?~1464년 (세조10)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다

남양홍씨16세 손으로 자(字)는 일휴(日休) 이고 호(號)는 마천(麻川) 이다

 

당성군(唐城君) 휘(諱)징(徵)의 손자요 아버지는 경성절제사(鏡城節制使) 휘(諱) 상직(?)이시고 어머니는 문씨(文氏)이시다

1442년 세종(世宗24)한학훈도(漢學訓導)로 재직중 친시(親試)문과(文科) 에 급제 하여

돈령(敦寧) 부부승(府副丞)이 되었고 그뒤 문종(文宗)초 에 우정언(右正言)지내고

1453년 선공감(繕工監) 판관(判官)을 거쳐 이듬해 개천(价川)군사(郡史)로 나가게 데었는데

(公)의 어머니 문씨께서 76세 노령(老齡)이라라 곧바로 좌헌납(左獻納)이 되었다.

1455년 세조(世祖1) 주부(主簿)로 재직중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等) 에 책봉록 되었고

1457년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로서 사은사압물관(謝恩史 押物官)되어 사행중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及第) 하였다

 

1460년 첨지(僉知)중추원사(中樞院使) 가 되고 진현관 대제학(進賢官 大提學)에 승진하였다.

동년9월 에는 함길도(咸吉道)선위사(宣慰使)로 함길도(咸吉道) 도체찰사(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 에게 어찰(御札)을 모시고 갔다 왔으며 1461년 호조(戶曹)참판(參判) 으로 하성절(賀聖節)및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었고

 1462년 는 인순(仁順)부윤(府尹)으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듬해에는 행사(行事)호군(護軍) 되고1464년 3월13일 선위사(宣慰使)로 홍주(洪州)에 갔다가  급서(急逝)하였다

(公)은 재능과 인품이 뛰었났으며 위용이 범상치 않은 큰 재목(材木)으로 문장에 능하고 술을 즐겨 하였다 한다

그리고 공(公)은 담대 하고 대식가(大食家)였으으며 성품이 호방하고 소탈했으며, 시와 풀피리에 능해 명성이 있었다.
엄청난 대식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진관사로 놀러갔을 때 떡 한 그릇, 국수 세 그릇, 밥 세 그릇, 두부,
청포 아홉 그릇을 먹고 내려오다가 산 아래서 다시 삶은 닭 두 마리, 생선국 세 그릇, 어회 한 그릇, 그
리고 막걸리 40여 잔을 비워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 기록되어있다.

저서(著書)로는 마천집(麻川集) 있다

(公)은 최초의 남양홍씨 족보인 갑술(甲戌)보(譜)를 편찬하였는데 불행이도  오늘날 그족보는 전해지지 않고

서문(序文)만 전하고 있다

 

배위(配位)는 정부(貞婦)인(人) 남평문씨(南平文氏) 로 사정(司正) 문유질(文由質) 의 따님이고  효문(孝文) 효성(孝誠)

두 아드님과 감정(監正) 순천(順天) 김약균(金若勻) 에게 출가한 따님이 있고

또 따님 한분은 성종(成宗)의 후궁(後宮)으로서 완원군(完)原君) 등(等)7명의 왕자(王子)와 3명이 옹주(翁主)를 나으셨는데

 이분이 바로 숙의(淑儀)홍씨(洪氏)이다

 

 *묘(墓)는 과천시(果川市) 에 있다가 춘천시(春川市) 서면(西面) 방동1리 산112번지  당산(唐山)묘역(墓域) 으로 이전하였다

(公)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실려있고 저서(著書)로는 마천집(麻川集) 있다

(남양홍씨 남양군파 세보중에서)

 

*참조

 

마천공(麻川公) 일동(逸童)에 관한 자료

 

홍일동 [洪逸童]  


1442년(세종 24) 한학훈도(漢學訓導)로 재직중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돈녕부부승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강예관(講隷官)으로서 여러 해에 걸쳐 한어(漢語) 강습에 전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장(杖) 80의 형을 치르고 파직되었다.
그 뒤 세종 말에서부터 문종 초에 우정언을 지냈다.
1453년(단종 1) 선공감판관, 이듬 해 개천군사(价川郡事)를 지낸 다음, 1454년 좌헌납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주부로 재직중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57년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로서 사은사압물관(謝恩使押物官)이 된 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사행중에 무단히 귀환해 중시에 응시했고, 응시한 뒤에는 아뢰지 않고 귀임했으며,
급제한 뒤에는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그대로 명나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돌아갔다는
이유로 지평 김기(金琦)의 탄핵을 받았으나 용서되었다.
1459년 판승문원사 재직중에 칙서의 내용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461년 호조참판으로서 하성절 및 천추사(賀聖節及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또한 이듬 해에도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현황 : 홍일동의 구비는 묘소 입구에, 신비는 묘소에 세워져 있다. 그의 묘는 원래 경기도 시흥군 남 면
금정리에 있었는데 그 지역이 개발됨에 따라 1990년에 서면 방동 1리 唐山으로 이장하여 구비는 묘 소 입구에 세워
놓았고, 비석과 석물 일체를 묘소 앞에 마련하였다. 묘비의 비문은 간단한 그의 내력과 그의 기사가 실려 있는
문헌의 글을 옮겨 적는 등 보기 드문 형식을 취해 후손 洪淳明이 정리하여 새겨 놓았다.
묘역 입구 부분 좌측에 제실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참고문헌≫ 端宗實錄
≪참고문헌≫ 世祖實錄

 

 

 

 

 

 

 


 

  마천공(麻川公) 홍일동(洪逸童)의 서체  

 

 

 

남양홍씨16세 손으로

자(字)는 일휴(日休) 이고 호(號)는 마천(麻川)휘(諱)일동(逸童)으로

官止集賢殿提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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