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 올라 유람하는 사람이 항상 끊이지 않으며, 산간 계곡의 그윽한 곳을 찾아 즐기기도 하였다.
때로는 산정에 올라 도성의 전모는 물론 남·서쪽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의 긴 흐름을 굽어보고
서·북·동 3면으로 도성을 둘러 싼 원근의 산악을 조망하면서 호연지기를 가져보기도 하였다.
더구나 단오절 같은 서민의 명절이 되면 도성의 장정·소년들이
남산 중턱의 잔디로 덮인 예장(藝場: 군사훈련장) 등지에 운집하여 씨름대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남산 북록의 주자동 막바지와 외남산의 남단 옆 녹사장및 북악 아래 신무문 밖이 씨름대회 장소로 유명하였다.
남산은 이미 정도 초기부터 도성십영(都城十詠) 중에 「목멱상화」가 있어 유명하지만,
후기로 오면서도 남산의 승경을 찾는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남산의 북쪽 사면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이루어 많은 사대부들이 저택과 정자를 마련하고
독서와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다.
현재 필동 막바지의 골짜기인 청학동은 한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경치 가운데 하나였다.
이 마을에는 중종조의 문신이었던 이행이 살았는데, 남곤을 비롯한 많은 시우(詩友)들이 왕래하면서
시회(詩會)를 벌이기도 하였다.
또 이안눌(李安訥)은 필동(현 동국대 경내)에 단을 쌓고 권필·홍봉서 등 당대의 명유들과 단상에 모여 앉아
시심(詩心)을 노래하였다. 영조 때 문신인 조현명은 남산 기슭 묵사동(필동2가)에
귀록정(歸鹿亭)이란 정자를 짓고 사계절의 풍치를 완상하였다.
또 남별영의 계곡물에 걸쳐 세워진 천우각(泉雨閣) 주위는 여름철 피서지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 근방 바위벽에는 ' Y? '라는 각자가 새겨져 예로부터 명소임을 전해 주고 있다.
그 뒤 고종년간에는 영의정 이유원이 이곳에 쌍회정(雙會亭)을 짓고 격동하는 사회에서 정치를 구상하였다.
정원용은 화수루(花樹樓)를 짓고 시심으로 한 때나마 전환기의 사회를 잊으려고 하였으며,
조인영도 이곳에 노인정(필동2가 산록)을 짓고 때때로 풍치를 읊는 등 당대의 문장가들이
이 노인정에 모여 주위의 승경을 감상하면서 시와 술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남산의 북록인 회동(회현동)도 풍치가 수려하여 승지로 유명하였다.
정광필이 이곳에 거주한 이후 많은 문인들이 와서 살았다.
김석주는 이곳에 누정을 짓고 그 모양이 범과 같으므로 범은 산에 있다 하여
누정의 이름을 재산루(在山樓)라 명명하였다.
영·정조 때 서화가였던 강세황은 홍엽루(紅葉樓)를 짓고 주위의 자연경관을 화폭에 담기도 하였다.
정원용은 말년에 회현동 본가에서 휴양하면서 남산의 풍광을 즐겼는데
당대 명망이 높던 조인영을 비롯하여 김좌근·김병학 등이 자주 이곳에 들려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다.
학문으로 이름이 있던 박영원·조용화·윤정진 등도 자주 이곳에 들려 풍치를 즐겼다.
특히 박영원은 왜성대 부근 샘이 흐르는 언덕 위에 녹천정(綠泉亭)을 짓고 풍경을 감상하였는데,
이 부근에 삼아계약수·복천암 등이 있어 한층 더 산수의 풍경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통감부 부근에 있던 녹천정 옛터에는 이토오 히로부미가 새 정자를 짓고
이름은 그대로 녹천정이라 하여 조석으로 올라 침탈의 흉계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서울에는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 때에 남산골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체로 벼슬자리가 없고
가난하여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또 '남산골 샌님'이라는 말도 있어서 가난에 오기만 남은 선비를 비양댈 때에 쓰였다고 하는데
'남산골 샌님이 원 하나 내지는 못해도 뗄 권리는 있다'라는 말이 전해 온다.
샌님이란 말은 생원님이란 말의 준말로, 남산골에는 불우한 양반이나 과거에 떨어진 생원님,
즉 샌님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남산골 샌님들은 불우한 생활을 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선비의 고고한 기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남산은 조선시대 이래로 일본과의 대외관계 속에서 많은 악연을 낳았다.
국초에 선린외교 관계상 인현동 근처에 일본사신이 머무는 동평관이 마련되었다.
그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오늘날 조선호텔 자리인 남별궁에 지휘부를 마련하고
남산 북록인 예장동의 왜성대 부근에 왜군 1,500여명이 진을 치고 왜성을 쌓기도 하였다.
19세기말 개항이 되면서 일제의 세력이 서울에 밀려 들면서 남산은 또 다시 일제의 군화에 짓밟히게 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군의 봉기를 구실로 일제는 서울의 남산 등에 군대를 주둔하고
왕궁을 표적으로 포대를 설치하여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일본측의 강압적인 위협 아래 남산 노인정에서 회합을 가졌으나 결렬되자,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침범하고 위협하여
결국 갑오경장의 피동적인 개화 제도의 시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고종 29년(1892)에 일본 거류민들은 남산 북쪽 기슭에 황대신궁(皇大神宮)을 세우기로 계획하여,
건양 2년(1897) 3월 17일 일본공사는 조선정부와 교섭하여
1ha의 땅에 공원을 세울 것을 목적으로 영구 임차지화 했다.
이해 7월 일본 거류민들은 이를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이라 명명하고 각종 시설을 갖춰 갔으며
1898년 11월 3일에는 이 공원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 후의 京城神社)을 세웠다.
광무 8년(1905) 왜성대에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일본공사관 건물에는 조선통감부가 들어섰다.
1906년에 발족된 경성이사청은 예장동 2번지에 자리 잡은 뒤 남산 북록 일대를 경성공원이라 명명하였다.
이어서 일본 거류민의 수가 증가하자 일본인은 현재 남산식물원 자리에서부터
남대문에 이르는 남산 서북록 일대(회현동1가 산 1번지 일대) 30만평의 땅을 공원으로 추진하여
융희 2년(1908)에 영구 무상 대여받기에 성공하고, 그해 봄부터 각종 시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정식 개원한 것은 1910년 5월 29일로 이 개원식에 고종은 칙사를 보내 치하하고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 이름하였다.
일제는 1916년부터 남산 전체를 공원화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동쪽의 장충단, 남쪽의 성곽 밖, 한양공원, 왜성대공원을 포함하는 대삼림공원계획이었다.
그리하여 1918년 조선시궁을 현재 남산식물원 일대에 건립하기로 하여 공사를 시작하고 한양공원은 폐쇄하였다.
이 신궁은 1925년에 완성되었는데 이때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은 헐리어 인왕산 서쪽으로 옮겨갔다.
한편 광무 4년(1900)에는 고종황제가 항일의 뜻으로 남산 동록, 옛 남소영이 있던 자리에 장충단을 세웠다.
이 단은 임오군란과 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 및 장병들의 충혼을 제사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남산에 대삼림공원을 계획하면서 장충단을 공원으로 편입시킨 뒤
1919년 6월부터 공원시설을 시작하였다.
그 뒤 1940년 3월 1일자로 조선총독부는 예장동 일대 34,800㎡를 남산공원으로,
장충동2가 일대 418,000㎡를 장충단공원으로 각각 지정하였다.
광복이 되자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과 일제의 사찰들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숭의여학교와 안중근의사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어 이한응열사의 기념비가 세워지고, 수표교를 옛 모습 그대로 옮겨 보존하였다.
또 용두동 서쪽 산록, 일제 때의 조선신궁 자리에는 1956년 광복절을 기하여
이승만대통령의 동상이 건립되고 그로부터 3년 뒤에는 남산 상봉에 우남정(雩南亭)을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이승만 동상과 우남정이 철거되었으며,
그 뒤 백범 김구의 동상이 남산광장에 들어섰고, 또 시립남산도서관 앞에는 정약용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그 밖에 어린이회관(현재 서울과학교육원)을 비롯하여 식물원·분수대 등이 1960년대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1955년 7월 11일 남산공원과 장충단공원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1959년 3월 12일에는 내무부에서 '남산대공원'으로 명칭을 고쳤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2년 7월 30일 장충단공원 용지 일부가 해제되어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이 건립되었다.
같은 해에 한국삭도(주)에서 케이블카를 설치 운행하기 시작했다.
1964년 12월 10일에는 시립 남산도서관 건물이 세워지고,
1968년 12월에 남산식물원이 개관되어 1971년에 증축 개원되었다.
1970년 6월 18일에는 남산 남쪽 중턱에 16층·17층 2개 동의 외국인 임대아파트를
대한주택공사에서 건립하기 시작하여 1972년에 완공됨으로써 남산의 경관을 크게 훼손시켰다. (1995년 철거)
그리고 1973년 10월 17일에는 장충단공원 남쪽 기슭에 국립극장·국립국악원·국립국악고등학교 등이 세워졌다.
1984년 9월 22일에 건설부에서 장충단공원을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 병합하였다.
이후 강남의 개발과 함께 남산은 교통의 장애가 되어 왔으므로
중구 필동과 용산구 한남동 사이에 제1호 터널이 개통되고,
용산구 이태원동과 중구 장충동을 연결하는 제2호 터널이 1969년 5월에 기공하여 1970년 12월 4일에 개통되었다.
이어서 용산구 이태원동과 중구 회현동을 잇는 제3호 터널이 1976년 5월 14일에 기공되어
1978년 3월 31일에 개통되었다. 서울의 명물로 손꼽는 서울타워는 남산 정상에 세워졌다.
이 탑은 236.6m로 1975년 8월에 완공되었으나 1980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리고 남산지구의 옛 성곽으로 광화문∼남소문∼남한산성∼숭례문까지의 3,200m 구간은
1977년부터 복원하기 시작하여 광희지구·장충지구·남산지구로 나누어 성곽 복원을 완성하였다.
<참조 : 서울의 산,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