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그, 뮌헨
어제 밤 발리-텐파사에서 독일국적의 루프트한자 보잉747 점보여객기를 타고, 하늘에서 한밤을 자면서 날아와 아침나절 프랑크푸르트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장을 빠져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엄습해 한기를 느끼면서, 어제까지 상하의지대에서 가벼운 옷차림마저도 거추장스럽게 느꼈던 것이 꿈만 같다. 대륙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문화와 풍속은 물론 시차와 계절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도 인생여정의 학습과정이 되지 않나 생각해 보면서 도이치에 대한 몇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
우선 프랑크푸르트에서만 안내를 맡은 가이드가 나오고 우리일행을 10일간 태우고 하이델베르그 뮌헨을 경유하여 오스트리아와 동유럽 체코까지 운행을 할 우람한 벤츠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추워서 떨고 있는 우리를 보고 6월이 시작되었지만 유럽의 계절은 아직 늦은 봄이라서 원래 날씨가 쌀쌀하다고 하면서 바로 관광을 시작하자고 했다.
요즘 유럽여행지에서는 한국유학생들이 파트타임으로 가이드를 하는 데를 종종 보는데 여기서 만난 여자가이드 역시 독일에 유학 온 한국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는 버스에 각자의 자리를 정하고 큰 짐을 아래 화물칸에 실으면서 이곳 기후에 맞게 옷을 보충해 입고 우선 아침을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따끈하게 먹었다. 오전 중에만 시내를 관광을 하고 다음 목적지 하이델베르그로 떠나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가이드를 따라 나서면서 대강 겉모습만 흩어보는 벼락치기 관광에 아쉬운 생각이 든다.
깨끗한 거리와 튼튼하게 지은 해묵은 건축물들과 정돈된 상가에서 독일인들의 근면과 정확성이 엿보인다. 세계를 지배하려고 1,2차 대전을 일으킬 만큼 야심이 크고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 그러면서도 음악을 사랑하는 독일인들의 존재를 조명해보고 싶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리기 전까지는 야만적인 무리 게르만족에 불과 했었다는 사실을 상고하면서 그래도 독일은 우리와 가깝게 지내고 도움을 주었던 고마운 나라라는 생각에 정감이 든다.
일찍이 구한말(舊韓末)개명의 초기에는 뮐렌돌프라는 사람이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장을 지낸 사실이 있다. 60년대 우리의 간호사 광부들이 외화벌이를 하면서 인정을 받아 리브퀘 대통령의 초청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을 하였을 때, 경제개발에 필요한 돈을 꿔주고 부산 해운대에 한독직업학교를 무상으로 세워준 나라다. 그리고 전남 영암출신의 김준연선생은 1930년대 세계최고의 명문 베를린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건국초기에 국회의원으로 많은 활동하였던 것도 생각이 난다.
쇼핑을 할만 분위기가 아니라 그냥 구경만 하고 다니다가 음악은 물론 축구를 좋아하는 이곳 사람들이 지금도 차범근을 기억하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다. 우리도 알다시피 유럽축구의 전차군단 독일에서 차붐이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차범근은 축구하나로 동양인 최초로 유럽축구를 평정한 갈색폭격기다. 차범근이 한때는 이곳 시민들의 사랑받는 명사였다는데, 반대로 교민들 사회에서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고 따돌림마저 당했다고 한다. 어디서나 유명세가 붙으면 교만해 보이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 아니냐고, 일소해버리고 싶은 이야기다.
오전 내내 프랑크푸르트 시내만 안내해준 가이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아쉽고 을씨년스러운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고성(古城)으로 유명한 하이델베르그를 향해 간다. <황태자의 첫사랑>하면 하이델베르그의 상징처럼, 이름만 들어도 경쾌하고 감미로운 왈츠의 군무가 펼쳐질 것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웬일인지 날씨가 너무 흐려 음산하고 겨울처럼 차갑다.
고성(古城)으로 한참 들어가다 오래된 성문을 지나면서 그래도 낭만이 되살아나, ♫성문 앞 우물곁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에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나무 밑♬ 중학교 때 불어본 이곳 민요 <보리수>를 불러 본다.
나는 50년대를 부산에서 거의 살면서 영화를 즐겨보는 영화광이었다. 주로 미국영화와 이태리영화였고 가끔은 프랑스와 독일 영화를 볼기회도 있었는데 반세기가 지난 요즘에도 그때 본 영화의 장면들이 눈에 선하게 비쳐질 때가 있다. 그런데 오늘, 그 때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감미로운 뮤지컬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주연여우, 안부라이스의 청순한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녀가 이곳 하이델베르그에서 황태자의 손을 잡고 왈츠의 리듬에 맞춰 경쾌하게 춤추는 모습이 반세기만에 생생하게 다시 떠오른다.
나는 하이델베르그를 기념할 만 것이 무엇일가 생각하다가 성터아래서 오래되어 화석같이 뭉개져버린 벽돌 조각하나를 챙겨들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 중간 문 뒤 우측 창문 곁에 자리를 잡아 전망이 좋다. 내 옆자리에는 조용하게 말이 없는 일본인 같은 여자 분이 탔는데 인사를 나누고 보니 서울에서 온 대학교수분이였다. 이제 우리는 독일에서 세 번째의 행선지 뮌헨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오늘 아침부터 갑작스런 추위로 감기환자가 여러 명 발생하였다. 나도 기침을 할 때마다 목이 조금씩 아프고 몸살기가 난다.
뮌헨시내로 들어서면서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특이한 공법으로 세워져 하얀색으로 돋보이는 올림픽경기장이다. 72년 제20회 뮌헨 하계올림픽 개막식 때 적군파 테러집단이 기관단총을 난사해 이스라엘 선수들이 때죽음을 당한 끔직한 사건의 현장이다. 당시에 뉴스로만 보았던 그 비극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잠시나마 애도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데, 날씨마저도 찌푸리면서 비명에 간 이스라엘선수들의 눈물인양 궂은비가 내린다.
뮌헨에서 일박을 하기위하여 우선 예약된 숙소를 찾아 짐을 내려놓고 저녁식사를 하려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작달막한 터키인 부부가 경영하는 식당에는 햄 소시지 치즈와 각종 채소와 육 고기와 바다생선이 푸짐하게 나와 있어 뷔페식으로 양껏 갖다먹었다. 식후에는 우리가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는 것을 안 식당주인은 말이 통하는 나를 붙들고 반가워했다. 자기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지금도 한국을 형제의 나라처럼 사랑한다고 나와 기념사진을 찍고, 언제든지 터키에 가거든 이스탄불에 있는 아버지 집에 찾아가보라고 그곳 주소를 적어주었다.
밤새도록 비가 내리고 아침이 되어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조반을 터키인 식당에서 든든하게 먹고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한 후 뮌헨을 떠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우리를 태우고 운전을 하는 야곱이라는 버스기사는 보통 체격의 유럽사람 인데, 순수한 독일인이 아니고 최근 유고에서 피난 온 사람이라 독일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영어도 서툴렀다.
이제 악성(樂聖) 베토벤과 트로멜라이를 작곡한 슈만의 고향 도이치를 떠나 음악의 천재 모짤트와 세레나데의 슈베르트 지휘의 거장 폰 카라얀를 배출한 오스트리아로 가고 있다. 대관령을 넘으면서 설악산을 바라보듯이, 차창(車窓)으로 멀리 올려다 보이는 알프스의 아름다운 정경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이 카라얀의 지휘로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선율을 타고 들려올 것 같다. 우리 일행은 서울에서 온 서울대생 학부형 어머니들 일행과 대전에서 온 가족친지들 그리고 부산에서 올라온 중년의 여고동창생들이 주류의 팀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버스좌석을 정할 때부터 버스 안에서 여행분위기를 주도하려고 묘한 신경전을 벌리고 있는데, 개별적으로 온 십여 명은 중립적 입장에서 여행을 유익하게 하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독일국경을 넘고 있다. (2006년 2월 6일 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