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제1부 폭풍전야
제4장 신군부와 민중의 대격돌
2. 서울역 진군
서울지역 10만대학생 신군부 유신부활음모 성토
학생회장단, 군과 충돌우려 회군결정
「사북사태」등 노동운동 폭발적 전개
전남대 학생 2천여명 「YWCA국민대회」지지 대규모 교내시위 벌여
박정희 사망이후 일단 상황을 주시하며 행동을 자제해온 대학생 및 재야단체들은 최규하정부의 본질이 하나 둘 드러나자 즉각 반격을 개시한다.
79년 11월 13일 해직교수협의회 등 5개단체가 긴급조치해제, 정치범의 전면 석방.복권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 저항의 신호탄을 쏘아올리기 시작한다.
이어 19일 기독청년협의회(EYC)의 「기독청년민주화선언」발표, 21일 동아민족기자 40명의 「자유언론을 위한 결의」채택, 22일 서울대생들의 「학원민주화선언」발표등이 잇따른다.
물론 이같은 움직임들은 계엄당국의 철저한 언론검열로 일반국민들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다시 며칠이 지난 11월 24일 오후.
서울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명동성당앞으로 1천여명의 군중들이 떼지어 모여든다.
그들은 모두 홍성엽군과 윤정민양의 결혼식청첩장을 지니고 있는 상태다.
명동성당앞 YWCA강당을 가득메운 「하객」들이 갑자기 최규화, 김종필의 유신정부 퇴진과 거국 민주내각구성 및 외세개입거부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 계엄군이 대회장을 덮쳐 96명을 연행한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시민, 학생들이 무교동까지 가두시위를 벌이자 다시 44명을 추가로 연행한다.
계엄사는 연행자들 가운데 전국회의원 양순식, 박종태, 백범사상연구소장 백기완, 동아일보 해직기자 임채정등 14명을 구속하고 10명을 수배하는 한편 윤보선, 함석헌 등 4명을 불구속송치한다.
조기개헌 시위 잇따라
당국이 「YWCA위장결혼식사건」으로 명명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는 이렇게 막을 내렸으나 이 사건이 당국 및 일반 국민들에게 준 충격은 매우 크게 작용한다.
수도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대규모 정치사건을 도저히 은폐할 수 없게된 계엄당국은 「사회혼란」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다시한번 휘두른다.
그러나 12.12를 지켜보며 정국추이에 당혹감을 품고있던 상당수 국민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신세력에 대한 의구심을 점차 증폭시킨다.
과연 저항의 불길은 더욱 번져간다.
11월 26일 KSCF(전국기독학생총연합) 10주년 기념행사를 계엄당국이 봉쇄하지 이 단체회원 50여명이 농성을 벌이다 8명이 구속되고 27일엔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조기개헌, 조기총선을 요구하는 소규모시위가 발생한다.
28일 광주에서는 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 주최 수요연합예배에서 목회자와 신도들이 경찰과 충돌, 19명이 체포되며 29일 서울파고다공원에서는 2백여명의 청년들이 유신헌법 대통령선거를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인다.
드디어 30일, 전남대학생 2천여명이 YWCA국민대회를 지지하는 대규모 교내시위를 조기, 폭발시킨다.
그러나 이같은 저항들은 전면투쟁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12월7일 최규하는 유신최대 악법인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한다.
바로 이날, 계엄위원회 제6차회의에서 당시 내무부차관이던 서정화는 이런 발언을 한다.
「긴급조치 9호해제에 따른 문제점으로 첫째, 김대중 등 극한 반체제분자들이 종교 학원 노동자들과 연합체를 형성, 3∼4월 고질적인 소요를 틈타 과감한 개헌과 현체제의 즉각퇴진 등을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서의 발언은 곧 유신세력들의 시각이었으며 그들이 이같은 「시각」과 「확신」을 수정하지 않는한 전면적인 민중항쟁은 피할수 없는 일로 뚜벅뚜벅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과도정부가 개헌과 선거일정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동안 유신체제아래서 극도로 억압당해온 민중의 힘이 정치권력의 공백상태를 비집고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한다.
80년봄 봇물처럼 터져나온 노동자들의 투쟁은 70년대말 심각한 불황에 따른 생활의 고통과 인권박탈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띠게 된다.
80년들어 4월 24일까지 전국에서 발생한 노사분규는 무려 7백19건으로 79년 한해동안의 총분규건수 1백5건에 비해 7배나 많다.
4월 9일부터 임금인상투쟁을 시작한 청계피복노조원들은 농성 7일째인 15일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의 유언을 쓴 만장과 영정을 앞세우고 가두로 진출, 경찰과 충돌한다.
4월 21일부터는 강원도 사북에서 놀라운, 이른바 「사북사태」가 벌어진다.
국내최대의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노동자들이 노조지부장과 회사측의 비밀 임금인상률 결정에 항의농성을 벌이다가 경찰과 충돌, 노조사무실과 광업소사무실, 정선경찰서 사북지서 등을 점거한 것이다.
정선경찰서와 이웃 장성.영월경찰서의 병력이 총동원되고 서울에서 5백여명의 기동 경찰이 급파됐으나 3천5백여 광부와 2천5백여 가족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사북읍 전체를 장악한채 경찰을 4㎞나 떨어진 고한읍까지 밀어내버린다.
언론은 사건이 수습된 24일에 가서야 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한다.
사북노동자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투쟁기간동안 체험했으며 이들의 투쟁은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이후 노동쟁의를 보다 활성화시킨다.
5월 들어선 어용집행부 퇴진 및 노동악법폐지 등의 이슈를 내건 보다 조직적.정치적인 노동운동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5월 14일 계엄철폐와 유신잔당 타도를 외치며 시내로 진출한 대학생들이 시위동참을 요구했을때 노총회관에서 농성을 주도하고 있던 지도부가 이를 거부하고 농성을 해산시켜버린 사건은 80년봄 노동운동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되기도 한다.
아무튼 80년봄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가톨릭농민회(가농)와 기독교농민회(기농)등 당시 전국적체계를 갖춘 운동체로서의 농민운동 조직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재을 적절히 벌여나가지 못한다.
80년 4월 11일 「민주농정 실현을 위한 전국농민대회」와 17일 「헌법 및 농림법령공청회」 등의 집회를 개최, 정책건의수준의 활동에 그쳤으며 가두시위까지 계획된 5월 19일의 「민주농정실현을 위한 전남농민대회」는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농민대표들의 주도로 취소되기까지 한다.
이는 70년대에 「크리스천아카데미사건」과 「농업근대화연구회사건」 및 「남조선민족해방사건」등에서 농민운동 부문이 다른 운동진영보다 훨씬 심대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사상적 조직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에 있었던 80년봄, 신군부의 정권찬탈 음모를 눈치채고 저지하려 했던 가장 강력한 세력은 역시 대학생들이다.
당시 학생운동은 비록 관념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기층민중의 이익과 요구를 대변하고자 하는 강한 이념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경찰의 진압능력을 뛰어넘을 정도의 엄청난 동원력과 「전투성」을 보유하고 있음에 사실이다.
79년 11월부터 학생회 부활을 논의하기 시작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석달간의 겨울방학을 이용, 조용하게 준비작업을 진행시킨다.
이들이 학생회 부활을 당면 최우선과제로 설정한 것은 「12.12」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와의 한판대결을 앞두고 학생운동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이에 놀란 최규하 과도정부가 학생회부활을 반대하고 기존의 학도호국단을 존속시키면서 간부선출 등의 미봉책을 제시했으나 학생들은 이를 일축하고 학생회부활을 기정사실화 한다.
드디어 3월 28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출범하고 4월 초순까지는 전국의 주요대학들이 학생회구성을 완료한다.
24개 지방대학도 동참
각대학 학생회는 우선 학원민주화투쟁을 시작하며 4월들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4월중순 병영집체훈련문제가 학원민주화투쟁의 이슈로 전면에 등장한다.
달이 바뀌어 5월.
2일 오전 1만3천여명의 재학생중 1만여명이 참석한 서울대 비상학생총회는 무성한 찬반논쟁 끝에 「더 큰 것을 얻기위해 작은 것을 버리기로」결정한후 입영거부 투쟁대신 계엄해제요구 등 정치투쟁에 돌입했으며 비슷한 시기 타대학들도 대부분 정치이슈를 전면에 내건다.
이어 교내에서 격렬한 정치구호를 외치던 대학생들은 13일밤 연세대가 주축이된 서울시내 6개대학생 2천5백여명이 세종로일대에서 야간 가두시위를 전개하자 그간 첨예하게 진행시켜오던 이른바 「단계적 투쟁론」과 「전면적 투쟁론」사이의 논쟁을 마감한다.
14일 새벽 4시30분께.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 등 서울지역 27개대학 총학생회장 40여명은 한사람 한사람 악수를 나눈다.
밤을 새운 회의 끝에 14일 오전부터 전면적 가두시위를 전개키로 결의한후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작별인사를 했던 것이다.
80년대 한국정치의 향방을 결정지은 운명의 나흘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7시간후 서울시내 대학생 7만여명이 교문을 박차고 광화문을 향했다.
다음날인 15일 오후, 서울역엔 무려 10만여 대학생들이 집결한다. 이날 지방에서도 24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감행한다.
오후 3시가 넘으면서 각 대학 학생회에는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에 군인들을 실은 트럭과 장갑찰가 집결한다는 제보가 잇따른다.
이소식은 즉각 서울역광장으로 전달된다. 임시연단에 오른 학생들은 「그들이 탱크를 몰고오면 달아나지도 싸우지도 말고 간악한 유신잔당에게 총부리를 돌리도록 호소하자」며 서울역 사수를 외친다.
그러나 이때 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은 「심야에 군과 충돌하는 것은 피해야한다」며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해 버린다.
훗날 어떤 평자들은 「서울역 회군을 놓고 「학생운동세력이 순진하게도 가장 결정적 순간에 대중의 힘과 투쟁의지를 분산시켜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부여하고 말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김대원 기자>
첫댓글 잘 읽고 가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