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상록수 발자취 되밟기 4
최 용신 선생의 농촌계몽 활동 학습과정
김 기 명
지난 호에서 최 용신 선생이 있기까지 함께한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그분은 신심상의 신앙심뿐만 아니라 재학 중 성서시험에서 항상 만점을 받았을 정도로 성서적인 지식도 완벽 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번호에는 그분이 농촌계몽활동의 실무적인 자질을 쌓는 과정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두남 학교와 루씨 학원 시절
최 용신 선생은 1909년 8월 12일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출생해서 해당화 피는 명사십리 해변을 뛰어 놀며 자랐다. 최용신 선생의 집안은 기독교 가정은 아니었지만 두남리에는 일찍부터 감리교 예배당이 있어 오빠들과 함께 주일학교를 나가면서 십자가와 예수님을 만나고 신앙심이 싹트게 되었다고 한다.
8세가 되던 1916년 사립교육기관이었던 두남학교에 입학해 2년간을 수학하고 10세가 되던 1918년에 원산에 있는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을 하는데 그 당시 두남 학교에는 의친왕 상해망명을 주선하던 독립운동가 이신애지사가 어린이들을 지도하면서 항일 애국정신과 농촌계몽운동을 역설하여 이때부터 나라와 농촌을 위해 희생 봉사하는 인격형성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1924년 루씨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6세가 되던 1925년에 두남교회 주일학교에서 회장과 부회장을 하던 시기에 김학준의 약혼 요청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같은 농촌운동 동반자로 삼기로 하고 약혼을 한다.
그리고 19세가 되던 1928년 봄에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을 했지만 학업 중에는 10리길을 통학하면서도 도시락도 싸지 못하고 학비 조달을 위해 학교 도서관 근로학생으로 일을 해야 할 정도로 집안이 어려웠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루씨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전희균 교목 같은 훌륭한 신앙지도자를 만나고 방애인 성자 같은 선배를 만나면서 기독교 신앙과 농촌계몽활동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게 굳어진다.
모든 것은 절대자의 뜻에 의해 결정 될 테지만 최 용신은 이런 스승들을 통하여 한발 한발 상록수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루씨 학당의 교문을 나서면서 이때 이미 기독교의 사랑, 봉사, 희생과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신념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졸업에 즈음하여 1928년 4월 1일 조선일보에 보도된 ‘교문에서 농촌으로’ 라는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교문에서 농촌으로-
수일에 불과하여 중등학업을 마치게 되니 기쁨도 있으려니와 반면에 애련한 느낌도 없지 않다. 인연 깊고 정 쌓인 루씨 동산을 떠나게 되니 형편과 처지가 다 같은 우리들은 새로운 희망과 포부를 가졌으리라, 이제 우리는 교문을 떠나 사회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우리 앞에 길이 평탄하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바이다. 그 것은 이사회가 부족한 점과 결함된 곳이 많은 까닭이다.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 요구한다. 더욱이 현대는 중등교육을 받고 나오는 여성을 가장 요구하는 줄 안다.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의 과거를 돌아보매 남성들의 다소의 노력과 활동이 있었으나 이는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것은 남성의 노력과 활동이 부족한 때문만이 아니다. 원래 사회는 남녀 양성으로 이루어진 대문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선 여성들은 5천년 동안 어둠 속에 갇히어 사회의 대세는 고사하고 자기들의 개성조차 망각하고 말았다. 이로 보아 남녀 양성으로 이루어진 이 사회가 남성만의 활동과 노력만으로써 원만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여기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 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 될 줄로 믿는다. 중등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각각 자기의 이상을 향하여 각자의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 그 활동의 첫 단계는 무엇보다 농촌 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 나는 농촌에서 자라난 고로 현 농촌의 상황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절실히 느끼는 바는 농촌의 발전도 결국 여성의 분투에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학교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북더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크게 유감 된 바이다.
문화의 눈이 구여성만 모인 농촌으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게 못한다면 이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1928년 3월 5일
또 졸업식 즈음에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에서도 졸업 후 희망은 “농촌에 들어가 농촌계몽에 일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 희균 목사는 교회를 통하여 민족의 단합과 사회개혁, 여성인력개발을 추구해 오던 분으로 최 용신 같은 우수한 인재를 만나 당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편으로 협성여자신학교로 진학할 것을 적극 권유하고 추천을 하게 된다.
협성여자신학교 시절 현장 실습
최 용신이 20세가 되던 1929년 4월 서울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남녀 공학 여자 5명, 남자 15명) 여기에서 황에스더 농촌사회지도교육과 교수 겸 사감을 만나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학문적 이론적 토대를 확고하게 수립하고 농촌계몽운동 실습과 체험을 통하여 삶의 지표를 확실하게 세웠는데 혹자는 만약 최 용신이 황에스더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주부 아니면 농촌지역 교회 전도사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고 했다.
1929년 협성신학교 입학 첫해 방학을 이용, 급우 김노득과 함께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로 농촌계몽활동을 처음으로 나갔다.
이 수안 지역은 지리상으로는 평양시역에 가까이 있으나 멸악산맥 줄기가 가로막고 있어서 교통편을 기차에만 의존 하던 그 때는 가장 가까운 신막역이 출입 거점이었다. 수안지역은 산이 1천m미만으로 높지 않으나 경작지가 별로 없는 산간지대다. 그러다 보니 사방 30리 이내는 교회도 학교도 없었다고 했다.
황에스더 교수는 미국에서 귀국할 때 어느 선교사로부터 지원 받은 100불의 자금으로 농촌계몽운동 대상지역을 물색하면서 감리교신학대학 1회 졸업생인 안 경록 목사에게 적지 추천을 의뢰한다. 안 목사는 평양, 강릉, 영월, 만주 영고탑, 수안 등에서 시무하면서 농촌계몽운동가로 독립투사로 활동했는데 수안관내 문명과 단절되어 있는 두메산골 용현리를 추천했다. 황에스더 교수는 그 곳에 땅과 집을 사고 최용신 김노득과 함께 농촌계몽과 교회개척을 위한 준비를 했다.
초기에 학생들의 관심을 끌 노리개 깜과 학교 운영비에 보탬을 할까하고 공책, 연필, 도배지, 딱지 등을 준비하고 흑판, 이불, 식품, 생활용품까지 사서 챙겼다. 그리고 기차로 신막역까지 가서는 걸어서 40리 산길을 걸어가야 했다.
용현리는 산비탈을 깎아 만든 비탈 밭에 감자나 보리 정도를 심어 연명하는 가난한 산촌으로 40여 호에 300여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문명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주민들은 무지와 체념으로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허름한 초가를 교실로 꾸미고 다음날부터 용신과 노득은 온 마을과 인근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모았다. 그리고 모여든 아이들에게는 놀이와 노래를 가르치고 딱지를 무료로 나눠주었다. 공책과 연필은 각각 1원을 받고 주었다. 이는 아이들에게 경제관념을 심어주고 물자의 소중함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처음으로 겪어본 주민들이 의심을 하면서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농촌계몽을 온 것이 아니라 연필이나 공책을 팔러 온 사람들이라고 소문을 내기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으리라고 어느 정도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완강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주민들의 불평에 연연해서 중단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묵묵히 할 일을 해 나갔다.
낮에는 아이들에게 한글과 산수, 노래, 웅변, 율동, 체조 등을 가르치고 저녁으로는 성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교재는 조선어 독본으로 했다.
그러나 부작용은 계속 되었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나이찬 남녀가 한방에 모여 앉아 별난 짓들을 한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노인은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호통을 치시기도 했다.
그럴수록 노득과 용신은 더욱 열심히 했다. 아이들은 교대로 가르치며 틈이 나는 대로 주민들의 농사일도 거들었다. 초가 학당은 사람들이 늘어가고 2주 정도 되자 제법 학원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갔다.
어느정도 안정이 되자 황에스더 교수는 용신과 노덕에게 학원을 맡기고 경성으로 올라갔다. 용신과 노득은 황교수가 떠난 후에 지식과 지혜를 모아 더욱 열심히 했다.
농사일까지 거들면서 하다 보니 몸과 마음의 피로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들과 얼굴이 익숙해지면서 어느 정도 정이 들고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3주쯤 지나서 그동안 아이들이 익힌 실력도 보여주고 주민들도 위로 할 겸 학예회를 열었다. 이야기꺼리도 구경꺼리도 귀하기만 했던 이 산골에서 학예회를 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웃 신계군과 곡산군에서도 구경꾼이 몰려와 좁은 학원마당을 가득 채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까막눈이던 아이들이 한글을 제법 유창하게 읽어대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젊은 남녀들이 산술문제를 척척 풀어대고 웅변으로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본 어른들도 배움의 필요성들을 느끼는 듯했다.
노득과 용신은 정성들인 보람을 처음으로 맛보기도 했다.
학예회가 끝난 다음 용신과 노득은 개학에 맞추어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고별사를 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가지 말고 같이 살자고 했고 아이들은 울면서 매달렸다. 주민들은 그들의 짐짝을 감추기까지 해서 용신과 노득은 맨몸으로 경성으로 돌아 와야 했다.
학교에 돌아와 노득은 황에스더 교수에게 용현리로 가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황교수는 노득에게 학업은 마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노득은 ‘학업보다도 이제는 농촌과 혼인을 해야겠다.’고 강한 의지를 표명하여 노득은 용현리로 돌아가 그 일을 계속하게 된다. 그리고 황 교수는 미국의 에스더클럽에서 보내주는 300불로 용현리에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고 김 노득은 6.25사변 때까지 그 곳에서 봉직 하는데 교회와 학교는 성광교회와 성광학교로 발전한다.
그러나 용신은 이 용현리 실습과정이 몹시 힘이 들었다. 주민들의 홀대와 무시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아 만족할 만한 생활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 용현리 경험은 자신을 점검해 보는 자성의 기회였고 보다 멀리 보고 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다짐의 기회가 되었다. 또 일제의 폭압정치와 만행을 직접 느끼게 되었고 무지한 백성들의 계몽이 시급하다는 것을 통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학교 2학년 때인 1930년에는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 옥명학원에서 두 번째 실습 활동을 하게 된다. 이곳은 북한 지역으로 해방과 동시에 접근하기 어려워 선생의 자세한 활동상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발견된 신문 기사에서 원산 근처 두남리 출신 최용신 양이 자기가 쓰던 일금 100원 상당의 풍금을 기증하고 갔다는 내용이 있어 그간에 포항이 경북 포항으로 오해되기도 했지만 이로서 강원도 통천 포항임이 확실히 밝혀지기도 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기에 황해도 수안 용현리에서 겪었던 경험이 크게 도움 되었을 것이고 이와 같은 2차에 걸친 체험이 샘골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큰 밑천이 되었을 것이다.
1931년 4월 졸업을 1년 앞두고 일어난 교내 분규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학업중단의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은 최용신 선생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큰 계기가 되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쉬고 있을 즈음, 1931년 10월11일 감리교 수원구역 여 선교사 밀러의 요청에 황에스터 교수의 추천으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에 YWCA농촌지도원 자격으로 파송 된다. 이 때 최용신 성생이 한 다짐은 “이 작은 몸뚱이를 남김없이 태워 태고연(太古然)한 이 마을을 밝혀 보리라”서원을 하면서 첫발을 내딛게 된다.
최 용신 선생은 모든 것을 기도로서 답을 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역사하는 분이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운길도 두려움 없이 기꺼이 행진했고 그 숭고한 모습은 과히 성자의 모습과 같았다.
동생 최 용경이 보관했던 신학교 시절 노트에 수기로 적은 기도를 보면
-전능하신 여호와의 능력이 아니면 어찌 이 아름다운 이 새벽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찌 나로 하여금 이 기쁨의 동산을 보게 하였으리요.(중략)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이 고요하고 맑은 이 새벽같이 이 마음도 맑고 고요하게 하여 주소서. 이 아침공기가 새로움같이 이 정신도 더욱 새롭게 하여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들려오는 거룩한 종소리같이 이 몸을 강하게 해 주시며. 이 입으로 나오는 말이 모든 사람의 정신을 일깨우게 하여 주소서.(중략) 여호와여, 이 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여호와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일하여도 주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소서. 여호와여, 이 몸을 주께 바치오니 이 아침공기가 신성하고 깨끗함 같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오, 주여, 오늘 하루도 기쁘게 하여 주소서-
협성여자신학교 시절 내면 학습
1900년대 초 국권을 상실하고 암울했던 시기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우리 민족의 개화에 기여한 공로는 적지 않다. 특히 최용신 선생이 성장해 오던 과정에서 감리교 교계 지도자들이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산 두남학교 이신애 선생으로 시작하여 루씨학원 교목 전희균 목사 그리고 협성여자신학교에서의 황에스더 교수는 농촌사회지도교육 전문가로서 최용신의 진로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차에 걸친 현장 실습과 학문적 토대와 농촌계몽이 애국의 첩경임을 체득시켰고 샘골 사업까지 이끌어 주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아 후원자로서 사표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종교인이요 저술가였던 전영택 교수는 최용신에게 올바른 정신세계를 구현 시켜 주었고, 기독교 사회운동가인 조민형 교수는 김포에서 농장을 운영하면서 「조선 농촌 구제책」을 저술하고 농촌운동은 문맹퇴치->단체조직->농사개량->지도자양성 이라는 이론과 실제를 시범하면서 농촌운동의 구체적인 행동방식을 전수 해 주었다.
3.1독립선언 33인 대표 중 한 분인 김창준 목사는 사회주의 기독신앙을 강론했고, 독립운동가요 역사학자인 정인보 선생은 올바른 역사의식과 한문학 국사학 국문학을 지도했다. 6.25때 내무부장관과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로부터는 경제학과 사회학을 수학했고, 조직 신학의 대가 정경옥 목사로 부터는 기독교 신학개론과 조직신학을 수학 했다. 이러한 막강한 스승들로부터 학술적 신앙적 그리고 농촌계몽활동에 대한 전문지식을 수학하고 2차에 걸친 실습까지 이수함으로서 완전한 농촌 운동가로 신앙적지도자로 손색없는 자질을 갖추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어리석은 선구자 최용신( 서병욱 지음. 안산시. 2010.02.28.)
최용신과 샘골마을 사람들(홍석창 지음. 한국감리교 사학회. 2010.06.15.)
상록수와 최용신의 생애(이주승 역음. 홍익재. 1992.07.30.)
방애인 소전(배은희 목사 지음 전주 유치원 발행.1933.12.25.)
상록수(샘골) 기사집(최용신 선생 정신계승모임. 김우경 보존 자료철)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