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 宗文, 나주목사 梅山公[이인혁] 체직(遞職,벼슬이 바뀜) 북귀(北歸) 서(序)
전남 영암 출신 동강 이송재 선조님의 동강집 수록 내용[1696년]
매산공 이인혁(李寅爀)은 경주이씨 익재공 후 오촌공파가 세거하는 충북 진천 초평면 용정리(생곡마을) 출신으로 조부는 형조판서를 지낸 벽오 이시발(李時發)이며, 매산공 이인혁(1634~1710)선생께서는 61세 노령에 전라도 나주목사(羅州牧師)에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1697년 벼슬을 마치고 고향으로 귀향할때, 나주 백성들이 동문밖에 천막을치고 송별잔치를 베풀엇다. 이때, 영암 망호정 이송제(李松齊,
1645~1703)께서 당시 송별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셨다.
▲나주읍성 동문(동점문) |
▲나주읍성 비석군(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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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사 이인혁(李寅爀, 1634~1710)의 자는 중장(仲章). 호는 매산(梅山).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조부는 형조판서 이시발(李時發)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경휘(李慶徽,1617~1669)이다.
1657년(효종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직(蔭職)으로 공조좌랑(工曺左郞)에 제수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가 폐위된 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다시 관직을 제수 받아 나주목사(羅州牧師)와 사복시정(司僕寺正)이 이르렀다.
동강 이송제 선생의 글을 풀이하면 아래와 같다.
지난 을축년(乙丑年, 1685) 봄에 나는 우리 경주이씨 대동보[甲子譜] 추보(追補)때, 기존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상경(上京)하여 잠시 머물렀는데, 여러 선비들께서 우리 종친중에서 매산 처사(處士) 이인혁이란 분이 계시는데, 이분으로 말할것 같으면, 중국의 황숙도『黃叔度 : 한(漢)나라 황헌(黃憲)의 字』나 원자지『元紫芝: 당(唐나라 元德秀의 字』와 견줄만한 아주 첨렴한 분이라며, 나에게 일러 주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시간을 내어 매산공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으며,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이리도 늦께 만나게 되었다며, 진작 만나 뵙지 못하였음을 아쉬워했다. 나는 서울에 머무는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았기에 추보 발간 일을 마치고, 고향 영암으로 귀향한다며, 작별 인사를 드린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매산공과 나누었던 감동적 이야기들은 늘 잊을 수가 없었다.
그후 10여년이 지난 갑술년(甲戌年, 1694) 여름에 매산공께서 61세 나이로 나주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나는 다시금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다. 나주(羅州)와 영암(靈巖)은 가까운 거리였기에 나는 자주 나주에 가서 매산공을 찾아 뵙고 안부를 물었고, 하루를 편하게 보내다
느즈막에 영암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후 매산공께서 나주목사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때, 나주읍민들은 동문 밖에 천막을 치고, 재임중의 은혜에 보답코져 술과 음식을 마련해 놓고 송별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읍민들은 술잔을 돌리며, 서로 회포를 풀었다.
이인혁 나주목사께서는 읍민들을 위하여 바르고 어질게 고을을 잘 다스리는 정치를 펼쳤기에 읍민들은 목사를 믿고 의지하며, 마치 촉(蜀)나라 장방평(張方平, 백성들에께 후덕을 베풀어 백성들이 사당을 짓고 화상을 그려 모셨다고 함)과 같은 선한 정치를 베풀었다고 말하며, 우리 읍민들도 촉나라 사람들이 장방평을 공경하였듯이 우리 읍민들도 그렇게 합시다라며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또한 읍민들을 공께서 이곳을 떠나시지만 우리들 마음속엔 물이 땅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 나는 것처럼 매산공의 선정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영영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촉나라 사람들이 장방평을 공경한 것 처럼....
글 : 영암 이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