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충만한 생명력과 화합의 미
김우연
(문학평론가)
신규범은 2021년《부산시조》로 등단하였으며, 첫 시조집『늪의 소리』를 세상에 드러내니 그 열정이 놀랍다. 작품들은 시조의 정형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성을 잘 갖추고 있다. 연시조와 단시조를 모은 70편의 작품들이 한결같이 단단한 구성력을 갖추었고, 쉽게 읽히면서도 삶의 깊은 사유가 녹아 있었다. 역동적인 세밀한 묘사가 돋보였다. 특히 시조의 두 축이라는 묘사와 진술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시조의 효과를 더욱 빛내고 있다.
첫 시조집에서 각 작품마다 어떻게 이런 수준 높은 구성법을 지니고 있을까 하는 의문은 그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해소되었다. 신규범은《문학도시》(2015)에 수필로 등단하여『박물관을 읽다』(2018)을 펴낸 바 있다. 그의 수필은 어떤 사건이나 소재를 다루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의미를 찾아서 새로운 의미와 중첩하고 있다. 이처럼 시조에서도 이미지 중첩으로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시조집 전편에 싱싱한 생명력과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배움의 열정, 삶의 성찰, 기행시조, 불교 수행자로서의 모습, 생활 주변의 현실에 대한 배려와 사랑 등으로 독자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고 있다.
1. 시조로 쓴 시조론
칠순의 언저리에 시조를 만났다
캠퍼스 조명 밟고 뛰어오는 지난 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출발선에 다시 선다
리듬을 등에 지고 운율의 끈을 잡고
갈고 닦은 말의 씨앗 행간에 심으면서
숨겨진 감성의 끝을 두 손으로 잡는다
뒤엉킨 자리마다 군더더기 들어내고
다가오는 계절을 시심으로 색칠하며
잘 익은 낱말을 모아 고봉으로 담는다
-「가리늦가」 전문
방언 ‘가리늦가’를 제목으로 삼았다. ‘가리늦가’는 일반 통념으로 볼 때는 어떤 기준보다 매우 늦은 시기를 말한다. 첫째 수는 시조와의 인연을 밝히고 있다. “칠순의 언저리에 시조를 만났다”는 말속에는 ‘배움’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주먹을 불끈 쥐면서” 굳은 각오로 시조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다.
둘째 수와 셋째 수는 시조론이다. 정형시인 시조는 자유시보다 음악성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둘째 수에서는 “리듬을 등에 지고 운율의 끈을 잡고”라고 하고 있다.
마지막 수에는 “뒤엉킨 자리마다 군더더기 들어내고”는 끊임없는 퇴고를 말한다. “다가오는 계절을 시심으로 색칠하며”라는 것은 시조는 계절, 즉 자연 속에서 삶을 성찰을 하고, 자연과 동화됨을 말한다. 세상과 투쟁이 아니라 화합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조는 잘 익은 낱말을 모아 고봉으로 담는다”며 시조로 쓰는 시조론을 마무리한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선명한 이미지이다. 「가리늦가」이 한 편만으로도 신규범은 시조시인으로서 큰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이다. “갈고 닦은 말의 씨앗 행간에 심으면서”라는 그의 ‘시조론’은 모든 시조시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2. 싱싱한 생명력
꽃봉오리 터뜨리며 가시연 새벽 열고
가창오리 물을 차고 창공으로 비상하면
눈감고 귀 기울여서 소리로 보라하네
물병아리 오종종종 부들 수풀 헤쳐가면
물상추 개구리밥 흔적을 지워가고
태고를 깨운 환호성 소리깃을 세운다
끝없이 펼쳐놓은 청람색 무명치마
진흙에 깊이 내린 아픔을 끌어안아
어부가 건져 올리는 생명의 맥박소리
-「늪의 소리」전문
표제시조로서 싱싱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역동적이다. 시조는 초장에서 시상을 일으키고, 중장에서 시상을 전개하며, 종장에서는 시상을 마무리하는데, 대부분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인 주제를 나타낸다. 연시조인 이 작품은 첫 수에서 “소리로 보라”며 시상을 일으키고, 둘째 수에서 “태고를 깨운 환호성 소리깃을 세운다”며 시상을 전개하다가 마지막 수 종장에서 “생명의 맥박소리”의 주제를 제시하였다. 임종찬 교수는 “시가 외형의 묘사에만 치우치면 시의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거꾸로 시가 의미에만 치우치면 그 시는 맹물맛이다.”(『시조에 담긴 주제와 시각』)라고 하였다.「늪의 소리」는 각 수마다 초장 ‧ 중장이 묘사이며, 종장에서 의미를 진술하여 묘사와 진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절창이다.
첫째 수에서 “꽃봉오리 터뜨리며 가시연 새벽 열고”라며 ‘가시연’의 정적인 상태를 깊은 눈으로 살펴 동적인 이미지로 변모시켰으며, “가창오리 물을 차고 창공으로 비상하면”에서는 ‘가창오리’가 날아가는 역동적인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둘째 수에는 초장 ‧ 중장이 늪의 생명력을 반복하면서도 싱싱함을 강조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그래서 “태고를 깨운 환호성 소리깃을 세운다”고 한다. 셋째 수에서는 시상이 비약하고 있다. 늪은 온갖 생명체를 품고 있는 “끝없이 펼쳐놓은 청람색 무명치마”로 표현하고 있다. 자연에서 인간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진흙에 깊이 내린 아픔을 끌어안아”는 늪의 넉넉한 덕성이다. “어부가 건져 올리는 생명의 맥박소리”는 ‘진흙’으로 상징되는 고통의 세계를 넘어서 ‘생명의 맥박소리’를 본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는 긍정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다. ‘늪’은 인간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물들지 않듯이, 우리들은 번뇌 망상의 늪 속에 살고 있지만 실상을 바로 보면 이 세상이 밝고 아름다운 곳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늪의 소리」는 “(산새가) 때때로 봄 산골짜기에서 우네: 時鳴春澗中”라는 왕유의 선시 「조명간(鳥鳴澗)」을 연상시킨다.
3. 삶의 성찰과 이웃과의 인연
골목길 언저리에 등짐은 벗어두고
아린 발목 매만지며 아쉬움 툭툭 털어
김 서린 식탁에 앉아 허허로움 달랜다
막걸리 곁들이며 각진 마음 추스르고
쌓였던 하루 피로 먼발치로 밀어내며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목청 모아 건배한다
설익은 사연들도 어색한 관계들도
뽀얗게 우린 국물 한 숟갈 떠먹는다
해장이 따로 없구나 술술 풀린 마무리
-「국밥집 삽화」 전문
소시민들의 고달픔과 애환을 국밥집에서 해소되는 장면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렸다. 이 작품은 표현 ‘중층 묘사’로써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자유시에서도 가장 결여된 것이 중층 묘사라고 한다. 중층 묘사란 감각적 이미지와 추상적 이미지를 교차시켜 서술하는 것이다. “등짐은 벗어두고 → 아쉬움 툭툭 털어”, “아린 발목 매만지며 → 허허로움 달랜다”, “각진 마음 추스르고 → (하루 피로)먼발치로 밀어내며” 등의 중층 묘사로서 더욱 생생한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다. 놀라운 표현법이다. 생활 시조이면서 깊은 사유가 녹아 있는 작품이다.
노랑나비 되려다 펼치지 못한 날개
가시밭길 걸어온 아린 기억 묻어두고
온기를 가득 부으며 희망을 되살린다
오고가는 눈빛이 꽃잎으로 날아오면
거품을 걷어내고 까슬하게 덖으면서
무뎌진 향을 찾으며 오감을 일깨운다
텁텁하고 씁쓸하고 달달했던 일들도
흐트러진 매무새를 반듯하게 고쳐 매고
허물을 녹여가면서 응어리를 풀어낸다
-「골담초 꽃차」전문
이 작품은 ‘골담초 꽃차’와 ‘응어리 맺힌 인간들의 삶’과 이미지를 중첩시키고 있다. 신규범 시인이 가장 즐겨 쓰는 기법이다. 이것은 그의 수필에서도 기본이 되어 있는 문학 장치이다.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백석산은 척박한 흰 돌산이었다. 천 길 절벽에 매달아 놓은 계단 길을 오른다.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 올라가는 모습이 하나같이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는 우리집 동네북이었다. 걸핏하면 괴로움을 어머니께 풀려고 했다. 힘겨운 아버지는 괜스레 북채를 들었다. 철없는 우리도 툭하면 북을 두드렸다. 가난도 아픔도 어머니 탓이다. 하물며 공부를 잘 못하는 것도 어머니 때문이다. 떨어지는 폭포수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득음을 했다. 하나같이 서로 다른 볼멘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달지게 견뎌냈다.
-신규범 수필, 「물 흐르듯」 일부
고향 초등학교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중국 여행길 중의 한 장면이다. 백석산 험한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 모습에서 모진 세월을 견뎌낸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미지가 중첩, 교차 되고 있다. 이 부분만 떼어내서 보더라도 독자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훌륭한 서정시이다. T.S.엘리어트의 시를 평생 연구한 영문학자 김양수는 “문학과 예술은 주관의 객관화이며 개성의 보편화이다.”라고 했는데, 위에 인용한 수필은 과거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시적으로 그려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골담초 꽃차」에서는 “노랑나비 되려다 펼치지 못한 날개”란 단순히 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골담초 꽃차’는 자신의 궁핍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꽃차가 향기를 내면서 새롭게 태어나듯이, 어려운 세파를 견뎌온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펼치지 못한 날개’로 절망한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는 것이다. 그래서 “텁텁하고 씁쓸하고 달달했던 일들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허물을 녹여가면서 응어리를 풀어낸” 것이다. 세계와의 화합이요 긍정적인 모습이다. 삶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4. 사회 현실과 이웃에 관심
풀벌레 울음소리 밤새는 줄 모르고
온기 잃은 화로에 외로움이 모여들어
적막이 어둠을 삼키고 새벽달을 띄운다
허물어진 담장 길 떨어진 쪽문사이
길고양이 발길 끊고 거미줄로 기운 허공
장독대 밑 빠진 독이 서러움을 절인다
마음속 빈집들은 스산함에 몸을 떨고
철거를 기다리는 멍울을 잘라내면
동박새 봄을 물어와 새살림을 차린다
-「빈집을 색칠하다 」 전문
빈집은 농촌은 물론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도시는 주로 아파트 개발로 사람들이 이주하고 철거를 기다리는 경우이다. 첫째 수에서는 “온기 잃은 화로”는 인간이 떠나버린 외로운 빈집의 모습이며, “풀벌레 울음”과 “새벽달”은 변함없는 자연이다. 서로 대조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길고양이 발길 끊고 거미줄로 기운 허공”으로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장독대 밑 빠진 독이 서러움을 절인다”는 것은 추상적인 ‘서러움’이 ‘밑빠진 독’으로 물이 빠져버리듯이 한 가족의 따뜻한 정과 이웃과의 인정이 사라지고 없는 모습을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모든 작품의 바탕에는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희망적인 모습이 늘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다. 이 작품도 셋째 수에서는 “동박새 봄을 물어와 새살림을 차린다”고 하며 마음속으로 희망적인 모습을 상상한다.
5. 눈부신 단시조
단시조는 시조의 본령이다. 시조의 국제화 ‧ 세계화로 단시조의 중요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신규범의 단시조들은 압축 ‧ 절제, 개성 있는 표현으로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마음을 연다는 건 움 하나 틔우는 일
잃을 것 없다는 건 빗장하나 푸는 일
매화향 담장을 넘어 손님을 맞이한다
-「대문을 열고」전문
낮에는 해바라기 해를 따라 돌아가고
달빛을 길어 와서 들이붓는 달맞이꽃
낮과 밤 이어지면서 둥글어진 지구다
-「한마음」전문
꽃향기 가득 싣고 달려 온 강물 따라
막 도착한 화물열차 햇살 온통 부려놓고
원동역 느린 우체통 시집 한 권 부친다
-「안부」 전문
심해는 속울음을 하얗게 토해내고
틈틈이 스민 눈물 거북 등에 길을 내며
소리는 부메랑 되어 젊음을 불러온다
-「주상절리 버스킹」전문
「대문을 열고」에서 ‘매화’는 마음을 열고 이웃과 소통하고 정을 나누겠다는 시인의 마음을 나타내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종장을 의인법으로 표현하여 시적 효과가 크다.
「한마음」은 ‘해바라기’와 ‘달맞이꽃’으로 밤낮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어지면서 둥글어진 지구’는 나와 너의 만남이고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며 그의 원만한 생각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안부」는 수필「안부편지」를 시조로 압축한 것이다. 울주군 상북면 깊은 산속에 사람들은 다 떠나고 홀로 남은 아흔이 넘으신 목사님을 만난 후에 안부 편지를 띄운다는 내용이다. 시인은 참선과 경전 공부를 꾸준히 하는 불교 수행자이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캐나다 심리학자 아라 노렌자얀은 “거대한 신을 섬기는 종교들은 소방관인 동시에 방화범이다.”(『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다른 종교인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
「주상절리 버스킹」은 신비하고 아름다운 주상절리를 흔히 예찬으로 끝나기 쉽다. 그러나 시인은 “소리는 부메랑 되어 젊음을 불러온다”며 싱싱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참신한 표현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심해는 속울음을 하얗게 토해내고”는 변형 묘사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안 보이는 것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기법인데, 흔히 ‘낮설게 하기’로 불리기도 한다. 시인의 입장보다 사물의 편에서 대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 시적 효과는 크다.
이처럼 단시조에서 객관적 상관물 , 변형 묘사, 비유 등을 통하여 시상을 확대하고 있다.
6. 고향과 어머니의 그리움
기왓장 사이사이 와송이 우거지고
빛바랜 편액 아래 먼지 덮인 대청마루
돌거북 검게 변한 채 내력을 지고 있다
둥근기둥 얼싸안고 뛰놀던 뜰안에서
멀어진 얼굴들이 꽃으로 피어나는
저녁놀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내 유년
다가가서 바라보니 그리움이 살아나고
용서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손을 잡는
아월천 모래밭에서 그려보는 풍경화
-「삼청정」 전문
삼청정은 시인의 생가 마을인 거창 신씨(居昌 愼氏) 집성촌인 경남 거창군 거창읍 양평마을에 있다. 지붕은 와송이 우거지고, 대청마루에는 먼지가 쌓여 있다. 시인은 고향을 찾아가서 “둥근기둥 얼싸안고 뛰놀던” 유년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그리움은 끝이 없고 그 시절이 아름답다.
행여 누가 주워갈까 동트기 전 집을 나서
보행기에 의지해 한 알 한 알 주워 모아
택배로 보내주신 밤 적지만 묵직하다
겹겹이 둘러싸인 시련을 벗겨내고
보얗게 빚은 모습 제사상에 올리는 날
어머니 동그란 얼굴 그려보는 상형문자
-「어머니의 가을」 전문
사모곡(思母曲)이다. 어머니는 늙어서 보행기에 의지하는 불편한 몸이다. 그런데도 제사상에 올릴 밤을 줍기 위해 동트기 전에 집을 나선다. 힘들지만 정성으로 주운 밤을 자식에게 보낸다. 그래서 자식은 어머니가 보낸 밤이 적은 양이지만 묵직하다고 한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밤을 보얗게 깎아서 제사상에 올린다. 시인의 어머니이자 우리들의 어머니들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핵가족으로 인하여 전통문화는 많이 변했다. 지금은 풍요롭게 살고 있으나 행복의 만족도는 오히려 떨어졌다고 한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금귀봉 높이 솟은 아월천 기슭에서
음석 터 일구면서 화목을 다독이고
온기를 나누어 가라 해와 달이 북돋운다
조상의 품속에서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버들눈 피는 소식 새소리로 듣는 새벽
형제가 어깨를 겯고 가는 길이 환하다
바람을 부려가며 씨 뿌리고 가꾸어온
힘들었던 지난날이 어느새 자리 잡고
천 년을 지켜온 가문 자손번창 이룬다
「구산을 바라보며 」전문
아월천 기슭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음석이 있는 터에 형제간의 우애를 바탕으로 가문 자손 번창을 이루는 인간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형제가 어깨를 겯고 가는 길이 환하다”라고 하며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을 10년 넘게 강의하시는 무비 큰스님께서는 “화엄경에서는 우리 전체의 삶이 그대로 삼매다. 현상 그대로가 삼매다. 각자의 삶에 충실한 그것이 그대로 진정한 삼매의 모습이다.”라고 하셨다. 모든 부모는 형제간에 우애가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천상의 세계일 것이다.
「구부러진 못⌟은 현관 입구에 있는 액막이 그림을 걸고 있는 못이 구부러져 있다. 그것을 보고 ‘구부정한 어머니’를 연상하며 이미지가 중첩되고 있다. “바람벽에 뿌리내려 가족사랑 걸머지고/ 힘들다는 내색 없이 평생을 지킨 자리/그 무게 견디지 못해 구부정한 어머니”(「구부러진 못」셋째 수)는 가족 사랑의 무거운 무게를 혼자서 짊어진 어머니의 길이다.
7. 수행자의 길
저 유명한 방거사는 신통과 묘용, 즉 요즘 말로 기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답하기를 “물을 긷고 땔나무 해오는 일이다.”(神通竝妙用 運水及搬柴)라고 하였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다 기적이라는 것이다. 밥 먹고, 이야기 하고, 걷는 것이 다 기적이라는 것이다.
독성전 나반존자 천진불을 꿈꾸었나
벽화는 까막잡기, 아기 업고 노는 누이
도량석 새벽 깨우는 후덕한 맞배지붕
쪽마루 창방 위에 홍예를 걸어두고
사계절 멎지 않는 법고의 울림 따라
빗살의 여린 가슴은 소망을 비워간다
격자 속 염기서열 뿌리를 찾아내어
송이송이 인연 따라 우주를 담아두고
매화가 먼저 당도해 봄소식을 알린다
-「솟을매화꽃살문」
독성전은 부산 금정산 범어사 내 전각이다. 첫째 수에서는 “독성전 나반존자 천진불을 꿈꾸었나”라며 진술을 하며, 그 이유는 중장에서는 나반존자가 어린이들이 천진하게 놀고 있는 벽화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독성전의 맞배지붕 속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천진하게 지내는 나반존자의 모습을 그렸다. 둘째 수에서는 법고 소리에 따라 “빗살의 여린 가슴은 소망을 비워간다”고 하였다. 소망을 채우는 게 아니라 비워간다는 것은 예사로운 표현이 아니다. 셋째 수에 와서는 “매화가 먼저 당도해 봄소식을 알린다”며 불교의 핵심인 연기 사상을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하였다. 탁월한 능력이다.
「묵언수행」에서는 고견사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마애불과 눈비에 마모된 노천의 석불이 “걸어온 길은 달라도 가는 곳은 하나다”라며 처한 상황은 달라도 중생 구제라는 가는 길은 하나라는 것이다.
어둠의 속살을 뼛속까지 녹이고
찾아온 낮선 해류 거친 숨결 다독이며
절애의 땅끝에 서서 지구본을 돌린다
밤낮이 바뀌어도 중심 잡는 수평선
제일 먼저 해가 뜨는 간절곶에 다다르니
비등점 자맥질하며 거친 손을 잡는다
-「까보다로까에서 지는 해」 전문
포르투갈의 리스본 서쪽에 있는 땅끝 마을인 ‘까보다로까’의 여행을 제재로 한 기행시조이다. 흔히 기행시조는 새로움에 취하여 찬탄으로 끝나기 쉽다. 그러나 위 작품은 사유적이다. 일몰을 보면서 반대편인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울산시 울주군의 간절곶을 떠올린다. “밤낮이 바뀌어도 중심 잡는 수평선”이라면서 불교의 중도 사상을 노래하고 있다. 중도 사상이란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태양은 그대로 있는데, 서 있는 자의 눈에 따라 일몰과 일출로 보일 뿐이다. 상대적인 것에서 벗어날 때 실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중심에서 벗어난 ‘무아(無我)’일 때 중도를 볼 수 있다.
이상으로 청암(靑岩) 신규범 시인의 첫 시조집 『늪의 소리』를 살펴보았다.
우선 시조의 정형에 충실하면서 내용은 현대성을 갖추고 있었다. 배행은 3행 배행을 하고 있으며,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전통적인 구성법을 주로 활용하되 묘사와 진술의 배합이 절묘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진술이 앞에 오기도 하고, 종장에서 상징으로 처리하여 효과를 높이기도 하였다. 특히 여러 작품의 묘사에서 역동적인 이미지로 싱싱한 생명력을 노래한 것은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다.
표현 기법으로는 다양하게 활용하여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변형 묘사를 통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며, 객관적 상관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의인법, 은유법을 통하여 의미를 함축하는 능력도 돋보였다. 어떤 사물에서 묘사와 진술을 통하여 하나의 주제가 완성되는가 하는 순간에 다른 것으로 비약하여 치환하면서 이미지를 교차, 중첩시키면서 강조하는 기법은 신규범 시조시인만이 가진 독특한 빛깔이다. 또한 감각적 이미지와 추상적 이미지를 교차시켜 서술하는 중층 묘사(multiple description)는 남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기법이다. 그런데도 신규범 시조시인은 이런 표현 기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있다.
시집에는 싱싱한 생명력과 따뜻한 인간미와 희망이 넘치고 있다. 그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열정’이 끝이 없으며, 자연과 모든 생명과의 화합은 불심(佛心)이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첫 시조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앞으로도 자신만의 빛깔을 계속 추구하기 바란다.
□ 해설에 인용한 시조들은 더 큰 글씨로 썼다. 이것은 불가佛家에서 경문은 크게 쓰고 주석은 작은 글씨로 쓰는 전통을 따른 것이다. 독자들이 인용한 시조들을 소리 내어 읽는 것 자체도 넓은 의미의 해설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