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닮았나봐요!
어릴 적 어머님의 아픈 허리는 끙끙, 밤새 앓는 소리가 자장가로 되어 버린지 오래되었다. 새벽녘이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심해질때면 부시시 일어나 가마솥에 군불을 지핀다. 따뜻한 물로 밥도 하고 세수를 하려면 일일이 물을 가마솥에 데워야 했던 시절이다.
그 시절 우리 일곱 남매와 부모님 그리고 신장병으로 투병중인 고모님과 할머니 그렇게 모두 열 한명 가족이었다. 그 많은 빨래며 밭일과 논일, 그리고 봄 가을에는 누에치기등. 끝도 없이 많은 일거리에 엄마의 손은 갈라지고 손톱이 다 닳아서 아프다고 하소연 하시곤 하셨다.
철이 없는 나는 겨울이면 손과 발이 터져 피가 나도록 얼음판에서 뛰어 놀았고, 봄이면 진달래 따러 온산을 헤매고, 여름이면 물놀이에 고기잡이에 마냥 신나기만 했다.
그런 우리 형제들을 아버님은 농사일에 적극 총 동원하셨다. 봄가을의 누에치기는 먼 밭에 가서 매일같이 뽕잎 따서 실어나르는 일은 우리 형제들 몫이었는데 오빠들이 태워주는 리어카가 신나고 재미있어서 열심히 따라다녔다.
비가와서 뽕잎이 젖어있으면 하나하나 물기를 닦아내야 누에들이 먹을 수 있었다. 창고가 따로 없던 관계로 선반을 안방에다 만들어 누에들에게 내주고 우리들은 선반통로에서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사각 사각, 쏴~ 비오는 듯한 소리를 자장가삼아 새우잠을 자야했다.
자다가도 수시로 뽕잎을 갈아줘야 했다. 뽕잎을 많이 먹고 배불러야 최상품이 나온다고 엄마는 쉬지 않고 지극정성이셨다.
왕성한 식욕도 잠시, 손가락만 하게 자라면 자기 몸에서 하얀 실을 뽑아낸다. 자기 입으로 실을 뽑아서 자기자신을 가두고 번데기로 탈바꿈하면서 땅콩모양의 하얀 집을 짓고는 생을 마친다. 온 방이 대롱 대롱 눈이 부시다. 하나 하나 따서 장에 나가 특등품이라도 나오면 그제서야 엄마의 얼굴에 함박꽃이 만발하시곤 하셨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는 더 힘들어 하셨다. 병원에는 가보셨을까? 아마 병원비 아까워 안가셨을 거다. 그 당시에는 특별한 수도 없었다. 급기야 엄마의 허리는 앞으로 굽어진 채로 바로 펼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부부동반 모임이라도 있을라치면 허리를 펴라고 다그치지만 엄마는 눈물만 흘리셨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세월이 흘러 시골을 떠나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입학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공부를 따라가기가 어려워지자 스트레스로 인한 변비와 편두통이 생겼다. 악성 변비의 고통이란 당해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급기야는 허리에 무리를 주어 무기력증과 편두통을 동반한 결과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재수를 시도했지만 지독한 편두통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부모님이 계신 예산 시골에 내려가서 낮에는 자고 밤에는 음악을 들으며 무기력한 생활속에 빠져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로 인해서 부모님들이 얼마나 속이 타셨을까!
아버님께서는 시흥 끝자락 소화리에 자그마한 연립을 마련해서 오빠 둘과 언니, 오빠친구, 남동생이 살았다. 얼마 후 언니가 시집을 가 버리자 나 혼자에게 가사 일이 맡겨졌다. 도시생활은 무미건조했다. 이십대 초반의 활기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가 없었고 한 정거장도 걷기가 싫고 힘들었다. 산다는 것이 아무런 바램도 의미도 느낄 수 없었다. 이럴 바엔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그날부터 죽을 방법을 연구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다면 자살모임에서 확실한 방법을 찾았을텐데...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죽는 방법을 찾지 못하자, 다시 한번 생각을 고쳐 먹자는 생각을 떠올랐다. ‘현재의 이 무력함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죽는 방법이고, 또 한가지는 죽기로 작정하고 이겨내는 방법인데, 그렇다면 한번 더 용기를 내 보자!’
무작정 배낭을 꾸려 기차를 탔다.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기타치고 노래 부르며 마냥 활기에 차 있었다. 모두 다 어디론가 목적지를 가지고 너무나 즐거워하는 기차 속에서 나만이 혼자였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 에게 어디가시냐고 묻자 지리산에 간다고! 엄청 좋은 산이라고 덧붙어 말한다.
‘그래! 나도 지리산에 가보자!’
한 정거장도 걷지 못했던 자신을 잊어버리고 산으로 목적지를 정해버렸다. 지금으로 부터 30년 전 지리산은 깊은 산골짜기였다. ‘세상에!’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거림계곡은 웅장한 집채만한 바위들이 즐비한 채로 널려 있었다. 계곡 넓이도 엄청나 보였다.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에 정신이 흠뻑 빠진 채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세석평전 까지 올라가 버린 것이다.
오두막 산장에 숙소를 정하고 돌아본 세석평전은 출렁이는 파도처럼 산봉우리들이 다가왔다가 사라지고 하늘이 열렸다 닫혔다 변화무쌍한 기류의 움직임으로 탄성 이 멈출 줄을 몰랐다. 전국에서 모여든 알록달록한 텐트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았다.
머리위에서 금방이라고 쏟아질 듯한 선명한 별들..... 새까만 하늘에 별들의 향연를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대자연의 신비로움에 살아있는 기쁨을 처음 느꼈다.
산행에서 돌아와 지인의 소개로 취직을 했다. 조그마한 개인사무실에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결혼자금 5백만원을 3년 만에 만들겠다는 당찬 목표를 가지고 들어갔다. 월급타면 청소년 도서목록 속에 있는 책을 하나씩 섭렵해 나갔다.
“인생은 자기가 감내할 정도의 시련을 준다”, “쇠는 달굴수록 단단해진다”, “단순함이 진리다” 라는 명상록. 행복론, 라즈리쉬,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책속에 펼쳐져 있었다. 뭔가에 열중한다는 것이 이리 재미있을 줄이야!
하지만 허리의 통증은 순간순간 모든 행동에 힘겨움으로 머물러있었다. 퇴근해서집에 돌아가면 빨래는 산더미였다. 수압이 낮아 반자동세탁기는 역할을 할수 없으니 손빨래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오죽 힘들면 내 허리 고쳐주는 남자랑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직장생활과 집안일이 힘들었다.
사람은 마음먹은 데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정말인가보다. 적금이 거의 끝나갈 무렵 잘생기고 마음씨 좋은 남자. 거기다가 내노라 하는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던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가 찾던 이상형이고 그동안 관심이 많았다고 하면서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허리를 고쳐주겠단다.
앗싸! 심봤다. 그날 이후 본격적인 관심과 사랑속에 전국에 유명한 한의원을 찾아서 좋다는 약(수탉을 삶은 물에 한약을 달여 먹는 것인데 엄청 느끼함)을 지어서 보냈고 병원을 순례하면서 치료도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결혼부터 하고 다시 고쳐보자고 1986년 우신향병원 근처에 신혼집을 마련해서 살게 되었다.
여러 식구들과 살다가 단촐히 둘이서 있으니 가사일도 적고 얼마나 편안하고 좋은지. 그것도 잠시 허리의 통증으로 두 달만에 병원에 입원해서 꼬박 누워서 견인(몸을 묶어서 무거운 쇳덩어리를 매달아놓는 방식)한다고 목과 허리를 묶고 잡아땡겼다.
그리고 베개받치고 엎드려 누워 밥 먹고, 머리도 누워서 감는 등. 완전 중환자처럼 꼼짝못하는 원초적인 방법으로 치료하던 시대였다. 정성과 인내를 다했지만 차도는 없었다.
두달만에 퇴원해서 교정원 치료을 다시시 작했다. 그 당시 월급이 20만원 정도 였는데 치료비는 30만원 정도가 들었다. 그곳에서 얼마동안 치료하면서 좋아지고 그 이듬해 건강하고 잘 생긴 큰아들을 낳았다. 세상이 달라보였다. 너무나 소중하고 예뻐서 쑥쑥 자라는 모습을 사진에 순간순간 담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아이에게 심취해 있었다.
어느 날 아이를 안고 머리감기다가 별이 반짝하고 충격이 오더니 허리가 펴지지않아 주저앉았다. 급한연락받고 온 애들아빠는 비오는 거리를 우산들고 등에업고 동네 한의원으로 내달렸다.
몇 군데 전전했지만 펴지지가 않았다. 결국 사당동에 명의가 있다하여 그곳에 가니, 입원수술 퇴원한지 3일됐다고 거절당했다.
뱃속에는 3개월된 아기가 들어 앉아 있으니 우리 아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였더니 그럼 임시방편으로 치료해 주신다 하셨다. 아마도 아이가 살수 있는 운명이었나 보다. 아들의 생명의 은인인 그분에게 새삼 감사드리고 싶다.
그로부터 10년 후 남편과 계룡산 갔다가 교차로에서 사고나면서 건강했던 몸은 다시 허리통증과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교통사고 휴우증은 날로 악화되고 급기야는 4년후에 꼼작못하고 몸져누우면서 반신욕을 만났고 산과 반신욕으로 정말 열심히 체력보강에 정성을 다하면서도 네 차례의 교통사고와 허리수술, 발목 수술을 받으면서 매번 새로 태어나듯 일어서곤 하였다.
건강한 몸은 만들었지만 허리근력이 약하다보니, 반듯함보다는약간틀어진몸과 구부정한 어깨로 자세가 조금씩 휘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있었다.
골반을교정해보라고 !누군가가 조연을 해주셨다.
골반을 바르게 잡아주자 꾸부정하던 허리와 어깨가 반듯하게 펴지고 든든한 힘이 받쳐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배가 따뜻해지면서 소화력이 좋아지고 숙변이 시원하게 해결되면서 체지방이 없어지자 s 라인 생기는 날씬한 몸매가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틀이었다.
30년 넘는 기나긴 세월동안 허리통증으로 고생 했는데, 골반잡아주는 틀 하나로 허리에 근력을 만들고 바르게 펼수있으니 참으로 신기하기만하다.
그렇게 아파하고 힘들어하신 우리 엄마!
지금 살아계셨다면 구부러진 허리도 반듯하게 세우고 예쁜 옷도 입을 수 있을텐데... 골반교정으로 몸이 좋아질수록 엄마 생각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가을이다.
첫댓글 와우...인간승리네요. 그 멋진 남자좀 봐야겠어요. 골반교정으로 오늘에 김영란님이 S라인을 유지하구있군요...축하하구요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1.10.04 19:43
인간 승리네요 언니 지금 너무 멋지십니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거 맞나요? ^^ 추카 추카 언니는 참 곱게 살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남모르는 아픔이 있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