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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
누가복음 6장1-1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와서 금식에 대해 논쟁하였으나, 금식의 진정한 의미는 모른채 형식적인 금식을 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금식의 의미를 가르치시며,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 비유의 말씀으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제자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6:1-5)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습니다(1절).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서 마태는 "제자들이 시장하여"(마12:1)란 말을 첨가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서도 분명히 허락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신 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합니다(2절).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2절)은 노동을 의미합니다. 나그네가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밭에서 곡식따는 것은 위법(違法)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삭을 잘라 비비는 것은 추수하고 타작한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당시에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와 관련된 사항들을 제외하고도 문자 그대로 수천가지의 명령에 대한 미묘한 조항들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 결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 완전히 형식주의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원칙과 형식을 고집하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준수의 참된 의미를 중요시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시며 다윗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3절).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문자적인 율법보다 율법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삼상 21:1-6을 인용하여 설명했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장들에게만 먹도록 허용된 진설병을(레 24:9) 먹었다는 사실은, 율법의 더 중한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마태는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정곡을 찌르신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곧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는 말씀입니다(마 12:7).
"읽지 못하였느냐"는 말은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이 전하는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유전에만 집착하고 형식으로 치우쳐 허탄한 일만 일삼는데 대해 성경 자체에 기록된 사례를 통해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께서 다윗의 예증을 사용하신 것은 다윗이 긴박한 상황에 처하여 율법 내용 가운데서 예외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다면 하물며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의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진설병'(4절)은 히브리어로 '레헴판님'이라 하여 '면전의 떡', '누군가의 앞에 두는 떡'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출 25:30). 이 떡은 모두 열 두 덩이로 성소 안에 있는 순결한 상 위에 두줄로 한 줄에 여섯 개씩 진설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일주일 동안 상 위에 진설되었다가 제사장이 거룩한 곳으로 가져가서 그곳에서 먹었습니다(레 24:5-9).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진설병을 먹는 것은 신성한 것을 더럽히는 행위였습니다(삼상 21:2,3; 마 12:4). 또한 이 열 두 덩이의 떡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였으며(레 24:8) 민족의 통일을 상징하였습니다(왕상 18:31,32; 겔 37:16-22). 한편 예수님께서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장들만을 위한 음식으로 율법에서 지정한 진설병을 먹은 사건(삼상 21:1-6)을 인용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도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공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5절)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로서 그리고 인자로서 안식을 어떤 정신과 방법으로 준수하셨는가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입법자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창 1:26) 제 7일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며(창 2:1-3),첫 사람 아담의 타락 후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을 다시금 회복시키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실 자이기 때문입니다(히 4:1-11).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같은 안식일 제도를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로 주신데(출 20:8-11; 신 5:12-15)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습니다. (1) 하나님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2)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 중에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성별시켜 주신데 대한 표징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출 31:13). (3)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신 5:15). (4)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출 20:10). 이상에서 우리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아울러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같은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제 7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는 금기조항에만 연연한 나머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주신 선한 규례를 오히려 인간의 행동을 제어(制御)하는 악법으로 변형시키고 말았으니 그 어리석음과 잘못이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선언에 비추어 볼 때 안식일 준수가 신자들의 신앙 성장에 장애가 되는 외적인 형식주의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주일 성수는 바리새적인 형식주의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답게 자발적인 순종과 섬김의 자세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2.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신 예수님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6:6-1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6절).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의 준수가 엄격한 형식적 규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을 제시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다른 안식일'이란 반드시 그 다음 안식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가 이 부분에서 의도하는 바는 어느 안식일이냐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사람의 오른손을 고쳤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셨습니다. 이 회당은 예수님께서 자주 드나드시던 가버나움의 회당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회당이나 성전이나 노천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관복음 전체에 걸쳐 입증됩니다(21:37; 마 13:54; 막 1:21 등).
오른손 마른 사람에 대해서 '오른손'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곳은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 가운데서 오직 여기뿐입니다. 이는 여러 방향에서 유추가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저자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문가적인 직업의식에서 나온 결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전문 의사로서 환자의 정확한 병명과 정확한 환부(患部)의 상태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그 진찰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사례 수집이라는 차원에서 관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환자의 마른 손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었다는 것은 이 환자의 상항이 보다 심각하였음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이 환자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손으로 생계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었다면 일반적인 대부분의 오른손잡이처럼 오른손의 마비는 그에게 치명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서는 보도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 환자에게 그간 손이 말라 있었던 기간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기간이었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서기관(7절)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제사장 계층에서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하여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율법이 모든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으며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등장한 서기관들은 문필가로서 이스라엘의 성문서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수집하는 데에도 몰두하였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필사자들, 편집자들 그리고 성경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자들로서 사람들의 대단한 신망과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헬라의 세속 문화로부터 유대교를 순수히 보존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난 소위 '하시딤' 혹은 '하시디안'이라는 경건 집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의 선한 동기와는 무관하게 날이 갈수록 형식과 위선에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앞서 안식일 논쟁에서 패배하고 예수님의 정곡(正鵠)을 찌르는 지적으로 인해 망신을 당했던 터라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엿보니’는 '엿보다'의 미완료형으로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동안에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엿보고 있었던 것은 송사할 구실을 찾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오늘날 성경을 보되 그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를 헐뜯을 근거를 찾기 위해서 말씀과 씨름하는 자들의 사악한 행위와 일맥상통합니다. 이들은 공히 예수님이나 성경 말씀에 대해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방 일변도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8절).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라고 합니다(막 3:5). 따라서 '그들의 생각'이란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고자 하는 악한 생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들의 생각을 어떻게 아셨는지에 관해서 누가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통찰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방법의 일환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향해서 무리가 잘 보이는 가운데 일어서라고 공개적(公開的)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엿보니'와 대조되는 말로서 완악한 마음을 갖고 송사할 구실을 찾으며 엿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다시 한번 반격하실 예수님의 당당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악한 의도를 물리치기 위해 그의 병 고치는 이적을 공개적으로 행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손마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곧 복종했습니다. 그는 권위있는 예수님의 명령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미리 아시고 그들이 치료의 행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한편으로는 병고침이 손을 만짐으로써가 아니라 말씀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물으셨습니다(9절).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핏발선 눈으로 지켜보며 책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바리새인 등에게 예수님은 공개적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여기서 '묻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로타오'는 '질문하다','요구하다'는 뜻인 '에로타오'보다 훨씬 강한 표현으로 '심문하다'는 의미까지 내포합니다. 따라서 이 말투 속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편견(偏見)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자 하는 메시야의 권위가 스며있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는 질문은 병든 사람이 죽을 처지가 되었을 경우에만 안식일에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에 대해서 반격을 가하신 것입니다. 손 마른 사람은 비록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해도 치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이라 해서 이를 내버려두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도외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과감히 실행하려고 하셨습니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의 이 반문에 담긴 예리한 풍자를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옳으냐 그러지 않는 것이 옳으냐'라고 묻지 않고 '안식일에 선행(혹은 생명 구함)이 옳으냐 아니면 악행(죽임)이 옳으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형식과 위선의 허물을 쓰고 사람의 진정한 아픔과 필요를 거들떠보지 않는 자들의 비정함을 이미 악행 내지는 살인 행위로 규정하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예리한 질문 속에는 거룩한 안식일에 예수님을 '멸하려고' '악'을 꾀하는 대적들의 음모에 대한 질책이 시사되어 있습니다. 마태에 따르면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의 예화를 사용했는데 그 주인은 안식일일지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확실히 건져내어야 합니다. 하물며 인간은 양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옳다고 결론지으셨습니다(마 12:11,12).
예수님은 무리를 둘러보시었습니다(10절).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무리를 둘러보시는 예수님은 근심하시고 노하신 상태였습니다(막 3:5). 아무튼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가하신 후에 그들의 태도를 살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중(意中)을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상식적인 선에서 모든 사람이 답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묵묵부답,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질문이든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느 쪽도 택일할 수 없는 난처한 처지에서 안식일에 치유 행위를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시며 곡해된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쇄신하려고 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는 명령은 사실상 그 손 마른 자가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명하셨습니다. 공관복음 어디에도 그 병자가 믿음을 가졌다거나 고쳐줄 것을 부탁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예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을 가졌던 것은 분명합니다.
손 마른 자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하매'는 손 마른 사람의 신앙적 행위를 입증해 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힘이 없고 마른손을 내밀라고 명하셨고, 그 사람이 손을 내밀었을 때 즉시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세 공관복음서 기자가 모두 '회복되다'는 말인 '아페카테스타데'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전의 상태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 병자의 병을 고치신 것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방치해 두는 것은 오히려 '태만'의 죄를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생명을 '멸하는' 악행을 범하는 것이고, 결국 안식일의 근본 목적을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성취시키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안식일의 입법자이심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손마른 자를 치유하시자,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였습니다(11절). '노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이아'는 모든 감각과 이성을 잃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는 의미인데 여기에서는 이성을 잃고 덤비려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구절에 '죽이다'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더 강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마 12:14; 막 3:6). 그러나 누가는 여기에서 '처치하다'라는 말을 사용해서 다른 기자들보다 완화된 어감을 주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 대한 바리새인들의 적대감이 완화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가장 교묘하고 은밀한 술책으로 예수님을 모해(謨害)하려고 한다는 점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처리하는 문제를 서로 의논하는 과정에 대해서, 마가는 그들이 회당을 나와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어떻게 예수를 죽일 것인가'를 의논했다고 기술합니다(막 3:6).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과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모함하고 그를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는 음모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를 죽일 계책을 세웠던 것입니다.
적용: 참된 안식일을 지키는 법
창세기 2장 2-3절에서 안식일에 대해서, 창조 사역을 마치신 하나님께서 제 7일을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고 말씀하시고, ‘6일동안 힘써 일하고 제7일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9-10)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제7일에 쉬시며 그날을 복되게 하며 거룩하셨다(출 20:11)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을 생각할 때, 안식일에는 우리의 일을 멈추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할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할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과 심지어는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마저 비판하고 예수님을 죽이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할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과 창조사역을 완성하심으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고 안식일 다음날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주일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닌 부활주일에 예배를 드림으로 거룩하게 지킴으로 안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신약의 성도인 우리는 매주일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주일예배에 참석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일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로서 하나님 보좌앞에 예배를 드리는 놀라운 축복의 시간입니다. 매 주일마다 드리는 주일예배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신 성자 예수님께 감사하며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이룹니다.
둘째, 우리는 주일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순간 영적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어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온전히 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아직도 우리의 육신은 옛 자아의 욕심에 이끌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살아야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옛 자아의 소욕을 제어할 때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갈 5: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