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정전, 조선 왕실의 상징적인 공간
근정전의 이름에 얽힌 사연도 흥미롭다. 근정전의 이름을 처음 지은 인물은 경복궁 건설의 주역 정도전이었다. ‘근정(勤政)’이란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나라를 통솔하는 자에게는 부지런함이 요구되었다. 이는 [서경(書經)]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하고, 문왕(文王)이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하며,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하였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정도전 역시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기 때문에, 왕은 무릇 부지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도전이 모든 일에 부지런해야 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할 바’를 알아서 부지런히 정치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왕이 부지런히 해야 할 것으로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왕이 부지런히 할 바를 알고 부지런해야 했던 곳 근정전, 근정전은 조선 정궁의 정전답게 이곳에서는 수많은 의식과 행사, 그리고 역사를 흔든 사건이 있었다. 근정전에서 행해진 대표적인 의식은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는 의식과 역대 왕의 즉위식이었다. 중종 때 편찬이 완료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京都) 부분에는 ‘근정전은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이다. 남쪽을 근정문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홍례문(弘禮門:홍례문은 나중에 흥례문으로 바뀜)이라 하며, 동쪽을 일화문(日華門), 서쪽을 월화문(月華門)이라 한다.’고 하여 근정전의 주요 기능이 조하를 받음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경복궁이 조선전기에만 정궁으로 기능을 한 만큼 이곳에서의 즉위식을 거행한 왕은 정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의 7명으로 확인된다. 첫 왕인 태조는 개성의 수창궁에서 공양왕의 양보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고, 태종 역시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태종이 상왕으로 올라가면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즉위식이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즉위식을 제외하면 근정전에서 행해진 대부분의 즉위식은 슬픈 즉위식이었다. 선왕이 승하한 후 장례 의식이 엄수되었기 때문이었다.
근정전에서는 외국 사신을 접견하면서 다례(茶禮)와 불꽃놀이를 행하기도 했으며, 근정전 앞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했다. 세종 때에는 생원, 진사시를 실시한 후 근정전에서 방(榜)을 발표하고, 생원 진사의 백패(白牌)를 나누어 주었다. 세종이 문과 시험의 책문(策問)을 낸 곳도 근정전이었다. 1519년(중종 14) 중종 역시 근정전에서 친히 책문을 냈는데, 당시 출제 문제는 ‘요순의 도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으며, 응시자는 120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