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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과 향내 나는 삶을 찾아
양경석 어르신
양경석 어르신은
숫자 7은 행운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7이라는 숫자가 한 사람의 인생에 절체절명의 위기로 찾아왔습니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불암산을 맨발로 등반하는 노원구 상계동의 양경석 어르신. 어르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예상치 못한 시기마다 찾아온 일곱 번의 위기를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 날 사업을 시작해 성공 가도를 달리던 양경석 어르신은 인생을 뒤흔드는 일곱 번의 위기를 만납니다. 24시간 쉼 없이 가동하던 공장 기계가 한순간에 수몰되던 순간부터 한쪽 눈을 잃게 되는 사연과 암 투병까지, 살면서 겪지 않아도 좋을 숱한 위기를 인생에서 무려 일곱 번이나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라는 말을 스스로 증명하듯, 어르신은 그 모든 위기를 견뎌내고 또 헤쳐나갔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당당한 자신만의 인생을 지금 또 살아가고 계십니다.
인생에서 큰 위기가 일곱 번이나 찾아왔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불운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위기가 일곱 번이나 찾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반대로 그 모든 위기를 이겨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그 숱한 위기를 헤쳐 나온 양경석 어르신의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모두가 힘겨운 지금 세상에서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희망과 용기의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1장 : 1979년 달동네 상계동 사람들
상계동에 오던 날
가을이 깊어만 가던 1979년 어느 날, 광진구 화양리에서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당시는 성북구였던 상계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울이라지만 차창 밖 풍경은 그야말로 낯선 시골 동네. 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보이고 가축을 기르는 내음이 코끝에 진동했다. 어지러운 길을 구불구불 들어서며 목적지인 상계동에 도착하고 보니 ‘어찌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갈까?’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세상살이에 넋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양지마을과 희망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위안 삼아 노래로 부르다가도 옆집에 먹거리가 생기면 혹여나 얻어먹을 수나 있지 않을까 하고 기웃거리는 힘겨운 마을. 그 틈바구니에 어느 날 그네들과는 어딘지 다른 듯한 모습의 남자가 나타났다. 갓난아이 하나와 배불뚝이 젊은 아낙을 거느린 샌님 같은 외모의 남자였다.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남자는 뭘 하던 사람일까?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도망쳐 온 사람일까? 소문으로는 일류 대학을 나왔다던데. 멀쩡하게 희멀건 사람이 참 안 되었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자신들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 걱정부터 하는 이들이 달동네 사람들이라는 것을 살아보고 나중에서야 알았다. 하루하루 살이가 그네들만의 인생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 그때부터 하루하루가 세월을 따라 여삼추처럼 흘러만 갔다.
달동네 풍경
앞에는 불암산이 우뚝 솟아 아침마다 눈인사를 하고 뒤편 수락산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소쩍새가 구슬프게 울어댄다. 그럴 때면 지나온 인생살이가 못내 서운해 가슴이 울렁인다. 수락산 쪽 양지바른 달동네를 양지마을이라 부르고 맞은편 불암산 자락에서 얼기설기 하늘을 가린 동네를 희망촌이라 부른다. 상계동 하늘 아래 달동네는 1968년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어려운 서민들, 특히 낙원동 근처 청계천 철거민들을 아주 한적한 산골로 내몰듯이 이주시켜 형성된 곳이다. 십자로 줄을 그린 뒤 천막을 쳐서 이 집 넣고 저 집 넣고 그러다 공중화장실에까지 집어넣는 식이었다. 물론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다. 시내에서 집까지 갈 택시를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올 손님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내몰린 하루살이 같은 하류층의 사람들이 끼니 걱정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심만큼은 아직도 시골 동네 같다. 어려운 살림살이기에 서로 이웃사촌을 만들고 도와주며 정을 붙이고 산다. 무슨 사정 때문인지 옆집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 우는 소리도 간혹 들렸다. 어쩌면 내일 아침 끼닛거리로 티격태격했는지도 모른다. 옆집은 열 평 집에 열두 명이 살았다. 우리 일처럼 안타까웠지만, 나설 수 없는 내 처지를 잘 알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 몰라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산골 마을이라서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 달동네. 영하 21도 추위에서 빨래하려면 수락산 계곡으로 가야 했다. 나중에는 수락산 물을 담아두고 호스를 연결해 동네 이 집 저 집에 연결했다. 물값을 받으러 오던 사람은 한쪽 팔이 없었는데 언제나 웃으며 다가오는 그 사람에게 수고한다고 덕담을 건네곤 했다. 그런데 물을 호스로 연결해 사용하다보니 가뭄이 질 때나 동파를 일삼는 동장군이 몰아치는 동지섣달에는 모두 안절부절했다. 그럴 때는 가끔 구청에서 캄캄한 밤에 물차를 보내주었다. 추운 겨울 골목길, 한 바가지라도 더 담아 보려 오들오들 떨면서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애환이 스친다. 어느 날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화장실 가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기억도 떠오른다. 동치미 국물로 가스 중독을 달랜 추억이 있기에 가끔 동치미를 먹을 때면 빙그레 웃어 본다.
풍경의 변화와 연탄의 추억
이런 달동네들도 세월의 변화와 개발의 바람을 따라 얼마 후에는 자연 속 아파트가 들어선 모습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그러니 상계동 달동네도 언젠가는 역사 속으로 파묻힐 것이다. 사실 이곳은 천하의 명당이다. 불암산과 수락산을 앞산과 뒷산으로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가려면 늘 몇 명씩 짝을 지어 넘어갔다고 한다. 호랑이나 다른 짐승들이 자주 출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서워하던 골짜기였는데,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자기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인 덕릉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 이 동네 길 이름이 ‘덕릉로’인 이유다. 그 후로는 선조가 이 고개로 나무 팔러 오는 사람들을 잘 대하라고 명령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후하게 대접을 받았다. 또 이 고개에 서낭당(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돌을 쌓아 놓은 곳으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의 역할을 했다.)을 만들었다. 그렇게 이곳이 ‘당고개’가 되었다.
살기는 팍팍했지만 달동네가 좋았던 이유는 맑은 공기와 함께 늘 한적하고 조용했고 <사랑의연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마다 살림살이가 어려운 이 동네는 긴긴 겨울 나눔의 손길에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젊은 청춘들이 스스로 봉사를 나서 시커먼 얼굴을 하고 땀 흘리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1979년 처음으로 뿌리를 내리고 이제 40년이 지나고 있다.
2장 : 돈키호테처럼 싸움터에 나서다
칠전팔기, 불굴의 투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 서정주, 1947년
이 시처럼 인생을 꽃피우기 위해 나는 울 일이 많았다. 맨손으로 일으켜 세운 사업체가 중국의 문이 열리면서 산업 전체가 몰락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보았다. 또 어느 날인가는 폭우로 흙탕물이 모든 것을 삼켰고 곧바로 IMF가 찾아왔다. 가까스로 재기했지만, 이후 또다시 자연재해와 교통사고를 연달아 겪었다. 그리고 눈 하나를 잃어버리는 신체장애를 딛고 일어섰더니 암이 찾아왔다. 처음 사업체를 시작했을 때부터 40년을 넘어 칠십 넘은 오늘까지 나락으로 떨어졌던 일곱 번의 위기를 극복하며 생존해왔으니 보람이요, 자랑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큰 아들 녀석은 “내가 아버지 같은 환경이었으면 죽어버렸을 것 같아요.”란다. 이제 칠전팔기 불굴의 투혼 이야기를 꺼내 본다.
사업의 시작, 아세아상사
1981년 3월 1일 나는 자수업으로 첫 사업체를 열었다. 40년 전 이야기다. 당시 직장에서 받은 마지막 월급 30만 원 가운데 20만 원을 집사람에게 건네고 단돈 10만 원을 들고 길을 나섰다. 집사람에게는 앞으로 6개월은 생활비를 못 줄지 모르니 알아서 살라는 말을 전하고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집안 집기들을 새 사업장으로 옮겨 놓았다. 인생 처음으로 독립한 순간이었다. 동대문운동장 평화시장 허름한 상가 2층에 보증금 10만 원과 월세 4만 원을 지불하고 전화도 월세로 한 대 빌려 사업을 시작했다. 성당에서 만난 아우와 여동생 그리고 동업하자는 전 직장 친구와 또 다른 직원 그렇게 다섯 명이 조그만 공간에서 시작했다. 앞으로 기미년 3월 1일 그날을 우리가 어떻게 변화시켜 맞이할지 상상하자면서 아세아상사라는 회사 이름을 명함에 새겨 세상에 뛰어들었다.
첫 거래는 동업자 친구가 거래처 두 곳을 새롭게 뚫어 성사되었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그해 추석 대목을 맞아 아동복 유명 브랜드에서 주문이 많이 들어와 재하청을 주면서 사업을 배우며 시작했다. 견적도 낼 줄 모르는 채 뛰어들었던 시절이었다. 이런저런 모험을 감수하고 첫 월급을 모두에게 건네던 날, 정작 나는 한 푼 없이 집에 들어갔다. 집사람 얼굴을 마주하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앞날에 희망이 보였기에 옅은 미소를 짓던 날이었다. 그 후 6개월 만에 지금의 상계동 달동네 살림집을 수리했다. 그리고 당시 경리를 보던 여동생이 내 사정을 누님들에게 이야기했는지 누님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자수 기계를 들여와 처음으로 공장을 차렸다. 동업자 친구는 한 달 만에 보따리를 싸서 떠났던 터라 새로운 생산직 직원 세 명, 사무실 직원 두 명과 함께 자수업 사업체로 시작한 새 출발이었다. 그렇게 생산 공장을 설립하고 사업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의류 부자재 수요가 많은 업종을 병행해 거래처를 늘려나갔다. 영업은 그럭저럭할 줄 알았다. 대기업 섬유부를 기웃거리며 한국외국어대학교 동문들을 찾아 나서니 우군이 참으로 많았다. 주 거래처는 대우실업 섬유부, 삼성물산이었고 반도상사 등 아동복 시장으로도 넓혀갔다. 그러다 보니 생산 능력이 따라가지 못해 일본에서 기계를 추가로 들여왔다. 이듬해 1982년 자동차를 마련하고 열 명까지 직원이 늘어나면서 제법 규모가 있는 공장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던 중 주 거래처였던 아동복 회사가 자체 공장을 세웠다. 첫 고난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마침 다른 거래처 사장님이 제안을 해왔다.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며 자기 회사를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집사람에게 하던 일을 맡기고 300명 규모 회사의 중역으로 자리를 옮겨 생산과 기획 그리고 영업까지 총괄 업무를 수행하면서 배우며 일했다. 그렇게 2년을 일하던 중 아세아상사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특수를 맞았다. 이때 다시 나의 일터로 돌아와 집사람과 함께 장위동으로 공장을 옮겼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리스로 시설재를 도입하고 생산 시설을 모두 새로운 자동화 기계로 교체해갔다. 2년 동안의 장위동 시절을 거쳐 태릉사거리의 넓은 장소에 공장 두 곳을 세우니 생산 시설이 크게 확장되어 전성기를 맞았다. 직원 수는 서른 명으로 늘어났고 3교대로 일을 했다. 전 자동화로 작업 현장은 24시간 쉴 틈 없이 돌아갔다. 그 당시 생산 규모로는 컴퓨터 자수 업종에서 가장 앞서갔다. 회사의 규모를 넓혀 본 시기였다. 남들 표현으로 돈이 저절로 굴러들어온다는 시절을 맞은 것이었다. 거래처는 날로 늘어났다. 1990년 3월 1일 창립일에는 한 해 일찍 플라자호텔에서 10주년 행사를 열어 지인들을 초대해 기념했다.
첫 번째 위기, 중국 개방과 섬유 산업의 몰락
호황의 시기를 지나고 1992년 첫 위기가 찾아왔다. 탈 냉전시대, 중국의 문이 활짝 열리자 섬유업계 사람들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불안이 스멀거리듯 싹 텄다. 중국의 값싼 섬유와 노동력은 우리나라 섬유 산업을 집어삼킬 게 불 보듯 뻔했다. 불안은 적중했다. 주 거래처였던 논노패션이 부도를 냈다. 어둠이 휘몰아쳤다. 휘청거렸지만 워낙 재무구조가 튼튼해 견딜 만했다. 하지만 뒤이어 한일합섬, 베비라아동복까지 줄줄이 부도가 나면서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중랑천 범람이 몰고 온 두 번째 위기
첫 번째 위기로 어쩔 수 없이 공장 하나를 폐쇄하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하지만 어둠의 그림자가 다시 눈앞에 다가섰다. 1998년 8월 6일이었다. 폭우로 중랑천이 범람하면서 공장이 쑥대밭이 되었다. 모든 시설재가 흙탕물에 삼켜져 처참한 모습으로 초토화되었다. 앞날이 불안 그 자체였다.
IMF로 맞은 세 번째 위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곧바로 IMF가 터졌다. 은행 이율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곧바로 가족회의를 열었다. 집을 팔아야겠다. 모두 이의가 없다. 당시 살던 월계동 집을 정리하고 작은 녀석은 군대로 보냈다. 하나 남은 공장 창고로 살림살이를 옮기고 큰아들을 그곳에 살게 했다. 나와 집사람은 남의 집 문간방을 얻어 잠자리로 삼았다. 단칸방을 몇 번이나 전전했다. 석 달 동안 모든 거래처가 사라졌고, 직원들에게 퇴직금을 주고 떠나보내고 나니 집사람과 큰아들만이 남았다. 텅 빈 곳에서 다시 재기를 모색했다. 그래도 행운은 노력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격언처럼 어느 날 우리 공장 간판을 보고 필리핀과 몽골 노동자들이 일하고 싶다면서 무작정 나를 찾아왔다. 다시 해 보자. 경쟁업체 공장에서 하청으로 일을 받아 마지막 남은 기계를 돌렸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자괴감이 들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성동고등학교 총 동문회 회장으로 자리매김할 선배가 총 동문회의 총무 자리를 맡아 달라고 전화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찰나의 판단이었다. 아내도 어차피 망한 것, 공장은 자기가 책임질 테니 다른 세상 좀 겪고 오라 했다. 그 자리를 수락하고 총 동문회로 나갔다. 달랑 전화 한 대밖에 없는 처량한 집단이었다. 말이 총 동문회지만, 어느 친목 단체만도 못했다. 회장, 사무총장 등 선배들이 모두 군 장성 출신으로 사회를 잘 몰랐다. 혼자 모든 일을 수행하며 기획해가는 동문회, 이곳도 또다시 맨땅이었다. 자금도 없고 사무실도 없었다. 공장 창고에 전화 한 대 올려놓고 남은 경비로 컴퓨터 한 대를 설치했다. “총무가 컴퓨터를 못 해?” 이 한 마디에 승부욕이 발동했다. 그 김에 컴맹 탈출을 시도해보았다.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콘텐츠를 만들어 올렸다. 그때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며 앞서가다 보니 학교 동문의 인명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장에게 인명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돌아오는 소리는 “야 인마, 인명부를 무슨 수로 만들어?” 나는 또 승부욕이 발동했다. “만들면 어쩌실 거예요? 내가 만들면 무릎 꿇고 술 사주시죠?” 배짱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터넷에서 학교 동문을 찾아주던 아이러브스쿨이라는 회사를 통해 5,000여 명의 동문 연락처를 찾아냈다. 장학금도 모금하고 회비 제도를 도입해 지로를 만들었으며 모든 동문의 인명부를 전산화했다. 내친김에 모교의 역사도 파헤쳤다. 오래된 서고에서 앨범 두 개를 발견했는데 거기에서 진짜 개교기념일을 찾았다. 그전까지는 일제강점기 이후 임의로 정한 날을 개교기념일로 사용하고 있었다. 설립자가 윤치호라는 것도, 우리 학교를 나온 인물 가운데 작곡가 홍난파, 정치가 장면, 구마적패의 두목이던 구마적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찾아냈다. 이를 글로 엮기도 했다.
또 한 번의 수해로 찾아온 네 번째 위기
2001년 여름, 중랑천이 또 범람해 재기한 나의 사업체를 몽땅 휩쓸고 갔다. 이미 수해를 한 번 입은 지역이었기에 그동안 공공에서 배수 시설을 설치해 놓았었다. 비가 꽤 왔지만, ‘설마 또 범람하겠어.’ 하고 있는데 밤 12시가 되니 심상치가 않았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아내와 아들을 불러 주문 받은 타올 20,000장을 위쪽으로 옮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문을 열자 엄청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계는 물론 살림살이마저 모두 흙탕물에 잠겼다. 나중에 알았는데, 배수 담당자가 술을 먹고 기계 돌리는 일을 깜빡했다고 한다. 보상은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집사람과 아들 녀석이 물속에서 나와 비를 흠뻑 맞고 처마 밑에서 울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졌다. 완전히 망했다. 머릿속으로 셈을 해보니 그래도 은행 빚이나 차입금은 없었지만, 형제들에게 빌려 쓴 부채가 남아 있었다. 모교 총 동문회 인명부를 만드는 일은 회장에게 이야기해 처음으로 급료 명목으로 수고비를 책정받아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사이 공장은 주인에게 내몰리듯 나와야 했고 형제들 도움으로 그나마 기계 한 대를 수리해 다른 곳으로 옮겨 직원 하나와 집사람이 꾸려갔다. 거래처 100여 곳 가운데 달랑 한 곳이 남았다. 군인들 군장을 만드는 거래처였다. 이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긴 했으나 삶의 고통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내색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와중에 동문회에서 기립박수를 받고 공로상을 받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하일성 선배, 배일집 선배 그리고 회장인 이석복 선배 등이 모두 수고했다고 격려했다.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는 이렇게 가장 험악한 처지에서도 모교인 성동고등학교 100년 역사와 30,000 동문을 모두 찾아냈고 이 땅에 처음으로 인명부를 전산화해 책으로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인명부 출판기념회를 치르면서 모교 후배인 가수 이승훈을 초청해 ‘비 오는 거리’를 들었다. 나의 마음속엔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볼을 타고 하염없이 내리던 두 빗줄기가 마음속을 적셨다. 영광의 순간과 참담함이 뒤엉킨 심정으로 돌아와 다음을 이어갔다. 남은 기계 한 대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던 때였다.
음주 경찰차 사고로 찾아온 다섯 번째 위기
두 번째 수해 때는 자동차까지 물에 잠겼다. 그래서 어느 날 차를 건조하고 시험주행을 하려고 집사람과 차를 타고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쿵 소리와 함께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떤 차가 뒤에서 들이받은 것이었다. 얼핏 보니 경찰차였다. 이후 한 달 반 동안 부부가 함께 병원 신세를 졌다. 당시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이 음주운전을 한 것이었다. 아들 녀석이 알아채고 추궁을 했더니 싹싹 빌었다고 한다. 처자식 이야기를 하며 사정을 하니 어쩌나. 보험처리로 끝을 냈지만, 집사람은 아직도 목에 후유증이 남아 있다. 입원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건물 주인이 10년 동안 임대해왔던 자리를 비우라고 했다. 법원 명령을 내밀면서 말이다. 참으로 인심이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여섯 번째 위기로 한쪽 눈을 잃었지만 그것도 운명
세월은 흘러 2004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별안간 지하철의 선로가 휘어 보였다. 동네 안과에 가니 큰 병원으로 가 보란다. 서울대학교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 망막 이상이라고 했다. 진단 후 3개월을 두고 보자는 소견이었는데 그것이 오판이었다. 결과적으로 수술 시기를 놓친 셈이었다. 다시 영등포 김안과로 가 수술을 받았다. 수술실을 나선 뒤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수술 후 엎드려서 일주일 동안 생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 번을 수술했다. 결국 한쪽 눈을 실명해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병원에서 조금만 세심하게 봐주었다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것도 운명이려니 받아들인다.
일곱 번째 위기, 암 병동에서 바라 본 세상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 암에 걸리셨습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 심정은 어떨까? 예전에는 환자에게 암이라고 바로 말하지 못했는데 요즘은 이렇게 본인에게 직접 전화로 알린다. 듣는 순간 기분이 묘하다. 내 생명이 얼마나 남았을까? 마음속에 회오리바람이 분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먼저 찾는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집사람이다. "여보! 나 암이래." 화장실에 있던 집사람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다.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그렇게 2017년에 암을 선고받고 병원을 정했다. 많은 환자 사이에서 한 달 반을 대기 상태로 기다린 끝에 다시 정밀 검사에 들어갔다. CT, 내시경 검사, 조직 검사까지 받고 돌아오자 도살장에서 겨우 살아나온 기분이었다.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의사에게 결과를 듣는 순간,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긴장이 흘렀다. 의사의 입에서는 “위암 초기입니다. 내시경 시술로 날짜를 잡아야겠습니다. 모든 일정은 간호사가 정해 드릴 겁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 전날로 수술 날짜가 잡혔다. 암 병동에 들어가던 날, 도살장에 죽으러 가는 소처럼 병실로 들어섰다. 먼저 입원한 환우가 통성명해 온다. 동병상련을 느끼고 서로 위안하면서 하루를 보낸 뒤, 같은 날 검사를 받고 그다음 날 내가 먼저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레에 누워 끌려가는 처지. 덜커덩덜커덩 엘리베이터에 실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기분은 아마 상상이 어려울 것이다. 수술실 앞에 대기자가 많아 기다리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여기서 영영 이별일까, 아니면 살아서 나올 수 있을까? 살아나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러는 사이 수술실로 들어가 죽은 듯이 몇 분이 지났을까? 그때 들려온 소리. “여보! 수술 잘 되었대! 수고하셨소.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그렇게 수술을 마치고 다시 암 병동으로 돌아온 날, 뒤 이어 가는 환우 얼굴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 삶과 죽음 사이에 곧 처할 사람의 표정이다. 먼저 다녀온 내 모습이 부러운 듯했다. 암 병동에서 3일 만에 탈출했다. 7개월 후 다시 검사 그리고 8개월이 지나고 돌아오는 3월에 다시 검사를 받으러 들어갔다. 이렇게 총 5년을 관리해야 하는 처지였다. 2022년 4월에 완치 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남들은 한 번도 아니 간다는데 무슨 팔자가 사나워 나는 세 번이나 도살장에 끌려갔을까. 두 번의 눈 수술과 위암 수술을 하며 나는 수술실을 세 번 나섰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고 산다. 병실을 드나든 지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껏 살아서 병을 관리하고 있지만, 아마도 옛날 같았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의학의 발달로 살았으니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기왕지사 남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것에 무게 중심을 두고 멋있게 살다 가자. 그것이 소망이다.
긍정의 힘, 돈키호테 같은 투혼으로
우여곡절을 겪던 2004년, 정겨운 하늘 아래 달동네 상계동 양지마을에 다시 귀향했다. 낡은 총 한 자루 쥐었던 이순신 장군처럼 달랑 기계 한 대로 또다시 싸움터로 향했다. 언제나 긍정의 힘, 솟아나는 에너지,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돈키호테라고 불리며 투혼 있게 밀고 갔다. 기계 다루는 법, 수리하는 법도 뒤늦게 터득하고 홀로 기계를 돌리며 그럭저럭 세월 맞이를 했지만, 부채 탕감이 힘겨웠다. 가장 처참했던 순간들은 형언하기 어렵다.
모두가 힘든 코로나시대에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여덟 번째 위기 앞에 선다. 나는 아직도 열정이 남아 있는 산업 전사요, 이 나라 내 겨레를 지키는 군인들의 견장을 만드는 역군이다. 모두가 보람이요, 긍지다. 가슴에 안고 땀 흘리며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인생이란 등산처럼 오르막 내리막이 뚜렷해 언제는 좋은 일이 지속되고 언제는 나쁜 일이 연속되는 한 편의 영화와 같다. 돌아보면 그렇다. 태어날 때 금수저 물고 태어난 덕분에 보릿고개 모르고 서울 유학이란 혜택 속에 남 부럽지 않게 자랐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자립해 스스로 생활해야 했기에 힘들었지만, 세상을 배우는 시기였다. 그래도 이른 경험이 삶에 보탬이 되었다. 청춘 시절은 정말 역동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비록 숱한 위기를 겪어 왔지만,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겪은 각종 사건으로 형성된 나의 성격, ‘긍정’과 ‘주체성’이 삶을 버텨낼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 양경석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보자.
3장 : 연탄 배달하던 소년, 내 운명은 내가 바꾼다
평범했지만 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
나의 추억 속 고향은 넓은 벌 평택평야 동쪽 끝이다. 경기도 평택시 청북읍 율북리가 그리운 그곳이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풍경처럼 동청리강 실개천이 흐르고 마당에는 황소가 울고 초가지붕 위 하얀 박꽃이 오가는 손님을 기다리며 토끼가 초롱초롱한 눈을 하던 전형적이고 목가적인 농촌 마을이다. 일제의 침략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좌파와 우파의 극심한 대치로 불안하기 그지없던 혼란의 한반도, 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운 나라.
내가 세상으로 온 날은 1950년 5월 22일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초가지붕에는 하얀 박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드넓은 평택평야 곡창지대라고 하지만, 모두가 힘겨운 삶으로 보릿고개는 피할 길 없었다. 부지런한 부모님 덕분에 유복한 정미소집에서 딸 여덟에 아들 둘인 열 명의 형제 가운데 아홉째로 태어났다. 곧이어 터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세상 물정 모르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누님들 손에 끌려 평택군 어연국민학교에 일곱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입학했다. 모범생으로 공부도 곧잘 하며 6학년이 되었는데, 정부 방침이 바뀌면서 시골 학생의 서울 중학교 진학 길이 막혀 서둘러 서울로 유학을 하러 가야 했다. 그렇게 서울장충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6학년은 못 받아 준다기에 5학년으로 한 학년 내려가니 어린 나이에도 마음에 응어리가 맺혀 풀릴 길 없었다. 어린 소년은 어쩌지 못하고 방황의 그림자 속에 휘말렸다. 공부를 손에서 놓고 시늉만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당시 5.16 군 출신 자녀들과 학교를 다녔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하숙을 하며 정변을 반대한 30사단장 장군의 자녀들과 한집에서 살고 있기도 했다. 정변군 자녀들인 박정희 소장 딸과 김종필 딸이 후배들이었다. 또 그 당시 부잣집 자제들이었던 현대중공업 정몽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도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으니 이 무슨 운명일까? 이후 떠밀려서 본 중학교 1차 시험에 낙방하고 2차로 응시한 학교에서 성동 중학 시절을 보내야 했다. 추억이 별반 없는 어려운 학창 시절이었다.
연탄 배달하던 소년
어린 시절에는 유복하게 자랐지만,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같이 했다. 아버님이 오랫동안 병환으로 계셨기 때문이었다. 여러 형제가 부모님 의존에서 벗어나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셋째 누님이 세탁소, 구멍가게, 이발소 등을 같이 운영했는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나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했다. 누님이 3년 동안 구멍가게를 할 때는 가게와 방이 딸린 곳에서 물건을 팔았고 겨울에는 연탄을 팔면서 생활했다. 서울동명국민학교 뒷골목 마장동 언덕 위가 가겟집이었다. 언덕이라 언제나 수레에 연탄을 싣고 끌고 밀고 하며 집마다 배달했다. 그때는 모두 연탄을 낱장으로 사서 쓰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중고교시절 남들은 공부에 전념했지만, 나에게 공부는 언감생심 뒷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가는 손님을 맞아 물건을 팔고 늦은 밤 문을 닫으며 마무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삶의 원동력이 될 줄이야. 뒤돌아보니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라는 선인들 말이 실감이 난다.
내 운명은 내가 바꾼다
나라는 사람은 타고 난 태생만 보면 사실 유약한 모범생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만성 알레르기를 안고 살았다. 중학교 시절 어쩌다가 깡패들과 시비가 붙어 참혹한 봉변을 당한 뒤로 체력을 길러야겠다 싶어 고등학교 때 태권도 운동부에 들어가 유단자가 되었다. 기질이 주변 따라 변했는데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님을 오랜 병고로 여의고 더 방황했다. 까까머리 시절엔 운동한답시고 도복을 옆에 끼고 불량한 학생이라도 되는 양, 옆 학교 여학생들과 어울리지 않게 미팅도 하면서 중국집이나 극장으로 나돌았다. 공부와는 거리가 먼 청춘을 보내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 병환으로 오랫동안 집안 환경은 불안하기 그지없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앞날에 불운이 싹트면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 길을 몰랐다. 대학 진학에 자신감을 잃어버리면서 다른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바다로 나갈 생각에 국립수산대학교 어로과 시험을 치렀으나 적록 색약으로 신체검사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모든 진로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농사도 지을 줄 몰라 허둥대다가 가족들에게 떠밀려 다시 입시학원인 대성학원에 입학했다. 험난한 삼수생의 심경에 반항이라도 하듯이 옆지기 여학생과 사랑놀이를 하면서 1차로 응시한 학교의 입시는 떨어졌으나 2차로 응시한 학교인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르투갈어 학과에는 무난하게 합격했다. 돌아보니 결국 중고대학교 모두 2차 학교에 들어갔다. 처해진 환경에 적응하며 나는 내 기질을 스스로 바꾸어 나갔다. 성격은 친구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야생마처럼 달라져 있었고 그렇게 늦게 상아탑으로 들어섰다.
4장 : 브라질 삼바, 인디언과 흑인 춤으로 명물이 된 화려한 청춘
청춘, 그 화려한 시절
세월이란 시계추는 멈춤 없이 흐른다. 삼수하는 동안 어느 여학생과 사랑놀이하며 둘 다 1차 시험에서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고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창 시절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많은 사람이 회자하는 명물이 되었고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나의 이십 대는 황금시대다. 캠퍼스 교정 안 무대가 좁았다. 학교에서 제일 큰 행사, 세계 민속예술제가 처음 만들어졌고 나는 나의 첫 무대로 큰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 각 매스컴에 등장하기도 했다. 시민회관, 이화여대 대강당, 세종문화회관, TV 방송국, 운동장 등을 누볐다. 모래시계 주인공처럼 학생운동으로 쫓기면서도 장학생, 응원단장 노릇까지 했다. 지나고 보니 그리운 추억이 가득한 추억 부자다. 멋진 향내를 물씬 풍겨가며 남다른 세월을 보냈다. 화려한 시절은 누가 뭐라 해도 청춘 그 시절이다.
데모와 군대 그리고 춤꾼
내 학창 시절에는 매년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나는 과 회장을 하면서 전체 과의 대표를 맡아 외국어학부에서 진행된 수학여행의 절반을 인솔했다. 1학년 때부터 데모를 하면 선두에 나섰다. 그러다 보니 대표 인물이 되어 교련 반대, 위수령 사건과 계엄령 중 유신반대 데모대를 이끌어야 했다. 전국에서 제일 처음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가 한국외국어대학교였다. 1973년 11월 17일의 일이다. MT를 치르고 남은 70만 원을 시위 자금으로 사용했다. 데모 주동자, 운동권 소리도 들어보면서 청춘의 기로에 섰다. 이후 관련 활동으로 안기부 직원이 나를 회유하려 여관방에 데려갔다. 술을 마시며 자꾸 떠봤다. 그 사람이 상황이 좋지 않으니 군대에 가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사람도 외대 독어과 선배였다. 그런데 군대에 가려고 봤더니 당시 나는 군 복무 대상이 아니었다. 공무원인 고향 지인이 군대를 빼 주려고 병역 카드를 없앤 것이었다. 난감했지만 친형님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만들어 군 복무를 했다. 입대하고 처음에는 고사포 포병으로 배치를 받았는데 부대 안 어떤 사람이 휴가를 나가 명동에서 총기 난사 사고를 일으키는 바람에 부대가 없어져 버렸다. 이후 보병으로 재배치를 받았다가 또 4개월을 기다려 다시 육군종합행정학교 공병으로 복무했다. 방위병이라 12개월만 복무하면 되었는데 3병과를 거치면서 총 21개월을 복무했다. 군 생활도 파란만장한 것이 마치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인생을 암시하는 듯했다. 21개월 만에 돌아와 4학년으로 복학했다. 배짱 있으면서 요절복통할 청춘 시절이 이어졌다. 나중에 샐러리맨 신화를 쓴 현대중공업 권오갑 회장과 둘이 돌아다니며 경희대학교 체대 일곱 명과 싸우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신문사 기자나 방송국 피디를 할 꿈을 꾸면서 경제원론을 펼쳐 들고 공부에 여념 없는 사이 이번에는 여대생들에게 납치되는 요절복통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인들에 둘러싸여 금남의 집인 여러 여자대학교 운동장에서 호루라기 하나 들고 여인들의 춤을 지도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76년 봄이다. 26세, 아름다운 청춘이었다.
여대생들의 납치 소동
빛바랜 사진 한 장. 벌써 반세기 가까이 지난, 요즘 시대와는 전연 다른 그때 그 시절. 춤 문화가 별로 없던 시절에 난 춤으로 무대를 휘저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지금은 종합대학이지만 그 시절에는 아니었다. 학과가 대부분 외국어 관련이다 보니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계민속예술제’라는 타이틀의 공연이 열렸다. 대형 강당이 없어 큰 축제를 하려면 다른 공간을 빌려 써야 했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진명여자고등학교 강당, 다음은 시민회관, 시민회관이 화재로 소실되어 그 다음은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으로 옮겨가며 공연했다. 나의 역할은 브라질 삼바 춤, 인디언이나 흑인 춤이었다. TBC 생방송 첫 프로에 출연도 해보고 세종문화회관이 건립된 첫해에 연출도 했다. 이런 민속춤이 모든 여자대학교에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대낮에 나는 여인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갔다. 납치된 곳은 상명여자대학교 운동장. 다섯 명의 여인들이 양쪽 팔을 잡고 등을 밀며 어딘가로 데려갔다. 두려움은 전혀 없는 납치 소동이었다. 나를 납치한 여인들은 상명여자대학교 음악교육과 학생들이었다. 상명여자대학교 민속경연대회에 나가는데 자기들의 춤을 지도해달라는 것이었다. 보름 동안 그네들 학교 운동장에서 호루라기 하나 들고 민속춤인 브라질 삼바를 지도했고 영예의 대상을 그들에게 안겼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어떤 학생들이 나를 차량에 태웠다. 미끄러지듯이 북악터널을 통과하는 걸 보고 "당신들 서울여대생입니까? 아니면 동덕여대 학생들?" 하고 물으니 서울여자대학교 식품가공학과 학생들이란다. “죄송합니다.” 하고 연신 인사를 받는 사이 학교에 도착했다. 서울여자대학교 테니스코트장에서 기다리던 여대생들이 손벽을 치면서 일행을 맞았고 난 이내 그들에게 둘러싸여 그렇게 또 한 번 춤 공연 연습에 돌입했다.
공연하는 날이 다가왔는데 아무래도 연습이 부족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특별 대책으로 공연 날 아침, 새우깡에 깡소주를 한두 잔씩 먹였다. “춤 별것 없다. 신명 나게 추면 되는 거다. 마음대로 춰라. 힘차게 춰라.” 성공이었다. 박수가 쏟아졌다. 미리 지정되어 있던 춤 다음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어여쁜 여대생들이 나를 와락 껴안았다. 포옹은 부끄러운 줄 몰랐다. 금남의 집 여자대학교 운동장에서 난 그녀들과 포옹했다.
수고비로 봉투와 선물을 받아 들고 돌아가는 길. 한쪽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 김정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음~ 생각을 말아요.’ 「하얀 나비」의 노랫말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늘 무대 위에서 내려오면 밀려오는 고독감. 다시는 안 한다고 했지만 덕성여자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창덕여자고등학교까지 여덟 번이나 춤 선생 노릇을 했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던 나는 어쩌면 전생에 기생이 아니었을까?
희망과 목표가 있는 삶, 멋과 향내 나는 인생
나의 학창 시절은 공부가 아니라 데모꾼이요, 응원단장이요, 춤꾼의 인생이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누가 그렇게 추억과 낭만이 넘실대는 아름다운 지난날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이런 과정을 겪으며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자신감과 승부수를 배웠다. 모든 상을 휩쓸고 돌아와 넉넉한 주머니로 술집 주인들의 환대 속에 두주불사 퍼마셨다. 동기와 후배 들의 부러움을 샀으니 그때 그 순간은 영웅 같았다. 모두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추억이었다. ‘희망과 목표가 있는 삶, 멋과 향내 나는 인생으로 거듭 살아내자.’는 인생관을 만들어준 청춘 시절이었다. 이런 낭만이 넘실대고 추억이 많은 세월을 뒤로하고 나는 점차 세상 속으로 나아갔다.
5장 : 고맙고 자랑스러운 가족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다
집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여름이었다. 친구 여동생의 주선으로 종로 고려당 빵집에서 만났다. 소개해준 친구는 삼수하던 대성학원 시절에 만난 친구였다. 그러고 보면 삼수를 한 것도 어쩌면 아내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던 듯하다. 집사람은 그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실 비서로 일하며 세 명의 회장을 모신 베테랑 비서였다. 변변치 못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내가 내세울 것 없어 어쩌지 못하는 사이 친구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평소 자네답게 저돌적으로 대시하게. 그다음은 우리가 분위기 잡아주겠네.” 그렇게 용기를 내어 곧바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렇게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외로움이 많아 보였다. 우리는 100일 동안 매일 정해진 장소에서 만났다. 그녀와 사직공원에서 첫 키스를 했다. 그리고 성당 체육대회 행사가 있던 어느 날, 성가대원들의 뒤풀이 자리에서 결혼할 여인이라고 소개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프러포즈를 했다. 1978년 3월 11일, 왕십리 성당에서 주임 신부님의 주례로 혼배성사를 하며 난생처음 나만의 가족이란 울타리를 치게 되었다.
우리는 경찰병원 양지시장 뒷골목에 백만 원짜리 문간방을 전세로 얻어 둥지를 틀고 신혼생활을 시작해갔다. 두 해를 이 집 저 집 떠돌았다. 그러다가 1979년 11월, 하늘 아래 달동네 상계동 양지마을에 내 생애 처음으로 문패를 걸고 정착했다.
고맙고 자랑스러운 나의 아내
모처럼 아내와 함께 외식하는데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아내를 생각하면 그저 고맙고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보잘것없는 사람을 택해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며 수많은 인내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행해준 노고를 잊을 수가 없다. 수많은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도 모두 아내 덕분이다.
흙탕물에 사업체가 모두 잠긴 날, 밤을 새우고 오들오들 떨며 울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대책 없이 흥청거리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며 일어섰다. 아마 어느 여인도 이런 남편과 살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아내가 가졌던 직업은 열 가지도 더 된다. 그 고생고생한 시절이 스무 해를 맞는다. 생각해보면 아내가 앞장섰기 때문에 위기를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녀에게 미안해 마음에 써 둔 글이 많다.
아내의 나이 예순아홉, 칠순 고희를 며칠 앞둔 오늘도 그녀는 어김없이 월급을 타는 현역이다. 두 번째 수해 이후, 집사람이 밖으로 첫 나들이 삼아 교보생명 보험설계사로 나섰다. 이후 텔레마케터, 뉴타운 추진위원회 사무실 요원, 희망 근로, 예식장 도우미, 백화점 점원, 요양원 조리 요원, 요양보호사로 오늘날까지 생계를 도왔기 때문에 그간의 모든 부채를 덜어낼 수 있었다. 참으로 고맙고 덕분에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그 사이 아이들은 모두 독립하고 이제는 둘만 남아 세월을 맞이한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비서 출신이 이렇게 산전수전을 다 겪어내고, 무엇보다 건강하고 또한 늘 긍정적으로 살아주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이렇게 또다시 위기를 넘고 있다. 모든 것이 고맙다. 아내가 자랑스럽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가는 우리 아이들
아이들 잘 키워 모두 한 해 걸러 출가시키고 보니 부모의 도리는 비록 미흡했지만 최소한의 책임은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번 수해를 만나 가장 어려웠던 빈털터리 시절, 내 인생 가장 처참했던 시절 밑바닥에서 끼니 걱정할 때 아이들은 혼사를 앞두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아이들을 불러 놓고 밥은 먹여줄 터이니 결혼 준비는 각자 알아서 준비하라고 이야기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변변치 못한 인생의 나락에서 부모로서 할 도리는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눈 하나마저 잃고 병원에서 수술받았을 때였다. 큰 녀석이 며늘아기를 데려와 소개했다. 큰 녀석이 장가를 가던 날, 예식장은 손님들로 가득 찼지만, 마음은 씁쓸했다. 그리고 열 달 뒤 작은 녀석도 장가를 갔다. 아버지로서 결혼식장 비용만을 부담했다.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어 살아가며 언제든 그네들 울타리만큼은 되어 주려고 한다.
두 아들을 장가보낼 때, 빈털터리 부모로서 소회는 참담했다. 당시는 부채 덩어리가 남아 가슴을 짓누르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였기에 사돈 될 사람들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모든 것 체념하고 살아왔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자신들만의 영역을 스스로 구축해간 아이들. 몇 년이 지난 뒤 큰 녀석은 처가로 들어갔고 작은 녀석도 보금자리를 마련해 마음은 놓이나 미안한 마음은 여전하다. 이제는 작은 녀석이 낳은 선물과 같은 손녀딸들에게 정이 깊숙이 쌓여 간다. 자식들에게 못 해준 도리는 내리사랑으로 언젠가 손녀딸들 공부 뒷바라지에 보탬이나 하자고 집사람과 다짐한다.
운명이란 스스로 개척해 가는 것. 우리 집 삼대는 모두가 그 길을 이루었다. 나도 100만 원 단칸방에서 출발했고, 단돈 10만 원으로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기에 아이들이 자립한 것도 모두가 집안의 전통 같다. 아이들 모두 한때는 예체능의 길을 택해 미술로, 골프로 갈 길을 정해 큰 녀석은 홀로서기를 해서 사업을 일구었고, 작은 녀석도 프로골퍼 자격증을 취득해 프로 골퍼로 세계 제일가는 골프용품 브랜드에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가고 있다. 얼마 전 작은 녀석이 “잘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며 술 한 잔을 따랐다. 그 술잔에서 세상 살아가는 맛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깨달았다. ‘부정보다는 긍정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하고 되뇌어 본다.
6장 : 삶을 돌아보며
위기의 순간마다 항상 도움을 주던 사람들
2001년에 두 번째로 공장이 잠긴 날, 타올 2만 장이 물에 젖었다. 어떡하나. 일단 순간 세탁기가 있는 곳에 가져가 몽땅 빨고 거래처에 전화했다. “빨았으면 그냥 줘. 오히려 더 잘됐네.” 하고 아무 변상요구 없이 가져갔다. 4-5백만 원 외상값이 있던 거래처도, 7-8백만 원 정도 자재를 거래하던 업체도 “제가 안 받을게요.”란다. 그동안 정직하고 후하게 거래했던 것이 돌아온 것일 테지만, 돌아보면 위기의 순간마다 항상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고등학교 때 모든 걸 포기하고 고향으로 낙향했을 때도 누님들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와 대성학원에 다녔고 결국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위를 해 잡혀갈 뻔했다가 선배 덕분에 군대에 갔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도, 사업을 시작하고 첫 거래처를 뚫을 때도 외대 동문들의 도움이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누님의 도움으로 상계동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난과 기쁨의 모든 시기를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때마다 나를 잡아 준 집사람 덕분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가장 보람 있고 행복했던 순간
나누면 돌아온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다. 인생은 끊임없이 주고받는 것이다. 살면서 가장 보람 있고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만들어 냈던 일이다. 1992년, 40대 초반에 사업이 순항 중이다 보니 후배들이 찾아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르투갈어과 총 동문회장으로 추대했다. 그렇게 선배들을 제치고 동문회장이 되었다. 인사말에 무슨 계획을 담을까 궁리했다. 먼저 장학사업을 꺼내 들었다. 회장이 앞서서 기금을 쾌척할 테니 모든 동문이 십시일반 참여하고 자신들 이름으로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자고 그 자리에서 모금 운동을 주도했다. 아무리 사업이 순항 중이었다고 해도 거금을 내놓고 장학금을 지급한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순수했던 것 같다. 그 이후 새로운 후배 동문회장이 또다시 적극적으로 나서 모금 운동이 자리를 잡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역사를 새로 쓴 셈이다.
인생이란 내가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것
이제 나의 다음 역할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어느 스님 말대로 저승 갈 때 무얼 가지고 가야 하나? 그렇다. 나 역시 가지고 갈 것이 무엇이 있으랴.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또 내가 베풀었듯이 모든 것은 돌아온다. 십일조처럼 남은 재산의 10분의 1은 좋은 일에 쓰도록 남겨 두자고 집사람과 약속했다. 그 약속대로 재산은 장학금에 보태고 저승길을 가려고 한다. 지금도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바로 보람 있게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겠다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봉사는 남을 위한 땀이다. 베풀어야 나의 운명도 밝게 펼 수 있다. 인생이란 내가 행한 만큼 복이 굴러오는 법이므로 좋은 일도 많이 하는 것이 좋다. 남들에게 베풀 줄 알아야 나에게도 복이 온다. 그러니 남은 인생 부지런히 살아보자. 좋은 일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일에서 보람을 찾아본다. 멋과 향내 나는 삶을 찾아 땀 흘리면서 살아간다. 인생은 꿈과 희망을 세우고 목표 지점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길이다.
보잘것없는 인생 이야기지만 용기와 위로가 되기를
세상을 살아보니 한 사람의 삶에 어떤 환경이 다가올지는 누구도 가늠하기 어렵다. 밑바닥까지 떨어져 살아 보았지만, 늘 굽힘 없이 용기 있게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긍정의 힘, 바로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 덕분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이루어도 얽매이지 않고 바로 다음에 도전할 일을 찾았고 ‘어떤 일이든 부딪히면 한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 비록 가진 것은 적지만 최후의 승자는 나다. 날고 긴다 했던 사업가, 정치인, 연예인 동문 들의 현재를 보면 대부분 은퇴해 할 일이 없고, 아픈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내 일이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칠십 고개를 넘기고 앞으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일손을 놓지 않고 사회 속에 필요한 일원으로 작은 일이지만 부지런히 남은 인생을 살아낼 것이다.
매일 아침 맨발로 수락산과 불암산을 오른다.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인 세월을 앞에 두고 건강을 유지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 도전 정신을 앞세워 나눔을 통해 사회에 되돌려주는 일을 할 것이다. 죽음 전에 모든 것을 내려 두고 흙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이 바로 올바른 길 아닐까?
봉사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젊어서의 경험이 나이 들어서도 많은 교훈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서로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면 남들보다 강해야 하므로 여러 경험 속에서 마음과 땀으로 먼저 겪어내야 한다. 현재는 힘들고 고통스럽다지만, 젊음이 있기에 꿈과 희망이 있는 것 아닐까? 희망을 세우고 목표가 분명한 삶을 찾길 바란다. 먼 훗날 내가 나로 살아낸 추억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하겠는가.
내 인생에서 무엇 용서할 것도 없다. 화해해야 할 일도 없다. 오직 단 하나 사회적 책임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나눔을 통해 사회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나 자신만이라도 제 역할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이제부터 부를 다시 창출해 마지막 소원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으로 살아보려고 한다. 또 다른 하고 싶은 일은 삶이 어렵고 힘들어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는 데 용기와 도움을 주고 싶다. 모두 언제 시련과 어려움이 닥쳐올지 모른다. 하지만 항상 좌절하지 말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와 투지를 살려 더욱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비록 보잘것없는 인생의 지나온 이야기지만, 장애와 암과 재난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남은 인생도 보람 있게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작은 행복 - 양경석 詩
어린아이처럼
호들갑 떠는 표정
참으로 소녀 같은 얼굴
작은 고마움에
나타나는 환한 모습
그야말로 행복일 것이다
행복이란 길이가 있는 것도
또한 넓이가 있는 것도 아닌
보이지 않는 실체
바로 마음속에만 존재
표정으로 나타나는 그림자
작으면 어떠냐
좁으면 어떠냐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
마음의 항아리
비워야만 채워진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