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침례교의 역사와 현실에서 볼 때, 우리는 아직 신학적 혹은 교리적 정체성을 제대로 세워본 일이 없는 것 같다. 세워진 적도 없는 정체성의 위기를 운운한다는 것은 어딘가 좀 어색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물려받은 침례교정신과 유산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손에 의해, 우리의 합의된 결의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침례교는 그 나름대로 독특한 침례교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선교의 역사도 남다르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관심의 부족은 심각한 수준이다. 역사유적이나 유물을 보존하는 일에도 대체로 무관심하다. 교단 차원에서 변변한 역사박물관 하나 만들지 못했고, 침례신학대학교 역사자료실도 유명무실하기는 마찬가지다. 강경 지역의 옥녀봉을 침례교선교의 성지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것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정도로 침례교단의 지도자들은 역사의식이 부족하다. 어떤 사람은 과거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말로 항변하기도 하지만, 과거 없는 미래는 없는 법이다.
또한 한국 침례교회가 표방하는 신앙고백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현재 기독교한국침례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서는 침례교회의 이상과 기본 정신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기는 하지만, 너무 간단하고 빈약해서 좀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1981년 교회진흥원에서 발간한 「침례교회」도 “침례교회를 정립”하기 위해 여러분이 참여해서 침례교회의 역사, 교리, 직분, 교회행정, 정신 등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것도 총회 차원에서 합의된 것은 아니어서 그 대표성을 인정받기가 어렵다.
이런 상태라면, 한국 침례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신앙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거나 설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한국 침례교회는 신학이 없다느니, 혹은 어떤 사람들은 “장침”(장로교와 침례교를 합친 말), “칼비니안”(Calvinist와 Arminian을 합친 말), “뱁티스테리안”(Baptist와 Presbyterian을 합친 말)이라는 말들을 자조적으로 사용하는지도 모른다.
([침례교신학], 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