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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서 숙
│대표 작품│
일부러 길을 잃다 외 4편
서 숙
고만고만한 시멘트 건물들이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란히 키 재기를 했다. 그 거리를 노후한 버스와 트럭들이 쿨룩쿨룩 해소 기침으로 헐떡이며 내빼고 나면, 꽁무니에 흙먼지와 함께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희뿌옇게 번지는 매연 저편에는 논과 밭과 그리고 소달구지가 있었다. 이렇게 도심을 향해 뻗어 있는 서울 외곽의 아스팔트 길 이편과 저편은 불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시와 농촌으로 확연히 모습을 달리하였다. 날림으로 세워진 도시는 어설프게 졸속을 드러내고, 풍상으로 납작 엎드린 농촌은 붉은 민둥산을 배경으로 남루를 걸쳤다.
집과 학교가 길 이편에 있는 아이들이 평소에 길 저편으로 가 보는 일은 드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의 여자 아이들 다섯 명은 그날 학교를 마치고 약수터가 있는 시골 길로 나가 보기로 했다. 뭔가 새로운 놀이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멀리 구릉들을 두르고 시야 가득 펼쳐진 들판에 좁고 꼬불꼬불한 수로가 이어졌다. 아이들은 그 수로를 따라 벌판을 가로질러 이내 제법 수량이 풍부한 시냇물을 만났다. 냇물이 흘러온 쪽으로 경사가 급한 둔덕 너머를 차지한 저수지는 짙은 초록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잠겨 있었다.
마침내 관악산 줄기 아래 턱에 약수터가 나타났다. 앞자락이 제법 널찍하면서도 아늑하여 놀이터로 안성맞춤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에서, 아이들은 그중 가장 넓적하고 평편한 것 하나를 차지했다. 그 즈음 아이들은 연극놀이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책가방을 한데 수북이 쌓아 놓고 그 바위를 노천극장의 간이 무대로 삼아, 「신데렐라」와 「장화홍련전」이 적당히 섞인 연극을 공연하였다.
무대를 내려와서는 논둑과 밭고랑을 헤매며 한참을 신나게 뛰어다녔건만, 들꽃을 한 움큼씩 꺾어 들었을 즈음, 종내에는 노는 것이 시들했어도 아무도 집에 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해는 아직도 한 뼘이나 남아 있었는데, 어차피 날이 저물 때까지는 누구네 집에서도 아이들을 찾지 않을 터였고, 지금 집에 가 봐야 갓난아기 동생을 업어 주든가 하는 귀찮은 일만 기다릴 것이었다.
메뚜기 사냥으로 소란스럽던 한 무리의 사내아이들이 우르르 어딘가로 몰려가 버리고 나니 갑자기 하오의 정적이 찾아왔다. 도대체 어른들은 다 어디로 숨어 버렸을까. 벼 이삭은 누렇게 영그는데 오늘따라 참새들도 어느 곳에서 포식을 하고 오수를 즐기는가, 간간이 서 있는 허수아비들만 무료하게 먼 산 바라기를 하고 힘없이 흔들리는 깡통 소리에 오히려 사위가 적막했다. 짧은 순간 다섯 명의 조숙한 여자 아이들은 동시에 궁리하는 눈빛이 되었다.
“우리 한번 길 잃어 볼래?”
한 소녀의 제안에 여덟 개의 눈동자가 일순 반짝했다. 그 아이가 능선 쪽을 손가락질했다. 저 능선 너머 한 번도 안 가 본 곳으로 가 보자고 했다. 들풀 더미를 무슨 영예의 꽃다발쯤으로 가슴에 안고, 그들 다섯 명의 여자 아이들은 한 줄로 나란히 낯선 길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 가을날 오후의 숲길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듬성듬성 성근, 그저 조용할 뿐인 산속에서, 어지간히 놀이에 지쳤는지 긴장 때문이었는지, 아이들은 재잘거리던 것도 멈추고 좁은 오솔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었다. 미지의 길을 찾아 나선 소녀들의 모험은 그런데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얼마 가지 않아 숭실대학교의 뒷마당에 당도한 것이다. 다시 그들에게 익숙한, 길 이편의 도시로 건너온 것이다.
그래도 대학 교정은 그들에게 그럭저럭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는 했으며, 마침 산책하고 있던 대학생 한 명과 말을 나누게 되었다. 그도 몹시 무료한 참이었던지, 얇은 눈꺼풀이 선량해 보였던 그는 아이들에게 썩 친절했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의 질문도 하고 그의 안내로 학교 이곳저곳을 구경하였다. 신학생이었던 그는 진지한 충고도 하였다. 조금 있으면 6학년인데 말만 한 처녀애들이 어디를 이렇게 쏘다니느냐, 공부를 해야지. 여자 애들은 그 말에 대놓고 시큰둥했어도, 그는 퍽 관대하여서 심심하면 다시 놀러 와라, 싱긋 웃어 주었다.
그 교정을 나올 때, 낯선 세계에 한 발 내디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막연한 기대감에는 한참 못 미쳤다. 그래서였는지 그 길 잃기 이후 아이들은 신학생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쏘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놀이를 시작했다. 연극놀이는 아무래도 소꿉장난에 불과한 것 같아서 집어치우고, 좀 더 어른스럽고 멋진 일로 여겨지는 소설 쓰기라는 새로운 놀이에 몰두하였다.
동시나 작문이 아닌 줄거리를 갖춘 글을 한 편씩 쓰기로 했는데, 능선 너머 길 잃기를 유도하였던 아이도 그의 첫 번째 소설을 시도하였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유괴 사건과 삼각관계가 뒤얽힌 것으로, 소녀는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이라고 자신하였다. 열심히 쓴 것을 수업 시간 중에 아이들에게 돌려 보이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선생님은 그저 말없이 빼앗아 가셨다가 나중에 돌려주셨을 뿐 어떤 꾸중도 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소녀는 그런 선생님이 몹시 야속하였다. 수업 중에 딴 짓 한다고 야단을 치시더라도 글은 재미있었다는 말씀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때 아마도 내심 실망이 대단하였나 보다. 선생님에게 무시당한 소녀의 소설은 이내 주인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짧은 창작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렇게 소녀의 두 번째 길 잃기도 맥없이 끝났다.
소녀는 우물 터를 지나고 성황당 고갯길을 넘어 학교에 다녔다. 그 다져진 황토의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은 어느새 시멘트로 메워졌다. 이제는 비가 내려도 운동화에 진흙이 달라붙지 않아서 좋았다. 더구나 그 시멘트 길을 따라 시설이 훌륭한 목욕탕도 문을 열었으므로 소녀는 목욕을 위해 멀리 가지 않아도 되었다.
단지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이면 길바닥을 뒤덮다시피 출몰하는 지렁이들이 성가셨다. 징그럽고 싫었다. 밟을까 봐 겁을 내며 소녀는 지렁이들에게 짜증을 냈다. ‘뭣 땜에 이렇게 나와 도는 거야. 그래 봐야 땡볕에 말라 죽기밖에 더 하겠니. 그냥 편안하게 땅속에 있을 것이지. 에구, 한심한 것들.’ 지렁이에게 길을 잃지 말라고 야단을 치면서 소녀도 더는 낯선 길을 찾아들어 길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하지 않게 되었다.
친구들은 성적순으로 각각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여 뿔뿔이 흩어졌으며,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져 갔다. 이제 소녀는 학교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초등학교 가는 길과 반대로 나 있는 쭉 뻗은 신작로로 갔다. 넓은 길은 고갯마루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 너머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눈에 안 보여도 빤한 길이었다. 그리고 일단 고갯마루에 서면 오종종하고 궁색한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신작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길에서 딱히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쉽고 편한 길을 그냥 걸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한 안테나를 거두었다. 그때 그 아이는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는’, 일견 평탄할 것 같은 노정은 그저 착각일 뿐, 매일매일 노심초사하며 그다지 편안하지 않은 일상에 기대어 시간도 삶도 속절없다고 애석해 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끝내 길을 잃지 못하고야 마는 자의 막막하고 울울적적한 심사만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신록의 노래
천년을 기다려 꽃으로 피어났을 것입니다. 또다시 천 년의 세월을 더하여 그 빛깔과 그 모습에 어울리는 향기를 지니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 방울의 물과 한 움큼의 햇빛으로 빚어낸 기적, 날마다 기적입니다. 연하고 연한 순하고 순한 그대 꽃봉오리의 기적을 본받아 나도 나의 기적을 짓습니다. 나도 한 방울의 물과 한 줌의 햇빛으로 연하고 연한 순하고 순한 새 움을 틔워 신록으로 세상을 맞습니다.
오랜 세월의 원(願)을 새겨 얻은 귀한 모습이어서일까요. 당신은 너무나 보드랍고 가냘파서 미풍에도 견디지 못할 것 같군요. 그대가 행여 다칠까 봐 조심조심 감싸고 싶은데 가까이 가지 못하겠습니다. 그대 섬세한 살갗은 가볍게 스치기만 하여도 멍이 들고 살짝 닿기만 하여도 상처를 입을 테니까요. 그대를 지척에 두고도 마냥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어 나는 애가 탑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바라보고 지켜볼 수 있어서 말할 수 없이 행복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사랑에 눈멀어 그대가 아름답게 보이는 게 아니라,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나는 당신이 아름다워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니까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그냥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사랑에 눈멀어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것은 당신이 지닌 간결함 때문입니다. 욕심의 군더더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은 그 무엇에도 헤프지 않습니다. 슬픔에도 일그러지지 않고 기쁨에도 들뜨지 않습니다. 당신의 절제가 눈부시어 나의 눈매가 가늘어집니다. 한때는 사랑의 밀어를 간절히 원할 때도 있었으나, 당신의 간결함과 당신의 절제를 배워 이제는 그저 말없이 충만한 합일의 기쁨을 누릴 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그러한 간결함과 절제로 나의 심중을 헤아립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나는 당신이 제일 어여쁩니다.’라고 기쁘게 알아듣고, 내가 당신을 아름답다고 말하면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즐겁게 알아듣습니다.
내 안의 소년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열렬히 그대를 사랑하는 일에만 열중할 뿐입니다. 그대 안의 소녀가 배시시 어여쁜 웃음으로 나의 사랑에 화답합니다. 그대가 내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 그리고 세상의 많은 것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신이 내게 무한히 너그럽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대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그대의 말을 가슴 깊이 명심합니다. 내 안의 순정, 순수, 내 속에 들어 있는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이 그대를 만날 때면 표정도 선명하게 파릇파릇한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때의 모습은 청순하여도 당신은 마냥 다소곳하지만은 않아요. 깜찍한 눈웃음으로 애교도 부릴 줄 알고, 가벼운 투정으로 응석도 곧잘 부립니다. 달빛이 은은할 때엔 요염한 자태를 뽐내기도 하지요. 때로 당신은 꽃잎 팔랑이며 바람과 희롱하고 도란도란 벌 나비와 소곤거리느라고 내가 다가가도 알아채지도 못합니다. 나는 시무룩하여 괜스레 아직 깨어나지 않고 나뭇등걸에 붙어 있는 애벌레의 고치를 집적거려 봅니다. 예쁘고 귀엽고 앙큼하고 매정한 그대, 그대는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 나를 꼼짝 못하게 옭아맵니까?
며칠 동안 봄볕이 좋더니 어젯밤에는 제법 큰비가 내렸습니다. 비바람에 그대 지쳐 쓰러질까 봐 나는 가슴을 졸였습니다. 그래도 의연히 말갛게 씻긴 얼굴로 그 역경에도 당신은 억세어지지도 거칠어지지도 않고 순한 모습 그대로 아침 햇살 아래 연한 꽃잎이 곱습니다. 산들바람에도 바르르 미세한 떨림이 애처로웠건만 폭풍우를 견뎌내는 모습에 나는 오로지 당신이 대견할 뿐입니다. 내가 기뻐하니 나의 몸에도 저절로 윤기가 흐릅니다. 그대를 사랑하다가 나는 드디어 온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저절로 깨우치게 되었나 봅니다. 내 몸은 어느새 이렇듯 천지에 위안을 주는 녹색으로 세상을 덮게 되었으니까요. 사랑이 지극하면 아름다움으로 현현한다고 하던가요.
어느덧 당신의 얼굴에 어쩔 수 없이 드리우는 허무의 그림자를 나는 가슴 아프게 지켜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나는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가실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훌쩍 가 버릴 것이라는 것도 나는 알아요. 그대 가세요. 미지의 세계를 돌아 오랜 기도로 한 하늘이 열리면 당신은 빛의 날개를 달고 구름 속의 햇살처럼 다시 돌아올 것도 나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대가 먼 길 마다 않고 찾아오면 나도 그때까지 휘돌아 온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삶의 의지로 하늘 향해 치솟는 것이나 날로 짙은 음영을 드리우는 것은 오직 당신 향한 그리움 때문입니다.
그리워서, 그리워서 그리움이 목까지 차 오르면 터져 나오는 꽃망울……. 이제 나는 기다림을 준비해야 하나 봅니다. 애달픈 내 마음은 그대에 대한 기억으로 시름을 잊고 다만 그리움으로 푸르러, 푸르러.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렸다
아침부터 내내 찌무룩하더니 그예 빗방울이 듣는다. 눅진한 하오에 한바탕의 비가 반가울 법도 한데 손에 우산이 들려 있지 않아 난처하다.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할까 잠시 생각했으나 청회색 낮은 하늘을 보아 지나가는 비는 아닌 것 같다. 집까지는 십여 분 족히 걸릴 테니 빗발이 세차지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겠다.
그런데 그만 얼마 안 가 빗줄기가 굵어진다. 이제는 기다란 담벼락만 이어질 뿐 쉬어 갈 처마 밑도 없건만 거리는 순식간에 한밤중처럼 캄캄해지고 빗물은 숫제 쏟아 붓는다. 얇은 여름옷 차림이라 금방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이왕에 젖고 나니까 에라 모르겠다, 그런대로 시원한 해방감이 찾아온다. 젖은 샌들에 발이 미끄럽다. 핑계 김에 천천히 걷는데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 위로 흐르는 빗물이 상쾌하다.
잠시 억수로 쏟아지던 비가 대충 잦아든다. 좀 전의 장대비 덕분에 거리에는 인적이 뚝 끊겼다. 널장구름 무거운 짐 부려 놓고 약간 뿌예진 하늘 아래 빈 거리에서, 이제는 아예 비 맞는 것을 즐기며 더욱 느리게 발걸음을 뗀다. 폭우 뒤에 잦아드는 비처럼 버거운 내 청춘도 그렇게 지나가는구나, 이런 저런 생각을 늘어놓으며 제멋대로 여유를 부리며 걷는데, 누군가가 등 뒤 어디쯤에서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야, 좀 뛰어라!”
그리고는 그 남자는 볼멘소리로 계속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비가 오면 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냐, 뭐가 그렇게 잘났어. 대충 그런 말인 것 같다. 저절로 피식 실소가 터진다. 실성한 여자로 보일까 봐 웃음을 참으며 나는 그저 앞만 보고 여전히 느릿느릿 나아간다. 내막이야 어떻든 누군가에게 도도하고 당당하게 여겨진다는 것이 내 허영심을 적이 만족시킨다. 그럭저럭 집에 거의 다 왔다.
찻집에서 친구와 아가씨다운 재잘거림이 한창인 중에 맞은편 테이블의 청년이 심상치 않다.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꽤 오래 그러고 있었던 모양으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상당히 노골적이다. 앞자리의 일행과 별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지도 않고, 작정한 듯 시선은 내게 고정시킨 채로다.
그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진 내가 영문도 모르는 친구를 채근하여 찻집을 떠나려는데, 어느새 그가 옆으로 다가와 내 바바리 주머니에 쪽지를 찔러 넣는다. 모일 모시에 이 장소에 나와서 기다리겠다는 짧은 메모다. ‘이런 흔한 수법이야, 뭐.’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려는데 내 마음이 약간 흔들린다. 그의 외모가 상당히 수려하기 때문이다. 학생 차림의 그는 잘생긴 얼굴에 체격도 좋고 옷차림도 단정하여 썩 호감이 간다.
좋은 인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그곳에 나가지 않았다. 뿐더러 그와 다시 마주치게 될까 봐 자주 가던 찻집이었건만 발길을 끊었다.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기대 밖의 다른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한편, 스스로 고고한 척하느라고 그랬지 싶다. 그런데 한참 훗날 그 찻집에 다시 가게 되었을 때, 혹시 그가 와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렸다.
신혼 초, 다소곳이 새색시 노릇 하느라 신접살림을 차린 대전의 셋집에서 서울 시댁까지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일을 마치고 대전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올랐는데, 이날따라 몹시 피곤하였나 보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하염없이 졸았다.
어느 때 퍼뜩 눈을 떴다. 나는 어이없게도 낯선 남자의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옆자리에 말끔한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앉았던 것 같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는데 침 한 줄기가 그의 진솔처럼 보이는 윗도리에 흐르고 있다. 손수건을 꺼내어 황급히 그의 옷에 묻은 침을 닦고 내 입술에 묻은 침도 닦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제대로 했는지 어쨌는지 아무튼 경황이 없었다.
그의 어깨에 얼마 동안이나 기대 있었는지 알 수야 없지만 급기야 침까지 흘리니까 안 되겠다 싶어 그가 기척을 내고 그 서슬에 내가 깨어난 모양이다. ‘아휴, 이렇게 무안하고 황망할 수가.’ 그런데 의외로 그는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는 가운데 과히 싫지는 않은 것 같고, 그뿐 아니라 상황에 걸맞지 않게도 설렘이라든가 호감이라든가 하는 꽤 좋은 분위기를 풍긴다. 나는 물론 헤어질 때는 제대로 고개를 못 들고 허겁지겁 터미널을 빠져나왔지만, 내게 남겨진 것은 민망함보다는 모종의 향기로운 여운이다.
런던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다. 옆자리의 중년 신사와 이런 저런 짧은 신상의 얘기를 나눈다. 그는 출장 길이고, 나는 대학에 다니는 딸을 돌보러 가는 길이다. 책을 조금 읽다가 두 다리를 좁은 의자 위에 끌어올려 겹치고 쪼그린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살포시 잠이 들려고 하는데 어떤 손길이 느껴진다. 눈을 감고 있어도 옆 사람이 조심스럽게 내 발치에 담요를 덮어 주고 꼼꼼히 여며 주는 모습이 선명하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나에게 닿지 않게 몸을 곧추세우고 내 자리를 지나 복도로 나간다. 그는 빈자리 하나 없는 만원의 비행기 어느 곳에서 서성거리는지 한참을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좁은 좌석에서 자신의 자리를 비워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배려 같다. ‘다리 뻗고 편히 주무세요.’라는 그의 심중이 읽혀진다. 나를 깨우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만 잠이 달아났지만, 그가 여며 준 담요 자락이 풀어질까 봐 자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웅크린 채로 가만히 있는데 마음이 참 포근하다.
때로 삶을 기로에 서게 할 만큼 큰 사건이, 신기할 정도로, 어느 틈에 까맣게 뇌리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반면에 짧게 스쳐 지나갔을 뿐인 사소하기 그지없는 순간들이 오래 사라지지 않는 기억들이 되어, 마치 모래밭에 묻혀 있다가 어느 때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사금파리처럼, 문득문득 내 마음에 빛을 뿌려 준다. 그것은 어느 한 나절에 노래 한 소절, 시 한 구절이나 잠언 한 토막, 영화의 한 장면이 맥락 없이 몇 시간이고 마음속을 맴돌 때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조용히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이 작은 기억들의 속삭임 속에는 거의 반드시 내가 그에 붙들린 이유들이 있다. 그러니까 그때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 가운데는 아마 내가 삶 속에서 소망하는 것, 세상의 안팎으로 찾아 헤매는 것, 사람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연애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가. 그래서 그 환상의 단초를 위의 에피소드들이 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 두서없이 떠올라 뒤섞인 기억은 상상으로 펼쳐 보는 연애소설의 서막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나의 소설은 일어나지 않았던 일의 후일담으로 전개된다. 비 맞던 날, 목소리의 주인공과 설전을 벌이고 그를 계기로 괴팍한 두 남녀의 맹렬한 연애가 불꽃을 튀긴다. 혹은 찻집에서 두리번거리는 대신에 모월 모시에 나타나 자신의 감정에 좀 더 충실한 모습으로 고전적이고도 감미로운 연애를 펼친다. 우산이 없어 맨몸으로 비를 맞다가도, 찻집에서 친구와 차를 마시다가도, 버스에서의 동석이 계기가 되어서도 연애는 시작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이상적인 이성의 모습이 투영되고 이루어지기 힘든 희망 사항이 나열되며 떨쳐 버릴 수 없는 미련이 앙금을 남긴다. 자기 안의 진실이 타인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쳐지는 오해, 우연한 만남 속에 새로운 이끌림을 발견하는 경이로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 반면에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 작은 친절과 호의와 관심과 배려가 큰 울림으로 다가서는 풍경, 그 연애소설에는 이런 것들이 들어 있다.
사람과의 만남 중에 가장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바로 연애 감정이다. 그렇지만 모든 벌어지는 일들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말이 맞기도 하다. 하지만 필연적인 만남이라고 해도 상대를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상대에게 끝내 밝힐 수 없는 진실이 있을 수 있고, 이해와 관용 이면에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간극이 생기기도 한다.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기도 하고, 이해하지만 동감할 수 없기도 하다. 가장 이타적인 것이 사랑의 감정이지만, 가장 이기적이 되고 싶은 것도 사랑의 모습이다. 이런 모든 갈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기울이는 열정 중에서 연애가 가장 아름답다, 그처럼 순수한 마음의 행로는 다시없을 것이기에. 그 연애소설에는 이런 것들도 들어 있다.
비록 나의 생활이 달팽이처럼 딱딱한 외피를 두르고 간신히 기어가는 형국이어도, 마음만은 언제라도 새처럼 날개를 파닥이며 맘껏 푸른 하늘을 날아오른다. 평생 가정을 꾸리지 못했던 사람이 지은 노래인 「즐거운 나의 집」이 만인의 가슴에 파고들 듯이, 기어이 연애를 못 하고 마는 사람이 쓴 연애소설이 어쩌면 더욱 절절하지 않을까.
연애, 참 예쁜 말이다.
푸른 방
푸른 바다가 천장에서 바닥까지 한 벽에 가득하다.
뤽 베송의 영화 『그랑 블루』의 커다란 포스터 덕분이다. 연한 하늘색의 벽지가 하얀 책상 뒤에서, 시원한 청색의 양탄자가 흰 커튼 자락 밑에서 더욱 파랗다. 꽃병도 거울 장식도 문구들도 덩달아 제각기 다른 파란빛을 지니고 여기저기 섬처럼 놓여 있는 이 방을 나는 ‘푸른 방’이라고 부른다. 코발트 블루, 인디고 블루, 클라인 블루, 울트라 블루, 시아닌 블루… 온갖 톤의 이다지도 많은 블루에 둘러싸여서 나는 그 모든 블루가 좋다.
물에 빠졌던 적이 있다. 여섯 살 아이는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떠 있는 듯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는데, 처음 겪는 무중력의 세계가 이상하게 편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완벽한 고요 가운데, 아이의 몸 주위로 온통 푸른빛이 번져 나가던 물속의 정경에서 그때의 기억은 그만 멈추고 만다. 이 방이 나를 멀리 아득하고도 늘 선명한 영상의 푸르스름한 색조 속에 곧잘 잠기게 해 준다.
푸른 방에서 나는 꿈을 꾼다.
일상의 건조함으로 납작 눌렸던 꿈 조각이 산 중턱 고운 물안개로 가볍게 부풀어 오른다. 지평선 너머 아슴푸레하던 기억의 성채가 윤곽도 분명하게 성큼 다가선다. 환상 여행이다. 낯선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픈 충동, 새로운 바람의 향방에 대한 호기심, 이국의 정취가 마음속 등불의 촉수를 높여 주리라는 기대를 안고 길을 떠날 때, 사면의 벽은 무한 확장되어 멀리멀리 물러선다. 벽이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 더러는 혼돈으로 흔들리고 더러는 막막하게 떠돌며 나는 사막과 바람과 바다와 습기를 만난다. 땅거미를 안고 돌아오는 시간여행의 귀착점에서 물러섰던 벽은 다시 견고하게 자리 잡는다. 푸른 방은 밖으로, 밖으로 번지는 드넓은 여행지이면서 안으로, 안으로 스며드는 격리된 도피처다.
환상 여행은 내내 푸른색이다.
청색의 이미지는 차갑고 고독하고 이성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색보다 열정적이다. 그 열정은 불꽃 없는 그러나 끈질긴 열정이다. 청색 인격을 그려 본다. 그는 투명한 의식을 지니고 충분히 강한 자의식으로 무장해 있으면서도, 의식 과잉의 흔적이 없이 감정과 이성의 밸런스를 유지한다. 그럼으로써 지적 훈련의 강도에 따라 그가 지닌 관념이 심도를 지닌다. 그가 명상가라면 내면의 심층적 의식과 삶의 다층 구조에 대한 모색의 여정을 조용히 갈무리할 것이다. 한 인간이 지니는 다중성의 의미, 인간 보편이 숙명으로 짊어진 모호성, 우리가 맞닥뜨리거나 추구하는 삶의 지향에 대한 깊은 성찰이 거기에 있다. 그가 문사라면 언어가 아우르는 세계는 무한하여 문학이야말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부단히 접근하고자 하는 운동성을 지닌다고 자부할 것이다. 그에게 책 읽기는 자아를 찾으려는 미로 헤매기이며, 글쓰기는 삶의 본질을 추구하여 떠나는 정신적 실존적 대장정이다.
그럼 나의 푸른 꿈은 어떤 것일까.
내가 아는 모든 것, 내가 모르는 모든 것,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것,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있었던 것, 그 모든 것을 차곡차곡 되짚어 보는 것이다. 삶의 여정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는 나와 타인의 시·공간을 헤집고 그 틈으로 삶을 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함몰된 전체 속에서 개성을, 역사 속에서 개별자를, 다시 개별성 속에서 유사성을 인식하고 파악하기 위해 시선을 모으고자 한다. 그러한 탐색전을 바탕으로 나는 푸른 글을 쓰고 싶다. 어떤 이의 마음의 현을 건드려 여린 감성의 새순이 돋아나듯, 가슴이 아픈 듯 따뜻해지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그래서 ‘그래,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라고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혹은 ‘아, 정말 그렇구나.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새롭게 깨달아 그의 머리가 맑아지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마음과 정신이라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세계를 탐구하다가 그로써 자기만의 언어를 완성하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다.
그러니까 푸른 방은 패러독스의 세계다.
글쓰기는 고독 속의 독백이고 몰입이다. 푸른 방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릴 때 나는 혼자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야말로 가장 고독하지 않다.”는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안에 대하여 나름으로 느낌을 나열하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이렇게 저렇게 애쓰는 것은 결국 ‘그렇지 않아요?’ 하고 세상에 말을 걸어 타인을 끌어들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건 직접 대화를 나누는 방식보다 더욱 자아를 확대시킨다. 하긴 대화에 목마르지 않은 사람들은 글을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석가도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책을 남기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써 놓은 글이 나에게 들려주는 고백임과 동시에 세상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 방은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발돋움의 터전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또 있다. 여러 가지 상념을 늘어놓다 보면 오락가락 종잡을 수 없이 뒤섞인다. 어느 때는 ‘원시적 생명력과 격정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또 어느 때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고 깊게 수긍한다. 이미 써 놓았던 글을 전혀 다르게 고치는 일도 빈번하다. 어느 것이 진짜일까. 시간에 따라 변화의 추이만 있을 뿐 진실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푸른 방에서는 변주곡이 흐른다.
이 방의 청 색조 안에서 나는 언어의 미로 속을 헤매며 편린을 집어 들고 분주하게 분석하고 취합한다. 이렇게 공들여 쌓아 놓은 말들이 그런데 다 낯이 익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남이 대신 써 준 것 같은 글이네요.’ 나의 글을 읽고 사람들은 내게 그런 말을 묻는 표정을 짓는다. 자기화의 과정에서 예전의 어떤 것과 닮은꼴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나는 나를 설득한다. 한 인격체에 여러 가지 모습이 겹쳐 있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속에 같은 생각이 자리 잡는 것이니, 내 안에 그들의 모습이 그들 속에 내 모습이 당연히 들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얘기를 조금씩 비슷하게 조금씩 다르게 변주곡으로 내놓을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이 방에 조금씩 명암과 채도를 달리하는 많은 푸름이 있는 것처럼.
푸른 방은 나에게 마법을 건다.
내 안에는 여러 겹의 자아가 있다. 나와 추상의 나, 나와 나의 그림자, 나와 나의 배반자가 끊임없이 공존한다. 그것들이 분열과 통합을 반복 합성하고 나면 내가 썼으되 마치 누군가의 대필처럼 생소하면서도 경이로운 세계가 앞에 펼쳐진다. 이 마술의 세계에서는 붓끝에 글이 따라 나오고 글이 글을 부른다. 이 알 수 없는 이끌림은 아마도 최면과도 비슷하다. 사람들이 더러 내 글이 의외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그런 면이 있었나요? 평소 모습과는 많이 다르군요.’라는 뜻이다. 글과 사람은 별개인가? 아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 단지 푸른 방이 만들어내는 마술의 세계가 현실의 외피 아래 품고 있던 여러 갈래의 자아를 다채롭게 펼쳐 보일 뿐이다. 아, 그러니까 마술에 걸리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서투르게나마 약간의 마술을 할 수 있게 되나 보다. 마법에 걸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은.
이 푸른 공간이 아늑하다.
花 水 木… 今
꽃요일에는 열정이 미의 화신으로 피어난다.
꽃[花]은 어디에서 왔을까. 火에서 왔을까, 아니면 化에서 왔을까. 변화하려는 염원에서 아름다움으로 현현하는 존재가 꽃이다. 짧디짧은 한 생, 더도 덜도 말고 열흘만 활활 불탈 수 있기를… 꽃의 기원이 간절하다. 촌음을 아껴 지성으로 지고지선을 갈구한다. 삶은 무상할지니 단 한 번 사랑에 목숨을 걸어 절정의 행복을 누린다. 기쁘게 노래하고 즐겁게 춤추리. 찬란하게 한순간을 피어 장엄하게 한 세계를 열고 진하게 사랑하여 회심의 미소를 날리면서 장렬하게 막을 내린다. 봄 들녘에는 열정을 태우고 남긴 재가 소복하다.
물요일에는 세월의 은 비늘이 아롱아롱 흔들리며 흘러간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아 아무것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다. 잡을 것이 없으니 놓칠 것도 없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 순리를 따르며 묵묵히 생명을 키운다. 그러므로 세찬 물결에 바위가 부대끼고 나무뿌리가 상하고 수달이 제 집터를 잃는다 해도 그것은 결코 물의 뜻은 아니다. 물은 오로지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무심의 못에 이르러 마침내 고요해진다. 하늘과 구름이 조용히 내려앉는 가운데 산을 물구나무 시키는 호수의 정경 앞에서 그예 세상이 고즈넉하다.
나무요일에는 꿋꿋한 마음자리가 넉넉하게 터를 잡는다.
태양과 바람과의 상생이 영구불변인 가운데, 나무는 태양에게 생명을 의탁하고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의연하여 자신을 굽히지 않는다. 소나무는 발치의 진달래를 귀여워하지만, 나무들은 엄연히 거리를 지킨다. 숲 깊숙한 곳에는 신령스러운 초월의 분위기가 향훈으로 스며들어 자잘한 마음의 티끌을 스르르 사라지게 한다. 그런데 숲에 들면 조심해야 한다. 숲 밖에서와 달리 숲 속에서는 숲이 보이지 않아 자칫 방향을 잃는다. 인간 세상을 등지라는 정령들의 유혹 때문이다. 나무는 숲 속에서 숲을 응시한다.
꽃과 물과 나무.
꽃은 아름다움과 열정의, 물은 생명과 거울의 그리고 나무는 푸른 의지의 표상이다. 꽃은 생을 아쉬움 없이 소진시키라고, 물은 낮은 자세로 삶을 수긍하라고, 나무는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라고 한다. 이들을 벤 다이어그램으로 옮겨 본다. 위 동그라미는 붉은색 꽃, 왼쪽 동그라미는 초록의 나무, 오른쪽 동그라미는 파랑의 물이다. 세 개의 원이 서로 사이좋게 겹치며 세 가지 중간 색을 만들어낸다. 겹치는 의미는 때로 엇갈리지만 대체로 조화롭다. 그리고 가운데 세 동그라미가 합치는 부분은 구극(究極)의 빛깔인 검은색이다. 거기에 ‘지금, 여기’라고 적어 넣는다.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고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것, 우리의 지상 과제다.
살아 숨 쉬는 이 순간 외에 우리가 기댈 것이 무엇이 더 있는가.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알 수 없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고 공간은 되돌릴 수 없다. 경험의 집적이라는 날줄에다가 꿈과 기대를 씨줄로 직조하는 인생의 베틀 위에 우리는 올라앉아 있다. 미망이나 회한에 사로잡히지 않고 허황한 신기루에 현혹되지 않으며, 오로지 나날에 충실한 문양을 짜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영원을 기약하는 진실이 채색 무늬로 나타나서 현재를 살아 미래를 연다. 황금의 무게가 오늘에 걸린다.
花 水 木의 지향하는 바를 꿈꾼다. 오늘은 꽃의 날, 변신의 기쁨을 누리리라. 오늘은 물의 날, 관조와 성찰이 나를 깊게 하리라. 오늘은 나무의 날, 고고한 탈속을 권유받는다. 그리고 지금. 불붙는 꽃처럼, 유유한 물처럼, 꼿꼿한 나무처럼 그리고 순간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아! 아무리 해도 그렇게 살 수 없다면 애석타, 어이하리.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다. 흐르는 계곡물에 제 모습을 아련하게 뒤척이는 산철쭉이 벼랑에서 곱다. 그가 물끄러미 개울물을 불리는 눈물의 의미를 새긴다.
꽃아, 너는 눈물 없이 지거라.
│서숙 작품론│
이슬꽃
박 장 원
수필가. 평론가
찬 공기와 뜨거운 공기가 부딪는 순간 돋아나는 이슬.
표면에 나타나는 ‘표로(表露)’, 감정이 어떤 상태로 드러나는 ‘유로(流露)’. 삶이 뜨거움과 차가움의 교차라면 푸른 잎새에 맺혀진 반짝이는 이슬은 인생의 영롱한 구슬이다.
감정이 아스라한 앞 태로 떠오르는 것을 포착한 것이 형상화다. 그러나 그 돋을새김이 잠깐이면 스러질, 웃고 있는 눈물 같은 이슬이기에, 간절하지만 멋이 있어야 한다. ‘삶의 유로’라는 ‘인생의 표로’라는 수필이 쉽지 않다. 그래서 묘하긴 묘해도 묘한 까닭을 모르는 ‘자연 유로(自然流露)’의 경계가 높다.
신변 잡사가 강한 충격을 받아 응결되는 수필.
수필은 아무래도 외유내강이다.
겉은 이슬처럼 여리지만, 속은 금강석처럼 다부지다. 다이아몬드에 흠이 날까 봐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고 광택이 찬연한 광물이다. 비금속인 탄소들이 심상찮은 순수의 알갱이로 반사된다.
“도(道)는 오로지 깨달음이고, 시(詩)의 길 또한 같다. 선(禪)으로 시를 비유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다.”
송나라 엄우(嚴羽)는 구태의연한 외양을 멀리하고, 실험적인 품격과 운치를 말하였다.
돈오(頓悟)를 중시하되 점수(漸修)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깨닫기 위해서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여겼다. 깊은 사색에서 우러나는 산뜻한 발견, 창작은 투철한 깨달음을 종지로 삼는 구도의 경지로 그는 생각하였다.
두리번거리는 심미안은 도처에 산재한 영감을 일으켜 세우고, 삶에 대해 섬세하게 반응할 신록의 감수성에서 주제를 가다듬고, 평소 갈고 닦아 홀연 기회가 오면 감응해서 제재를 얻고, 심상한 일상에서 범상치 않은 결정을 찾아낸다. 돈오점수는 현대 수필 세계에서도 빛나는 뒤 태이다.
소설은 테마, 시는 이미지, 수필은 분위기라 한다.
몽롱한 상태로 우러나는 분위기는 금세 스러질 이슬처럼 아슬아슬한 결정이다. 버릴 수 없는 인생의 향기를 찾으면 절반은 성공이다. 그리고 그 멋을 밑바닥에 깔아 저만큼 분위기를 꽃피우면 삶에서의 소중한 만남이다.
수필가 서숙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랑의 모습을 그려 보고 싶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거는 기대를 투영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 그렇게 사랑은 불꽃으로 타올라 황홀하여도 지속성은 미지수다. 그래서 애달프다. 그러한 타자성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 그리스의 수도자가 순례의 길을 따라 바위산을 오르듯, 물론 몹시 힘이 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랑 말고 달리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랑이 저만큼에서 그만 그치고 말 것을 염려하는가. 꽃은 필 때 질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이 깊은 멋은 어디에서 우러나는가.
알 수 없는 인생의 애달픔 속의 애틋함, 애틋함 속의 간절함이 솟아나고 있다. 그 바탕에는 아슴아슴 밀려드는 창랑滄浪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평소의 감성과 지성이 생활이 되어 독특한 리듬을 타고 흐르는 산문정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랑 말고 달리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이슬 맺힘이 순전하다.
서숙의 첫 수필집은 『일부러 길을 잃다』이다.
길 없는 길은 없다.
그는 길 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자신 앞에 널따랗게 펼쳐지리라 믿으며, 속으로는 힘들어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여유롭다. 새로운 길을 찾으려 일부러 길을 잃는 그는 섬세하지만 시원스레 “꽃은 필 때 질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며 이슬의 숨결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문학적 자전│
더 아름다워지는 꽃
서 숙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 순간 꽃은 파르르 더 아름다워진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살풋, 사랑은 한 겹 더 깊어진다. 생각이나 느낌은 말로 되어 나올 때 비로소 온전함의 광휘를 입는다. 그런데 어느 때는 생각보다 말이 앞장을 서서, 말이 먼저 나오고 생각이 그 뒤를 따라오기도 한다. 이때의 말은 어떤 선험적 예지력을 지닌다.
언어의 파장과 울림에 의한 의미의 확장. 그것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터가 곧 문학이 아니겠는가. 귓가에 떠돌고 입 안에 맴도는 편린들에 항상 흡족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말이 있어 참 다행이다. 역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러면 ‘별이 아름답다’, 그러한 감수성으로써 그득함에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인가. 나의 별은 반짝이는 존재 너머 행성, 항성, 광속, 우주, 그 궁금증에 나를 닿게 하려고 애쓴다. 별이 단지 아름답게 반짝이는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나의 고민이다. 그렇게 수필 하는 나의 마음은 시인의 서정만으로는 부족하여 거기에 무엇을 더 얹으려 한다. 관조자의 심미와 탐구자의 분석을 어떻게 조화롭게 유지할 것인가, 높은 지성과 깊은 정서를 희망하지만 그 진폭은 한없이 아득하다. 그래도 세상은 때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볼 가치가 있다. 눈물 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아련히 아름답긴 하지만.
예술의 길이란 것이 결국은 확대되는, 또는 응축되는 자아 가운데 생각이든 감정이든 느낌이든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의 격정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표현의 막막함 때문에 사진작가는 화가를 화가는 작가를 작가는 음악가를 음악가는 무용가를… 부러워한다. 무한 가능에 무한 도전이다. 그 많은 자기 승화의 도구들 중에 문학이, 수필이 오롯하다.
이렇게 언어가 우리에게 주는 능력 속에서, 고양된 영감과 출렁이는 느낌이 표출되는 것(dance out)과 철리에 경도된 사념이 표출되는 것(think out) 사이, 즉 정서와 사유 사이, 격정과 사상 사이, 충동과 반성 사이, 그리하여 감성과 이성 사이에 놓이는 것이 수필 아닐까.
그런데 아직도 나의 시선은 창공을 가르는 새의 몸짓에게보다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류의 글귀에 더 많이 머물러 있다. ‘나’를 의식하고 ‘나’를 주지하려는 존재의 부대낌인 관념의 보푸라기를 잔뜩 묻힌 채, 난해시로부터 서정시로의 중간 지점에 나의 시심은 놓여 있다. 건조한 이성 우위에 감성의 물기가 점차 스며드는 모양새다. 추상의 환으로부터 구체적 감촉까지의 그만큼의 정신적 거리 이동은 일종의 역주행이랄 수 있는데, 들이대는 잣대에 따라 성장, 체념, 후퇴, 포기 같은 단어들로 환치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수필을 만난 후 내게 온 변화다.
주변에서 글을 써 보라는 권유가 있을 때마다, 나는 농 반 진 반으로 “나무와 풀 이름을 몰라서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글을 쓰게 되었다. 동경하던 세계였으니까. 그런데 더듬거리며 글을 쓰다 보니 내가 모르는 것은 나무 이름 풀 이름만이 아니었다. 그렇건만 할 말은 더 많아졌다. 모르는 게 많으면 할 말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새로운 발견이다.
이왕 내친걸음이라 모르던 것을 알아 가기 위해 꽃도 보고 나무도 보며 천천히 걷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곱고 청아한 새소리도 들린다. 모습은 감춘 채 소리만 들려주는 새들로부터 나름의 지혜를 배우는 중이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주는 대로 받고 다가오는 대로 느껴라. 새의 음색으로 미루어 생김새는 이러이러하겠거니 섣부르게 지레짐작으로 넘겨짚지 마라. 모르면서 알아 가는 것, 지금까지는 암중모색의 묘미가 쏠쏠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다지 신통할 리가 없는 졸속의 학습 과정에서 목숨까지야 걸었겠는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니 딱 그만큼밖에는 건져 올리지 못하는 소출을 섭섭해 하면 안 된다.
스스로가 약간은 뻔뻔하고 약간은 딱하다. 그래도 나의 알아 가려는 정성과 납득하려는 노력 그리고 어설픈 성과가 꽤 많이 기특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희망이다. 모르는 것이 많을수록 희망은 더 커지는 법이다.
재능과 노력. 좋기로야 뛰어난 재능에 피나는 노력이라. 그런데 어쨌든 노력 이전에 재능이다. 특별한 경험이 어우러진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나의 글쓰기는 타고난 재능으로 술술 써 내려가는 신명에 의한 것은 아니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천형을 짊어진 것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내 인생의 서사 구조는 평범과 단순, 그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곰곰이 그러모은 생각의 갈피를 소중하게 펼칠 수 있는 장이 덥석 반가워,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가는 마음 자세를 가져 보는 것이다. 결 고운 비단을 장만하여 수틀 가득 다양한 문양으로 채워 보겠다고, 그러면서 나름의 분위기를 지녀 조화를 이뤄 보겠다고 공을 들인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시절이 비껴 간 복고풍의 패턴이 맘에 걸린다.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염려스럽게 보듬는다.
어쩌면 내가 아끼는 것은 다 이런 식이다. 오방색 명주실 올올의 동양 자수가 화려한 검은 공단이건 오묘한 쟈가드 문양의 다마스카스 실크건 이도저도 모두 유행 지난 천 조각이다. 아름다우나 구태의연하고 소중하나 거추장스럽다. 그래도 치렁치렁한 고풍의 옷 기슭을 길게 끌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길 때, 사그락사그락 비단 자락 스치는 소리가 감미롭다. 이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을 더러 만나 둥근 이마를 맞대고 따스한 가슴을 나누며 고전적 아름다움을 위한 송가를 즐긴다. 수필과의 만남이 소중한 만큼, 아니 그 이상, 수필을 통한 만남을 생각한다. 귀한 인연, 이만큼의 선물이라니.
자존과 시심과 꿈과 자유 등의 단어들을 곁에 두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분명 즐길 만한 행운이다. 나아가 습작을 넘어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을 품지만 끝내 바람에 머무른다 해도 그로써 족하다. 고독 속의 충만함, 세상을 향한 착한 호기심, 아름다움 속에 깃드는 슬픔, 그 가운데 정화되어 가는 나의 사랑. 이렇게 고요한 기쁨을 안겨 주는 수필 정경 속을 느릿느릿 소요한다. 그러다가 어쩌면 나는 고색창연한 중세의 성채를 조용히 걸어 나와, 몇 세기의 전설을 품고, 티타늄의 세련된 광택이 멋진 마천루로 단숨에 건너갈 수 있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