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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연법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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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크랩 설악산 봉정암
현림 추천 0 조회 270 11.07.05 06: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설악산 봉정암 기행

 

토요일 밤 11시 집을 나섰다. 친구와 둘이. 늘 바쁜 친구라 고작해야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밖에 만나지 못하는 친구다. 나도 그도 모처럼의 장거리 여행이다. 경춘선 고속도로를 들어서니 불야성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행락객들. 연휴가 끼었기 때문이리라. 춘천을 벗어나 인제로 들어가니 그 많든 차들도 뚝 끊어졌다. 가로등 밖은 어둠의 왕국이다. 새벽 2시, 용대리에 도착했다. 가평휴게소에서 잠시 쉬었을 뿐 논스톱이었다. 행락객들이 끊어진 가계들은 덩그런 불빛만 있을 뿐 너무 조용하다. 적막이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가는 셔틀버스는 8시부터 움직이니 걸어갈 수밖에 없다. 백담사까지는 7키로다. 평시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거리다. 그러나 예상한 일이라 미련 없이 배낭을 꾸리고 출발했다. 오로지 빛은 랜턴의 한가닥 불빛에 의지한 야행(夜行), 랜턴 밖은 어둠의 정글이다. 별빛 세어 가며 걸어간다. 인적이 끊어진 길은 온통 물소리 새소리뿐이다. 별빛에 젖은 밤이 익어간다. 새들은 밤에 잠도 없나봐.. 동행한 친구가 한 마디 한다. 졸리는 모양이다. 허긴 야간산행은 참으로 오랜 만이니... 아니 그에게는 처음인지 모른다. 두 시간이 채 안되어 백담사에 도달했다. 밤길은 걸음이 빨라지나 보다. 어둠은 여전히 위세 당당하다. 백담사 경내를 둘러보고 싶어도 둘러 볼 수가 없다. 내려올 때 시간이 되면 둘러보지.. 미련을 남기고 영시암으로 향했다. 띄엄띄엄 산꾼들이 보인다. 모두가 젊은이들이다. 젊음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우리네 옛적과는 사뭇다르다. 세월도 변했나 보다. 허긴 무엇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랴만.

 

5시가 넘어가니 어둠이 서서히 사라지고 산들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영시암에 도착했다.

영시암은 6·25전쟁으로 소실된 터에 백담사 주지로 있던 설봉 스님이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후손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과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서예가 형제의 도움을 받아 1992년부터 복원 사업을 시작해, 지금도 불사가 계속 되고 있는 암자다. 영시암의 옛 주인은 삼연 김창흡이라 하며, 삼연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이 암자와 관련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영시암은 일반 암자치고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삼연의 증조부는 김상헌(金尙憲)이고. 그의 형이 김상용(金尙容)이다. 형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비빈(妃嬪)을 호위 하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결한 충신이고, 아우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시조를 남긴 충신이다. 삼연의 형제들 역시 증조부나 아버지 못지않게 일세에 이름을 떨쳤다. 장남 김창집(金昌集)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김창협(金昌協)은 대제학을, 그리고 삼남인 삼연 김창흡과 넷째 김창업(金昌業)은 당대에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우리 역사에서 부자 양대(兩代)가 영의정을 지냈으며, 양대가 사사(賜死)된 가문은 이들이 유일하다.

  

삼연은 1689년(숙종 15년)에 이러난 기사사화(己巳士禍) 때 부친 김수항이 장희빈 소생의 세자(윤) 책봉을 반대했다 하여 죽임을 당하자 1705년 백담사로 들어온 후, 4년 뒤에 내설악 깊은 곳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은거한다. 그는 은거지의 이름을 처음에는 삼연정사라 부르다가, 뒤에 영시암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1711년 어느 날 선생의 하녀가 영시암 뒤에 있는 골짜기에서 범에게 물려 죽는 변을 당하자 이곳을 떠나 지금의 화천군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삼연이 남긴 시 ‘영시암’은 부친의 죽음 뒤에 설악산에 입산하게 된 연유와 당시의 심경을 전하고 있다.

 

영시암(永矢庵)

 

내 삶은 괴로워 즐거움이 없고

세상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려워라

늙어 설악 산중에 들어와

여기 영시암을 지었네.

<출전:인제군지>

 

심연의 유적비는 불행이도 6·25전쟁 통에 사라졌다고 한다.

 

영시암은 봉정암과 오세암을 올라가는 갈림길에 위치하고 있다. 봉정암 오르는 길이 너무 멀어 중간 지점에 쉬어가라고 지었다는 설도 있고.. 종무소에 예약하면 숙박도 가능한 모양이다. 불어오는 산 바람이 상쾌하다. 갈길이 멀다. 봉정암까지는 아직 상당히 멀었다.  

 

                                          개울가에 널어 진 나무, 봉황의 머리를 닮았나...

수렴동계곡의 대피소다. 수렴동계곡은 가야동계곡과 구곡담계곡이 합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곡담계곡은 만수담, 쌍용담 등 9개의 담이 있고, 수렴동계곡은 외설악의 천불동계곡과 함께 설악산의 대표적인 수려한 계곡이다. 계곡의 물이 너무 맑다. 청옥같이 푸르고 투명하다. 서서히 아침 햇살이 산머리를 비추기 시작한다.

 

 

 

 

거암들은 대개 길옆이나 안부 능선에 있는데 설악의 바위들은 산머리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애기궁뎅이나무라 부를까..  생김이 묘해서.

 

봉정암 가는 길에는 이상한 고사목이 많다. 관통석같은 나무..제행무상(諸行無常)을 암시하는 걸까.

어디까지가 바위이고 어디까지가 나무인지 경계가 묘하다. 바위와 나무가 한덩어리로 뻗어있다.

                  이제 봉정암이 눈 앞이다. 주변은 마등령의 한 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다.

 

 

 

          봉정암 500미터 앞 소위 깔닥고개라 부르는 바위 너들길이다. 실제 오르면 그리 험한 길은 아니다.

 

 

 

 

 

 

 

 

 

 

 

봉정암 사리탑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것으로 뇌에서 나온 것이라하여 불뇌사리탑이라고도 부른다.

봉정암은 강원도 인재군 북면 설악산 소청봉에 있는 사찰로써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인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대표적 불교성지인 오대적멸보궁(五大寂滅寶宮) 가운데 하나로 불교도들의 순례지로 익히 알려진 유명사찰이기도 하다.

봉정암은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창건하였다. 원효, 보조 등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677년(문무왕 17) 원효가, 1188년(고려 명종 18) 지눌이 중건한 것을 비롯하여 6·25전쟁 이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화재로 자칫하면 명맥이 끊어질 뻔하였다.

 

태백산 1,470미터에 자리한 망경사, 지리산 1,450m에 자리한 법계사, 봉정암은 설악산 용아장성릉을 배경으로 해발 1,244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3번째 높은 고도에 있는 절이다. 봉정암은 봉황이 알을 품은 뜻한 형국의 산세에 정좌하고 있으며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가섭봉, 아난봉, 기린봉, 할미봉, 독성봉, 나한봉, 산신봉이 감싸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불사리의 한반도 유입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실려 있다.

 

『양나라에서 진흥왕 때 최초의 불사리가 들어 왔고, 자장율사가 643년 선덕여왕 때 불사리 100립을 들여와 황룡사탑(소실) 태화탑(멸실) 통도사 금강계단(현존)에 모셨다.』

 

후대에 이르러 이른바 5대 적멸보궁이란 말이 생겨났다. 자장율사가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4곳에 봉안하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일본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양산 통도사의 진신사리 일부를 강원도 정선 정암사에 나누어 보안함으로써 5대 적멸보궁이 되었다.

 

그러나 이밖에도 우리나라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절이 여러 곳이 있다

봉정암은 전설에 의하면 지금부터 1,350여 년 전, 당나라 청량산에서 3,7일(21일) 기도를 마치고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 100과와 금란가사를 받고 귀국을 했다.

 

자장율사는 처음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사리를 봉안할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서인가 찬란한 오색 빛과 함께 날아온 봉황새가 스님을 인도했다. 한참을 따라가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이르렀고, 봉황은 한 바위 꼭대기에서 사라져 버렸다. 자장율사가 거기를 올라가 보니 그 일대의 지형이 부처님 형상을 닮았으며 봉황이 사라진 곳이 부처님 이마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이 곳에 뇌사리를 모시고 5층석탑을 조성하고 봉정암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라 애장왕 때 조사 봉정이 이곳에서 수도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사리탑에서 내려다 본 용아장성

 

                                                           용아장성의 모습이다.

 

 

 

 

 

 

 

봉정암 사리탑 뒤편에서 오세암까지 거리는 4키로가 넘는다. 능선을 4번 오르고 4번 내려와야한다.

단풍철이라면 몰라도 지금같은 계절에는 너무 단조롭고 지루하고 힘든 코스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산꾼들을 만나지 못했다.

오세암은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관음암(觀音庵)에서 유래됐다. 오세암이란 암자의 명칭은 관음설화를 담고 있어 흥미롭다. 관음암을 중건(1643)한 설정(雪淨)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어느 해 가을, 겨울 양식을 구하러 양양에 다녀와야만 했다. 길을 떠나기 전에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4세 된 조카에게 관세음보살을 찾으면 보살이 살펴 줄 것이라 이른 후 길을 떠났다. 그러나 장을 보고 신흥사에 도착했을 때 밤새 내린 폭설로 마등령을 넘어올 수 없었다. 눈이 녹은 이듬해 3월에 돌아오니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조카가 목탁을 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해가 바뀌어 다섯 살이 된 동자가 관음의 신력(神力)으로 살아난 것을 기리고자 그때부터 오세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노산은 <설악행각>에서 『오세(암)의 일컬음이 혹은 오세신동의 견성한 곳이라 해서 오세라고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절 조사(祖師) 스님들의 기록을 보면 과연 ‘오세조사’란 이가 있기는 했으나 혹시 사실일 수도 있겠고, 또 혹은 말하되 매월당 선생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는데 일찍이 그를 일러 ‘오세신동’이라고 일컬어왔던 것이므로 이곳을 ‘오세’라고 했다는 것인바 두 가지 말이 모두 문헌에는 없는 것인즉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치 않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오세암과 매월당의 깊은 인연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매월당이 남긴 시는 500년 전의 설악과 오세암의 옛 모습을 전하고 있다.

 

만의(晩意)

천 봉우리 만 골짜기 그 너머로(萬壑千峰外)

한 조각 구름 밑 새가 돌아오누나(孤雲獨鳥還)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此年居是寺)

다음해는 어느 산 향해 떠나갈거나(來歲向何

바람 차니 솔 그림자 창에 어리고(風息松窓靜)

향 스러져 스님의 방 하도 고요해(香銷禪室閑)

진작에 이 세상 다 끊어버리니(此生吾己斷)

내 발자취 물과 구름 사이 남아있으리(樓迹水雲間)(생략)

 

                                                      오세암의 관음불이다.

 

 

 

새로 조성한 관음불인 모양이다. 오세암의 관음보다 전각도 화려하고 모습 또한 장엄하다. 허나 오세암의 옛모습에 더 친근감이 느껴진다.

 

토요일 밤11시에 출발하여 월요일 새벽2시가 넘어 귀가했다. 장장 30키로가 넘는 무박3일의 여행, 순수 산행시간만으로도 15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시원치 않은 몸으로 이 산행은 처음부터 분명 내게 힘든 산행이었다. 그러나 설악의 봉정암을 무박으로 다녀왔다는 부뜻한 마음. 비록 봉정암의 이모저모를 담아오지 못하고 적멸보궁을 눈 앞에 두고 봉정암을 먼저 올라와 기다리는 친구를 위해, 백담사에서 용대리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을 마추기 위해, 다음을 기약하며 오세암으로 서둘러 내려오긴 했지만 불뇌사리탑과 오세암의 관음불에게 참배하고 왔다는 것만으로 흡족하다. 귀경길 졸리는 눈으로 몇번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무탈하게 귀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보이지 않은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무관세음보살...()()()...  

 

 

 

 

 

 

흐르는 곡: 산운/대금과 가야금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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