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수도 꼭지 [생生과 사死2]
한 선승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모든 제자들이 그 자리에 모여 있었다.
선승의 수제자도 있었다. 그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스승인 선승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수제자는 사원 계단에 앉아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의 눈물이 계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자리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 울음을 터뜨리다니?
사람들은 높은 깨달음에 이른 수제자가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신이 울고 있다니요. 당신은 우리에게 긍극적인 내면의 존재는 죽지 않는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당신이 울고 있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신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스승의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게 아닙니까?"
사람들의 말을 들은 수제자가 눈을 뜨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를 방해하지 말아다오. 내가 흐느껴 울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라. 나는 지금 스승 때문에 울고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존재 때문에 울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그의 육체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다. 그의 육체 역시 존재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이제 그의 육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테니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때 한 사람이 수제자를 설득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는 수제자의 눈물이 자칫 그의 명성에 흠을 낼 것이라면서 설득하려 들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 나는 무한한 지복감속에서 살고 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도 무한히 깨어 있다. 나는 지복의 크기만큼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깨어 있다."
그렇다. 누군가 붓다를 때린다고 하자.
혹은 누군가 그대를 때린다고 하자.
붓다가 느끼는 고통은 그대의 고통보다 훨씬 크다.
왜냐하면 붓다는 기쁨 못지않게 고통에 대해서도 깨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물 위에 뜬 연꽃처럼 섬세하기 때문이다.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에 대해서도 섬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붓다는 고통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고통조차 초월한다.
고통을 인지하되 고통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구름이 붓다를 둘러싸고 있되 그가 구름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하다.
우리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 버린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난간에 머리를 부딪쳐 길거리에 쓰러져도 아무 느낌이 없다.
멀쩡한 상태에서 머리를 부딪쳤다면 굉장한 통증을 느꼈을 텐데 말이다.
붓다는 무한한 고통 속에 있다.
그리고 그는 고통을 무한히 즐기고 있다.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둠의 계곡이 수만 갈래로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천국에 닿으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뿌리를 지옥에 내려야만 한다.》
《기쁨을 얻고자 한다면 고통의 계곡을 지나가야만 한다.》
우리가 기쁨만 취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든다면, 발목을 묶은 채 달리기를 하려는 것과 같다.
혹은 적이 두려워서 문을 닫아걸고 그대 자신을 집 안에 가두는 것과 같다. 적 뿐만 아니라 친구조차 그 집에 드나들 수가 없다.
연인조차 그대를 방문할 수 없다. 대문 앞에 서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두려움에 찬 그대는 연인을 위해 대문을 결코 열지 못한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문을 닫아 걸었다.
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문을 닫아 버렸다.
이제 적은 물론 친구조차 출입할 수 없다.
친구조차 적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두려움을 빼고는 아무도 그 집을 드나들 수가 없다.
문을 열어라. 신선한 공기가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때 위험도 함께 따라 들어올 수 있다.
친구가 들어올 때 적도 함께 따라 들어올 수 있다. 낮과 밤이 함께 들어오듯, 고통과 기쁨이 함께 들어오듯, 삶과 죽음이 함께 들어오듯 말이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킨다.
외과 의사는 수술을 하기 전에 환자에게 마취제를 주사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이 너무 커서 환자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환자의 의식을 흐려 놓지 않으면 고통 때문에 그의 몸을 자르고 붙일 수 없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다.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 보아야 한다.
고통을 뚫고 지나가야만 한다.
그때 비로소 친구가 방문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문이 열리게 된다.
《고통과 기쁨》, 그 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높은 단계로 옮겨갈 수 있다.
《낮과 밤》, 그 이중성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초월을 경험하게 된다.
깨어 있는 의식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의 계단을 올라갈 수 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아주 기초적인 사실이 있다.
삶은 이중적이다.
삶은 두 반대 극이 만들어내는 리듬이다.
행복은 불행을 동반한다.
조화가 불협화음을 동반하듯 말이다.
영원한 불행이 없듯, 영원한 행복도 없다.
영원한 조화가 없듯, 영원한 불협화음도 없다.
모든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다면 행복은 순식간에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영원히 조화를 유지하게 된다면 조화의 참된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누가 조화 따위에 신경을 쓰겠는가?
행복은 불행을 동반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조화는 불협화음을 동반하기 때문에 귀할 수밖에 없다.
기쁨은 고통을 품고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
마찬가지로 고통은 기쁨을 품고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
우리는 누구나 존재의 이중성을 이해해야만 한다.
행복을 받아들이듯 불행을 받아들여라.
기쁨을 받아들이듯 고통을 전적으로 받아들여라.
기쁨만 취하고 고통은 외면하려 들지 마라.
불가능한 일이다. 기쁨만 있고 고통은 없어야 한다는 욕망을 품지 마라.
기쁨은 혼자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그 반대급부를 필요로 한다.
《고통이라는 칠판이 있어야 그 위에 적힌 기쁨이라는 분필 글씨가 명료하게 보인다.》
마치 별이 밝은 대낮이 아닌 어두운 밤하늘에서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말이다.
낮이 되면 별은 보이지 않는다.
밤이 되어 하늘이 어두워져야 별이 잘 보인다.
모든 것은 그 반대급부를 필요로 한다.
죽음이 없는 삶을 상상해 보라.
삶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될게 뻔하다.
죽음이 없는 삶이라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죽음은 삶을 명확하게 만들어 준다.
삶에 강렬함을 부여한다.
흐르는 물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삶, 매 순간이 귀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삶이 영원하다면 누가 그 소중함에 대해 거들떠보기나 하겠는가?
늘 내일을 기다리기만 할 뿐, 누가 지금 이 순간을 살려고 하겠는가?
내일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이 순간이 귀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전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삶의 궁극적인 깊이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을 지 없을 지 누가 아는가?
누가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내일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불행이 찾아오거든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해 주도록 하라. 행복이 찾아오거든 그대로 환영해 주도록 하라.》
그 둘은 같은 게임을 즐기고 있는 파트너들일 뿐이다.
기억하라. 우리가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길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전적으로 새로운 향기를 얻게 된다.
자유의 향기, 무집착의 향기.
무엇이 찾아오든 평정을 잃지 않는다.
무엇이 찾아오든 침묵 속에서 그대로 받아 들인다.
침묵 속에서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고통조차 보물이 된다.
불행조차 보물로 변형이 된다.
죽음조차 끝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