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엄마」7월호 연재글

아는 분의 소개로 '좋은 엄마'라는 월간잡지에 글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본 적은 없는데 길거리 가판대에 보면 '좋은생각'이라는 잡지의 소속인데 이번에 독립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울댁의 귀농기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표지를 올려놓으려고 했는데 사이트가 잘 안 열리네요. 그냥 그런 책이 있어 미물 글이 실리고 있다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DIV class=tx-hr-image-4> <HR class=hide> </DIV>     “을매나 덥던동.” 6월에 들어서자마자 더위는 끝을 향해 달리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도 길가에는 마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더위가 거칠어질수록 일하는 시간은 당겨지고 일 끝나는 시간은 늦어진다. 대신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이 길어지는데 이 때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면 며칠 동안은 마을 소식을 접하지 못한다. 서울에 살 때는 며칠 얼굴 못 봐도 그런가보다 하지만 한 이웃에 붙어사는 이곳에서는 하루이틀 보지 못하면 저 집에 무슨 일 있는지 어디를 갔는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누구네 집 개가 몇 마리 새끼를 낳았는지, 옆집 숟가락, 젓가락 숫자도 다 안다는 시골에서의 삶은 서울토박이인 나에게 참으로 힘든 시간을 가져다 주었다. 대도시 서울에서 온 젊은 부부의 모습이 신기했을 터. 이사 오는 날, 우리집 마당에 불을 지피며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던 마을 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날씨는 쌀쌀했고 비는 주룩주룩 내렸으며 오후 서너 시가 되어서 도착했는데 마당에는 사람들이 그득했다. 그 때부터였나. 궁금증과 호기심에 찬 그 분들의 시선이 내 어리둥절한 눈망울과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   아침에 일어나기도 전에 우리집 마당에 들어서는 분들이 많았고, 밥을 먹고도 또 밥을 먹으러가는 상황도 자주 발생했으며, 농사 스케줄을 줄줄이 읊어야 하는 일도 많았다. 익숙하지 않은 아침 기상시간에 밖에서 인기척이 나면 정신없이 옷을 챙겨입고 나가 얼굴을 마주 대하는 일은 얼마나 창피한지, 밥을 먹고 있는데도 먹던 음식 정리하고 어여 밥 먹으러 오라는 일은 또 얼마나 황당한가(하루 세끼 남의 집에서 밥 먹은 일도 부지기수다), 또 어느 밭에 가서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고 가꾸는지 일일이 상의하고 얘기하는 일은 참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다 관심과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걸 헤아리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작년 3월에 귀농하여 지금까지, 서울내기 여성이 가지고 살았던 나 홀로만의 습관과 방식이 차츰차츰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런 일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일하고 들어와 밥 짓는 일도 귀찮은데 아랫집에서 “우리집에 오소. 밥 머끄로!” 하면 신나게 달려가기도 하고, 마당에다 평상도 짜놓아 마을 사람들이 들어와 앉기도 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경상도 사투리도 이제 대충 얼버무릴 줄도 알고 거절할 줄도 알고 대충 맞장구도 칠 줄 안다.   경북 청송군 진보면 세장리 양지말. 우리 부부는 2009년 3월에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남편과 서울에서 나고 자랐던 나는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경기 벽제와 사릉 쪽에서 6년 동안 주말농장을 했다. 오레 전부터 귀농의 뜻이 있어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귀농지를 찾아다녔고 인연이 닿아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평생 반려자를 만나는 것과 귀농지를 만난다는 것은 삼대가 덕을 쌓을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하늘이 정해주는 것 같다. ‘청송’ 하면 주왕산, 주산지, 무엇보다도 악명높은 청송교도소로 유명하다. 교도소의 입지조건상, 강 따라 높은 뼝이 둘러싸여 있는데 참 아름다운 곳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보호감호소가 있을 때만도 교도관이 5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청송은 좌로 안동, 우로 영덕, 위로 영양이 위치해 있는데 고추와 사과가 유명하다. 특히 달고 시원한 청송사과가 유명세를 타지 못한 이유는 이 지방에서 다 유통이 되기 때문에 대도시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설(?)이 있다. 옛날의 오지로 전라도에 있는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을 꼽았다면 경상도는 BYC(봉화, 영양, 청송)를 꼽는다고 한다. 지금은 교통이 다소 편해졌지만 기업이나 공장이 들어서지 않아 흉물스러운 광경을 볼 일도 없고 다른 곳보다 뒤늦은 탓에 오히려 청정의 이미지가 더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속도로가 뚫릴 예정이라 좀 걱정도 되지만 그 이미지만큼은 오래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청송으로 귀농지를 정한 후 땅을 구하고 집수리를 하고나서 본격적인 시골생활에 접어들었다. 바로 농사철이 시작되고 바뀐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고 바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오감은 하나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봄날 이른 아침이면 앞마당까지 날아와 종알대느라 여념이 없는 제비들. 뻐꾸기와 딱따구리, 무당개구리의 울림은 아무리 시끄러워도 지루하지가 않다. 음악을 귀에 달고 다니던 도시의 습관은 새와 바람, 풍경소리로 공허함을 채운다. 농촌에서의 삶은 그동안 잠자고 있던 내 시각과 미각 그리고 청각, 촉각까지 원래 기능으로 회복시켰다. 일하다가도 푸르른 산과 나무, 물줄기를 바라보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 색에 놀랍고, 바구니 하나 들고 몇 걸음 나가면 다른 반찬 없이 먹을 수 있는 나물과 열매들이 밥상을 화려하게 장식해준다. 가슴봉우리 사이로, 눈꺼풀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힘겹다가도 목 언저리로 부는 단 몇 초의 가녀린 바람에도 감동한다. 영화관이 없어도 영화같은 감동의 순간을 매번 감상하게 만든다. 귀농한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도시로 되돌아가지 않는 건, 위와 같은 자그마한 감동이 늘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으로서 나 자신과 마주하며 진정으로 느끼는 강렬함을 일깨우는 그 순간부터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귀농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인생의 정답은 항상 “일체유심조(一切唯心造)”, 마음먹기 달린 것이다. 도시든 농촌이든 말이다. 귀농은 다만 선택일 뿐! 여기까지가 좋은 얘기다.   황토구들방에서 국화꽃 동동 띄운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황토로 물들인 생활한복과 머릿수건을 매고 열심히 항아리 닦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의 지인들을 위해 안부를 전한다. 요새는 일회용 커피믹스 마실 시간도 없고 똥 누면서 신문 볼 시간도 없다. 항아리는 엄청 비싸서 멀쩡한 것은 몇 개 사지도 못하며 한 여름의 야생화는 온통 매야 하는 웬수 같은 풀들로 보인다. 종로에서 먹던 거품 그득한 생맥주에 골뱅이 안주도 가끔 생각난다. 일체유심조가 다 어디 갔느뇨. 바쁜 농번기에 월드컵 축구는 그나마 챙겨보는 오락거리일 뿐이다(이곳에 있으면 왜 월드컵 축구에 열광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양지말 서울새댁은 이제 생태와 생존의 간극에서 매번 산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최전선에 서있는 투쟁전사가 다 되었다는 얘기다.   <좋은 엄마 7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