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리
칠성1리는 칠성, 조들, 질매끝의 자연부락을 합쳐 행정리가 된 것이다.
청도천의 충적토와 칠성천, 화리천이 합류하는 이곳의 갈마봉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특히 둑안들, 조들, 새들의 토질은 비옥하며, 수리水利 또한 안전하여 군내에서도 양질良質의 평야(들)로 정평定評이 나 있다.
산지山地는 마을 동편의 갈마봉 산릉이 완만하게 낮아져 있고 서편으로는 풍각면까지 이어지는 산서山西들이 펼쳐져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산 기슭까지 경사진 전답으로 되었고 동편의 산비탈에는 과수밭으로 있었으나, 지금은 많은 전답들이 과수밭으로 감, 복숭아의 재배로 주민소득이 증대 되고 있다.
칠성리 본마을은 마을명이 변경되기 이전에는 마역리麻亦里로 수리水利가 온전치 못하여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밭농사가 위주爲主엿을 것이고 생산되는 농작물 중에도 삼(麻)농사가 대부분이라 “삼”에서 기인起因된 마을명이 아닌가 싶다. 이웃마을 화리가 과거 마실(麻谷)이라 하여 이곳을 마역리라 부른 것으로 믿어진다. 생각하건데 조선시대에 칠성리와 화리에서 생산된 삼(麻)을 원료로 하여 상당량의 마포麻布가 생산됨으로 대구감영大邱監營 및 본군으로 공물 貢物로 배정받아 납품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국도20호선을 중심으로 좌.우의 논은 청도천 호안공사가 완료 되여 “새들”이니 “둑안들”이니 하는 들명(名)이 생겨진 것으로 보여 진다.
조(趙)들(월곡촌月谷村)은 칠성리 동편의 마을로 와미등(갈마등) 북쪽 기슭에 자리한 자연부락이다.
1700년경 조부자趙富者가 거주하면서 마을 일대의 전답들이 조부자의 것으로 조(趙)들이라 부르게 된 것이 현재도 그대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조들이라 부르기 전에는 월곡촌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마을이 적어 각종 지리지나 청도읍지에 등재된 기록이나 문헌은 없으나 이웃마을 화리에 거주하는 영일정씨迎日鄭氏 보첩譜牒에는 뚜렷하게 월곡촌 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일정씨(화리)의 입향조入鄕祖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가 화리로 이거移居하였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월곡이란 와미등 위에 달이 뜨면 이웃 마을인 구랑, 낮실, 칠성의 곡내谷內가 온통 월광일색月光一色이 되여 월곡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질매끝은 각남면의 행정구역이나 사실상으로는 화양읍에 생활권을 두고 있다.
교통, 교육, 생활권 모두가 화양읍 권역이기 때문이다. 도로, 과수원의 농장에 따라 점점이 집을 지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을 도로변이고 주위에는 들판과 과수원 지대이지만 과거에는 청도천 물길이 이곳까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길은 지금의 화양읍 서상2리인 노봉동 마을을 지나 질매고개로 통과하였기에 질매등의 끝부분에 해당된다고 “질매끝”인지 고을 군수가 말안장을 내려놓고 쉬어가던 곳이라고 “질매끌”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후자는 이 지점을 미화美化 과대평가過大評價를 받고자 한 것이 아닌지? 그 내막은 알 길이 없고 질매등인 질매고개에서 유래되었다는 추측만 할 뿐이다.
칠성1리에는 먼 옛날 선사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로 미루어 보아 이때부터 사람이 거주했다는 것이 사실이나 관계 문헌이 없어 어떤 부족이 어떤 씨족이 살았는지는 지금으로서는 규명 할 길이 없다.
다만 1680년경에 고려인 김덕하 金德夏공이 정착하였고 뒤이어 밀양박씨, 김해김씨, 철성이씨가 입동入洞하여 오늘의 칠성1리를 형성하고 있으며 조들에는 철성이씨가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다.
칠성2리는 향죽, 향인촌, 사인촌, 죽촌등의 자연부락이 합쳐져 형성 된 마을 이다.
본군의 진산인 남산이 급격히 내려진 북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칠성1리의 지석묘가 없었다면 이곳이 먼저 마을의 터를 잡고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은 취락의 여건도 좋을 뿐 아니라 우리군의 최고서인 오산지에 향인촌과 관련된 인물편이 있고, 또한 이곳의 지명에도 사통정四通政들, 집들 등이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기 때문에 이 마을의 역사가 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칠성2리는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에서 남고南高 부분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어 일찍부터 고을의 선현先賢들이 거쳐 간 이유로는 남산이라는 명산과 식수가 좋은 탓이라는 점과 군기郡基와의 거리가 가까고 갈마산릉渴馬山陵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풍수지리학적으로 길지吉地가 아닌가 싶다.
사인촌舍人村은 이 마을에서 사인舍人이란 벼슬을 한분이 배출되었다고 사인 舍人또는 사인舍仁이라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후일後日에 와서 사인이 향인촌鄕仁村으로 바뀐 사유는 알 길이 없다.
추측 건데 공자지도孔子之道인 인仁을 바탕으로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자 한데서 마을명이 유래되었다는 것도 배제 할 수 없다. 이것은 1800년 초에 건립된 아산장씨牙山蔣氏의 재사인 화계사華溪詞가 이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유학儒學하고 무관 하지는 않은 것이다. 죽촌竹村은 향인촌의 아래쪽인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칠성천변에 있으면서도 사방四方이 들이라 농촌으로는 좋은 위치이다.
그래서 마을이 취락되였을 것으로 보아지며 특색도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마을에는 대(竹)밭이 있었다고 죽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 마을 주위가 온통 과수밭으로 둘려 쌓여 있다.
향인촌과 죽촌을 칠성2리라 하고 향죽向竹이라 부른다. 이 마을도 어느 마을과 도 마찬가지로 자연부락에서 한자씩 따서 붙인 마을명이다 칠성2리인 향인촌에는 아산牙山인 장희윤蔣希尹공이 정착하면서 마을 터를 다듬고 후손들이 선현先賢의 유지에따라 학문에 전념한 탓으로 유풍儒風이 짙게 생활면에 깔려 있다.
아산장씨하면 향인촌으로 통할 정도로 본군내서는 알려져 있다. 화양읍 신봉리, 청도읍 사촌2리 장蔣씨 마을과 더불어 군내에서는 집성촌 으로 희귀 성씨이면서도 성촌을 이루는 의흥예씨, 기성반씨와 한가지로 유학을 숭상하는 씨족이라 할 수 있다.
칠성리는 자연부락이 많은 마을이 칠성리로 마을명을 정해진 것은 1916년 행정구역 조정 때 다른 마을처럼 글자 한자씩 따서 마을명을 했어도 괜찮을 같은데 무엇가 주민의 마음에 들지 않았든지 마을입구(마을가장자리)에 있는 7개(현재는 4기가 남아있음)의 지석묘를 착안하여 북두칠성을 비유 칠성리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 관리들은 묘墓를 마을명으로 정하였다고 비웃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