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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교통사고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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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어머니. 박명희.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지난 1999년 12월 8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2개월여의 투병생활 끝에 생을 마치셨다. 하지만 어머니가 보여주신 독도사랑은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지난 1998년 6월에 독도사랑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대구행사를 하면서 어머니를 몇번 만나뵐 기회가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어머니가 경영하는 덤방구 식당에서의 기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아래는 주간한국(1999.3.11)에 소개된 어머니의 이야기 전문이다. 어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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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문제로 온 육지가 시끄럽다. 한일어업협정이 발표된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독도영유권 문제까지 다시 들먹거리는 판이다.
이 소란을 바라보는 대구의 한 한정식 식당 주인 박명희(44)씨. 그 심정은 어떨까. 박씨는 대구에 사는 ‘독도어머니’ 다. 누가 임명장을 준 것도 아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죄다 그녀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94년부터 지금까지 독도경비대원들에게 김치를 담가 보낸 일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두고 ‘정부도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숨은 애국자’ 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좋아 이 일에 뛰어든 사람이다. 김치뿐 아니라 명절때면 고향을 찾아가듯 바리바리 음식이며 생필품 등속을 챙겨들고 대원들을 찾는 ‘젊은 어머니’. 독도에 드나든 것만 모두 일곱 번이다. 자신의 아들을 경비대원으로 둔 부모보다도 더 많은 횟수다. 아니 독도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반인’ 의 접근이 쉽지 않다. 대원들뿐만 아니라 이젠 독도 일 전체가 내 일 같기도 하다. 96년 일본총리 독도망언사건때엔 하던 식당일도 밀쳐두고 울릉도 선상시위까지 참가한 일이 있다.
시위대의 맨 앞줄에서 눈에 띄게 핏대를 올리던 사람이 그녀다. 처음엔 독도에서 고생하는 대원들 입걱정이나 덜어주자고 시작한 일이 그사이 그녀의 ‘업’ 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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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결혼한 ‘반 머스마’ 억척 노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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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라곤 하지만, 호적상으론 마흔 중반이 다 된 지금도 ‘데려가는 놈이 없어서 시집을 못 가는’ 노처녀다. 이미 소문난 욕쟁이지만, 그것도 웃는 얼굴로 욕을 한다거나 ‘돈 안되는 손님’ 까지도 따뜻하게 챙기며 친절을 베푸는 통에 차마 미워하지도 못하게 하는 남다른 기술이 있다. 그녀가 경영하는 식당은 ‘덤방구’ 라는 한식당. 올해로 9년째다. IMF이후 매상이 예전의 10분의 1로 떨어졌지만 그나마 잊지않고 찾아주는 ‘골수’ 단골들 덕분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메뉴부터가 순 토속음식인데다 손맛도 좋아서 대구에선 제법 알려져있고 단골 가운데엔 지역의 ‘유지급’ 인사들도 꽤 있다. 독도경비대와 인연이 맺어진 것도 바로 그 단골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딱한 현지 사정을 들으면서부터다. 식량은 물론 물까지도 두달에 한 번 겨우 받아 산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썩은 물’ 로 두 달을 산다는 얘기였다. 궁여지책으로 ‘바이오 물통’ 이라도 사주려고 한다는 그 단골손님의 말에 박씨는 ‘그럼 나도 일부라도 돕겠다’ 며 나섰다가 결국 김치를 보내주는 것으로 조정됐다. 바로 그날부터 오늘까지 독도경비대원들의 김치보내기가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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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때엔 매달 한 번씩 김치를 보냈지만, 최근엔 식당수입이 줄면서 보내는 횟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있다. 한 번에 드는 배추만 약 200포기. 독도식구 43명이 한달동안 먹을 양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많게는 150만원까지 든다. 아깝다는 생각 없이 순전히 ‘자식 바라지’ 를 위해 쓰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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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체도 여간 큰 노동이 아니다. 처음 일하는 아주머니들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첫날 200포기를 소금에 절이고 돌아가더니 다음날 아무도 식당에 나오지 않았다. 일이 워낙 고되었는지 아예 결근해 버린 것이다. 몇번을 그렇게 혼이 나 본 박씨는 나중에 아예 배추 일부를 미리 절여둔 뒤 사람을 불러 도중에 일손 ‘증발’ 을 막는 꾀도 생겼다. 남보기는 좋아도 이같이 ‘돈도 품도 많이 드는 일’ 이다. 그 일을 5년이나 끌고 온 것도 억척같은 박씨였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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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수비대원들 모두가 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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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어른들이 애들한테 공부 잘한다 잘한다 칭찬하면 신이나서 더 잘하게 되잖아요.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도 당시 독도 경비대장님이 수시로 전화걸어서 고마워하고 대원들 안부도 전해주고 덕분에 잘 먹고 있다고 좋아하시는게 너무 흐뭇하고 기분좋아서 점점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애들도 휴가 나오면 꼭 우리집에 들러서 자고 가기도 해 오죽하면 식당 손님들이 ‘독도엄마 아들이냐’ 며 대원들에게 용돈까지 줘보내곤 했습니다. 50명 가까이 되는 경비대원들 명단도 거의 외우게됐고 다음 교체조가 누구누구인지도 환하게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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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사이 경비대장만 벌써 세 번이나 바뀌었다. 맨처음 알게 된 양재열 당시 경비대장은 ‘독도 빠꼼이’ 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어디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미리 알만큼 ‘독도박사’ 였고 정도 많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박씨가 궁금해할까봐 수시로 전화를 걸어 대원 하나하나의 안부며 살아가는 얘기까지 마치 친가족처럼 들려주곤 했었다. 그 후임으로 오면서 친해진 이승명 경감은 나중에 급성골수암에 걸려 세간의 안타까움을 샀던 주인공. 수술비 1억3,000만원을 구할 길이 없어 다들 속만 끓이던 때, 박씨는 당시 자신의 식당 고객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영남대 총장에게 사정해 어렵사리 무료수술을 주선하기도 했다. 여전히 좋지않은 상황에서 두달전엔 골수이식수술까지 받았다는데, 일체 면회까지 불가능해져 최근엔 박씨도 그저 가족으로부터 주변소식만 전해듣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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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경찰대학 출신에다 나이도 20대 초반이라 그런지, 예전 경비대장이나 대원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예전같은 푸근한 정이 적어진듯 해 가끔 마음 헛헛할 때도 많다. 독도 근무기간 자체가 짧아진 탓도 있다. 길게는 거의 10개월 가까이 독도에 머물면서 “니 누고?” 하면 “접니다” 로 통하던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김치가 제대로 도착했는지 궁금한 박씨가 아예 먼저 전화를 걸어 물어보는게 속 편하다. 어머니 노릇은 그래서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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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척스럽지만 인정 많은 식당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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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에서도 억척 주인으로 소문났다. 내내 욕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누구에게도 스스럼없고 유난히 잔 정이 많은 그녀는 손님들 사이에 인기다. 털털한 성격은 그녀의 천성이기도 하다. 경북 의성 출신인 박씨는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소문난 ‘반 머스마’ 였다. 집이 가난했지만 차라리 ‘너무 가난하고 너무 못생기고 너무 배운게 없었기에’ 지금 이만큼이라도 잘 살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다. 가진게 없으므로 처음부터 자신이 열심히 해야 잘 산다, 남에게 기대면 안된다는 생각이 어려서부터 머리에 꽉 박혀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동안 섬유공장 경리로도 일했고 작은 인삼찻집도 열었다. 오랫동안 마음을 둬왔던 음식점을 직접 시작한 것이 91년. 장사는 대체로 잘 됐다. 붙임성도 좋은데다 일 솜씨가 아주 야무지고 철저했다. 보기엔 덜렁대도 ‘최선을 다한다. 남 흉내는 절대 안낸다. 내가 확실히 아는걸 가지고 장사해야 실수를 안하지 다른 사람만 겉따라가면 실패한다’ 는 나름의 영업방침도 확고했다. 지금도 화장실 청소는 직접 해야만 속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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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도 해봤다. 어찌어찌 모은 큰돈을 아는 친구에게 빌려줬다가 떼이기도 하고, 재작년 여름엔 대선특수를 겨냥해 송이버섯을 사뒀다가 누군가 냉장고 스위치를 내려버려 하루아침에 8,000만원어치를 홀랑 날린 적도 있다. 그래도 밉고 아쉬운 마음을 한 번에 털어버리면 그것으로 끝.
대신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수록 많이 들어오더라는게 그녀가 장사를 통해 배운 교훈이다. 얼마전엔 구조조정 여파로 실직을 당한 뒤 9일간 그녀를 찾아와부인에게도 말하지못한 고민을 털어놓은 중년 단골도 있었다. 쉽게 보자면 ‘밥집 아줌마’ 에 불과한 자신을 그만큼 소중한 한 인간으로 생각해주고 있다는 점에 오히려 고마웠다.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사람에게 극진하기는 아무래도 타고 난 듯 하다. 정문 수위들에게 번번이 잡상인이란 오해를 받으면서도 오후 서너시쯤 되면 친한 단골들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파전이며 찐 고구마 등 간식거리를 돌리기도 했다. 손님이 잘 돼야 식당도 잘 될테니까. 그렇게 돈을 벌어서 쓰고 싶은 데가 너무 많다. “돈만 있으면 나눠 쓸데가 얼마나 많습니까” 라고 그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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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체아 수용 시설서 자원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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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최대의 낙도 바로 그런 것들이다. 독도수비대도 ‘수비’ 해야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평생 함께 나누면서 살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엔 ‘돈’ 대신 ‘몸으로 떼우는’ 방법도 새로 개척했다. 매주 수요일 인근 정신지체아 수용시설에 나가 아이들 목욕과 빨래와 청소 등을 하는 일이다. 체력으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첫날엔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어린이 14명을 목욕시키고 돌아와 완전히 떨어졌다. 토, 일요일엔 아예 한 아이씩 번갈아가며 식당에 데리고 와 사정이 허락하는데까지 며칠씩 친부모처럼 거뒀다가 들여보낸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의 아이인줄 착각하기도 하고, 종종 싫은 내색을 하는 손님도 있다. 그때마다 박씨는 그저 빙긋 웃으며 ‘불쌍하쟎아요…’ 할 뿐이다. 남들이 어떻게보든 그렇게라도 자신이 데리고 나오지 않으면 한달 내내 바깥 바람을 못쐬리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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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곁엔 언제나 즐거운 일이 수두룩 널렸다. 식당을 하면서 좋은 손님들을 만나 친구처럼 지내는 일도 즐겁고, 곧 날씨만 풀리면 준기와 찬석이 등 뇌성마비아동 3명을 데리고 나가 달성공원 동물구경을 시켜줄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다. 장사가 안된다고는 하지만 문을 닫지않은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 있으면 외로울 일도 짜증날 일도 없다. 독도어머니가 똑똑하다는 것도 바로 그런 지혜를 진작에 깨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순간은 역시 직접 담근 김치박스를 싣고 포항까지 달려가 독도 가는 배편에 실어올릴 때다. 이 기분좋은 일을 아무래도 그녀는 평생 놓지 않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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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있어서 남을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힘들때도 그저 ‘이건 내가 해야 될 일’ 이라는 생각으로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한번 맺어진 인연이니 독도는 제 평생 돌봐야지요. 하루빨리 독도가 ‘확실한 우리땅’ 이 됐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힘 닿는데까지 주변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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