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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심사평>
실존적 의미망(意味網) 짜기
심사위원
박 양 근 (수필가. 문학평론가. 부경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최 원 현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 상 렬 (수필가. 문학평론가. 계간 『에세이포레』 발행인)
1. 들어가며
지금은 낯선 풍경이지만 길을 가다가 문득 우리는 어떤 사람이 유리 칸막이 뒤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장면과 맞닥뜨릴 경우가 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대수롭지 않은 그의 모습이 마치 초상화같이 눈에 들어올 때,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아마도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했을 경우일 것이다. 마네킹을 보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 자신의 비인간성 앞에서, 그리고 끝없이 사물화(事物化)되어 가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에서 불안을 느끼게 된다. A. 카뮈가 호소하는 부조리의 속성일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이윽고 자기 자신에게 대한 낯섦까지도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수필작가가 쓴 한 편의 수필을 읽는다. 그 한 편의 수필 속에는 작가인 화자의 진솔한 삶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으며, 대상에 대한 작가의 사상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화자의 체험과 삶에 대한 해명이 진지하면 할수록 독자들은 그 한 편의 작품을 통해 삶의 깊은 메시지를 감지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는 수필이 그저 생활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고, 작가가 천착한 생활이라는 일상에 옷을 입게 마련이라는 데 있다. 자연스레 작가 중심의 신변적 화소가 주(主)를 이루게 됨은 말할 것도 없으며, 과거로의 회귀라는 고전적 통과의 과정을 밟기도 한다. 이는 우리네의 삶이 어차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 위에서 이루어지며,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공간적 확대의 그림을 그리게 되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문학작품을 읽고 창작하려 하는가? 이런 우문(愚問)에 대한 답변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존재 파악이라는 두 맥락으로 귀착된다.
지금 우리는 너나없이 무조건의 질주와 과속에 정신을 팔고 있다. 군중들은 물질의 허상만을 붙좇고, 작가마저도 극도로 불투명한 액체성의 공간을 헤엄친다. 하여 문학은 이런 불투명 속에서도 탈출구를 보여 주어야 한다. 수필문학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수필문학은 인간학이라는 그 소용 가치만큼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고 해명하고자 하는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수필문학은 1인칭에서 출발하며 작가와 현실의 정서적 등가에 놓인다. 자기관조와 투영이라는 수필의 지향은 다난한 현실 위에 구축한 정서적, 사변적 깃발이 된다. 살되 어떻게 사느냐 하는 인간 삶의 궁극적 향방을 찾아 떠나는 여행. 그래 수필은 인생이라는 여행이 된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화두는 작가적 삶의 역정에서 자연 유로(流露)되는 자기고백일 수밖에 없다. 이런 독백과도 같은 자기관조의 정서가 독자의 심경에 부딪혀 메시지를 제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헤겔의 변증법은 역사적 현재는 언제나 피와 땀과 먼지로 가득 차 있는 고통스러운 세계로 보고 있다. 현재의 소멸은 새로운 현재의 끊임없는 형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굳이 철학적 담론을 끌어낼 필요는 없겠지만, 수필의 향방만은 비록 미등(尾燈)일망정 생(生)의 나아갈 길을 보여 준다. 문제는 문학의 보편성이 그러하듯 작가적 체험의 확대에 있을 것이다. 체험의 진폭이 지닌 한계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문학적 상상력일 것이다. 포스넷이 말한 문학이란 산문이건 운문이건 반성보다는 상상의 결과라는 언명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금번 『수필세계』 신인상 응모에 선(選)에 오른 작품은 김문숙의 「노루와 여우」 외 4편과 박명순의 「별난 손님」 외 4편이다. 이들 작품은 저마다 개성적 특질을 지니고 있으며, 상상과 사유의 깊이가 있고,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사고의 과정을 거쳐 문학적으로 성공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심사위원 전원의 합의를 거쳐 신인상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이르렀다. 앞으로 이들이 펼쳐 나갈 창작 활동에 기대를 건다. 이들 작품의 공통적 특질은 주제 구현에 있어 인간의 이해와 존재 파악이라는 수필문학의 인간학적 목표에 접근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한마디로 실존적 의미망을 짜 가는 이들의 작품 세계를 구체적으로 밝혀 보고자 한다.
2. 인간의 이해와 존재 파악
김문숙의 일련의 수필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에 깔고 있다. 소재는 비록 일상의 평범함에서 취택하였어도 이를 작가의 독특한 시선으로 자기화하고, 행간에 내밀한 의식의 창으로 바라본 존재 해석의 철학을 담고 있다. 수필이 지나치게 사유화되고 서사 중심으로 전개되는 관습적 정형의 틀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의미를 찾으려 하는 장점을 발견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김문숙의 수필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城)을 구축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심사에 오른 다섯 편 모두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치 작품으로서의 완성도가 높다. 수필 「노루와 여우」는 비교와 대조, 대칭적 수법으로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노루와 여우는 동물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개별적인 동물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노루는 순한 모습에 정이 간다. 그 순함이 나에게 부담 없이 다가온다. 내가 지향하는 선함과 공감을 이루며 좋은 이미지를 갖게 해 주었다.라는 노루에 대한 화자의 선함이란 의식과 대조적으로 여우는 먹을 것을 구하러 인근 마을로 내려오거나 산을 넘어야 하는 사람들을 해치기도 하였다. 그날의 여우의 행동은 지금도 아찔한 두려움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언술로 두 동물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대비시켜 마을 산 어귀에서 만났던 노루는 그렇지 않다. 그리움의 여운으로 남아 있다.라는 단정적 제시어로 마무리 짓고 있다. 만일 이 수필이 여기에서 정점에 이르렀다면 그저 이야기 자체에 머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동물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을 교직하면서 여우와 같이 악행을 일삼을 사람보다는 노루같이 선한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선(善) 지향적인 결미를 보여 준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심성이 착한 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성이 악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 이 두 마음이 함께 공존한다. 그것은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한 원천적 본성이다. 이 두 마음은 자신이 지닌 도덕성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표출된다. 사회 속에는 다수가 정해 놓은 가치 규범이 있다. 여우와 같이 악행을 일삼을 사람보다는 노루같이 선한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노루와 여우」에서)
해석과 의미화에 있어 결미의 논리적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며 상징과 여운, 함축보다는 설명을 택한 건조함이 아쉽지만 주제 제시를 위한 논리적 과정이 돋보인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나 가치의 문제는 삶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살되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옳고 가장 보람 있게 살고자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자는 것이다. 사람답게, 사람으로서 옳게 살자는 것이다. 인간은 싫건 좋건 이런 의미를 찾는 동물이며, 그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인간의 삶은 동물의 삶과 구별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내재적 필연성이 있다. 이러한 내재적 요청은 넓은 의미에서의 윤리적 요청일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윤리란 원래 희랍어의 에토스(ethos)란 어휘에서 연유한 것으로 우주나 인간이 가진 거처나 자리를 뜻한다. 그러므로 윤리적 문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문제, 우주 안에서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문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김문숙의 수필은 다분히 아날로그적이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착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모든 것이 물량화, 정보화되어 가는 시대에 인간다운 참다운 인간애에 작가의 시선이 머물고 있음은 작가적 의식으로 보아 바람직하다. 오늘의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점차 비인간화에 오염되게 한다. 기계에 예속된 현대인은 점차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너와 나 사이의 소통은 단절되어 간다. 저마다 자신만의 높은 성채(城砦)를 쌓고 그 안에 안주한다. 그래 우리에게 바람이 있다면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수필 「체 같은 사람」이나 「장독대를 닦으며」가 그러하다. 이 두 수필은 삶에 있어 에토스, 윤리적인 문제와 맥락을 같이한 이웃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체 같은 사람, 화자의 주변엔 그런 이가 있다.
며칠 전에도 그가 우리 집 얼어붙은 수도 공사를 하였다. 마당과 집 안으로 연결된 수도 파이프가 강추위에 그만 얼어붙은 것이다. 그는 연장을 챙겨 댓바람에 달려왔다. 배관이 묻혀 있는 곳을 가늠하여 파고 뒤집어 얼어붙은 곳을 찾아내었다. 더운 물을 계속 부어도 해결이 되지 않자 온풍기를 가져와 더운 열을 쪼이자 비로소 물이 나왔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세탁은커녕 식수도 사용하지 못할 처지였다. 그의 수고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체 같은 사람」에서)
체는 살림살이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물건이다. 껍질과 검불 등 불순물을 가려낸다. 쉴 새 없이 몸을 흔드는 고통이 뒤따라도 알맹이만 남기는 그런 도구다.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체와 같은 이다. 그가 있어 수도 공사도, 보일러 수리도 뚝딱이다. 어디 이것뿐이랴. 집이 부서지거나 누전된 전기선, 전자 제품에서 가스레인지까지 그가 못 고치는 것은 거의 없다. 땅속에 깊이 관정을 박아 물을 끌어올려 쓰는 동네 물탱크가 바닥을 보여도 그는 어느새 나서서 원인을 찾아낸다. 언제든지 부탁 받은 것을 야무지게 고쳐 금세 성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니 그는 체와 같은 사람이다. 마을 일에도 앞장서지만 그는 마을 이장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장애인이다. 약간의 농사와 막노동으로 살며 인정의 도리를 다 지켜 가며 살아가는 사람, 화자의 시선은 그에게 가 닿고 있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고 할머니들만 남아 있는 농촌에 그는 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행간에 담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독자로 하여금 감동케 한다. 아무리 윤리를 외친다 한들 무엇 하랴. 인간으로 살기 위한 내재적 필연성, 인간답게 사는 문제에 작가는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사람은 보여지는 외형만 갖고 평가하는 경우가 태반이다.라지만, 그의 마음씨가 영하의 기온에서도 따스한 인정을 느끼게 한다. 이웃집이 필요로 하는 그가 오늘도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온몸으로 흔들리는 체처럼…….이란 결미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다.
「장독대를 닦으며」는 낯선 부인의 지청구에 몹시 당황하였다. 남의 살림을 간섭하는 태도가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점이 보여도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그런 지적을 하지 않는 법이다.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이 장독대를 닦으라, 마라 하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라는 서두의 긴장감으로부터 출발하여 해소의 과정을 소박하게 그려내었다. 갓 시집온 새댁에게 보낸 낯선 이웃의 충고의 의미를 해석하기까지는 아마도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웃 간의 소박한 인정이 샘솟는 수필이다. 앞서의 「체 같은 사람」이나 「장독대를 닦으며」와 같이 수필은 일상적이지만 일상 이상의 의미를 감지하게 한다. 수필문학은 이렇게 철학적 거대 담론이 아닐지라도 얼어붙은 독자의 가슴을 훈훈하게 덥혀 줄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인간의 이해와 존재 파악은 다른 수필 「관음소심」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기다림으로 꽃피운 관음소심의 마음으로, 「어떤 응답」에서는 믿음과 기다림이란 기표와 기의로 구체화되고 있다. 결국 김문숙의 일련의 수필은 인간의 이해와 존재 파악이라는 실존적 의미망 짜기에 있다고 하겠다. 기대되는 작가가 탄생하지 않았는가.
3. 체험의 통합적 접근
작가의 감각은 항상 다중 감각적이어야 하고, 감성적이고도 지적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체험에 대한 통합적 접근이다. 박명순의 수필은 이런 통합적 접근을 염두에 두고 창작되었다고 하겠다.
박명순의 수필 「별난 손님」과 「인사」는 역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접맥된다. 화자의 삶은 가족 공동체의 해체라는 현대적 가정과는 사뭇 별나다. 「별난 손님」에서와 같이 당숙아저씨, 당숙모가 등장하며, 「못생긴 사과」에서는 손녀가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마음의 빚」에서는 외숙모, 외사촌, 할머니 등의 가족이 거명된다. 그런가 하면 「다듬잇돌」에서는 친정집 가족들이 등장하며, 「인사」에서는 이웃 세탁소 주인이 등장한다. 이는 박명순의 수필이 인간에 통합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수필이 인간에 대한 이해에 일관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인간에 대한 이런 이해는 바로 존재 인식이란 삶의 철학, 인간학과 유관하다. 현대 사회의 일면으로 비추어 보면 그의 수필은 다분히 과거 시점에 국한되어 있고, 전통적 뿌리와 공동체적 인식에 근거한다. 이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동류의식, 가족 공동체를 구심점으로 한 관계 형성에 그의 수필의 자리가 있음을 보여 준다. 핵가족화하고 개인 생활 중심으로 변모해 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역행적 사고가 지배적임을 알게 한다. 수필문학이 인간학이라 한다면 박명순의 수필은 적어도 그 출발이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 근거함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별난 손님」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그리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이미 깊숙한 곳까지 다문화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국경이 무너지고 서로 다른 민족이 공동의 삶을 영위한다. 파생되는 충격도 만만찮다. 이런 문화적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의 혼재는 현대인의 의식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준다. 흑룡강성에서 살고 있는 당숙 내외분이 설날 아침에 중국에서 왔다. 사유의 발단은 제사에서 시작된다.
집으로 모시고 온 당숙은 시아버님이 보고 싶어 하시던 동생이 아니었다. 얼굴도 어릴 때 본 그 얼굴이 아니고 나이가 더 적어서 사촌 동생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일을 잘못했다고 아들에게 화를 내셨다. 그걸 본 아저씨가 가방에서 족보를 꺼냈다. 족보를 보니 시댁에 있는 것과 똑같았다. 아버님이 찾는 사촌 동생은 중국에 가자마자 열병으로 돌아가셨고, 자기는 거기 가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설명을 했다.
문제는 화자와 당숙 내외의 의식의 차이에서 전개된다. 한 달이 지나도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취직을 부탁하기도 한다. 돌아갈 항공료도 없고, 생활비도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 친척이 찾으면 가기만 하면 돈방석에 올라앉는 걸로 중국에서는 알고 있단다. 우리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그저 노부모님의 소원을 풀어 드린다는 마음에서 순수하게 만나 보는 일만 중요시했다. 참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아왔다.고 화자는 독백처럼 서술하고 있다. 끝내 생활비까지 보태어 중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생각의 차이를 안고 중국으로 돌아가신 당숙 부부가 우리를 너무 야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가슴마저 답답해 왔다.는 결미는 문화적 충격에서 오는 이 시대의 고민일 것이다. 논리적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변화의 시대에 우리가 안고 있는 인간의 이해와 존재 파악이라는 점에서 문화적 충격과 갈등의 문제를 무리 없이 전개한 작품이다. 체험의 통합적 접근이라 하겠다.
화자의 집은 고층 아파트 맨 꼭대기에 있다. 오르내리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내리고 화자 혼자서 끝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내리지만 어떤 사람은 벽만 쳐다보다 내릴 지점에서 아무 말 없이 내린다. 좁은 공간에서 성난 사람처럼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수필 「인사」는 이렇게 서두를 풀어내고 있다. 화제는 시골 마을 세탁소 주인과의 얽힌 소소한 이야기이다. 이 수필의 담론과 같이 인사는 서로 간의 예의이자 소통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상당 부분 상호간 소통이 단절되어 있다. 자주 얼굴을 대하면서도 인사가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상호 간의 불신이 있기 마련이고 분위기는 삭막해진다. 화자가 단골로 하던 세탁소를 바꾸었다. 아파트 정문 앞에 새로 세탁소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자연 화자와 단골이었던 세탁소 주인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런 화자의 심정과는 달리 이전 세탁소 주인은 만나면 아는 체 인사를 한다. 화자는 그게 여간 미안하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전 세탁소 앞을 지나다녔다. 그런데 그 세탁소 주인 부부는 여전히 나를 보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자기 집을 찾아오는 사람도 아닌데 모른 척해도 누가 탓할 사람이 없건만 그 집 앞만 지나가도 인사를 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시장을 보고 손에 무거운 짐이라도 들고 오면 얼른 뛰어나와서 짐을 세탁물 배달하는 바구니에 넣어서 오토바이로 우리 집 앞에 갖다주곤 했다. 그러니까 갈수록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화자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고 이어 화해의 기미를 보인다. 단초는 딸애의 혼사 준비로 산더미같이 쌓인 세탁물 처리였다. 화자는 망설이다 그전 세탁소로 전화를 건다. 가까운 곳에 세탁소가 생겼다는 이유로 멀리했던 세탁소와의 소통의 재개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존재 의미를 자각하게 되는 모멘트는 혼사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연스레 복구되고 이를 통한 화자의 해석이 뒤따른다. 날마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면서 인사를 나누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면 그날은 기분이 좋다. 나가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는 여운이 맛깔스럽다. 다소 진부한 결미지만 행간에 담고 있는 의미의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박명순의 실존적 의미망은 이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소재에 대한 철학화다. 수필의 의미화는 이렇게 자신의 인생관과 결부된 삶의 철학이 정서와 혼재하여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 화자에게 있어 변화하는 시속(時俗)은 마중물과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삶을 살기 희원하는 작가의 마음이자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박명순의 수필은 이렇게 체험의 통합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외관에만 치우치는 세태에 비정의 날을 우회적으로 세운 「못생긴 사과」에 대한 통찰이나, 마음의 빚을 영영 갚을 길이 없게 된 사연을 진솔하게 표현한 「마음의 빚」 그리고 다듬잇돌의 회감을 그린 「다듬잇돌」 역시 작가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인간의 이해와 존재 의미의 재해석이라는 두 축을 교직하고 있다. 무리 없이 전개한 수필일 것이다.
4. 나가며
『수필세계』는 이로써 김문숙, 박명순의 탄탄한 두 신인을 수필 문단에 내놓게 되었다. 소재의 해석과 의미화에 있어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앞으로 작가로서의 보폭을 기대할 만하다. 이들 두 신인의 작품들은 비교적 발상의 신선함, 경이적인 착상이 장점일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필이 자기 고백적인 글이긴 하지만 자기도취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문학이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 정신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눈을 통해 타인을 보게 되고 사물을 자기화하여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이는 종국에 가서 실존이란 인간의 문제에 귀결해야 할 것이다.
수필가는 많아도 진정한 수필가는 찾기 힘들다고 한다. 그게 사실인가. 단연코 아니다. 시대를 이끌어 가는 선도자는 여럿이 필요 없다. 물론 수적 강세가 질적 향상을 초치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는 몇몇 사람의 손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그저 빛만 좋다고 모두 살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작가 정신의 여하에 달려 있을 것이다.
두 신인 작가에게 바라건대, 항상 열려 있는 시선으로 대상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드러내는 작가가 되어 주길 당부한다. 열려 있는 두 신인의 새로운 시선에 주목할 일이겠다. <심사평│한상렬>
<신인상 당선 소감>
문장이 준 놀라운 경험
김 문 숙
충북 대전 출생
고령주부독서회 11대, 12대 회장 역임
제1회 경북여협체험수기공모 입상
14인 수필집 『화전과 매화차』 동인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 재학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습니다. 그동안 등단을 꿈꾸어 왔지만 신인상 소식을 듣고 나니 밀물처럼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부족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짱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용기와 열정으로 문을 밀고 들어서서 배우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도 있으리라 각오를 다집니다.
초등학교 삼학년 때 읽은 문장이 준 놀라운 경험이 제게 꿈을 꾸게 했습니다. 학교 교실 뒤편 책장 속에서 꺼내어 읽었던 동시집 속의 한 편의 시가 가슴을 마구 찌르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난생처음 느낀 감정이었습니다. 문장을 통해서 전해진 그 느낌은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나도 그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까지 품게 했습니다. 그 어린 날의 가슴속에 살아 있던 소망을 이루려고 노력을 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자라는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더 정진 하라는 뜻으로 새기며 좋은 글을 쓰면서 열심히 공부해 가겠습니다.
고령주부독서회에서 오랫동안 지켜봐 주시고 문학의 길로 이끌어주신 박진형 선생님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저에게 문학의 기본 바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령공공도서관의 가족들, 그리고 이십 년 전, 독서회를 만들어 주셨던 김태곤 관장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신인상 당선 작품>
노루와 여우 외 4편
김 문 숙
차가 산길로 접어들었다. 휘익 산모롱이를 굽어 돌자 헤드라이트 불빛에 산짐승이 잡혔다. 노루였다. 차창 밖으로 팔을 뻗으면 손에 잡힐 듯하다. 노루는 숲이 끝나는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었다. 아래쪽 길에서 굉음을 내고 올라오는 차 소리를 듣고 일부러 그곳으로 피해 있었던 것일까. 별안간 비쳐지는 휘황한 불빛에 감전된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나는 뜻밖에 노루를 만나 속도를 줄이려다 덜컥 차가 멈춰 섰다. 바로 눈앞에서 야생의 생생한 산짐승을 또렷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노루는 황갈색의 등줄기에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크고 둥근 눈은 순하였다. 몸집이 컸으나 균형이 잡혀 있었다. 내 눈 안으로 들어온 노루의 감동적인 모습을 마음으로 느끼는 순간, 노루는 휙 몸을 틀더니 산 위로 후다닥 뛰기 시작하였다. 몇 번 폴짝거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산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노루를 본 기쁨에 들떴는데 신기루처럼 일순 사라졌다. 한참 동안이나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보물을 잃은 양 가슴이 휑하였다. 이처럼 가까이에서 노루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유롭고 활달한, 미끈한 외형은 건강미가 넘쳤다. 동물원에서 보던 맥 풀린 동물과는 선명히 대조가 되었다.
노루는 순한 모습에 정이 간다. 그 순함이 나에게 부담 없이 다가온다. 내가 지향하는 선함과 공감을 이루며 좋은 이미지를 갖게 해 주었다. 순함과 선함은 서로 조금 다르지만 바탕은 같지 않을까? 비록 동물이지만 그런 뜻에서 정이 생긴다. 이른 봄부터 이 산 저 산에서 커억 커억하며 울어 대는 소리가 들릴 때면 그러한 느낌이 한층 더해진다. 먼 골짜기의 그 울음으로 노루의 존재를 의식하고 함께 공존한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이 산골 동네를 이웃집 나들이 오듯 자주 출몰하는 노루가 그래서 더 정겹다.
어릴 때였다. 추수가 끝나 갈 어느 늦가을,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계신 큰댁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큰 항구 도시에서 늦은 오후 두어 시간 바다를 달려 큰댁 이웃 마을 포구에 내렸다. 큰댁은 노장산 남쪽 농소재를 넘어야 있다. 농소재는 험하게 구불거렸고, 가파르고 높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우리는 선착장을 빠져나와 갯마을을 뒤로하고 산길에 접어들었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업고 선물 보따리를 머리에 이셨고, 나는 어머니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산길이었다. 거친 풀이 다리에 스치기도 하고, 작은 나뭇가지들이 옷을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재 마루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재를 오르는데 다리가 아팠지만 꾹 참고 어머니 뒤를 따랐다. 농소재를 넘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산 중턱까지 올랐을까? 별안간 어머니가 고함을 쳤다.
훠이 훠이 저리 가거라. 저리 안 갈래. 멀리 가거라. 못된 여시야.
다급해진 어머니의 목소리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개처럼 생긴 산짐승이 눈에 들어왔다. 주둥이는 뾰족하고, 털이 수북하며 꼬리는 통통하였다. 두 마리였다. 어두운 털빛을 지닌 여우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휙휙 넘기도 하고, 옆에서 풀쩍풀쩍 뛰기도 하였다. 캥캥하며 음산한 울음소리까지 내었다. 순간 우리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나는 얼른 어머니의 뒤에 숨어 치맛자락만 꼭 붙들고 와들와들 떨었다.
이놈의 여시, 저리 못 가나. 저리 안 갈래. 훠이 훠이.
어머니의 점점 더 다급해진 목소리는 산 아래 골짜기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고함을 질러도 쉽게 가지 않자 돌을 주워 여우를 향해 던지기 시작하였다. 여우들이 잠시 물러나는 듯하더니 우리가 움직이자 다시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는 더 크게 고함을 치고 돌을 주워 연신 내던졌다. 키가 크고 풍채 좋은 어머니의 당당한 행동에 위압을 느꼈던지 여우가 사라졌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 손으로 등허리에 업은 동생을 꼭 받치고, 한 손으로는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정신없이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또 다시 여우들이 나타날까 봐 두려움에 떨며 겨우 재 마루에 오르니 땀에 온몸이 흠씬 젖었다. 이미 날은 캄캄하게 어두워져 아래쪽 바닷가 마을에는 집집마다 불빛들이 깜박이고 있었다.
그때는 깊은 산속에 여우가 흔히 살았다. 먹을 것을 구하러 인근 마을로 내려오거나 산을 넘어야 하는 사람들을 해치기도 하였다. 그날의 여우의 행동은 지금도 아찔한 두려움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마을 산 어귀에서 만났던 노루는 그렇지 않다. 그리움의 여운으로 남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심성이 착한 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성이 악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 이 두 마음이 함께 공존한다. 그것은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한 원천적 본성이다. 이 두 마음은 자신이 지닌 도덕성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표출된다. 사회 속에는 다수가 정해 놓은 가치 규범이 있다. 여우와 같이 악행을 일삼을 사람보다는 노루같이 선한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체 같은 사람
며칠 전에도 그가 우리 집 얼어붙은 수도 공사를 하였다. 마당과 집 안으로 연결된 수도 파이프가 강추위에 그만 얼어붙은 것이다. 그는 연장을 챙겨 댓바람에 달려왔다. 배관이 묻혀 있는 곳을 가늠하여 파고 뒤집어 얼어붙은 곳을 찾아내었다. 더운물을 계속 부어도 해결이 되지 않자 온풍기를 가져와 더운 열을 쪼이자 비로소 물이 나왔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세탁은커녕 식수도 사용하지 못할 처지였다. 그의 수고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좀 전까지 멀쩡하던 보일러가 또 말썽을 부렸다. 갑자기 가동이 뚝 멈춰 집안이 냉골이었다. 다시 그의 손을 빌렸다. 보일러 부속품이 오래되어 못 쓰게 된 것을 단번에 알아내었다. 읍내 먼 거리를 오가며 새 부품을 사다 끼우니 마술처럼 보일러가 다시 가동되었다. 그의 덕분에 집은 따뜻한 온기를 되찾게 되었다.
어디 이것뿐이랴. 집이 부숴지거나 누전된 전기선, 전자 제품에서 가스레인지까지 그가 못 고치는 것은 거의 없다. 땅속에 깊이 관정을 박아 물을 끌어올려 쓰는 동네 물탱크가 바닥을 보여도 그는 어느새 나서서 원인을 찾아낸다. 언제든지 부탁 받은 것을 야무지게 고쳐 금세 성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다 떠나고 없는 농촌 마을은 주로 할머니들뿐이다. 여자들이 고치고 만들고 하는 일에는 대개 문외한이다. 설사 남자들이 있다 해도 그쪽으로 밝지 못하면 그의 도움을 수시로 구한다. 그는 대꾸도 없이 잘도 고쳐 준다. 한번은 친척이 우리 집으로 보리쌀을 가지고 오다가 좁은 논고랑에 트럭을 빠뜨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쩔 줄 몰라 애태우자 마침 곁을 지나가던 그가 대형 트랙터를 끌고 와 쇠줄을 묶어 논고랑에서 트럭을 끌어내 주었다.
그는 마을 일에도 언제나 앞장선다. 마을 길 풀 베기와 경로 잔치, 체육대회의 연례행사인 공동 작업 때 몸을 사리는 법이 없다.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공동 일은 대체로 규모가 커서 경운기며 트럭이 동원되니까 챙겨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동으로 일을 시작하고 끝내야 하므로 자칫 시간을 낭비하기 예사이다. 그러나 그는 바쁜 와중에도 일의 시작과 끝을 혼자 구상해 놓는다. 그는 몸이 재발라 다른 사람보다 몇 곱절이나 빨리 일을 마친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그를 아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는 마을 이장도 아니다. 더군다나 감투를 쓴 유지는 더더욱 아니다. 본래 타고난 성품이 부지런하고 날래며 손재주가 남다르다. 그의 오지랖은 넓어 일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와 원인을 알아보고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렇다고 품삯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은 오랫동안 한동네에 살고 있는 이웃이니 도움을 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긴다. 소신껏 도와주고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긴 세월을 이곳에 살아오면서 그가 없었으면 몹시 불편했을 것이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그는 장애인이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하고, 귀까지 먹었다. 그러나 그는 이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재주꾼 소리를 들었으며 이웃들에게 마음 씀씀이도 남달랐다. 그의 희맑은 눈은 정확하다. 한번 본 것은 대부분 따라 했고, 무엇이든지 혼자서 익히고 깨쳤다. 학교 문 앞에는 가 본 적이 없지만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도 웬만한 것은 의미를 읽어낸다. 어려운 건축물을 쌓는 일과 까다로운 기계도 잘 고친다. 전문 학원에서 배운 적도 없지만 위험한 전기도 척척 잘 고치니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
그는 약간의 농사와 막노동으로 살며 인정의 도리를 다 지켜 가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되었지만 부모님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몸이 불편한 큰형의 적지 않은 농사도 다 거들었고, 사업에 실패한 작은형에게 선뜻 큰돈을 내어 주었다. 그렇다고 자기의 가정사에 소홀하지 않았다. 아들들을 대학까지 보내 번듯하게 키웠다.
사람은 보여지는 외형만 갖고 평가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외형은 단지 보여지는 모습일 뿐이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진다. 장애를 가졌으나 그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장애를 뛰어넘어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 쓰며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의 그가 주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씨가 갸륵했고, 그렇게 살아 있는 모습이 감동스럽다.
나는 그가 사람이 지녀야 할 참된 모습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불우한 처지 속에서도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훈훈한 인정이 피어난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도와주며 오순도순 살아간다.
체는 살림살이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물건이다. 껍질과 검불 등 불순물을 가려낸다. 쉴 새 없이 몸을 흔드는 고통이 뒤따라도 알맹이만 남긴다. 비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이웃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그를 보고 있으면 문득 체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체. 이웃집이 필요로 하는 그가 오늘도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온몸으로 흔들리는 체처럼…….
관음소심
관음소심이 더디게 부풀리던 꽃망울을 터뜨렸다. 살포시 매달린 희디흰 꽃 다섯 송이, 지조 있는 여인이 와서 살포시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자태 또한 향기롭다. 언젠가부터 나는 관음소심을 보면 친척 아주머니를 떠올리곤 한다.
팔순이 넘어 꼬부랑 할머니가 된 아주머니는 우물처럼 깊은 병을 안고 산다. 지나간 젊은 시절을 힘겹게 보낸 탓인지 뇌 질환으로 몇 번이나 쓰러졌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불가능해 북망을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다. 아주머니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열아홉 살이 되자 이웃 마을 총각에게 시집을 갔다. 오종종 많은 시집 식구의 틈바구니에서 딸 하나를 얻었고, 이어 육이오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에게 남쪽으로 밀리기만 하던 전쟁 상황은 한적한 시골의 남자들에게까지도 징집영장이 날아들었다. 스물두 살의 남편이 징집 대상이 되었다. 아저씨는 식구들과 눈물 속에 작별을 하고, 인근 도시로 가 단기간 군사 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전선의 상황이 날로 급박해져 꽃다운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내몰려야만 하였다. 전쟁터로 떠나기 직전 가족 면회가 주어졌다. 시어머니가 집안을 대표로 아들을 면회하였다. 혼자 온 어머니를 보자 아들은 크게 낙담하였다.
어머니 그 사람도 데리고 올 것 아니오.
아범아! 이 난리 통에 새파란 젊은 각시를 어찌 여기까지 데리고 오노.
그래도 그 사람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갔으면 했는데…….
끝내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런 아들을 보자 어머니는 며느리를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시골 구석의 먼 길을 도로 가서 며느리를 다시 데려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기에는 면회 시간 또한 너무나 짧았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아들을 달랬다.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면 얼마든지 볼 테니 부디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너라.
…….
어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며 아들을 전선으로 보냈다.
시어머니에게 남편이 아내를 면회소에 데려오지 않았다고 타박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아주머니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도 면회를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지만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며느리가 막무가내로 따라 나서겠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날마다 속으로 눈물만 삼키며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아내를 끝내 한번 보지 못한 채 전선으로 떠났던 아저씨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전사하고 말았다.
집으로 날아온 날벼락 같은 전사 통지서에 아주머니의 하늘이 무너졌다. 가정의 중심이며 든든한 버팀목, 삶의 의지처였던 가장이 홀연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때 아주머니는 꽃봉오리 같은 스물한 살이었고, 딸은 한 살배기 젖먹이였다.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과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범한 소망을 지녔던 아주머니는 졸지에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버린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고, 불행한 시대, 닥쳐 버린 비정한 현실은 피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시집에서는 아주머니에게 은근히 개가를 종용하였다. 친척들도 그런 분위기로 몰아갔지만 아주머니의 마음은 끄떡도 안 했다.
개가라니 어림도 없다.
평소 꼿꼿한 성격을 더욱 곧추세우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였다. 아주머니의 태도가 워낙 강하여 주위에서 개가라는 말은 점차 숙지근해졌다. 아주머니는 젊은 나이에 전쟁에서 전사한 남편을 애통해했고, 아버지를 잃어버린 어린 딸이 더욱 애처롭게만 생각되었다.
모진 고통의 세월이 이어졌다. 시부모를 봉양하고 딸을 키우며 농사를 짓고 여러 시형제들까지 건사해야 했다. 그러니 남편 없이 혼자 해내야 하는 시집살이는 하루도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청상과부라는 기구한 팔자를 가진 여인의 대명사가 아주머니였다. 혼자된 여인을 죄인으로 생각하던 시골의 관습도 아주머니를 힘들게 했다. 집안의 대소사 때 많은 친척들이 모여 웃음꽃을 피워도 그 자리에 끼일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 사람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갔으면 했는데…….
전선으로 떠나면서 남긴 남편의 마지막 말에 아주머니는 평생을 기대고 살았다. 자신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는 남편에 대한 한 가닥의 믿음, 그 믿음 때문에 아비 없는 딸을 위해 가족의 틀을 깨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저씨가 다 하지 못한 큰아들로서의 도리를 아주머니가 대신 짊어지고 가시투성이 덤불 속을 걸어왔다.
아주머니는 평생 사치를 몰랐다. 불쌍하고 서럽게 죽어 간 아저씨가 가슴에 걸려 좋은 것을 마다했다. 딸과 양며느리가 의복과 귀한 음식을 계속 잇대어도 최소한의 것만 취하고는 모두 물렸다. 맛난 음식을 입에 넣으면 아저씨 생각에 목에 걸렸고, 좋은 옷을 입으면 그것도 가시 옷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주머니는 출중한 외모를 지녔음에도 언제나 거무튀튀했고 야위었다. 이러한 아주머니를 두고 친척과 이웃들이 나무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찌 내 마음을 다 알 것이고. 못 입고 못 먹고 새파란 청춘에 죽어 간 사람도 있는데 그까짓 것이 뭐가 대수인고.
아주머니는 무엇이든지 죽은 아저씨와 연관 지어 생각하였다. 일생 동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남편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런 아주머니가 애처롭기도 했지만 나는 존경스러웠다. 나이 어린 새댁 때 홀로되었으므로 얼마든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건만 온전히 가정을 보듬고 이끌어 왔던 것이다. 자신은 기구한 삶을 살지언정 딸에게만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했고, 아저씨에게도, 한 집안의 며느리로도 몫을 다 한 것 같아서 남다르게 다가왔다. 요즘 세태로 보면 연기처럼 허망한 삶을 부여잡고 살아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불행에 굴하지 않은 소신 있는 삶을 살아왔다. 생이란 대체로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닌가. 전쟁 통에 한 사람이 불행한 국란으로 먼저 죽어 갔지만 남은 한 사람은 반백년의 세월이 더 흘러도 소중한 부부의 연을 지켰다.
세월이 흐른다고 나를 향한 그 마음을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아주머니의 입버릇 같은 이 말은 아저씨를 향한 일편단심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기다림으로 꽃피운 관음소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응답
나는 한때 동양란에 관심이 많았다. 청아한 난 향기를 사랑하였지만 문주란의 향도 함께 느껴 보고 싶었다. 식물의 향기는 경이롭다. 라일락의 향이 그러했고, 백합의 향도 그러했다. 더욱이 그윽한 난향은 말해 무엇 하랴. 신비로운 향기에서 자연의 오묘함을 느끼곤 했다. 그런 연유로 좋은 향기를 지닌 식물을 보면 자연히 곁에 두고 싶어졌다. 그 가운데도 문주란이 갖고 싶었다. 그러나 문주란을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 여러 지인들에게 탐문하여 용케 큼직한 씨앗 한 개를 구하게 되었다.
작은 상자 안에서 고이 겨울을 난 씨앗을 봄이 되어 화분에 옮겨 심었다. 문주란의 알뿌리는 하나였으니 싹을 틔우지 못할까 조바심쳤지만 다행히 튼실한 싹을 밀어내 주었다. 가늘고 긴 어린 싹이 쌍둥이로 올라왔다. 누군가 꽃을 피우려면 반 양지쪽에 두라고 하였다. 우물가 포도 넝쿨 아래 자리를 정하였다. 포도잎들이 문주란에게 강한 햇살을 가려 잎이 상하는 것을 막아 주었고, 넝쿨 사이로 잠깐씩 비치는 햇빛도 적당하였다.
문주란은 자랄수록 잎도 길어지고 키도 커졌다. 옆의 선인장보다 모양새가 더 좋아졌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바깥에 두었으나 별문제가 없었다. 난대성 식물이라 겨울이 되어 놓아둘 장소가 마땅찮았다. 고민 끝에 안채 욕실에 두었으나 비좁아 식구들이 불편해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문주란의 장점을 누누이 설명하며 꽃을 피우면 향기가 좋다고 달랬다. 사 년만 지나면 꽃을 피운다고 하니 식구들도 향기로운 꽃을 볼 기대감으로 불편함을 꾹꾹 누르며 지냈다.
보통 꽃나무는 심은 지 사 년이 되면 꽃을 피운다. 문주란도 그러겠거니 생각하였다. 하지만 문주란은 꽃을 피우지 않았다. 그럴망정 동양란처럼 잎이라도 고상했으면 감상의 대상이 되어 그리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주란의 잎은 넓적하고 길어 멋이 없었다. 겨울이면 무성하던 잎이 모두 졌고, 떼어진 흔적이 보기 흉했다. 식물은 저마다 고유의 외형미를 갖추지만 나는 문주란에게 도저히 좋은 점수를 쳐줄 수가 없었다.
문주란은 어느새 우리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식구들은 갖다 버리라고도 했다. 나는 문주란이 꽃을 피워 줄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 때문에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집에서 쫓겨난 문주란을 미용실로 옮겼다. 꽃을 피우지 않는다고 고심하는 나를 보고, 한 이웃이 쌍둥이는 꽃 피우기가 어렵다고 하며 대궁이 한 개를 툭 떼어내었다. 그 때문인지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러도 문주란은 계속 침묵하였다.
너를 사랑한다. 예쁜 꽃을 피워 주렴.
나는 들며 나며 이런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영양제를 주기도 하고,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옮겨 가며 온 신경을 썼다. 그런 해를 몇 번 더 보낸 올여름, 지극한 정성에 감읍했을까. 어느 날 튼튼한 꽃대가 쑥 올라왔다. 손을 꼽아 세어 보니 십 년은 족히 걸린 것 같았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이 가도 꽃을 피우지 않는 문주란을 보고 내 속은 까맣게 탔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꺼칠한 대궁이 위로 돋아나는 새잎에게 꽃을 피워 주리라 기대했다가 여름을 맥없이 보내 버리고 나면 문주란이 바보 식물처럼 여겨져 체념하기도 하였다. 비좁은 미용실에서마저도 넓게 면적을 차지하니 정말 내다 버려야겠다는 마음에 삿대질까지 하였다.
문주란의 첫 꽃, 두툼한 꽃대가 올라와 엷은 포의를 벗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문주란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며 꽃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가늘고 긴 여러 개의 꽃망울들이 차례로 흰 꽃잎을 열기 시작했고, 천천히 꽃잎이 움직였다. 그 순간을 관찰하는 것은 우주의 오묘한 질서를 새겨 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신비함으로 가득 찬 자연의 조화가 아니면 어찌 식물이 꽃을 피울 수가 있겠나. 기다림에 지쳤던 숱한 시간들도, 꽃을 피우지 않아 실망했던 마음들도 그 순간에 다 떨쳐 버리고 순백의 꽃의 정취에 잠겼다.
꽃잎은 첫 꽃이기에 향기 또한 진했다. 그토록 맡고 싶던 문주란의 향기를 맡을 때 오랫동안 품어 왔던 궁금증이 확 풀렸다. 향기는 결코 난에 뒤지지 않았다. 특유의 고아한 난향을 문주란도 갖고 있었다. 문주란 첫 꽃을 보면서 믿음과 기다림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삶은 어쩌면 믿음과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믿음과 소망을 지니고 살아간다. 문주란 향기를 기대하며 꽃 피우기를 기다린 것은 소소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고 기다린 믿음에 대한 응답 같아 흐뭇했다. 향기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꽃이 필 것이라 믿었고, 꽃을 기다리게 하였다. 믿음과 기다림이 없었다면 결코 얻지 못할 순간이 아니겠는가.
장독대를 닦으며
그날도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집 안이 조용한데 마당에서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웬 낯선 중년 부인이 장독대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나는 부엌을 나서며 예를 갖추려 하자 부인은 혀를 끌끌 찼다.
고운 새색시가 있는 집의 장독간이 윤기가 흘러야지 이리 먼지가 앉아 있으면 남이 흉본다.
나는 갑작스런 낯선 부인의 지청구에 몹시 당황하였다. 남의 살림을 간섭하는 태도가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눈에 거슬리는 점이 보여도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그런 지적을 하지 않는 법이다.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이 장독대를 닦으라, 마라 하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동시에 나의 게으름이 들통이 난 것 같아 순식간에 얼굴이 홍당무로 변해 어쩔 줄 몰랐다. 그러자 부인은 바로 뒷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웃이 남의 살림을 간섭한다고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행여 남의 입에 오르내릴까 걱정이 되어 해 본 말씀이라고 부연하였다.
그제서야 나는 부인께 인사를 하였다. 나는 아직 그 부인과 낯도 익히지 못했고, 친해 본 적이 없건만 새댁인 내가 걱정이 되었다는 말 한마디에 감복하였다. 이웃을 남으로 생각하지 않는 농촌의 생활 관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부인의 넉넉한 인심 때문이었을까? 나를 아주 가깝게 여기고 있었다는 뜻으로 들렸다.
부인이 마당을 나가자 나는 큰 함지박에 물을 떠 와 장독대를 말갛게 씻었다. 먼지가 뽀얗던 독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햇살에 반짝이는 장독대를 흐뭇하게 보고 있자니 부인의 따스한 마음처럼 느껴져 또 한 번 부끄러웠다. 이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아름다운 산천처럼 정이 흐르고 있구나. 이런 생각들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도시에서 자랐다. 도시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처럼 냉정함으로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우리보다 나를 중요시하여 자신은 상대적으로 공허함을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러니 이웃 간의 따스한 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웃집 부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도시의 싸늘한 이웃의 모습이 아니었다. 갓 시집온 새댁을 친척도 아닌데 옆집 부인이 염려한다는 것은 아무나 품을 수 없는 마음이기도 하였다.
이웃집 부인도 나를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충고를 해 주지 않았을까. 마을에서 맨 처음 마음을 트게 되자 수십 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밀해져 갔다. 돌담을 사이에 두고 철마다 수확한 푸성귀며 별미 음식들이 넘나들었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에도 친척처럼 서로 오가며 정을 더했고, 마을에서 나를 감싸 주고 다독여 주는 배려와 친근함은 누구보다 깊었다.
나는 그 부인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그분은 현실을 합리적으로 구분하는 명석함이 있었고, 넘치지 않는 절제와 예의범절이 은연중에 우러나왔다. 나는 어머니처럼 대했다. 옆에 계셨으니 어려운 것들을 상의하고 여쭈어 온 세월이 오래 지났다. 벌써 아이들이 다 컸고, 오랜 시간을 앞뒷집에서 오손도손 함께 보내고 있다.
갓 시집온 새댁에게 낯선 이웃의 충고는 오랫동안 각인되었다. 언제나 생활 속의 일침이었다. 충고할 때 그 부인의 진지한 모습과 옳은 뜻의 말씀은 친정을 떠나 시집온 나에게 부모님의 가르침처럼 느껴졌다. 그 충고를 그냥 흘려버렸다면 나는 어떠했을까? 미숙했던 나의 살림살이는 얼마나 더 시행착오를 겪었을까? 나는 오늘도 장독대를 말끔하게 하려고 애쓴다. 새댁 때의 경험으로 아직도 장독대에 먼지가 앉게 되면 애가 탄다. 짬을 내어 먼지가 낀 장독대를 닦았다. 반질반질해지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신인상 당선 소감>
잃어버린 자아 찾기
박 명 순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대구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어떤 양심」 당선
어젯밤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왜 꿈속에 잠깐 나타나셨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오후, 수필세계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뜻밖의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놀라서 어리둥절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확인해 보아도 제 이름이 틀림없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수필세계 신인상에 응모해 보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수상하신 작가님들의 작품을 읽어 보니 모두 수준 높은 작품들이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뽑는 인원도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을 벼르기만 하다가 올해는 용기를 내서 응모를 해 보았습니다.
수필 쓰기는 저에게는 잃어버린 자아 찾기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허둥대며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수필을 쓰면서 제 자신을 반성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하기 싫은 일도 있습니다. 수필 쓰기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취미가 아닌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의 강요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일기장 검사를 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무서워서 일기를 썼습니다. 그렇게 쓰기 싫은 일기도 매일 쓰다 보니 습관이 되어서 50년이 넘은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일기 쓰기가 수필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작가가 되는 것은 저의 오래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글을 쓰고 생각하고 읽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을 텐데 부족한 제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제가 쓴 글에 대해서 아낌없는 조언을 해 주신 문우님들 고맙습니다.
당선의 기쁨은 잠깐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제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먼 길 돌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걱정이 됩니다. 적어도 저를 도와주신 분들께 실망을 주지는 말아야 할 텐데…….
앞으로 더 좋은 글 쓰라는 뜻으로 알고 처음 글을 쓰는 마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제 글의 가장 큰 약점을 뛰어넘는 참신한 수필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인상 당선 작품>
별난 손님 외 4편
박 명 순
설날 늦은 오후였다. 설 차례를 지내고 나서 대강 치우고 지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당숙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궁금한 듯이 물었다.
조카며느리, 어젯밤 제사는 뭐이고, 오늘 아침에 지낸 제사는 또 뭐이가?
나는 어젯밤 제사는 시증조부님 기제사이고 오늘 아침에 지낸 제사는 설날에 지내는 차례(茶禮)라고 설명을 해 드렸다. 당숙모님도 궁금했는지 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당숙과 당숙모님은 설날 며칠 전에 중국에서 오셨다. 우리 시댁에는 음력 섣달그믐날도 제사가 들어서 그 어른들 보기에 이집에는 날마다 제사만 지내고 사는가 싶어서 속으로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중국에서는 제사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문화혁명 이후로 조상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해서 중국인은 물론이고, 조선족 사회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당숙 아저씨 내외분은 중국 흑룡강성에 사신다.
옛날 일제 강점기 때, 시당숙의 어른께서 살기가 어려워서 가족을 데리고 북간(北間)도로 떠나가셨단다. 그 당시 시아버님과 앞뒷집에서 같이 자랐던 사촌 동생이 있었는데 시아버님은 그 동생을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하셨다. 부모님의 소원이니 자식들은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마침내 흑룡강성에서 살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우리가 부모님을 모시고 중국으로 가서 만나 보게 하려고 했지만, 팔순이 넘은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그쪽 어른들을 초청했다. 연락을 받고 두 분이 오신 것이다.
집으로 모시고 온 당숙은 시아버님이 보고 싶어 하시던 동생이 아니었다. 얼굴도 어릴 때 본 그 얼굴이 아니고 나이가 더 적어서 사촌 동생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일을 잘못했다고 아들에게 화를 내셨다. 그걸 본 아저씨가 가방에서 족보를 꺼냈다. 족보를 보니 시댁에 있는 것과 똑같았다. 아버님이 찾는 사촌 동생은 중국에 가자마자 열병으로 돌아가셨고, 자기는 거기 가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설명을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시아버지는 당숙을 붙들고 펑펑 우셨다. 멀리서 찾아 온 동생을 보니 반가워서 울고, 큰동생이 어려서 돌아가셨다니 불쌍해서 울었다. 우리 식구들 모두가 다 울었다. 말 그대로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정초에는 고향에 모시고 가서 집안 어른들께 인사하고 조상님들 산소에 성묘도 했다. 심심하실까 봐 대구 근교도 모시고 다녔다. 주말에는 경주에 모시고 갔다 왔다.
시아버님은 멀리서 생전 처음 온 사람들이니 이번에 다녀가면 다시는 못 올 사람들이니 섭섭치 않게 잘해 주라고 하셨다. 식구들이 다 나가고 나면 거의가 하루 종일 나하고 같이 있었다. 당숙은 우리말을 좀 하는 편이었는데 억양이 북한 말과 비슷했다. 숙모님은 중국 태족이라 우리말을 잘 못했다. 그래도 살림하는 주부라서 그런지 내가 시장에 다녀오면 물건 값에 관심이 많아서 자꾸 물었다. 내가 중국 말을 모르니까 그럴 때마다 아저씨가 통역을 해 주곤 했었다.
그럭저럭 그 당숙 부부가 온 지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언제 가는지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눈치만 보고 지내던 어느 날, 드디어 당숙이 입을 열었다. 취직을 시켜 달라고 했다. 아저씨 연세가 예순다섯 살이라고 했는데 어디에 취직을 시킨단 말인가? 나이는 많지만 중국에서 협동농장에서 일을 해 봐서 무슨 일이든지 잘할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자기들 취직을 못 시켜 주면 중국에 있는 아들과 딸이라도 큰 회사에 취직시켜 달라고 떼를 썼다.
우리가 자기들을 찾는다고 해서 비싼 항공료 쓰고 와서 중국으로 돌아갈 돈도 없다고 생떼를 썼다.
우리 식구들은 기가 막혔다. 요즈음 한국의 대학 졸업자도 취직을 못해서 큰일인데 중국 사람을 어떻게 취직을 시킨단 말인가? 우리가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쓸지 몰라도 우리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
이 어른들이 한국에서 사촌 형님이 자기들을 찾는다고 하니까 무슨 팔자 고칠 일이 생겼나 해서 그렇게 급하게 왔던 모양이다. 흔히들 말하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면서 날아왔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자기들 나름대로는 많이 실망을 하는 눈치였다.
한국에서 친척이 찾으면 가기만 하면 돈방석에 올라앉는 걸로 중국에서는 알고 있단다. 우리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그저 노부모님의 소원을 풀어 드린다는 마음에서 순수하게 만나 보는 일만 중요시했다. 참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아왔다.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에게 공연한 짓을 해서 자식들 고생만 시켰다고 두 어른이 말다툼을 했다. 한 달 넘게 멀리서 온 손님을 모시느라고 내 나름대로는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아팠다. 결국 왕복 항공료를 물어 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한국에 와서 한 달 넘게 놀았기 때문에 돌아가면 당장에 쓸 생활비도 없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어쩔 수 없이 생활비까지 조금 드려서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내가 종갓집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참으로 많은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고 했지만, 살다가 이런 손님은 처음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친척 간에 서로 만나 보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한 일이 이상한 쪽으로 끝이 났다.
사람을 초대할 때도 급하게 하지 말고 잘 생각해 보고 해야 된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다른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의 생각과 문화의 차이가 컸다.
생각의 차이를 안고 중국으로 돌아가신 당숙 부부가 우리를 너무 야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가슴마저 답답해 왔다.
못생긴 사과
추석이 다가오자 남편이 사과를 사 왔다. 그것도 여느 해와 달리 세 상자나 사 왔다. 추석 차례상에 올릴 사과는 사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상자를 열어 보았다. 속에는 모양이 이상한 사과가 가득 들어 있었다. 옆에 서 있는 남편은 같이 근무하는 직원의 부모님이 과수원을 하고 있는데, 여름철에 우박을 맞아서 사과가 저 모양이 되었다고 했다. 제값 받고 팔지도 못할 것이고 버릴 수도 없어서 사 주게 되었다고 했다. 차례상에도 올리지 못할 사과를 너무 많이 샀다고 잔소리를 했더니 남편은 버럭 화를 냈다.
추석에 아들딸 오면 먹고, 갈 때 싸 주면 되지.
추석 전날, 아들네 식구가 왔다. 며느리 앞에 사과를 한 소쿠리 내어 놓고 깎아 먹으라고 하고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사과가 하나도 줄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며느리에게 멀리서 오느라고 시장할 텐데 왜 안 먹었느냐고 물었다. 며느리 대신 옆에 있던 세 살짜리 손녀가 똑소리 나게 말했다.
할머니, 못생겨서 안 먹을래요.
손녀는 못생겼다. 못생겼다.하면서 사과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어린 손녀가 하는 행동을 보면서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괜히 못생긴 사과를 내놓았다는 후회가 들었다. 유난히 깔끔한 며느리가 이상한 시어머니라고 생각하지나 않았을까? 가난한 시대를 살아온 내가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과는 모양은 못생겼지만 그래도 맛은 있었다. 겉모양이 예쁘지 않아서 어린아이 눈에도 아예 맛이 없게 보였던가보다.
요즈음 세태가 외관에만 치우쳐서 그 속에 있는 참모습을 모르고 지나친다. 사람의 참된 마음보다 우선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포장이 화려해야만 좋은 물건인 줄 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겉모양만 좋으면 그만이다. 못생긴 사과는 맛은 괜찮았지만 겉모습이 아름답지 못해서 어린아이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했다.
추석날 오후 결혼한 딸 내외가 왔다. 딸은 사과를 참 좋아한다. 내가 먹다가 둔 사과를 입으로 가져가기에 기겁을 했다. 딸은 임신 중이었다. 예쁜 과일만 먹어야 할 시기에 못생긴 사과를 먹게 할 수가 없었다.
며느리도 주고 딸도 준다고 사 온 사과는 이제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되었다. 사 온 사람도 안 먹고, 집에 있는 아들도 안 먹으니 나밖에 먹을 사람이 없었다. 깎아서 먹다가 갈아서 먹다가 사과잼도 만들었다. 그래도 사과는 줄어들지를 않았다. 함부로 버리기도 아깝고, 이웃에 나누어 줄 수도 없었다. 계속해서 사과를 먹었더니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태어나서 사과를 그렇게 많이 먹은 적이 없었다. 사과에 아주 질려 버렸다. 나는 남편에게 당분간 사과는 안 먹으리라 푸념을 했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오죽하면 세 상자나 사 오겠나? 보니까 너무 딱하더라.
그런 사과는 아는 사람들이 인정으로 팔아 주는 것이지 낯선 곳에 가서는 팔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농사지은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생해서 지은 사과 농사가 우박을 맞아서 그 모양이 되었으니 우리는 안 사 먹으면 그만이지만 농부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제값 받고 팔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농부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요즈음은 먹는 음식도 예뻐야 인정을 받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마음의 빚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남에게 빚을 지고 산다. 현명한 사람은 마음의 빚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빨리 갚으려고 노력을 한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그 빚을 미루고 살아간다.
내가 여섯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갔을 때였다. 외사촌 오빠들을 따라 강가에 물놀이를 나갔다가 그만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장난을 쳤는지 발을 헛디뎠는지는 생각이 안 나지만, 물에 빠져서 둥둥 떠내려갔다. 깜짝 놀란 외사촌 오빠들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 사람이 빠졌어요!
마침 그때 어떤 젊은 아저씨가 강물에 뛰어들어서 나를 건져 주었다. 어머니는 어린것이 왜 물가에 갔느냐고 꾸중을 하셨고, 이모들은 내가 죽을 뻔했다고 난리였다. 나를 건진 지점에서 조금만 더 떠내려갔으면 물이 깊어서 어른도 빠져 죽는다고 했다. 그 당시 내 기억에는 찬물에 빠졌다가 나와서 추워서 덜덜 떨었던 기억뿐이다. 계절이 늦가을이었다고 했다.
나를 건져 준 그 아저씨는 군청 직원이라고 했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을 하는 중에 사람이 빠졌다고 하니 다급해서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었다. 나와 우리 어머니에게 그 아저씨는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었다. 가끔씩 어머니는 그때 이야기를 하실 때면 꼭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니 아부지만 살아 있었어도 그 양반 양복 한 벌 해 주었을 긴데…….
어머니는 평생을 바쁘게 사시면서도 항상 그 아저씨를 잊지 않으셨다. 어느 날 생각난 김에 우리 모녀가 같이 그 아저씨를 한번 찾아가 보자고 하셨다. 당신 딸을 구해 주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고 하시면서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이미 세월이 수십 년이 흘렀는데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가느냐고 했다. 어머니는 외숙모에게 물어보면 아마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나는 아이가 고3이고 어쩌고 하면서 핑계를 대고 어머니의 말씀을 그저 흘려들었다.
그해 겨울, 딸의 대학 합격 소식을 전한 게 이 세상에서 우리 모녀간의 마지막 대화가 되어버렸다. 내가 이런 저런 핑계로 자꾸 미룬 탓에 어머니는 결국 마음의 빚을 갚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서는 외숙모님의 부음(訃音)을 받았다. 이젠 옛날 그 아저씨를 찾을 수가 있는 인연의 끈을 모두 놓쳤다.
외숙모 문상길에 외가 쪽 친척 할머니를 만났다. 어릴 때부터 자주 보았던 할머니는 나를 보고 아주 반가워했다. 그 할머니에게 혹시나 하고 궁금한 일을 물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할머니는 연세가 많아도 귀는 어둡지 않았고 기억력도 좋았다. 내가 외가에 와서 물에 빠졌던 일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외할머니가 나한테 집에 돌아가서 식구들에게 물에 빠졌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셨단다. 할아버지가 아시면 친정에 가서 아이도 제대로 못 보았다고 어머니가 꾸중을 듣는다고. 그 말을 들으니 어머니께 불효한 일이 또 한 가지가 더해졌다.
친척 할머니에게 그 아저씨가 어디쯤 산다는 말을 듣고 근처를 다 돌아다녔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집집마다 문패도 살펴보아도 내가 찾는 이름의 문패는 없었다. 그 이름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수없이 들어 왔던 이름이다. 어머니는 딸네 집 전화번호는 평생 동안 기억하지 못했어도 그 아저씨 이름은 용케도 기억을 하고 살았다.
몇 시간을 헤매다가 어느 양옥 대문 앞을 지나는데 문패가 고씨였다. 이름은 다르지만 성이 같아서 초인종을 눌렀다. 만약에 그 집이 내가 찾는 집이 아니어도 그 사람을 통하면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네 집을 둘러보고 하니까 할머니는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다. 내가 찾는 사람의 성함을 말하면서 혹시 그분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면서 자기 남편인데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나를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찾아온 용건이 궁금한 듯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어떻게 나를 소개해야 할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먼저 외삼촌 함자를 대고 어릴 때 외가에 왔다가 물에 빠졌는데 이 댁 어른이 건져 주었다고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면서 반가워했다. 오래 전 신혼 때, 남편이 옷이 다 젖어서 들어와서 물어보니 어떤 여자 아이를 건져 주고 왔다고 했단다.
나는 그 어른은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고 살아온 날들이 후회가 되었다. 내가 무슨 큰일을 한다고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가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미 세월이 반백 년이나 흘렀다.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며 울었다. 내가 우니까 할머니도 따라 울었다. 나는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고 할머니는 남편 생각에 울었을 것이다. 눈물을 훔치고 나서 우리 어머니가 당신 딸을 구해 주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다고 평생을 미안해하셨다고 했다. 어머니가 벌써부터 찾아뵙자고 했는데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가 이제야 왔다고 했다. 내 말에 그 할머니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때 모친이 우리 집 양반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고 하던데, 그리고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누구라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겠지.
할머니 말을 듣고 보니 어머니가 인사를 제대로 못 했다는 뜻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외가에서 우리 집으로 올 때 그 아저씨를 만나지 않은 줄 알고 살아왔었다. 말로는 당신 마음을 표시했지만 형편이 안되어서 아무런 대가를 표시하지 못했다는 그런 뜻인 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아무나 입을 수 없었던 비싼 양복을 다 버렸으니 그게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항상 커다란 빚으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결국 그 빚을 갚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건 어머니의 빚만이 아닌 내 빚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 역시 그 빚을 영영 갚을 길이 없게 되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할 대상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듬잇돌
친정집을 수리하려고 집 정리를 하다가 다듬잇돌을 찾아냈다. 비록 오래된 물건이라 볼품은 없어도 어머니가 생전에 아끼던 물건이었다.
어머니가 못내 그 다듬잇돌을 평생 옆에 두고 산 것은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갓 철이 들었을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웬 낯선 아저씨가 우리 집 안채를 들여다보았다. 등에는 새카만 다듬잇돌을 밧줄에 묶어서 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상한 아저씨가 바깥마당에 와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아저씨를 보고 아주 반가워하시며 말씀하셨다.
이게 누구신가? 무거운데 얼른 내려놓게.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아저씨는 다듬잇돌과 박달나무 방망이 한 쌍(두 개)을 내려놓았다.
그날 아저씨는 우리 어머니가 차려 주는 점심을 먹고 차비도 얻어서 돌아갔다. 아저씨가 돌아간 뒤 어머니는 다듬잇돌을 자꾸 쓰다듬었다. 어린 내 눈에는 별것도 아닌 물건을 어머니는 무슨 보물인 양 쓰다듬었다.
다듬잇돌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우리 집에 와서부터 갈 때까지 말 한마디도 안 하고 간 그 아저씨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내가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머니는 왜 그렇게 반가워하시는지.
옛날에, 어머니가 외가에서 자랄 때, 월선이란 몸종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사대부 집안에는 노비가 있었다. 월선이는 우리 어머니보다 두 살 많은 사람으로 어머니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었다. 월선이의 부모도 외가의 노비로 있었고, 월선이도 자기 부모의 신분을 따라서 종이 되었다. 어머니가 태어나서부터 월선이와 함께 자라났으니, 주종(主從)의 관계를 떠나서 친자매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니의 몸종으로 월선이를 우리 집으로 보냈다. 어머니의 교전비였다. 어머니를 따라서 우리 집으로 왔으니 우리 집 종이 되었다. 월선이는 천성이 착하고 부지런해서 우리 할머니께서 늘 칭찬을 하셨다.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가던 중에 6․25전쟁이 터졌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우리 아버지와 고등학생이던 막내 삼촌이 전쟁 통에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장성한 아들을 잃고 상심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도 두 아들 생각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셨고, 길게 탄식을 하셨다.
내 평생 남한테 모질게 한 일이 없는데…….
할아버지는 종을 너무 부려 먹어서 그 죗값을 받은 거라고 생각을 하셨던지 문중 회의를 해서 종들을 다 내보내기로 하셨다.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자기들 마음대로 가서 살라고 했다. 사돈댁에서 며느리가 시집올 때 보내 준 월선이도 자유롭게 보내 주기로 작정을 했다. 마땅한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니 나이도 많고 종의 신분이라 좋은 자리가 없었다. 결국 동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시집을 보냈다. 남편은 나이도 많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땅도 없고, 직업은 석공이라고 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 어머니가 월선이의 안부가 너무 궁금해서 물어물어 월선 아주머니네 집을 찾아갔다. 월선 아주머니는 어머니를 보고 맨발로 달려 나와서 껴안고 펑펑 울었다.
거기를 다녀오신 어머니는 시골 장날이면 쌀을 한 자루 이고 장에 가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어머니는 쌀을 장에 팔러 간 게 아니라 월선 아주머니네 집에 갖다주고 오신 것이었다. 아이들은 올망졸망한데 땅도 없고 하루 종일 돌을 다듬어 봐야 벌이도 안될 건 뻔하고 아이들 밥이라도 배부르게 먹이라고 그랬을 것이다.
우리 집 다듬잇돌은 그 석공 아저씨가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서 자기 정성껏 다듬어서 지고 온 것이다.
어머니는 그 다듬잇돌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먼지가 앉을까 봐 천으로 덮개를 만들어서 씌워 놓았다. 또 가끔씩은 다듬잇돌을 쓰다듬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그때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아마 당신이 친정에서 월선이와 함께 유복하게 자라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키셨을지도 모른다.
먼지투성이인 다듬잇돌을 깨끗이 씻어서 방망이와 함께 정리했다. 전에는 무심코 보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참 잘 다듬었다. 그 단단한 돌덩이를 어쩌면 저렇게 매끈하게 잘 다듬었을까.
이제는 만들어 준 사람도, 요긴하게 잘 쓰던 사람도 다 떠나고 다듬잇돌만 남았다. 바라보는 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인사
우리 집은 고층 아파트의 맨 꼭대기에 있다. 1층에서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다른 사람들은 다 내리고 나 혼자 끝까지 올라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사를 하고 내리지만 어떤 사람은 벽만 쳐다보고 섰다가 자기가 내릴 지점에서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내린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거나 낯선 사람에게 인사를 하기가 쑥스러워서 그럴 것이다. 그래도 좁은 공간에서 성난 사람처럼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오래 전에 어떤 단체에서 먼저 인사합시다.라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걸 보고 혼자 많이 웃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인사를 잘 하지 않았으면 저런 운동까지 벌이게 되었을까?
어릴 때, 시골집에는 이웃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었다. 별다른 음식을 해서 들고 오기도 하고, 농기구를 빌리러 오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보니까 처음 볼 때 인사를 하면 그다음에는 저절로 인사를 잘 안 하게 되었다. 볼 때마다 인사를 하는 것도 쑥스럽고 받는 사람도 많이 귀찮을 것 같아서였다.
어느 날 오후 큰집 당숙께서 우리 집에 오셨다. 아침에도 다녀가신 터라 나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할아버지께서 그 모습을 보셨다. 아침에 인사를 했다고 변명을 해도 할아버지는 하루에 몇 번이고 만날 때마다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아이들이 인사를 잘 안 하면 그 집 어른들이 욕을 먹는다고 하셨다.
우리 동네 입구에 세탁소가 있다. 이 동네로 이사를 온 후로 계속해서 그 집에 세탁물을 맡겼다. 나는 성격이 고지식해서 웬만해서는 단골을 잘 바꾸지 않는다. 그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세탁소를 바꾸었다. 아파트 정문 앞에 새로 세탁소가 생긴 것이다. 원래 중국 음식점을 하던 자리인데 경기가 좋지 않으니까 그 자리에 세탁소가 들어섰다. 사람의 본성이 편한 것을 좇는지라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운 집에 세탁물을 맡기게 되었다.
몇 달 동안을 그전 세탁소에 가지 않으니까 그 주인 부부도 내가 다른 집에 가는 걸 알았을 것이다. 같은 업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네 경쟁 업체가 생겼다는 걸 모를 까닭이 없다. 내가 가까운 세탁소를 이용한다는 것도 짐작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전 세탁소 앞을 지나다녔다. 그런데 그 세탁소 주인 부부는 여전히 나를 보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자기 집을 찾아오는 사람도 아닌데 모른 척해도 누가 탓할 사람이 없건만 그 집 앞만 지나가도 인사를 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시장을 보고 손에 무거운 짐이라도 들고 오면 얼른 뛰어나와서 짐을 세탁물 배달하는 바구니에 넣어서 오토바이로 우리 집 앞에 갖다주곤 했다. 그러니까 갈수록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딸의 혼사를 앞두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느라 세탁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전 세탁소로 전화를 했다. 그러고 나니 내 마음이 편했다. 그 사람은 오랫동안 우리 식구들 옷을 세탁했어도 무슨 실수를 하거나 불친절하게 한 적이 없었다. 다만 가까운 곳에 세탁소가 생겼다는 이유로 내가 그 집을 외면했던 것이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인사를 하니 내가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 세탁소에 다시 오라고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집으로 가는 사람에게 어떻게 인사하고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못 할 것 같다.
우리는 잘 아는 사람에게는 인사를 반갑게 잘한다. 낯을 가려서일까?
외국인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웃으며 인사를 하는 걸 보았다. 문화의 차이 때문인지 생활 습관의 차이인지 모르지만 좋은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날마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면서 인사를 나누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면 그날은 기분이 좋다.
나가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