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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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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할라인의 신화
지금도 최대민족인 신할라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옛날 인도에서 숫사자와 뱅골의 여왕 사이에 쌍둥이 남매가 태어났다. 아들은 커서 사자를 죽이고 여동생과 결혼하여 라라 국을 건설했다. 자식복이 많았지만 큰아들 윗샤야는 무리를 지어서 온 나라를 어지럽히고 돌아다녔다.
그래서 결국 배워 태워서 추방해 버렸는데 스리랑카에 도착한 그는 야차(귀신. 악마)를 정복하고 신할라 왕국을 건설했다. 이 일족은 '사자를 죽인 자 SINHALA' 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6세기 경에 편찬된 책인 [마하왕사]에 있는 왕권 신화의 한 대목이다.
대부분의 스리랑카인들은 특히 민족주의자들은 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신할라인은 북인도에서 왔다.'' 이 섬에서 신할라인이 최초로 개화한 민족이다.''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은 신할라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학문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있다. 고대에는 작은 국가가 여기저기 있었는데 어느 한 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여 강대화한 것 같다는 것이 합리적인 스리랑카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2. 왕조시대로 이야기되는 고대에서 중세로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아누라다푸라를 도읍으로 하는 신할라 불교 왕국이 번성했다.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로마와의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도읍은 불교의 중심지가 되어 법현같은 승려는 멀리 중국에서 구법 순례를 왔다. 이러한 번영은 대규모 저수지를 이용한 관개로 풍부한 쌀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판디야나 쵸라등 타밀의 여러 나라로부터 온 원정군과 자주 전쟁을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민족적 대립 관계
전쟁은 왕권간의 문제이며 신할라 왕실의 왕위 계승 다춤에 타밀인이 용병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동맹이나 혼인 관계도 있었다.
불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에도 항쟁이 전혀 없었는데 그 이유는 7세기경 남인도에서 힌두교 복고주의가 강해지기 전까지는 타밀 지방의 여러 나라들도 불교를 널리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할라 왕조는 아누라다푸라에 왕도를 정한 이후 남인도에서 있던 여러 왕국들로 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마침내 도읍을 플론나루와로 옮겼으며, 13세기 무렵에는 북부의 건조지대를 중심으로 한 신할라 체제가 급속하게 쇠퇴하고 만다.
플론나루와로 왕도를 옮겼지만 계속된 침략자들의 공격으로 왕과 백성들은 남부의 습윤지대로 계속하여 후퇴및 이주를 했고, 건조지대에 세워졌던 사원과 왕궁, 저수지는 버려져 정글로 변해 갔다. 그 무렵 자후나 지방에는 타밀 왕국인 야루라나무가 건설 되었다.
3. 식민지 시대
16세기 초 인도의 고아지방에서 포르투갈인이 스리랑카 섬에 들어왔다. 당시 스리랑카에는 타밀인들의 왕국이었던 야루파나무 왕국과 그리고 신할라인들의 세 왕국(코테.시타와카.캔디)이 있었다. 포르투갈및 네덜란드의 식민시대에 계속된 침략공격으로 인하여 스리랑카 섬은 캔디왕국만 제외하고는 모든 왕국이 멸망하고 말았다. 맨 마지막으로 이 섬의 지배자가 되었던 영국은 1815년 캔디왕국마저 멸망시킴으로써 이 섬에는 왕조의 역사가 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4. 독립을 향한 길
19세기 중반에 홍차 농장이 생기자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력이 필요해 남인도에서 타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토착민인 신할라인.타밀인.무슬림 사이에 발생한 상업 자본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엘리트층이 형성 되었다.
이들은 점차 식민지배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을 하게 되었고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며 새로운 종교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가장 큰 규모로 전개된 것은 다수 민족인 신할라인을 주축으로 하는 불교 부흥 운동이었다. 사원학교와 불교 학교가 건설되었고 불교 교육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경제적. 종교적 배타주의의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지배자인 영국인에게만이 아니라 타밀인과 무슬림, 카톨릭및 신교로 개종한 신할라인들에게도 겨누어 졌다. 스리랑카에서 있어서의 최초의 민족 폭동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할라 대 카톨릭의 충돌은 이미 1883년에 콜롬보에서 일어났다.
저항운동의 파고는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의회 제도의 도입과 헌정 개혁의 과정을 거쳐 1948년 2월 4일에 독립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스리랑카 내셔날리즘은 형성되지 않았다.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는 통일국민당과 자유당, 두 정당 사이의 정권 다툼으로 일관되었다.
1956년, 자유당의 반다라나이케 정권이 신할라어 공용어법을 제정하자 타밀 족은 강력하게 반발하며 연방제 아래서의 자치를 요구했다. 1972년, 자유당.평등사회당.공산당의 통일전선 정권이 헌법으로 불교에 준국교적인 지위를 부여자하 타밀인들은 드디어 타밀 이라무 국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젊은이들은 독립을 부르짖으며 무장 투쟁을 개시했다. 1983년 반타밀 대폭동이 일어나 많은 희생자가 나오자 타밀 게릴라들의 반격은 더욱 거세어 졌다. 마침내 1987년에는 인도가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연방제의 테두리 안에서 타밀인에게 대폭적인 자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일단 타협이 이루어졌다.
분리 독립 운동은 타밀인이 2류시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하는 방편이었지만 민족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타밀 이라무 국이 독립한다고 해도 그 지역에 포함되는 동북부 안에는 또 신할라인과 무슬림 등 소수 민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부의 무슬림은 독자적인 정치조직은 만들어 타말인의 지배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현대 정치는 계급적.경제적 모순과 2대 정당 사이의 투쟁, 식민지 통치의 잔재, 이웃 나라인 인도의 정치 상황등과 깊은 관계를 지니며 민족 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분출되어 온 셈이다.
출처: 재스리랑카 한인회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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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불교 이해
1. 스리랑카 불교(상좌부 불교)의 배경
불교발전사에 의하면 붓다 입멸후 약 100년이 지난뒤 불교는 최초로 두개의 종파 즉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어 진다. 이후 계속하여 지말분열을 거듭하여 총 20개부파에 이른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인도의 아쇼카 대왕의 아들(동생이라는 설도 있음) 마힌다 장로에 의해서 이다. 기원전 247년 6월 보름날 당시 아누라다푸라에 왕도를 두고 있던 신할라 민족 왕 데바남피야 팃사(DEVANAMPIYA TISSA)가 미힌탈레(MIHINTALE)에 사냥을 왔을 때 이곳 스리라카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왔던 마힌다 장로와의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이루어졌다.
당시 마힌다 장로의 일행은 4명의 비구와 2명의 사미승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이 이곳 스리랑카에 가져온 불교는 상좌부 계통의 불교였다.
또한 마힌다의 누이인 상가미타는 조금 늦게 스리랑카에 내도하여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루었던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가지를 갖고와 당시 왕도였던 아누라다푸라에 심었다고 한다. 그녀는 11인의 비구니와 함께 왔다고 하며 스리랑카의 왕비를 비롯한 이 섬의 많은 여성들을 비구니로 출가시켜 비구니 승가를 만들었다. 특히 그녀가 가져온 보리수 나무가 세일론 불교진흥에 대단한 역할을 하여 불타성도의 상징으로써 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신성시 하였고 존경했다.
스리랑카에 전래된 상좌부 불교는 이후 태국및 미얀마등으로 전파 되었으며 또한 BC 80년경에는 그동안 구전으로 전래되어 왔던 붓다의 가르침(경전)을 세계 최초로 팔리어(PALI)로 문자화 한다. 이를 빨리어 경전이라고 오늘날 붓다의 원음이 담겨 있는 경전으로 매우 귀중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상좌부 불교(근본불교)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남방에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상좌부 불교의 대표적인 나라로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를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상좌부 불교라도 각 나라의 전통과 생활방식, 사고의 차이에 따라 수행방식에 있어서 그 각각의 특징과 차별성이 있다. 예를 들면 스리랑카는 승려의 교육(敎育), 태국은 지계(持戒), 미얀마는 수행(修行) 등이 각각 두드러지며 그것이 그 나라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초기 불교의 근본사상인 계정혜(戒定慧, s沖la·sama?hi·prajn??라는 삼학(三學, thri-s?ks.a)의 세 주춧돌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스리랑카(Sri Lanka)의 면적은 62,337㎢이고, 인구는 약 1천 9백만 명 가량이다. 종족 분포도로 볼 때 싱할라(Sinhalese) 74%, 타밀(Tamil) 18.1%, 무슬림(Muslim) 7.1%, 기타 0.8% 이며, 종교 분포도로 볼 때는 불교가 69.3%, 힌두교 15.5%, 이슬람교 7.5%, 기독교와 천주교 7.5%, 기타 0.1% 이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교육중심주의(학문생활)’와 ‘수행중심주의(수행생활)’의 커다란 두 흐름에 따라 수행하는 비구들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전통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불교의 근본이 학문인가, 수행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벌어진 논쟁의 결과, ‘교육중심주의’와 ‘수행중심주의’라는 비구들의 두 가지 생활방식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계속 각각 다른 두 가지 수행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이 두 가지 비구들의 생활형태는 현재의 스리랑카 불교의 현황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상좌부 불교의 기본이었던 ‘자기 중심적인 수행주의’ 뿐만 아니라 포교가 곧 자기 수행이라는 교화적 불교(他利利他)가 민중화되었던 것이다.3) 오늘날 일반 재가 학생들이 학습하는 교재나 승려들의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국어·시·문화·문헌 등은 모두 그 두 계통의 장로들이 남겼던 다양한 문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 교육 과정에도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 수행중심주의
현재 스리랑카에는 수행생활만 하는 비구의 거주지가 여러 곳에 있는데 대다수가 동굴이며, 숲속의 거주지는 대부분 현대에 들어와서 생긴 것이다.
수행자들이 머무는 토지의 관리와 운영은 재가 신자들로 구성된 후원 단체가 맡아서 하는데 이 신자들로 구성된 후원 단체 또한 비구들과 함께 수행하는 단체들이다. 먼 곳 어디에도 다니지 않는 이 비구들은 경제적인 일에는 관계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탁발 나가 얻은 음식에서 얼마 정도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나머지는 함께 수행하는 비구들과 식당에서 같이 식사하기도 하고 각자 자기 동굴 속에서 식사하기도 한다.
오전에는 수행도 하고 가사 빨래나 목욕을 하는데 빨래나 목욕은 오전에만 한다. 주된 수행은 자기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 하는 좌선명상(vipassana?bha?ana?이며, 심신이 많이 지쳐 있을 때는 조용히 걸으면서 하는 경행(can?amana)을 하는데 경행을 위한 장소도 있다. 오전 10시경에는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한다. 오후에는 명상을 하는데 ‘오후 불식(不食)’이므로 탁발은 하지 않는다.
현재는 인근지역의 신도들이 음식을 준비해서 승려들의 수행지로 가져오면 승려들은 시간을 맞추어 자기 거주지에서 바루를 가지고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나서 승려들은 신자들에게 오계를 전수하고 보시 공덕에 관한 법회(bhukta?umodana?를 하고 다시 자기 수행지로 되돌아간다.
(2) 교육중심주의
이 사찰들은 대부분 마을의 중심에, 혹은 도시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현재에는 비구들이 탁발 나가는 일은 거의 볼 수 없고 대신 마을 신도들이 하루에 두 차례 걸쳐서 아침과 점심공양을 순서대로 사찰로 가지고 온다. 승려들의 하루 일과는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아울러 중생을 교화하고 포교와 관련하여 사회 여러 문제에 부딪치며 중생들과 함께 살아간다.
‘교육중심주의’ 비구들의 교단에는 크게 세 개의 종파가 있다. 이 종파가 생긴 것은 지난 450여 년 동안 서양 열강의 지배를 받은 이후에 불교가 피폐해진 부산물이다. 포르투갈 인들의 침략(1505∼1658)에 이어 홀랜드(1658∼1796) 그리고 영국(1796∼1948)이 차례로 스리랑카를 식민지화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하에서 불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들은 불탑과 가람을 파괴하고 사원 소유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불교인들에게 강제로 개종을 요구하는 등 여러 가지 박해를 가했다. 이때에 박해를 당한 종파는 대부분 도시나 마을의 중심에 있던 학문중심주의 승가와 사찰 그리고 불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절멸된 비구 교단을 재건하기 위해 미얀마와 태국에서 불교의 법통을 이어와 부활을 꾀했다. 스리랑카 불교와 이들 나라의 상좌부 불교와는 친선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자연스런 일이기도 했다.
현재 스리랑카 불교의 법통을 잇고 있는 씨얌파(siyam-nikaya)·아마라푸라파(amarapura-nikaya)·라마냐파(raman??-nikaya)는 이전까지는 출가자와 일반 사회 계급과의 사이에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었지만 이후로부터 출가자와 사회 계급과 밀접한 관계가 생기게 된 것이 한 특징이기도 하다.
이 세 종파 가운데 스리랑카 비구들의 주요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종파는 씨얌파이며, 1753년 태국의 우팔리(Upali) 장로가 비구 25명과 스리랑카에 와서 구족계(upasampada?를 전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아마라푸라파는 씨얌파가 창종된 지 55년 후인 1808년에, 라마냐파는 그 후 56년 뒤인 1864년에 일단의 스리랑카에 스님들이 미얀마에 가서 구족계를 받아 돌아와서 창종한 종파이다.
스리랑카 행정부의 불교부(Ministry of Buddhasayana) 2001년 10월 통계에 의하면 3개 종파에 속하는 사찰의 총 숫자는 8,204개이고, 비구들의 총 숫자는 29,877명이며, 그 숫자의 절반 정도는 사미승려들이다.
큰 세력을 가진 시얌파는 캔디(Kandy)의 아스기리야(Asgiriya) 사(寺)와 말왓타(Malwatta) 사(寺)로 구성되어 두 명의 종정(宗正)이 존재하며, 토지와 재산을 소유한 대사원 또는 불치사(佛齒寺, Dalada?ma?iga?a)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 가고 있다. 이 종파의 승려는 대부분 사회의 상류계층 출신자들로 이러한 점이 출가 불교로서의 비구의 순수성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것은 승가 집단이 자연스럽게 상류계층과 자족적인 유대 속에서 번영을 누렸기 때문이다.
라마냐파와 아마라푸라파의 출현은 이러한 경향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아마라푸라파는 하층 계급 출신자를 많이 받아들이는 서민적 성향의 승가집단이라는 것이 특징이다.11) 이 3파는 그 근본이 모두 스리랑카에서 다른 나라로 전파되었다가 다시 법통을 이어온 것이며, 교의상으로는 서로 크게 다른 점은 없다.
2. 비구의 생활과 교육과정
출가의 과정이나 출가자의 교육과정은 상좌부 불교가 행해지고 있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 등 나라에 따라 약간의 문화 차이는 있지만 거의 비슷하다. 이하에서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살펴 본다.
1) 출가 행사
출가하고자 하는 자는 이미 ‘일요 불법학교’에서 승려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알기 때문에 출가에 대해 자신이 명확한 입장을 밝힐 수가 있다. 출가자들은 대부분 어린이들인데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부모와 가족들의 의사도 매우 중요하다. 아이가 8∼9세가 되면, 또는 총명한 이에게 출가자가 되면 얻게 되는 공덕 등을 자세히 알려주며 부모가 출가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 본인의 동의에 의해, 부모가 원하는 사원의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아 사원으로 데리고 가 주지 스님에게 맡긴다.
약 1년 동안은 주지 스님과 사원의 다른 스님들의 인도를 받으며 수행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간단한 기본 교리를 배운다. 그리고 나서 적당한 날을 택해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사미계를 받아 출가하게 되는데, 이 날은 그 사원의 큰 축제가 되며 아이에게 입힐 가사와 그 행사에 모이는 스님들의 공양, 보시 등 모든 경제적 부담은 그의 부모와 사찰 신도들이 모여서 해결한다. 10살이 되지 않아도 출가하면 비구 대접을 받게 되며 이 비구에게는 자기 부모 등 가족 친지들이 모두 큰절을 한다. 출가자는 절을 하는 이들에게 합장을 하지 않으며 ‘소원을 이루라’ ‘건강하라’ 등의 내용을 포함한 팔리어 게송을 들려준다.
2) 출가자의 교육과정
출가한 스님은 승려 전문교육기관인 승가학교(pirivena)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는다. 사미 스님은 동참 스님들과 승가학교에 거주하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4월, 8월, 12월 방학 때만 자신이 출가한 사찰에 다녀올 수 있다. 새벽 5시에 일어나고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게 되며, 아침에는 각자 공부하고 점심 공양 후 오후 1시에 학교가 시작되어 오후 5시 30분에 끝난다.
일반 학생들과는 다르게 경전은 물론이고 팔리어와 범어를 배우며 국어, 영어, 수학 등 일반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도 학습한다. 그 외에는 승가학교에서 매일 불교언어와 경전을 외우는 것이 특별한 과정이다. 또는 ‘위빠사나’ 수행법도 배우고 설법하는 능력도 키우며 독경하는 것도 학습한다.
이와 같은 교육을 5년 이수하여 승가학교 기본 교육과정을 마치고 ‘승가학교 기본 교육시험’이라는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그 다음 고등 승가학교에 올라가 2년마다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시험을 3번 보면 6년간의 ‘판디타(Pand.it)’를 획득하여 졸업하게 되고, 이로써 출가자의 승가학교의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게 된다.
3) 구족계 행사
출가자가 20세가 되면 구족계를 받게 된다. 구족계단은 종단별로 각 종정 스님을 비롯한 ‘종단의 행정승(kayaka sam.gha-sabha)’으로 구성되어 설치되어 있다. 구족계는 5월부터 6월 보름 사이에만 받을 수 있다. 그 한 달 사이에 적당한 날을 택해 구족계를 받는다. 행사 당일 구족계 받는 일을 축하하기 위해 수계자의 부모, 친척과 이웃 사람들 그리고 출가한 사원 주변 사람들이 구족계단으로 모인다.
아침에는 종정 스님과 종단의 스님들이 계시는 여러 사원들을 은사 스님과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다니며 보시하고 인사를 드린다. 아침 10시쯤에는 수계법당에 모인 종정 스님, 부종정 스님 등이 묻는 불교 언어와 경전에 관한 질문에 직접 대답하여 합격해야만 구족계를 받을 수 있다. 이 구두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모여 있던 부모, 친척들이 ‘사두(sadhu)’라고 3번을 외친다. 그 말은 ‘좋다, 좋다, 좋아’라는 뜻이다. 모인 스님들에게 공양을 보시하고 모인 사람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계를 받는다. 이때 계를 받기 바로 직전에 인생의 마지막 기회로 속인처럼 옷을 입고 각종 보물로 장식한 왕관도 쓰고 목걸이를 걸거나 반지도 끼는 왕의 복장을 한다.
계를 받은 다음에는 비구가 되었음을 축하하는 전통 음악과 춤을 공연하며, 다시 출가한 사원으로 돌아와서 오후에는 구족계를 받은 승려에게 첫 설법(mam.gala-dharma-des.ana)을 듣는 것으로 구족계 행사가 끝이 난다.
3. 재가자의 종교 생활 : 포살(pohoya, 布薩)을 중심으로
보름은 달이 꽉 찬 날이다. 이 날은 ‘포허야(布薩)’ 날이라 하는데 상좌부 불교에 있어서는 가장 성스러운 중요한 날이다. 이 날은 불교 역사 속에서 훌륭하고 성스러운 일을 기념하여 불자들이 그 의미를 생각하며 선한 일을 하고 수행을 하기 위해 사찰에서 하루를 보낸다.19) 모든 상좌부 불교국가는 보름날이 국가에서 정한 휴일이기 때문에 모두 한가히 선행을 하며 공덕을 쌓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보름날은 술집조차 문을 열지 않아 술을 마신다거나 노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보름에는 이른 아침부터 온 마을 신도들이, 노인들은 물론 손자 손녀들까지 데리고, 성스러움과 깨끗함을 상징하는 하얀 옷을 입고 절을 찾아 모여든다. 절에 모인 신도들이 스님을 모시고 6시쯤에 불당에 들어와 부처님께 아침 공양을 올리고 나서 스님으로부터 8계 혹은 10계를 받아 하루종일 계를 지키며, 마음을 밝혀 삼매에 들어가 지혜를 얻는 수행의 일정을 지낸다. 이러한 수행 행위는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침 공양을 끝내고 나서 법당, 불당, 수행장, 경행토(經行土), 동굴 등 어디서든지 조용히 수행에 든다. 아침 9시가 되면 모두 법당에 모여 스님을 모시고 설법을 듣는다. 스님은 1시간 또는 1시간 30분 동안 설법하며 각각의 보름날에 연관된 불교 역사 가운데 있던 성스러운 이야기를 해주고 위빠사나 수행법과 수행할 때 일어나는 형상 등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한다.
법회가 끝날 때가 되면 점심 시간이 되므로 계를 받아 수행하는 신도들의 자녀들이 점심 공양을 가지고 모인다. 그들과 함께 불당에 스님을 모시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다음 절에 계시는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고 나서 자신의 부모에게 공양을 올린다. 이것은 보통 집에서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떠나 수행자, 즉 우바새(남자재가신도) 우바이(여자재가신도)
라는 생각으로 행하는 것이다. 대신 공양을 받은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공양보시에 관하여 좋은 말을 해준다.
오후 2시쯤 스님을 모시고 좌선수행에 든다. 법회를 열어 스님의 권고를 받아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시간이며, 오후 5시쯤에는 스님을 모시고 《본생경(Jataka)》을 암송하는 시간이다. 이때는 스님이 《본생경》 중 한 가지 이야기를 선택하여 억양을 맞추어 암송한다. 신도들은 합장한 채로 듣는다. 《본생경》은 팔리(pali)어가 아니라 각 나라마다 그 나라말로 암송한다.
오후 6시쯤에는 모두 다시 불당에 모여 부처님께 차, 꽃, 향 등 공양을 올리고 나서 차 한잔으로 저녁 공양을 하며 밤새도록 스님들 모시고 소위 호주(護呪) 혹은 파릿타(paritta)라고 하는 염송 기도에 들어간다. 만약 호주를 진행하지 않게 되면 각자 경전을 암송하며 밤을 새운다.
보름날, 정해진 행사 이외의 시간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념처경(四念處經)을 암송하며 시간을 보낸다. 불자들은 누구나 《사념처경》 한 권씩은 다 가지고 있으며, 아침에 절에 올 때 가지고 오는 것을 잊지 않는다.
4. 사찰과 사회
대부분의 사원은 각 마을 또는 동네나 시내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서 자기 동네의 사원이 가족 사원이 된다. 가정의 일상사는 물론 모든 종교적 행위가 사찰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진다. 예를 들면 결혼식이 있으면 그 전날 스님으로부터 경전을 듣고 보호를 받고, 임신을 하면 임신했다고 부처님께 고하고 스님으로부터 《앙굴마라경(央堀摩羅經, Angulimara-sutta)》을 듣고 보호를 받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났음을 고하고,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말을 시작한다고, 글씨를 배울 때가 되면 글씨를 배운다고 부처님께 고하고 큰스님에게 첫 글을 배운다. 이처럼 모든 일들이 사찰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1) 불교학교(Daham-pa?ala)
사찰마다 교리학교가 있다. 일요일만 교리를 배우는 학교라 ‘일요 불법학교’라고도 한다. 일요일이면 온 마을의 학생들이 흰색 전통 의상을 입고 꽃을 따서 바구니에 담고 불교 교리를 배우기 위해 사원으로 모인다. 불당 앞에서 스님으로부터 오계를 받아 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리고 나서 불법공부를 시작한다.
불법학교에 참석하는 아이들을 1학년부터 10학년으로 나누어 수준에 맞추어 행정부의 불교부(佛敎部)에서 만들어진 교재를 가지고 불교를 배운다. 이 교재는 저명한 스님들과 불교학자에 의해 불교부에서 편찬된 것이라 그 내용도 재가 학생들이 공부하기에 적절하도록 짜여져 있다.
절마다 학생들이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에 이르는데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그 사찰의 스님들 또는 그 마을의 교사들이다.
교사들은 그 학생들의 학교나 마을 선배들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교육은 후배들을 위한 사회복지 차원의 자원봉사이기도 하다. 교사로서의 월급 등과 같은 어떤 보상도 받지 않는다. 불교 공통의식은 스님의 지도하에 모든 학생들이 따라하며 같이 하고 배우지만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교리 공부는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가르친다. 불교교리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위한 효도법, 이웃들과 함께 사는 것, 사회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의 극복 방법들도 가르치기 때문에 현실생활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불법학교의 졸업장은 취직할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므로 사회 생활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다. 매년 지방마다 학생들의 실력을 알 수 있게 지방 불법학교 시험을 본다. 우수한 성적의 합격자들은 전국적인 불법학교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국가로부터 장학금 및 증명서를 받는다. 이러한 일들은 전적으로 불교부에서 전담한다. 또한 일반학교에도 스님들이 최소한 한 명씩 교사로 있기 때문에 불교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으며, 대학교에도 불교학과가 있어서 불교과정인 수능시험을 보아서 불교를 계속 배울 수 있다.
2) 대각회(大覺會, Mahabodhi society)
450년 동안에 식민지화되어 흥망과 성쇠를 되풀이 한 스리랑카 불교를 되살리기 위한 운동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법난 극복의 경험을 살려 인도 불교의 부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지금의 인도 불교를 다시 회생시킨 일등 공신은 스리랑카 출신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lika Dharmapala)이다. 그가 1890년도에 창립한 대각회(大覺會, Mahabodhi society)는 지금도 스리랑카 스님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있다.
3) 불교청년회(YMBA)
올코트(Olcott) 대령이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불교 신문과 잡지도 발행하기도 하여 1880년에는 〈YMBA〉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그 다음 불교를 되살리기 위해 세워진 단체도 또한 불교청년회이다. 바론 자야틸라카(Baron Jayatilaka)는 1898년도에 스리랑카 수도인 콜롬보(Colombo)를 비롯한 각 지역마다 불교청년회를 창립하여 1944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46년간 봉직을 하며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불교청년회의 본사는 콜롬보(Colombo)에 있지만 각 지역마다 지부가 있어 불교운동에 앞장서서 불교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본사에서는 불교학교를 유지하고 졸업증서(diploma)를 발행하며, 포살 법회는 물론 자주 국내와 국제 불교학자들을 초빙하여 토론을 마련하기도 한다.
4) 비구니 교단의 재설립
11세기 초엽 남인도의 촐라(Chola) 인들이 스리랑카를 침입함으로써 사찰은 폐허가 되었다. 이때 비구니 교단은 절멸되고 만다. 그리고는 그 이후로 스리랑카에서는 비구니 교단을 계속해서 복구하지 못했다.
비구 교단이 절멸될 때는 이웃 상좌부 불교국에서 이어 받아 교단을 다시 세웠지만 절멸 이후 비구니 교단이 없는 것은 태국·미얀마·캄보디아 등 다른 남방 불교국도 상황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교단이 단절될 무렵 다른 상좌부 불교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 비구니 교단의 맥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비구니 교단의 맥을 다시 잇는 것에 관하여 스리랑카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6년도에 대각회의 노력에 의해 인도에서 비구니 교단을 다시 세웠다. 이는 스리랑카 불교에 있어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996년 12월 8일, 당시 대각회의 회장이었던 스리랑카의 위풀라사라(M. Vipulasara) 스님의 노력 끝에 인도 사라나트(Saranath) 사원에서 비구니의 구족계를 줄 수 있게 되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해외 여러 많은 비구들 가운데 선택한 사미니들 11명은 한국 비구니들과 상좌부 비구들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스리랑카의 비구니 교단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그 비구니들은 1998년 3월 12일, 1년 2개월만에 스리랑카에서 또 달리 선택된 23명의 사미니들에게 구족계를 내렸다. 그 일은 스리랑카의 불교 역사 가운데 980년 만에 일어난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5. 불교 행사(puja)
1) 호주(Maha Paritta)
상좌부 불교에서도 타력신앙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호주(護呪) 또는 호경(護經)이라고 하는 피릿(paritta)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정토종에서 말하는 타력신앙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이 있다.
염송 기도의 일종으로 특별한 경전을 암송하는 피릿 의식은 해탈하고자 하는 이유보다는 각종 위험이나 재난, 질병과 횡액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3개월 후의 제사, 1년 후의 제사 또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도 진행되는 피릿 의식은 12명 이상의 스님들을 각 집으로 모시고 전날 밤 9시경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 6시쯤에 끝난다.
피릿 의식을 행하는 집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뭇잎 등을 이용하여 집안에 의식을 진행할 새로운 장소를 만든다. 의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초대받아 온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이 참석한다. 암송하는 의식을 진행할 때 스님과 재가자들은 함께 긴 실을 잡고 있는데 의식이 끝난 후에 스님들이 그 실을 잘라서 목이나 오른팔에 매어 준다. 이 실은 삼보를 상징하여 세 줄로 되어 있는데 몸에 감고 있으면 육신을 보호하여 건강해지며 아울러 하고자 하는 일도 잘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태국, 미얀마 등 상좌부 불교국에서도 같은 의미로 피릿 의식을 행한다.
2) 보리수 신앙(Bodhi-puja)
타력신앙적인 의식 가운데 또 한 가지는 보리수 신앙이다. 보리수를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루실 때 앉아 있던 성스러운 사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보리수 행사는 정해진 날이 없이 개개인이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의식인데 보름날에는 모든 곳에서 보리수 신앙을 행한다. 이러한 보리수 행사도 각종 위험이나 재난 질병과 액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 또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축하하기 위해서도 보리수에 물을 붓는 의식을 행한다.
보리수로 부처님을 대신하기 때문에 보리수 앞에 차, 과일, 꽃, 향, 초 등 공양을 올리고 스님을 모시고 스님이 읽어주는 게송과 시 등을 따라하면서 1시간 또는 1시간 반 동안 기도를 올린다.
스님을 모시지 않고도 개개인이 시간 나는 대로 보리수에 와서 물을 부으며 게송을 읽는데 자녀들의 시험, 승진 등 일상에서의 여러 소원들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보리수 주변에 신도들이 없는 시간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3) 패라해라(Perahera)
이 ‘패라해라’라는 행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중심으로 하여 수백 년전부터 시작하여 내려오는 행사이기도 하고 문화재이기도 하다. 백 마리가 넘는 코끼리들에게 옷을 입혀 코끼리 등에 사리를 모시고 많은 악단과 전통 무용수들이 사람들과 함께 시내를 도는 것이다.
현재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불치사(佛齒寺)가 중부 지방 한가운데 캔디(Kandy) 시내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7월 초에 시작하여 7월 보름날까지 15일에 걸쳐 행사가 진행되는데 이 행사는 가장 큰 국가적인 축제이기도 하다.
매일 밤 8시쯤에 시작하여 시내에 정해 놓은 길들을 다니며 밤 12시경에 되돌아와 끝나게 되는데 종교의 차별이 없이 온 국민들이 즐기는 한 달 동안의 국가문화재의 행사이다. 마지막 날 밤은 대통령도 나와 구경을 하는데 불치사의 사찰 관리를 맡고 있는 관료들과 지방장관, 시청장들이 그 다음날 캔디의 대통령 관저로 찾아가 이번 해에도 패라해라 축제가 잘 끝났노라고 신고해야 한다. 이것은 옛 왕조 때부터의 전통이다.
패라해라 행사를 진행했던 이유는 부처님을 존경하는 데에도 있지만, 스리랑카는 열대 지방이고 농경사회이므로 ‘비를 내려 달라’는 염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먼 옛날부터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의식(패라해라)을 행하면 비를 내려준다는 믿음과 국가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불교 예술은 불치사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되어 왔는데 전통 불교 음악, 춤 등 불교 예술을 살리는 행사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불치사의 패라해라의 형식을 빌어 수도인 콜롬보의 캘라니야(Kalaniya) 사원에서는 불교 역사상 여러 이야기를 기념하기 위해서 1월 보름에 패라해라를 연다. 또한 2월 보름에 비구 승가사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콜롬보(Colombo, Gangalama) 시내에서, 삼장 사경 결집을 기념하기 위해 9월 보름에 알루위하라(Aluvihara) 사찰에서 열리는 패라해라들이 유명하다.
4) 가치나(迦?那, Kat.hina-puja)
7월 보름날에 비구들은 모두 우안거(雨安居: vassa)에 들어간다. 이 날 낮에 비구들이 모두 포살당(布薩堂)에 모여 포살의 의례를 행한다.
저녁에는 마을 신도들이 사찰에 모여 앞으로 3개월 동안 우안거에 들어감을 청하기 위해 가사를 만들 옷감을 보시하며 초대한다. 초대받은 비구들 중 한 명이 법회를 열어 안거에 대해서 설법하며 정진을 다짐하는 약속을 한다.
이 기간 동안에 신도들 중에는 계를 받고 같이 수행을 하기도 한다. 또한 아침·점심으로 스님들에게 공양을 가져다 주며 저녁에는 차 공양을 한다. 안거 3개월 동안에는 비구들은 외국은 물론 타지역을 방문할 수 없다.
10월 보름이면 안거가 끝나는데 10월 보름부터 11월 보름까지 안거에 든 스님들에게 특별한 ‘가치나(kat.hina)’라는 가사를 보시하도록 한다. 이 한 달 동안의 기간을 ‘가치나 치와라 마사(kat.hina-civara-maisa)’라 한다.
이 특별한 가사는 사찰 주변 지역의 모든 신도들이 돈을 조금씩 거두어 모으고 마을의 모든 사람이 한 땀씩 바느질을 해서 단 한 벌의 가사를 만들어 단 한 명의 스님에게 보시하므로 그 의미가 깊다. 적당한 날을 선택하여 15명 정도의 외부 스님들도 초대하여 이 가사를 보시하는 의식을 진행하게 된다. 이 날 신도들이 가사를 모시고 새벽 4시부터 마을 안의 모든 길을 빠짐없이 다니면서 전통 불교 음악을 연주한다. 그때에 신도들은 자신의 집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보시를 하기도 한다. 이 가사를 마을에 돌리면 마을의 나쁜 질병들이 사라지고 큰 공덕을 얻는다고 믿는다.
가사를 마을에 돌리고 나서 사찰 안으로 모시고는 스님들에게 점심 공양을 보시하고 ‘가치나’ 가사와 여러 가지 보시물들을 스님들께 올린다. 신도들로부터 보시 받은 ‘가치나’ 가사는 주지 스님과 큰스님들이 안거에 임했던 한 스님을 선택하여 주는데 가장 입을 것이 없거나 모자라는 스님에게 돌아가게 된다. 가사를 받은 스님은 그 가사를 3개월 동안 입고 있거나 항상 함께 해야 한다. 가티나 가사와 떨어져 생활하면 안 되기 때문에 잠잘 때도 머리 옆에 두고 잔다. 그것은 온 동네 사람들의 정성으로 직접 만들어 준 깊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5) 웨삭와 포선
웨삭(Vesak)는 5월 보름을 말하고 포선(Poson)은 6월 보름을 말한다. 상좌부 불교에 있어서 5월 보름은 부처님의 탄신·성도·열반을 기념하는 날이며, 스리랑카 불교에 있어서 6월 보름은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Asoka) 왕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스님이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 그 두 보름날 사이의 한 달 동안에 스리랑카 곳곳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웨사크 날이 되면 전국 각 절들은 스리랑카 최대의 명절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한다. 한 달이나 진행되는 행사에는 법회는 물론 길가는 행인을 위한 보시의 집, 불교 연극이나 찬불가 공연을 한다. 또는 부처님의 《본생경》 등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회화나 전구로 등을 장식하여 아치형의 문(thoran.a)을 만들기도 한다. 가정에서도 가족의 소원이 담긴 등을 직접 만들어 걸기도 한다. 친구, 친척, 부모에게 웨사크를 축하하는 ‘웨사크 카드(Vesak Card)’를 만들어 서로 보내기도 한다.
광장에서는 큰 등을 만들어 등 경연대회도 벌이는데 이러한 행사는 각 지역의 청년불교협회에서 주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구경을 하면서 축제를 즐긴다. 그래서 ‘웨사크를 구경간다’고 말한다. 아울러 이 한 달 동안에는 헌혈을 하기도 하고 축제의 제물로 쓰여질 소를 사서 방생하는 의식도 있다.
6. 맺는 말
스리랑카의 최대민족인 신할라인들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 국민들은 상좌부 불교를 신앙하며 항상 사찰과 연관하여 살아간다. 스리랑카 불교의 특성은 교학 전통, 학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은 모두 팔리 삼장과 그 주석서들이라는 전통의 교학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팔리어 경전, 위빠사나 수행 방법, 보시와 공덕, 호주경, 포살, 가티나 행사, 웨사크 기념 행사 등은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보여준다.
대승불교권의 불교학자들이나 또 다른 국제적인 학자들이 남방 상좌부 불교를 ‘지구상에 살아 있는 불교’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상좌부 불교에서 승단이라는 교단의 강한 힘 때문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