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나타”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요한계시록 22:20)
오늘 함께 나눌 찬양은 고형원 작사,작곡의 “마라나타”입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앞서 지키는 대림절!.
주의 성탄을 기대하며, 기다리며 정결하게 준비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형원선교사님에 대한 소개는 11월 17일에 카페(찬양의 샘)에 올려드렸던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찬양을 함께 나누면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아래에 첨부해 드립니다.
'주님, 오시옵소서'(Come, O Lord!), '우리 주님께서 오십니다'라는 뜻의 아람어 '마라나타'의 헬라어 음역(音譯).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소망이 함축된 기도문이자 성도 사이의 인사말이다(고전16:22, 계22:20).
초대교회성도들의 인사가 ‘마라나타’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과 박해, 고난,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어떤 아픔인지 알기에 손을 잡으며 ‘마라나타’했을 그들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예배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어느 곳에는 주님을 모른다 부인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북한에 있는 성도들도 지금도 그렇게 믿음의 손을 잡고 있을 생각을 해 본다.
“마라나타”!!
코로나의 확산으로 인해 약해진 우리의 믿음들이 다시 일어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아기로 오신 주님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는 대림절이 되기를 소망하며, 한 주간도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중심으로 기도합니다!
-고형원선교사-
고형원은 대한민국의 전도사이자 찬양사역자이자 가수이자 현재는 부흥한국 대표를 현재까지 맡고 있다. 우리가 주로 부르는 CCM의 대부분을 작사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나무위키는 이렇게 고형원을 소개하고 있다.
고형원이 작사,작곡한 곡으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애창하고 있는 곡들이 참 많다. 특히 ‘마라나타, 부흥, 물이 바다 덮음같이,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비전, 이 땅의 황무함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그날, 파송의 노래’등 많은 찬양을 만들며, 이 노래들은 찬양 가수의 앨범과 전국 각지의 예배 처소에서 울려 퍼졌다. 크리스천들은 그가 만든 찬양을 부르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부흥을 갈망하고 삶이 변화되는 것을 체험했다.
고형원은 참 많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찬양사역자이면서, 예수전도단 간사이고, 문화선교를 위해 정식으로 파송 받은 선교사이며, 하나의코리아(unitedkorea.org)라는 단체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는 수많은 직함은 사역을 위한 기능적인 것으로 자신은 ‘형제’로 불리길 원한다고 했다.
고형원은 올해로 59세가 되었다. 그는 고려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했지만, 허리통증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예수전도단에 들어가 간사로서 예배인도자가 되었다. 1997년에 ‘부흥’이란 이름으로 앨범을 발표하며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200여곡을 작사, 작곡 했다.
제목만 들으면, 한소절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수 많은 찬양을 만들어 은혜를 끼치는 고 선교사이지만 놀랍게도 그는 음악 전공자가 아니다. 신앙가정에서 성장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음악적 수준으로만 본다면 지금도 음대는 커녕 음악고등학교도 갈 수준도 못된다’라고 말한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악보를 그릴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이 그려줬던 시절도 있었다. “빈들에서도, 운전할 때나 예배를 드릴때도 안테나처럼 있다가 제 영혼안에 노래에 대한 감흥을 주실 때 잘 받아서 녹음기나 핸드폰에 녹음을 해요. 지금도 시창이 안돼는걸요” 그렇기 때문에 고 선교사는 그가 만든 찬양이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든 찬양을 사람들과 나누게 하시고 그 찬양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그의 삶을 인도하셨다.
고형원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업고등학교에서 건축을 전공을 하며 고려대학교 건축과에 입학을 했으니 아버지께서 자랑스러워할 만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제대하고 복학 후 극심한 허리통증 때문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기대도 무너지고 질병의 고통과 싸우며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으련만 고 선교사는 원망하기보다 감사하기로 했고, 그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했다.
고형원은 기독교 집안이 아닌, 제사하고 굿하고 부적을 붙이는 예수를 모르는 비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의 권유로 전도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꿈은 원래 시인이 되고 싶었고,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어릴적 꿈(시인, 외교관)이 찬양을 만드는 작곡으로 이루어졌고, 복음을 위해 여러 나라를 다니며 하나님의 대사로 복음을 전하는 외교관으로의 사명자로 하나님이 이루셨다라고 지금은 고백한다.
고형원은 청년 때에 허리통증으로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예수전도단에서 간사로 공동체 생활을 하며 하루의 반은 누워있고, 나머지 반은 악보 그리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치유도 하실 수 있지만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기간 동안 은혜와 주신 노래가 많아요. 질병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붙들 수 있었지요. 또한 치유의 하나님은 통증을 없애주셨어요” 이후 10년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예수전도단 간사로 섬기면서 신학대학교(Northwest Bible College)도 수료했다.
고형원은 지금도 피아노도 못치고 기타도 아주 재능 있게 다루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음악과는 상관없었던 자신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하다고 말한다.
고형원은 지금도 부흥한국과 하나의 코리아(unitedkorea.org)라는 단체의 대표를 맡아 북한의 선교와 복음화를 위해 비전을 품고 복음 안에서 북한 동포들과 함께 살 날을 꿈꾸며 북한동포들을 위해 문화사역으로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