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 - ‘삼백년 원한 품은‘이
‘삼백연 원한 풍은’이 된 사연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이난영은 1916년 목포 육전거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목화공장에서 일하던 그녀는 열여섯 살에
‘태양극단’의 목포 공연 때 막간 가수로 처음 무대에
섰다. 그 후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손목인이 작곡하고,
문일석이 가사를 쓴 <목포의 눈물>이 1935년에 발표된다.
목포의 애국가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다.
90년대 까지 호남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팀 해태
타이거즈가 승리를 거둘 때마다 팬들이 목 놓아
합창한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단지 응원가만이 아니었다.
한(恨)과 설움으로 살아온 이 땅의 사람들의 영혼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소리도구’였던 것이다.
‘목포의 눈물’은 한반도의 시름가이자 진혼가였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목포의 눈물이 일상적인 사랑가였다면 이런 가사
들이 나왔을 리 없다. 삼백년 원한은 무엇이고,
옛 상처가 새롭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목포의 눈물> 가사를 쓴 문일석은 스물 두 살의
문학도였다. 그는 <목포의 눈물>을 쓴 다음 해인
1935년에 스물세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것이 그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
<목포의 눈물>이 발표되었던 1935년에서 3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임진왜란 때다.
삼백년 원한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곡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이 대목의 가사
‘"삼백년 원한 품은’에서 발음이 비슷한
‘삼백연 원한 풍은’으로 바뀐다.
일제강점기 검열의 서슬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동안 이 부분은 ‘삼백연 원한 풍은’으로 불렸다.
하지만 노래 부르고 들은 이가 그 속뜻을 잊어버린
적은 없었다.
젊은 문학도 문일석이 애향가로 쓴 <목포의 눈물>.
그런데 애향가의 제목에 웬 눈물인가. 이 노래에는
그의 깊은 역사의식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폐결핵을 앓고 있던 스물 두 살의 문일석.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작품 <목포의 눈물>에는
망국의 한이 서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목포의
눈물은 찬가나 송가가 아니다.
그것은 비가이며 저항가인 것이다.
이별의 눈물과 설움, 그리고 원한과 상처.
이것이 목포의 정서였다.
그러나 목포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항구에서 맺은 절개, 목포의 저항의식은 계속된다.
바로 1942년, 또 한 차례 대대적인 목포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이 ‘목포는 항구다’였다.
글.사진 : 루덴스 dlaudgod@gmail.com
https://youtu.be/A7IqckAOsi0
[출처] 목포의 눈물 - ‘삼백년 원한 품은‘이 ‘삼백연 원한 풍은’이 된 사연|작성자 솔밭에송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