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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베스크
··· 김경인
어둠이 문 앞에서 서성일 때
밤의 실패를 풀어내던 꿈속의 소녀가
텅 빈 바깥을 내다볼 때
풍경의 창백한 눈동자가 힘없이 굴러 떨어지고
낡은 털실처럼 시간이 한없이 늘어질 때
머리로부터 벗어나려는 머리카락의 합창처럼
한 박자 늦게 연주되는 현의 팽팽한 열기처럼
소녀가 빙글 돌고
두 눈부터 알록달록한 색실처럼 스르르 풀어질 때
한 소녀가 또 한 소녀 속으로 감겨들어가
감쪽같아질 때
한 소녀가 막 빠져나온
한 소녀의 윤곽을 마구 흩어버릴 때
달무리 지듯 뭉개질 때
침묵밖에 모르는 나무에 천 개의 이파리가 돋아나
각기 다른 목소리로 나부낄 때
문으로 사라진 소녀가
무엇을 망설일 때
돌아나온 소녀가
무엇을 망설이는지 몰라
울음을 터뜨릴 때
일그러진 얼굴 속에 누군가 천천히 걸어나올 때
어둠 속에서 빛나는 혀가 돋아날 때
풍선의 장례
··· 김경주
하늘에 포르말린이 흩어진다
그건 구름이 풍선의 장례를 치르는 일
구름이 하늘에서 풍선 속을 통과한다
저녁은 공중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일
내려온 공중에 가득 찬 수면을 바라보는 일
다른 선으로 빛이 떠내려가는 일
떠내려가는 빛이 기어이 새가 되고 마는 일이 있다
그 빛을 문장으로 이장하는 일 그건 내가 이 세상에서 바꾸어
부르기로 한 일, 문장의 일
구름이 허적허적 게워내고 있는 풍선
혁명, 다를 피를 벤 구름
연필이 마신 등고선들
떠오르는 순간 장례를 치르는 문장
음울한 짐승의 물방울
죽은 다음에야 풍선을 비울 수 있는 육체,
그건 내 나비의 실내에 부검이 못 들어오는 일
나는 배 다른 구름의 일
표본실엔 물방울짐승
천의 아리랑
··· 김승희
1. 가슴속의 피아노
누구나 한 번을 떨어지고 싶어 한강으로 간다,
가슴에 검은 피아노 한 대를 질질 끌고
한강 다리를 취중 횡단······
야, 이 미친년(놈)아, 너 죽고 싶어?
흠뻑 쌍욕을 먹어본 적이 있다,
죽고 싶으면 저나 혼자··· 환장···
뒤통수에 따라오는 빛나는 쌍욕의 훈장을 끌고 강가에 서면
그런 떨어지는 것들이 모두 모여 강물이 숨을 쉰다,
이렇게 많은 피아노들이 한강에 떨어졌는가,
달을 주렁주렁 매달고 미친 피아노들이 숨을 쉰다,
강물은 숨결, 숨결은 이야기, 누군가의 숨결, 산맥의 이야기,
오늘 밤에도 누군가
한강 물 속에서 녹슬고 부서진 벅찬 피아노의 탄식을 듣는다.
사랑이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이
너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을 알아보는 것이다,
1890년대 후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네 번의 조선 여행 중에 알아보았다.
조선 백성들의 존재 이유는
오직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들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뿐이라고,
아리랑이 있었고 아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요
서로 가시를 내밀어 부비며 쑤시며 마구 찔렸어요
다만 흘러내리는 피가 더웠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너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이
나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을 만났을 때
모든 피아노에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이 있듯
생소하지가 않아서, 혈연처럼 참회처럼
온갖 독극물과 피와 쥐약과 정액에 시체 방부제까지 섞인
더러운 한강 물 속으로 뛰어들려다가
잠시 멈춰
네 가슴의 녹슨 피아노를 손으로 어루만지듯
미친 아리랑을 피아간에 아득하게 들어주는 것이다
2. 부용산
장시익의 <찔레꽃>이나
이애주의 <부용산>이나
그런 노래 듣고 있을 때
일천 개의 가을 산이 다가오다가
일천 개의 가을 산이 무너지더라도
13월의 태양처럼
세상을 한 번 산 위로 들었다 놓는 마음
노래가 뭐냐?
마음이 세상에 나오면 노래가 된다는
장사익의 말···
그래서 아리랑이 나왔지.
하얀 꽃 찔레꽃 찔러 찔려가며
그래서 나왔지, 찔리다 못해 그만 둥그래진 아리랑이
둥그래진, 멍그래진,
찔렸지 울었기 그대 목 놓아 울면서 흘러가노라
장사익의 <찔레꽃>이나
이애주의 <부용산>이나
그렇게 한 번 세상을 산 위로 들었다 놓는 마음
13월의 태양 아래
찔레꽃 장미꽃 호랑가시 꽃나무가
연한 호박손이 되고 꽃순이 되고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로 나라갈 때까지
마음이 마구 세상에 흘러나오고 싶은 그 순간까지
숨을 참고 기다리다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런 아리랑
3. 론도 카프리치오소
피를 팔아 산 피아노의 이야기와
피를 팔아 산 피아노가 밥이 된 이야기와
피를 팔아 산 쌀이 밥이 되었다 똥이 된 이야기와
그런 똥과 오줌이 또 내 피가 된 그런 이야기
피아노에 묻은 피, 그런저런 이야기들이
강물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돌 속의 물고기와
빙하 속의 물고기와
청산가리 속의 물고기여
5.18 부상자 중 10%는 자살이요
자살이라네
가자 가자 흘러가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
델마와 루이스가 영화 마지막에 차를 몰고 투신하던
그 절벽,
그 절벽의 분홍색 흙의 빛깔, 극락의 빛깔,
그랜드캐니언도 먼 옛날엔 바다 밑에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빛깔을 얻었다,
그렇게 갑자기 바다 속의 피아노가
피 묻은 가슴으로 산 위에 우뚝 솟았다,
물속의 피아노가 갑자기
산 위의 피아노가 되는 날,
갑자기 절벽의 이야기가 되는 날, 솟구쳐
돌 속의 물고기와 빙하 속의 물고기와
청산가리 속의 물고기가
다 같이 함께 만세 부르며
푸르른 하늘 밑에 분홍색 극락으로 푸르러 푸르러
4. 배고픈 승냥이의 노래
어디야, 어디야,
명사계가 어디야,
어디야, 정말, 명사계가 어디야,
누구야, 정말, 응? 어디 가야, 어디 가야?
거울이 원죄야, 이름이 원죄야, 아니 다,
밥이 원수야, 꿈이 원수야
오늘도 그냥 일용할 고통이
쓰레기 같은 거울 산을 이루고
거울 앞에 나를 세워놓고 부려먹고 부려먹고 또 부려먹고
이 산 너머 가면 명사계 있냐고
저 산 너머 가면 명사계 있냐고
거울 뒤로 가야 명사계 나오냐고
태산 같은 땀과 태산 같은 피 흘리며
명사계가 어디냐고
어기 가야 우리 어머니 만나요?
어디 가야 내 사랑 다시 만나요?
어디 가야 해와 달 함께 만나요?
5. 밥의 아리랑
용산이나 마포, 밥집이 많은 거리로 올라가
밥을 먹는다.
곡기를 끊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땅을 쳐야 할 상황인데도
무심하지 않으면 하늘이 아니지······ 의젓하게
혼자서 밥을 먹는다,
아리랑은 밥이다······ 아니 물에 만 밥 같은 것······
얼굴에서 얼이 다 빠지니
굴만 남았다
굴 속으로 설렁탕 국물이 막 흘러들어간다,
생판 첨 비가 너무 많이 와
얼이 다 빠져수다······
괜치 제주 방언을 말해본다,
부담 주기 싫다며
허리에 돌 24㎏을 묶고
자기 집 우물 속으로 몸을 던져
빠져 죽은 어느 할머니가 있다,
첩첩 굴 속에서 정선 아리랑이
설렁탕 국물을 따라 아련히 휘돌아든다,
윤무······
뱃속으로 휘돌아드는 노래가 있다,
얼이 다 빠져수다······ 의젓하게
얼이 빠진 굴을 들고 앉아
거울 너머 창자 속으로 흘러가는 아리랑을 바라본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무심하지 않으면 하늘이 아니지,
설렁탕 국물이 아련히 창자 굽이를 휘돌아든다,
그 노래가 쓰리라······
6. 흙의 아리랑
어쩌다 하늘공원까지 왔어요,
하얗게 머리 풀고 흔들리는 망초꽃 홀씨와 억새들,
저 스스로 왔다가 저 홀로 물결처럼 흔들려요,
그때는 사랑인 줄 모르고
발버둥치며, 지나간 시간들,
구름에 목을 걸고 살아요,
구름이 흔들리면 온몸이 나부껴요,
밥줄이란
목에서 위까지 걸려 있는
그 줄이래요,
밥이 법이다
그런 말은 싫은데
몸의 한가운데, 흉곽에 피아노 철사줄이 흔들거릴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목구멍 속으로 울부짖는 피아노가
터져나오려고 해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할머니도 그렇게 아팠을 거예요,
할머니도 그렇게 외로웠을 거예요,
흙이 불러요
산이 불러요
물과 바람이 불러요
막 불러요, 뿌리쳐도 불러요,
소리치며 불러요, 휘몰아치며 불러요,
흙이 그리워져요
흙이 향기로워져요,
흙 속에 기억들이 빛나요,
할머니,
흙이 막 날아와요,
흙 묵은 억새 풀잎들이 마구 휘몰아쳐
얼굴을 덮으며 날아와요,
흙에도 날개가 뻗치는 그런 날이 있나 봐요,
그런 날
흙이 시집이에요,
흙이 전기傳記에요,
흙이 자서전이에요,
흙보다 더 아름다운 책은 없는 듯해요
그러고 보니 할머니, 할머니란 말 속에 흙이 들어 있네요
흙은 여인들의 아리랑이에요
자유종 아래
··· 김중식
가죽나무 타고 넘어 들어갔던 서대문형무소
왜식 목조건물 사형장은 나의 놀이터였지
도르래에서 밧줄을 끌어내려 목에 걸었지
축하해, 젊음의 교수형을 집행하는 화환花環
목의 때와 살갗과 육즙으로 엮은 비린 동아줄
미친 시대가 하필 우리의 전성기였으므로
돌아버리지 않아서 더 돌아버릴 것 같았던
속으로 화상火傷 입은 청춘이었으므로
유언이래야 “할 말 없다”는 것이었지, 개로
태어나더라도 늙은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짖지 않는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덜컹
발판을 열면 다리가 뜨고 혀가 나오겠지
죽을죄는 없고 죽일 벌만 있을 뿐, 발아래
컴컴한 식욕을 날름거리는 콘크리트 지실
나는 뛰어들었지, 귀 막고 입 다물며
나는 뛰어들었지, 다시는 젊지 말자고
十二 총잡이들의 몽타주
··· 김중일
一 온종일 시계는 내 눈앞에서 위협적으로 권총을 빙빙 돌렸다
二 그때 시청 앞 시계탑의 총신이 정확히 여섯 시 오십구 분을 겨냥했고, 리모델링 중인 오랜 건물 옥상으로, 명중된 구름이 풀썩 내려앉았다, 총상 입은 구름은, 황급히 크레바스 같은 시간의 깊은 틈새로 숨어든 것이다
三 늙은 창문들의 주름을 펴기 위한, 리모델링이 한창인 S사의 외벽은 대형 천막으로 가려져 있다, 천막을 걷으면 공터만 남아 있을 듯한 의심스러운 시간의 적요
四 구름은 비대한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잠시 옥상 위에 머물렀지만, 곧 먼지 뒤엉킨 통풍구를 통해 수상한 연기처럼 건물 안으로 빨려들었다
五 그때 건물 앞을 통과하던 그 누구도 은밀한 구름의 잠입, 혹은 은신을 눈치 채지 못했다, 한겨울의 여섯 시 오십구 분은 아침이든 저녁이든 어둑어둑했으므로
六 현관 입구에는 백 년 된 괘종시계가 막 일곱 번째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가래 끓는 노시를 내며 숨을 고르고 있었고, 인기척에 황급히 돌아서면 거리에 도열한 가로등은 지금 막, 켜지기 직전인지, 꺼지기 직전인지
七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창문들을 보았다, 그 초점 없는 눈동자 속에는 충혈된 구름이 두 눈 가려진 채 인질로 잡혀 있었다, 거리에 즐비한 술집들의 창문은 지금 막, 닫히기 직전인지, 열리기 직전인지
八 나는 반쯤 마신 다크 럼rum 속에서, 나선형으로 흘러나오는 검은 구름을 손바닥으로 황급히 틀어막았다, 뜬구름을 리볼버처럼 잽싸게 뽑아 들던 총잡이들은 매일 어떤 얼굴을 하고 이 붉은, 건물을 들고 났을까
九 내 손목시계 속으로 도주한 열두 명의 악당들이, 접이식 권총의 총신을 펴고 일제히 하늘로 방아쇠를 당기는 시간
十 나는 두 눈을 감고 거리를 뒤로 걸었다, 거리 도처의 모든 반짝이는 것들은 총잡이들의 현상수배전단으로 도배가 돼 있고, 사진에는 모두 같은 얼굴 다른 표정으로 인화된 구름의 몽타주뿐
十一 험상궂은 총잡이들······
十二 자리를 뜨기 전 난간 밖으로 뱉어진 가래침처럼
로드킬 2
··· 문혜진
혀에 닿아 파닥이는 물고기, 얼음의 각질, 혀를 내밀어 내리는 눈을 핥는다. 크리스마스 아침, 일 년에 한 번 교회에 가기 위해 구두를 닦고 대문을 나서는 그런 날, 차에 부딪쳐 나뒹굴어진 피자배달 오토바이, 비현실적인 붉은 피가 눈길에 뿌려지고 울부짖는 짐승의 신음 소리, 몰려들어 웅성대는 사람들, 소년의 몸에 경련이 시작된다.
눈길을 뚫고 달려온 119 구급차, 오토바이가 들어 올려지고 쇼크상태의 소년은 들것에 실려 차에 오른다. 담요에 감싸인 꺾인 다리 성장판이 채 닫혔을까. 소년을 배웅하던 어머니, 붉은 전등 아래 고기를 썰던 차가운 손, 거죽에 도는 희미한 광택, 짧게 자른 손톱 아래 아무렇게나 붙어 있는 검은 지층의 흔적
혀 끝에 닿기도 전에 녹아내리는 눈, 피와 흙이 뒤섞여 질척이는 거리, 구급차가 떠난 자리에 팔짱을 낀 채 남아 있는 사람들, 얼음보다 낮은 체온의 얼음물고기, 얼굴에 차가운 비늘이 쏟아진다. 차갑게 더 차갑게 투명한 피가 비치는 하얀 아가미의 얼음물고기 회색 하늘에 퍼덕이며 떨어진다.
검은 산 그리기
··· 송재학
폐광 뒤쪽,
벼랑에서 낙화하는 철부지 진달래꽃이
스무 살의 시선으로도 아찔하구나
검은색 힘줄이 견디는
아픈 무게,
검은색을 지워도 다시 검은빛이기에
상처란 말을 붕대처럼 감았다
붕대를 풀면 다시 검은색일까
검은 소리 들리는 직류폭포 근처
이끼의 묵언 주둥이는
무채색 물방울을 핥았는데도
어느새 초록,
초록과 검은색,
나무와 나무 사이
부레 달린 길이 생겼다
검은색이 끌고 온 일몰이 생겼다
붉은 버섯을 보다
··· 엄원태
얼굴 흰 여자, 붉은 우산 쓰고 서성이는 장맛비 속에 마냥 서 있었다 하필이면 등산로 어귀 휴게소 주차장 구석에··· 여자는 십 리 들길을 혼자 걸어 연밭 지나고 포도밭과 과수원을 지나서 왔다고, 이따금 그렇게 서 있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고, 누가 아는 체를 했다
상수리숲 아래 젖은 낙엽 더미 어깨 들썩이며 한숨 쉬는 것 보았다 나뭇잎들의 번들거리는 우울을 눈으로만 매만졌다 능소화는 전봇대처럼 밑둥치만 남은 소나무를 타고 올라 제 한 몸으로 화엄 만다라를 이루었다 그만하면 됐다
산비둘기가 살기 힘들다는 푸념처럼 울었다 나리꽃들은 끝내 묵묵부답, 저마다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 젖은 공기 탓이었다 누가 긴꼬리제비나비를 봤다고 말했다 다른 누가 불어난 개울을 건너다 징검돌 잘못 디뎌 발목까지 물에 빠진 직후였다 자귀나무 분홍 꽃술은 어느새 퇴색했지만 그만하면 됐다
하산길에 붉은 버섯을 보았다 떡갈나무 아래 비탈이었던가, 붉은 우산의 그녀가 거기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듯, 하염없이 허공을 향해 서 있다
는개처럼 가는 비만 오락가락했다
모던 타임스
··· 오은
큰오빠는 팔굽혀펴기를 천구백 개째 하고 있었다 팔을 굽힐 때마다 땀방울 몇 톨이 자랑스럽게 돋아났다 네가 격투기를 하면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거다/그게 돈벌이가 더 돼? 아빠와 엄마는 항상 논쟁을 벌였지만 큰오빠는 근육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선반의 트로피를 바라보며 오직 양질의 고깃덩이가 되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저 훤칠한 총각은 누구냐 할머니는 사람들의 이름을 자꾸만 잊어버리셨다 갑자기 통닭이 먹고 싶구나 할머니가 큰오빠의 등짝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잘 드시면 몸이 나을지도 몰라/하루에 열 끼나 드시는데? 아빠는 이상을 굽힐 줄 몰랐고 엄마는 현실이 펴지기만을 기다렸다 큰오빠는 팔굽혀펴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통닭이 배달되자, 할머니는 날렵하게 날개를 낚아채 덥석 입에 물었다 미각은 여전하셔/이제 가실 때가 된 거지 엄마가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가 가슴살을 뜯어 큰오빠에게 가져다주었다 큰오빠는 쟁반에 입을 대고 개처럼 그것을 씹어 먹었다 샹들리에가 위태롭게 껌벅였지만, 모두들 그저 자기 자신이 눈을 감았다 뜬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감뉴스를 틀었지만, 아무도 미도리의 실종이나 제인의 망명, 철수의 죽음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자정이었고, 에너지 보충을 이유로 다들 잠자리에 들고 싶어했다 철수는 할머니가 진작 잊어버린, 이제는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는 작은오빠의 이름이었다 할머니가 그 이름을 떠올리려는 찰나, 화이트 노이즈가 모두의 머릿속을 하얗게, 어지럽게 만들었다 결국 내일의 날씨코너는 내일로 방영이 미뤄졌다
큰오빠는 이천 번 팔을 굽히고 천구백구십구 번 팔을 펴는 데 성공했다 굽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펴지지 않는다는 사실만 오직 생각하기로 했다 할머니가 입맛을 다시며 큰오빠의 이름을 다시 물어왔다 아빠와 엄마가 하품을 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선반의 트로피가 떨어졌지만 엔트로피를 떨어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큰오빠가 팔을 이천 번째 펴자, 큰오빠의 항문에서 방전된 에너자이저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겠지? / 비가 오지 않는다면
큰오빠에 이어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할머니가 차례로 눈을 감는 소리가 들렸다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
··· 유형진
너를 생각하면서 이 문장을 쓴다
생. 이라고 쓰면 나는 생강의 톡 쏘는 쓴맛,
그리고 비닐하우스 안의 정사를 생각한다.
겨울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은
나를 가두거나 풀어준다
생. 이러고 쓰면 나는 질긴 고무줄.
빚을 지고 허덕이다 젖먹이를 버리고 떠나는
누군가의 뒷모습.
너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런 문장도 떠오르지 않겠지.
바보, 라고 말해버리면 그 순간 나는 바보.
똥개, 라고 말해버리면 그 순간 나는 똥개다.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을 얻기 위해
나는 지금 너를 생각한다.
너는 오늘 밤, 빛나는 오리온을 생각했을까?
그런 생각도 한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누군가 사정하며 생을 빌릴 때도
오리온자리에서 알 수 없는 빛이 흘렀지.
그 빛을 평생의 빛으로 누군가는 허덕이며 간다.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을 향해.
생. 헐떡헐떡.
자장가
··· 이기성
어두운 대지에 얼굴을 파묻기 위해 차가운 지붕 아래로 흘러내리는 밤, 그걸 두꺼운 담요처럼 덮고 누워 난 오직 하나만을 기억해. 이를테면 단식하는 개들, 개들의 뜨거운 이빨과 허공의 외투를 껴입은 슬픔의 최적량. 그리고 지하도에 누운 늙은 왕의 귓바퀴를 흐르던 마지막 눈물. 오늘 밤을 지나 검은 쥐들은 얼어붙은 강물 위를 달려가고 토할 때까지 꺽꺽 울다가 사라지는 발자국들. 얘야, 입을 다물렴, 누군가 등을 어루만지면 조금 추위를 느낄 수도 있지. 불멸의 잠은 한없이 포근하고 개들의 벌어진 입을 스치는 먼 바람, 고요의 목구멍에 쌓이는 희고 푸른 재. 슬픔을 모르는 늙은 왕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면 따뜻한 오줌이 흘러나와
그래, 생각이 에너지다
··· 이문재
아무리 파도 기름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지구 반대편을 팠다.
생각이 에너지다.
SK에너지.
아무리 해도 사람들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텔레비전 반대편을 보았다.
맞다. 생각이 에너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지구를 그만 파야 한다.
그만 파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이 에너지라는 생각이 팠던
지구의 저 수많은 구멍들부터 막아야 한다.
지금 지구 반대편으로 달려가
구멍을 뚫고 기름을 뽑아올리는 생각은
새로운 에너지가 아니다.
지구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생각이 진정한 에너지다.
아무리 해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 든다?
지구나 곧 내 몸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그럼 그때 자기 몸의 반대편을 파보라.
그때 자기 마음의 안쪽을 보라.
먹고 입고 쓰고 타고 버리는 것의 앞뒤를 보라.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고
그것은 또 어떻게 어디로 가는가.
그렇다면?
그런 생각이 새로운 에너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새로운 생각도 못 된다.
새의 얼굴
··· 이민하
날개를 저을 때와 날개를 접을 때
새는 어떤 표정일까
날개는 새를 소유한다
타이머가 날개를 소유하듯이
누구나 태어난 채로
오늘은 나의 생일이 아니다
축하해다오
문 앞에 사탕처럼 들러붙는 꽃들 말고
죽은 새도 괜찮다
선물을 다오
열두 살 때 처음 내 방에 날아든
새 한 마리가 다음 날 화단에 묻혔다
그 애의 싸늘한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후로도 종종 놀래키듯
크고 작은 새들이 들어와
방에서 실려나가는 일이 늘었고
그때마다 새를 대하는 기술이 늘었지만
나는 여전히 새를 수리하지 못한다
새는 얼굴을 숨기려고 부리를 키운다
비행기처럼 자란 부리를 피해
엄마는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는 어떤 이들의 부리공포증을 이해한다
나의 지렁이공포증처럼
환각이 절벽으로 떠미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비 오는 날
산책을 시도하지만 기차처럼 달려오는 지렁이의
꼭꼭 숨겨진 얼굴처럼
날아가는 새의 얼굴은 날개 속에 묻혀 있다
날개는 눈빛을 거래하지 않는다
나는 화단에 엄마도 묻었다
화단은 무덤을 숨기려고 꽃들을 키운다
손톱으로 흙을 파며 내가 기르는 건
묻혀진 날개가 아니라
새의 얼굴
나는 화단에 나를 묻었던 걸 이해한다
부리에 삼켜진 엄마처럼
지렁이에 삼켜진 사랑처럼
如來哀反多羅
··· 이성복
이 순간은 남의 순간이었던가
봄바람은 낡은 베니어판
덜 빠진 못에 걸려 있기도 하고
깊은 숨 들여마시고 불어도
고운 먼지는 날아가지 않는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고운 잠
눈 감으면 벌건 살코기와
오돌토돌한 간천엽을 먹고 싶은 날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나는 아무래도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
흘러내리는 얼굴
··· 이수명
얼굴을 던지며 걸어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건물은 무게를 가지지 않는다.
콘크리트는 무게를 가지지 않는다. 콘크리트는 발효 중이다.
얼굴을 던지며 걸어간다.
공간을 공격하면
공간은 쉰다.
안이 바깥이 되어 떨어지는 주사위들
흘러내리는 얼굴들
즙이 많고 재빨리 썩어가는 얼굴들
던지며 걸어간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어디서 시작되며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던지며 걸어간다.
폐허의 섬 파르티타
··· 이승원
건물의 사체가 먼지를 머금고 아직 직립해 있을 때
썩지 않는 생선 꼬리를 맡으며
나는 누구의 이름을 생각해냈던가
인공물이 자연에 근접하며 낡아간다 지워지고 흔들리며
지붕은 속살이 드러나
그곳에선 빤히 혼자라는 게 허기처럼 떠오르고
태양계를 벗어나는 탐사선처럼
깊은 수심 속으로 내려가는 죽음을 상상한다
살마다 녹슨 새장은 스스로를 속박한다
들떠 일어난 천장의 페인트가 나방처럼 날개를 젓고
버려진 스패너들 검어진다 네 얼굴처럼
묽게 칠한 그의 아랫도리가 가리고 있는
두 개의 흐린 눈은
언제를 기억해내려 했던가
해가 흘린 피를 유리창이 반사한다
광택을 잃은 구 층 아파트의 허물어지는 베란다
느리게 몸을 열고
거품을 무는 바다에서 새가 제 흰색을 공중에 그린다
짙은 물이 고인 거대한 욕조 바닥
마개를 뽑을 때 들리는 비명 소리는 언제나 물리지 않았지만
더럽혀진 젖은 손가락은 결국 어디를 가리켰는가
밤의 연약한 재료들
··· 이장욱
밤이란 일종의 중얼거림이겠지만
의심이 없는
성실한
그런 중얼거림이겠지만
밤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않고
맹세를 모르고
유연하고 겸손하게 밤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중
죽은 이의 과거가 빈방에서 깊어가고
소년들은 캄캄한 글씨를 연습하느라 손가락만 자라고
늙은 개의 이빨은 밤마다
설탕처럼 녹아가는데
신축건물들이 들어서자
몇 개의 골목이 중얼중얼 완성되고
취한 남자는 검게 그을린 공기 속을 흘러가고
밤은 그의 긴 골목이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드디어 외로운 신호처럼
보안등이 켜지자
개의 이빨은 절제를 모르고
갓 태어난 울음들이
집요하고 가득한 밤을 향해
오늘도 녹아가는 이빨을
필사적으로 세우고
하얀 방
··· 이준규
화요일이다 수요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월요일일지도 하얀 문이 있는 방에 오래 있었다 창이 있는 방이었는데 창문을 열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버즘나무와 은행나무가 보였고 그 위로 구름이 있는 하늘이 보였다 복도로 가끔 사람 같은 것이 지나갔다 때론 매미 소리가 들리고 때론 눈이 내렸다 가끔 겁먹은 소음이 들려왔다 하얀 문이 있는 하얀 방은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하얀 방이었다 언젠가 그는 하얀 방이 있는 하얀 문을 나가기로 결심하며 결심이란 단어는 우습다고 생각하며 그런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뭐랄까 아무튼에 속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영역 같은 단어는 참 이상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얀 물을 겁쟁이답게 단호하게 열어젖혔고 문지방을 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끔찍한 흰빛을 느꼈다 다시 하얀 문을 과감히 닫으려다가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괘 비겁한 생각에 그의 나이에 걸맞은 안색을 지어보려 애쓰며 안색이란 고색창연한 단어를 나는 왜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 듯한 흔들리는 표정도 잠시 인간적인 매력도 더하기 위해 지어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 흰빛은 나의 등장을 축하하는 조명이거나 친구들의 깜짝파티일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세상에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그때까지의 엄혹한 현실이라는 것을 생각해냈고 동시에 엄혹하다는 단어를 생각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했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할 위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실소라는 단어를 왜 난데없이 생각했는지 생각했다 그러면서 역시 이 하얀 방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보고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래도 좀 민망하기는 하지만 문을 천천히 그리고 힘없이 닫았다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고 발가락 너머로 개미와 거미가 사이좋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음번에는 아무리 무서운 흰빛을 만나더라도 문을 열고 나가 다른 문을 만나리라고 단호히 결심했고 이번 결심은 진짜라고 돌이킬 수 없다고 느꼈다 창밖으로 노란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하얀 방은 초록 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사이에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물론 궁금하지 않았고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노란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고 커피를 다 마셨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그는 자연스럽게 하얀 문을 열고 나가 물을 끓이고 커피잔에 커피를 넣고 끓인 물을 부은 후 작은 숟가락으로 잘 저으며 나는 왜 숟가락이라는 단어를 사랑하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빨리 하얀 방으로 들어가서 하얀 방을 나오는 장면을 전쟁 전날 밤의 왕의 서재 같은 분위기를 가진 다른 방에 우뚝 서서 검은 창밖의 엉킨 지평을 응시하는 왕의 재떨이 같은 기분으로 상상하리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느라고 커피를 조금 흘렸고 조금 흘러 바닥에 흐른 커피를 걸레로 닦았다 닦으며 그는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싶었으나 그 생각은 그에게 금지된 것이었다 그는 다시 문을 열고 하얀 방으로 들어가며 어쩌면 정말로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아 노란 빗방울을 묻히고 있는 버즘나무와 은행나무의 징그러운 모습을 감상하며 심심하니까 울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울었다 눈물엔 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얀 문을 열고 문지방을 지나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나무 위에 고양이
··· 임현정
오렌지주스 병을 핥던 때처럼
온통 오렌지빛으로 물들었지.
이 도시의 가로등 불빛은
녹슨 피조차 오렌지주스야.
언젠가 꽃모가지를 리본으로 묶은 걸 보았어.
그녀도 그렇게
툭툭 팔을 분지르며 곤두박질쳤지.
네가 모가지에 칭칭 감아준
질긴 전화선
난 이 도시의 색소가 좋아.
이 흥건한 오렌지빛을 핥을 수도 없어
먹통처럼 발자국이 남지 않는
무서운 길을 네가 지나갔지.
그녀를 탬버린처럼 흔들던
가쁜 숨소리가 사라진 은행나무 아래는
둥근 마침표처럼 부드러운 흙이야.
뾰족한 화살은 노란 중심으로 날아가 박혀. 그러니까
그 눈빛은 네 거야.
잃어버린 물건, 네 가슴팍에 놓고 갈게.
하얀 장갑과 검은 눈동자
그리고 수소풍선처럼 날아가버린
털을 곤두서게 하는 오렌지빛 비명도.
축하해. 야옹
두 발의 시
··· 조연호
손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손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조용히 붙들고 있었다.
북쪽 측랑 근처
이모와 함께 작은 여자들은
근대적인 반성을 처음 대했다.
이렇게 고양이 수염 같은 발이 달린 나를 좋아해주다니
너희들의 위생도 내 것만큼 얇은 것이고
가방을 열면 청결이 사라지는 걸 바라보게 되겠지.
코스모스가 피고 있었다.
서간체 양식으로
인간을 매료시킨 신의 불손
소독, 그리고 인체의 시절
착한 사람이며 착한 율법사인 당신
사람이 원하면 그것은 사람으로 나타났다.
네가 남자와 여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신비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
거기서 나는 하나의 이름을 듣고 그것을 불렀다. 따뜻한 돌을 안은 변온동물이 먼저 그 이름을 받아 갔다. 더 즐거운 일은 결혼과 출산의 부작용으로 우리의 온도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선물 받지 못한다는 것. 그때 너의 코와 귀에 달린 장신구는 성별이 나뉘고 중성中性을 떠나는 것. 그때 너의 코와 귀에 달린 장신구는 성별이 나뉘고 중성을 떠나는 첫 번째 꿈이 되었다.
신체의 여러 이름을 너무 애절하게 바람을 쥐고 있었기에
풀은 자기 냄새를 맡고
사람과 눈 마주치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선행, 그리고 처벌의 시절
입구는 빈집에 남아 떠난 것의 무게를 재고 있었다.
하루에 두 끼씩 나는 지옥을 부러워하고
지상의 가장 낮은 층이 내게 보여준 것은
열쇠를 품는 방법
엄마가 낳은 첫 인간에 대한 생각
손을 만든 자의 업적은
떠난 자의 손을 남겨진 자의 손에 붙여주는 것
다섯째 날에 그는 바다에게 이별을 낳으라고 명령했다
치솟는 이별
고산병 환자처럼 한 걸음씩 토하고
한 마리가 여러 마리가 될 때까지
치솟는 이별
다섯 시간 반을 낙원에서 보낸 사람이 있었다.
그를 위해 낙원은 두 발의 절망을 남겨둔다.
위생, 그리고 모국어의 시절
여섯째 날에 맹인 소녀는 월경 자국에게 말한다 ;
속삭이는 말처럼 아래로 걷고 싶어,
내가 만일 건너편에서 부슬부슬 흩어진다면 그걸 보는 사람들은
자기 허벅지를 힘주어 걸레질하겠지
바람이 검어지는 곳
두벌씩 자판에 가까운 결심
열심히 선고하는 바람을 지켜보는 내게는
검은 손 안에 잔뜩 들어 있는
단지 한 개의 혈액형만 떠오를 뿐이었다.
불모지가 있기 때문에
불타는 땅은 그리운 세계가 될 수 있었다.
불모지가 없다면 두 발은 돌아갈 장소라는 의미를 몰랐겠지
다행이다, 불모, 두 발의 위쪽에 달려 있어서
아케이드
··· 진은영
유리의 거미줄
나와 네게서 달아나 맞잡은 손바닥이 하늘하늘
날아갔다
내 혀는 도착한다
오늘에
청량고추의 플랫폼에
“괜찮아, 문제 없어!” 하는 나를
양치질 후 흰 거품처럼 뱉어버리고
토성의 자줏빛 흔들리는 하늘가에서
출발한 두 다리가
첫 봄날을 지나, 무질서한 이야기를 지나
수요일의 분주한 상점과
여름 과일의 시들어가는 나날을 지나서 간다
공장 근처 새까만 비둘기들
낡은 가을 하늘의 접시 위를 탄
파이처럼 굴러다닌다
나는 걸어가며
아직 네 얼굴에 빗방울이 바늘처럼 쏟아지는 이유
시장 좌판에 파란 플라스틱 바구니가 놓여 있는 이유
노란 사과들, 오렌지들, 오이, 체리가 싱싱하고
몇 개의 썩어가는 달이 담겨 있는 이유를
생각하고
네가 목욕을 좋아하는 이유
모든 더러운 영상을 나르는 샛푸른 혈관들의
방사형 거미줄에서
하나의 힘이 태어나는 이유를 생각한다
변두리에 흰 달 떠오르는 시간에
너의 겨드랑이
팔 손목 곡선의 부드러움
전나무들의 날카로운 꼭대기를 껴안는
매끄러운 검은 살의 하늘
먼지 낀 유리 사이로 내려와
성탄 무렵 쇼윈도 별을 향해 뻗어간다
둥근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비의 머리카락이
내 발등을 어루만지면
너를 만나게 된 이유와 만나게 되겠지
추운 12시에
강철 셔터에 낀 녹 맛이 빛나는 12월에
방황하는 익사체
··· 최승호
뚱뚱한 익사체가 흐린 늪에 떠 있을 때 당신은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거나 대형마트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 있거나 어느 술집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익사체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본 익사체는 수면에 엎드린 채 낮잠을 자는 듯한 남자였다. 게으른 남자, 무력하기 짝이 없는 남자, 미지근한 물의 흐름에 온몸을 맡긴 평온한 남자, 익사체는 뭉게구름처럼 고요했다.
어디선가 황소개구리가 울고 있었고 늪가로 걸어나온 게아재비가 회갈색 앙상한 몸을 뙤약볕에 말리고 있었다. 혼자 뜯어 먹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시체, 소금쟁이들이 뚱뚱한 익사체를 더듬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송장 냄새를 풍기는 이것의 살점은 쉽게 물어뜯을 수가 없다. 어쩌면 더 부패해서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 남자는 죽어서도 질겨빠진 옷을 입고 있었다. 바지가 그의 엉덩이를 덮고 있었고 양말이 그의 발을 감싸고 있었다. 구두는 어디에서 벗겨진 걸까. 늪바닥의 수렁을 들여다보듯이 얼굴을 수면에 처박은 채 익사체는 느릿느릿 떠다니고 있었다. 이제는 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남자, 그의 목을 감은 물풀들은 새로운 넥타이, 새로운 고삐 같았다.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른다
··· 최원준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른다 밤이면 머리카락들이 두개골을 향해 파고들어 잠을 이룰 수 없다 깜빡 잠든다면 머리카락들이 몸안으로 들어와 휘젓고 다닐 것이다 머리카락들은 끊임없이 찾아내려 한다 잠들었다 일어난 사이 사라진 것, 둥글게 부풀어오르다 한순간 꺼져버린 것, 머리카락들의 관심은 안으로 향해 있다 물기를 머금거나 햇빛에 반짝이지 않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는 잘라낸 머리카락 뭉치를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린다 수면이 소용돌이치자 머리카락들은 쓸려 가지 않기 위해 변기에 달라붙는다
피 속을 달린다
··· 최치언
피 속을 달린다 세 마리의 꽃이 대가리를 물고기처럼 꼿꼿이 세우고
피 속을 전속력으로 미끄러지는 생각을
얽히는 지느러미를 더 단단히 잡아매고 피 속을 달린다
소녀가 바다를 들고 있는 곳까지 내가
소녀에게서 모래를 낳을 때까지 꽃들은 달린다 피 속을 더 힘차게
꽃들의 대가리가 비늘처럼 한 풀 한 풀 벗겨진다
바람이 후려치는 주먹을 다 맞으면서 세 마리의 꽃이 수천 마리의 꽃들이 될 때까지
찢어지고 피어나고 꽃들의 군단이 되어
피를 숨결처럼 휘날리며 온통 허공이 핏빛이 될 때까지 질척질척한
피의 심연을 외다리로 짓밟으며 피 속을 달린다
바다는 돌처럼 무겁고 소녀는 어머니처럼 무섭다 피를 흘리는 건
내 눈이다 내 눈 속에서 흘러나오는
피 속을, 소녀에서 처녀가 터져나올 때까지
약속에서 꽃들의 이빨이 터져나올 때까지
피가 피로 어두워질 때까지
인형들
··· 하재연
눈썹이 비뚤게 그려지고
입술이 피처럼 붉은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너의 엄마는 죽었고
너도 아홉 살에 죽었다
나는 조금도 훌륭해지지 않았다
한 겹씩 덮여가는
이 얼굴에는 캐릭터가 없다
말을 줄이는 것이
세상에 대한 조금 덜 나쁜 태도
백지에는 얼굴을 그리면 되고
나무는 살을 깎아내면 된다
그러나 네 입술에는
색을 칠할 수가 없다
네게서 빠져나간 검은빛들은
대기를 떠돌아다니고
남은 한 가득의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난다
너는 그때 내게
안녕 또는 어서 와, 라고
말했던 것일까?
거짓말의 기록
··· 허수경
나, 태어났어
추워, 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먼지들을 모아 옷을 만들어 입고 싶었지
태어났을 뿐이었어, 누군가 나를 자라게 했어
아직 꽃술을 열어보지 못한 꽃들이 성교를 하느라 바쁜 들판에 누워
아직 단 한 번도 새끼를 낳아보지 않은 새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나비에게도 잠자리에게도 덜 익은 빛을 보여줘, 라고 공기에게 말했던 적도 있었어
나와 자연은 사실혼관계
법정에서는 서로에 대해 아무 권리가 없다는 걸 늦게사 알았지
나에게 말을 거는 저 암소가 일찍이 나에게 수유를 한 어머니라는 걸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어.
매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하늘에 있는 공들에게도 내 수유의 어머니,
그 고깃덩어리가 걸린 정육점을 단 한 번이라도 보여주었으면 했어.
공들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까? 인간을 수유하는 암소들을 생산하는
더러운 거리 구석에 있는 도살장을 알까,
저것 봐, 아이가 불어대는 풍선 어떤 포유류의 방광이 하늘로 가서
먼 들판을 은은하게 비추어대는 하늘의 공이 되네
시간을 잘라 만든 혁대를 목에 감고 죽은 테러리스트가 살던 감방 안에서 자라던 작은 백합의 뿌리는 세계를 버티는 나무처럼 테러의 주검을 견뎌내고 있었어
아주 어린 중세가 대륙 저편에서 현대처럼 활개를 치고 있네, 그 말을 듣기 위해 춤을 추러 가는 아이들에게
나 태어났어, 라고 말해봐, 말해봐,
아이들이 당나귀처럼 웃으며 내 얼굴에다 총을 들이댈 거야
피가 솟구치는 숨겨진 샘이 있다라거나
죽을 수 없는 인간들이 매일매일 전쟁을 한다거나
그리고 당신이 날 사랑한다거나
그리고 그리고 그 말을 내가 믿는다거나 하는
엄숙하게 웃기는 나날 동안
나, 태어났어
아퍼, 라고 말하면 너무나 아파서 이 세상의 밤을 떠도는 모든 안개를 엮어 붕대를 만들고 싶었지
안개붕대를 감고 누워 컴컴하게 웃고 있었으면 했어
발목 지고 가는 코끼리 발목이,
··· 황학주
호스 물을 건네주러 가듯 코를 세우고 걷는 코끼리
비가 오기로 한 쪽으로 달리는 마음은
진홍빛 황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는 차를 멈추고 보고 있었다
귀를 펼치고 오는 코끼리
긴 송곳니 하나를 부러뜨리고 오는 코끼리
새가 날아올 수 있는 거리를 알 수 있는 나무는 어디에도 없고
코끼리가 되면서부터 걸은 거리를 코끼리만 어림하고 있을 것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코끼리의
잃어버린 식구들이 발목을 접고 누워 있는 어딘가도
펼친 귀뿌리 주름처럼 구겨져 있으리라
코끝을 대면 땅 위에 깔리는 쉰 목소리
그리움이 누그러질 때까지
붉은 강물에 등이 다 잠기도록 달리는 코끼리
노을은 물 있는 곳을 찾아 도망 나온 불목하니,
물어보랴 흘러내려가는 것들이 풀과 낮달을 키우는 동안
비 개인 어느 날 코끼리로 다녀가는
한 수컷과 한 암컷 사이 바다 같은 슬픔으론 무엇이 되느냐고
사라진 풀들의 잠언을 생각해낼 수 없는
발목은 따스하게 이는 흙먼지를 매달고 늦지 않게 가고 있다
연밥 같은 발을 들어 땅을 딛는 영혼을
몸 안으로 불어넣어 밤새 부풀어오르는
달덩이 코끼리,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발목 지고 가는 코끼리 발목이 킬리만자로 아래 있었다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기에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동그라미
- 김성규
이깔나무가 시퍼런 혓바닥을 늘어뜨린
대낮
뱃속에 두꺼비 한 마리 기르시죠
어둡고 뜨듯한 물 흐르는 하수구에서
두꺼비가 기어나온다
지린내와 임산부가 헐떡이는
팔월
가난한 처녀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가봐야
재수 없으면
장롱에서 굶어죽을 인생
뒤뚱거리는 임산부가
이깔나무 그늘에서 숨을 고를 때
뱃속에 두꺼비 한 마리 기르시죠
기어간다
뜨듯한 뱃가죽 같은 아스팔트 위로
눈을 뜨고, 한 근
오물덩어리로 뭉개질 때까지
뭉개져 둥근 원을 그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