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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45주년 기념 문화기행 중 '담양과 해남편' 입니다. 표운 여정과 함께 다녀오십시요."
표운여정(瓢雲旅情) -1-
가사(歌辭)문학의 원류를 찾아서 -정 송강과 윤 고산-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정자와 누각을 중심으로 사상과 예술 등 찬란한 고유문화를 꽃피워 왔다.
우리 국토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편히 모일 수 있는 마을 어귀, 경치가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언덕, 휘어감고 흐르는 강변이나 산등성엔 어김없이 정자가 서 있다. 바로 거기서 우리 선대들은 시를 짓고 노래를 읊었다. 세월을 잊고, 또 그 세월을 잇기도 하며 삶의 지혜와 경륜을 갈고 닦았다. 이른바 정자 문화가 거기서 형성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호남의 정자 문화로 정송강(鄭松江)과 윤고산(尹孤山)의 숨소리와 발자취다. 무상한 풍상에 씻겨 단청이 쇠락하고, 소홀한 관리로 그 유품들이 더러는 유실되었지만, 그를 기리고 사랑하는 것은 후손인 우리들의 몫. 어찌 필자 한 사람만의 바람이겠는가.
우리들 그 누구에게도,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五友歌),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와 송강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등 조선시대 국문학계의 쌍벽을 이뤘던 이 두 분에 대한 아스라한 그리움이 남아있다.
이러한 그리움은 이 분들의 유적지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문득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호남문학을 대표하는 이 두 분의 고장, 해남과 담양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1. 담양의 정송강(鄭松江)
대나무가 있는 곳마다 마을이 있고, 마을이 있는 곳마다 대나무가 있는 곳. 정송강이 가사문학을 꽃피운 이 곳 전남 담양은 대쪽같은 선비정신과 예술과 학문을 숭상하는 명현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추풍령에서 소백산맥과 갈라져 나온 노령산맥이 이곳까지 줄달음쳐오다 우뚝 멈추면서 만든 추월산과 병풍산을 북쪽에 두고, 이 산들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내를 이루어 이곳 저곳을 거치면서 담양읍내를 감돌기도 하고, 또 다른 줄기는 담양호와 광주호에 모여 머물기도 하면서 마침내는 커다란 줄기인 영산강을 이룬다. 운치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곳 선현들의 정자와 발자취를 찾았던 어느 묵객은 “백리 담양 흐르는 물은 구비구비 만경인데”라고 읊은 바도 있다.
이와 같이 담양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이 곳 유림, 명현들이 지은 정자들이 지금까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조선조 명종,선조시대의 名臣이며 우리나라 가사문학(詩歌文學)의 대가(大家)인, 이 고장에서 배출된 송강 정철의 유적과 정자가 지금도 남아 있어 가는 이의 발길을 멈춘다. 정송강의 문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송순의 면양정, 민가정원의 대표작 양산보의 소쇄원, 서하당 김성원의 식영정(息影亭)과 김윤제의 환벽당, 김덕령을 기린 취가정, 정송강의 말기작품 『사미인곡』『속미인곡』과 같은 빼어난 가사를 지었던 「송강정」들을 담양 읍내에서 887번 지방도를 타고 광주호 방면으로 가면서 어렵잖게 만나게 된다.
1533년(중종 28) 송순(宋純:1493~1583)이 건립한 면앙정은, 이황(李滉:1501~1570)을 비롯한 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곳이다. 봉산면 제월리 제봉산 자락에 있는데, “내려다보면 땅이, 우러러보면 하늘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산천 속에서 한백년 살고자 한다”는 곳이다. 그의 면앙정가는 강호가도(江湖歌道)를 확립한 노래로, 정극인의 '상춘곡'의 계통을 잇고,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에 영향을 준 우리 가사 문학에 빛나는 작품이다.
면앙정을 거쳐 광주호 방면으로 가면 담양군 고서면 원광리에 죽림(竹林)과 노송(老松)에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정자가 야산 위에 하나 있다. 이 정자는 원래 죽록정(竹綠亭)이라고 불렀으나 정송강이 말년에 관직에서 밀려난 후 이곳에 머물면서 이 정자를 중수(重修)하고 자기 호(號)를 따서 송강정(松江亭)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각 집으로서 대나무와 소나무 숲속에 묻혀있고, 앞에 흐르는 강과 넓고 먼 야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정송강이 말년에 낙향하여 권력에 다시 복귀할 때까지 세월을 낚고 있었다. 이때 송강은 우리 국문학의 불후의 가사작품인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남겼다.
이 몸 삼기실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던가
나하나 졈어있고 님하나 날괴시니
이 마음 이사랑 견졸데 노여없다.
- 思美人曲 中에서 -
이 가사는 왕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孝心을 생각한 가사로서 정송강의 끊임없는 권력지향성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송강정을 떠나 877번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광주호 넓은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광주천을 만난다. 이 광주천을 옛날에는 紫薇灘(자미탄)이라고 불렀다. 「자미(紫薇)」는 목백일홍이라는 말이고, 「탄(灘)」은 개울이라는 뜻으로 이 개울을 따라 옛날에는 목백일홍이 많이 있어서 그 아름다눈 자태을 보였었다. 이 목백일홍은 7월 한여름에 꽃이 만개되어 9월까지 1백일간 붉은 빛을 발한다. 이런 목백일홍이 지금은 광주천변에 몇 그루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길을 넓히고 광주천변의 방죽을 쌓으면서 베어진 것 같다.
자미탄 개울가에 있는 정자 중 언덕빼기 벼랑위에 위치하여 가장 좋은 전망을 갖고 있는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이 정자는 송강의 처(妻)외가 당숙인 棲霞當(서하당) 김성원(金成遠)이 조선 선조15년(1560)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건립한 것이다. 이 정자에서 정송강은 고 경명(高敬命), 백광훈(白光勳), 송익필(宋翼弼)등과 같이 공부하고 교우(交友)하면서 지냈다. 그들은 당대의 명문장가들로서 자연과 벗하면서 시를 짓고 읊으면서 문학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 정자에서 바라다 보이는 별뫼(星山)를 주제로 쓴 것이 바로 「성산별곡(星山別曲)」. 그래서 이곳을 송강문학의 산실(産室)이라고 일컫고 있다.
어떤 지날 손이 성산(星山)에 머물면서
서하당(棲霞堂)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고 아니 사시는고......
- 星山別曲 中에서 -
식영정(息影亭) 마루에 앉아 절벽 아래쪽 자미탄 개울을 내려다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 흐르는 물에 뛰어들어 벌거숭이로 미역을 감고 물고기를 잡는 등 천렵을 하고 싶어진다. 저 멀리 개울 아랫 쪽에는 광주호가 나의 눈을 한결 포근하게 해준다. 잔잔한 호수물이 햇살에 반사되면 미풍과 함께 물결이 어른거린다. 이와 같은 풍광에서 우리의 시인 정송강은 어찌 시정(詩情)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던 고우(古友) 정영식(鄭榮植)공이 갑자기 나를 붙잡고 웃는다. 이 정자가 자기 이름 석자를 거꾸로 배열한 발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함께 웃었다. 세월이 흘러 옛 식영정의 시인 묵객들은 세상을 떠나고, 호남 士林의 풍류는 그 맥이 끊겼으나 고우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자랑스런 우리의 조상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시를 음송하는 것은 “그림자도 쉬어간다”라는 식영정의 뜻과 같아 더욱 문향다운 호남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각집으로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멋진 노송에 둘러쌓여 있어서 아름다움을 더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소나무도 벼락이나 산불에 의한 천재지변으로 훼손되고 있다. 최근에는 산불이 크게 일어 식영정까지 위협할 정도로 주위의 노송이 불에 타고 그슬려 버렸으니 역사의 유적지가 이렇게 훼손되어 가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식영정 돌계단을 내려오면 왼쪽 깊숙한 곳으로 연못이 있고, 이곳에 부용당(芙蓉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 뒤편에 주춧돌이 널려 있는데 이 곳이 그 옛날 서하당터였으니 바로 식영정을 지은 김성원의 집터이다.
이 부용당은 가무, 음주를 즐기면서 한껏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한 곳이기도 하다.
서하당에서 자미탄 건너 마주 보이는 곳에 김성원의 사촌 종질(從姪)인 김윤제가 을사사화가 일어난 후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서재를 짓고 칩거한 환벽당(環碧堂)이 있다. 자미탄을 건너 환벽당 입구로 돌아서자면 낚시하기 꼭 알맞은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성산별곡」에 나오는 조대(釣臺)이다.
임금의 부름을 기다리는 송강이 이 좌대에서 세월을 낚았으리라.
환벽당현판은 훗날 우암 송시열이 이곳을 방문하여 호남 사림의 풍류를 기리며 쓴 것이다.
환벽당에서 걸어서 5분거리에 취가정(醉歌亭)이 있다. 취가정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후손인 김만식(金晩植)이 1890년에 장군의 덕을 기리며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의 이름을 취가정이라고 한 연유는 송강의 제자였던 권석주(權石洲:1569~1612)가 꿈에 김덕령장군이 나타나 취사가(醉辭歌)를 불렀다는 얘기에서 전래된 것이다. 취가정의 마루에 앉으면 시원스레 펼쳐지는 옥답과 자미탄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 뒤편 쪽으로는 두팔을 벌리고 춤을 추는 여인의 몸매와 같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어 취가정의 운치를 더욱 돋운다.
취가정에서 자미탄을 건너가면 성산, 열녀봉, 효자봉 등으로 이어지는 산등성 한가운데서 또하나의 산줄기가 내려오는 끝에 옹기종기 붙어있는 조용한 마을집들이 나온다. 이 곳은 담양군 남면 지촌리 지실마을이며 송강 정철이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다. 정송강은 1536년 중종 3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인 맞누이와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된 둘째누이로 인하여 경원대군(慶原大君:후에 명종이 됨) 과 친숙해졌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계림군과 관련되었다고 아버지가 유배당 할 때 정송강은 아버지의 배소(配所)에 따라 다녔고, 1551년 특사된 후 온가족이 송강의 외가인 담양으로 이주하여 김윤제의 문하생(門下生)이 되었다. 오랜 연륜의 이 동네에는 집집마다 돌담장이 정감어리고 늦가을의 추수때에는 아름다운 우리 농촌의 빛깔을 느낄 수 있은 곳이다.
이 마을 위로 울창한 대밭속을 흐르는 만수동(萬壽洞) 계곡을 오르면서 송강이 계곡의 바위마다, 못마다 이름을 붙이고 또 주옥같은 가사와 시를 지었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꺽어 셈하면서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에
지게위에 거적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른해, 흰달, 가는 비, 굵은 눈,
쌀쌀한 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꼬.
- 장진주사(將進酒辭) 중에서 -
전남 담양의 정송강과 교우하던 유학 사림(士林)학자의 정자를 찾아보면서 마치 이곳이 우리나라 안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만을 따로 떼어다가 축소하여 놓은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와 같은 훌륭한 분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이곳을 떠나 남으로 내려가면 정송강의 가사문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미완(未完)의 거목(巨木)이 한분 계셨다. 전남 장흥땅에 조선시대의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옥봉(玉峰) 백광훈의 兄인 기봉(岐峰) 백광홍(白光弘)이다. 이 고을 출신인 기봉 백광홍(1522~1556)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을 선도한 문인으로서 유명한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이었던 옥봉 백광훈의 친형이기도 하다. 타고난 본질이 탁월하고 효행심(孝行心)이 깊었으며 우애가 지극하고 순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일찍이 일제(一齊) 이항선생(李恒先生)에게서 학문을 닦았고, 하서(河西) 김인후, 율곡(栗谷) 이이(李珥), 영천(靈川) 신잠(申潛), 고봉(高峰) 기대승, 석천 임억령 등 당대의 유명한 인물과 사귀고 덕업을 쌓았다. 특히 그의 문장력은 이들보다 가히 뛰어나 이항선생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나이 33세(명종 10년) 봄에 평안도 평사가 되었으며 서도지역을 순회하면서 그곳의 세태와 자연풍물을 보고 가사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1556년(명종 11년) 병이 들어 벼슬을 내놓고 귀향(歸鄕)하여 35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떴다.
관서명승지(關西名勝地)에 강호(江湖)에 병이 깁퍼
왕명(王命)으로 보내실새 죽림(竹林)에 누엇더니
행장(行裝)을 다사리니 관동팔백리(關東八百理)에
칼하나 뿐이로다.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연조문(延詔門) 내달아 어와 성은(聖恩)이야
모화고개 너머드니 가디록 망극(罔極)하다
귀심(歸心)이 빠르거니 연추문(延秋門) 드리다라
고향을 사념(思念)하랴 경회남문(慶會南門) 바라보며
벽제(碧蹄)에 말가라 하직(下直)코 물러나니
임진(臨津에 배 건너 옥절(玉節)이 앞패섯다
천수원(天水院) 도라드니 평구역(平丘驛) 말을 가라
송경(松京)은 고국(故國)이라 흑수(黑水)로 도라드니
...................... ......................
-기봉 백광홍 관서별곡 중에서- - 송강 정철 광동별곡 중에서
그가 지은 「관서별곡」은 정송강이 지은 「관동별곡」 보다 25년 앞서 지은 것으로 「관동별곡」의 모체가 되었으니 많은 구절에 닮은 데가 있다. 「관서별곡」의 내용을 살펴보면 군왕을 애모(愛慕)하고, 변방을 근심하고, 충성심을 나타냈으며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 풍물을 노래한 것이다. 기봉의 시비(詩碑)가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2번 국도변 기봉사당 옆에 1987년 11월 1일 건립되어 지나가는 과객으로 하여금 우리 가사문학의 원류(源流)를 가르쳐 주고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정리 환희산(歡喜山:해발 430m) 밑에는 송강 정철의 사당(祠堂)과 좌측 산등성 양지바른 곳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둘째아들 종명(淙溟)과 함께 누워 있는 정송강의 묘가 있다. 정송강은 효심이 많은 둘째아들을 자기 발밑에 두도록 유언을 하였다. 장남은 일찌기 요절하였다. 이 사당을 지키는 분은 정송강의 16대 장손 구성(求晟)씨로 지금 이곳에 살고 있다. 예부터 충북 진천은 산수가 수려하고 특히 물이 풍부하여 이 고을에는 백곡, 초평, 덕산저수지 등 유명한 저수지와 호수들이 많아서 낚시꾼에게는 가장 친근한 곳이기도 하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말과 같이 넓은 평야에 오곡이 항상 풍부하여 좋은 인심으로 사람살기가 좋을 뿐 아니라 충청도의 전형적인 양반풍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330년전 현종 6년에 우암 송시열이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있는 정송강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겨 사당을 창건하고 제향하여 왔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시대 서인(西人)의 분파인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서 서인의 거두인 정송강에 대한 흠모로써 풍수지리가 좋은 곳을 택하여 정송강의 묘를 이장코자 방방곡곡을 찾아다녔고, 지금의 문백면에서 진천읍으로 향하는 17번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말부리고개에서 쉬면서 환희산을 바라보다 이곳이 명당이라고 확인하고 이장한 것이다.
정송강은 15세때 어머님 고향땅 담양 창평에서 어린세월을 보내며 학문을 정진하다가 25세때 문과급제, 율곡,기봉과 같은 호당(湖當)에 뽑혔으며 30세때 함경도 암행어사, 42세때 승지, 43세때 고향에 내려왔다가 44세때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면서 3년간 강원도, 전라도, 함경도의 관찰사로 지냈고 이때 시(詩)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최초의 가사 「관동별곡」을 이때 지었고, 또 시조 및 유명한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49세때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4년동안 작품생활을 하면서 「사미인곡」「속미인곡」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남겼다. 1589년 53세때 우의정, 다음 해 좌의정, 1592년(56세) 임진왜란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후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강화도(江華島)의 송정촌(松亭村)에서 우거하면서 만년을 보내다가 귀천(歸天)하였다.
정송강은 많은 시가를 남겼을 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그 자취를 남기면서 역마살이 있는 여행객의 오랜 반려자로서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2. 자연(自然) 속의 풍류객(風流客) 고산(孤山)(녹우당과 보길도)
전라남도 해남은 남서부지방 관광지역을 연결하는 관문과 같은 교통 요충지로서 서(西)로는 조용하고 운치있는 진도섬, 동(東)으로는 남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완도섬을 거느리고 있는,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을 잇는 길목이다. 가물가물한 땅끝이기에 윤선도를 비롯한 숱한 사람들이 숨어 살았거나 귀양살이를 했던 곳, 한과 기다림이 쌓인 곳이다.
이런 이유로 이 지방의 문화를 「유배의 문화」라고 말하기도 하며 지금도 이 지방에는 수많은 시인, 소설가 등 예술인이 배출되고 있고, 시인 김지하, 소설가 황석영이 암흑의 80년대초 한때 여기에 낙향하여 작품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예향(藝鄕)을 자부하는 이 지역은 우리나라 국문학에 상당히 영향을 끼친 고산 윤선도와 한국의 램브란트라고 불리우는 선비화가 공재 윤두수에 의하여 더욱 빛나고 있다. 낭만과 꿈이 어우러졌던 나의 학창시절, 특히나 글 읽기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산중시곡(山中新曲)의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배우면서 자연을 벗하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멋있는 선비 고산의 생활철학을 무척이나 동경하였다.
그래서 담양의 정송강에 이어 고산의 생활과 그 유적지를 찾아 또 길을 나섰다.
내 버디 몃치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의 달 오르니 긔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밧긔 또 더하야 무엇하리
학창시절,오우가를 읊으시며 자연을 기린 국어담당 정철(鄭哲) 선생은 고산의 종손(從孫)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는 말씀을 하면서 고산의 종손을 제자로 두었음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필자의 7년 선배이신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尹亨植) 선배를 찾아뵙고 고산과 해남 윤씨의 문화유적(文化遺蹟)을 살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주)뉴욕에 있는 윤 영돈 동문이 고산의 후손이 아닌가.
해남시내에서 대둔사(舊 대흥사) 가는 길로 3.2km 쯤 가다보면 ‘고산 윤선도(尹善道) 고택(古택)’이라는 표지판이 나오고, 왼편으로 들어가면 소로길 양편으로 펼쳐지는 잘 정돈된 논밭은 그 옛날부터 해남 윤씨가 소유한 기름진 논밭과 들판으로서, 이것을 거치면서 약 1km를 달려가면 깊숙이 자리잡은 연동마을에 ‘윤고산유적지’라고 씌어진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이곳이 바로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綠雨堂)이다.
녹우당 앞마당에 들어서면 왼편에 고산유물관리소와 윤고산 시비(詩碑)가 있으며 오른편의 유물전시관은 최근에 지어 고산과 공재 등의 유물을 항상 전시하고 있다. 마주 보이는 곳에 수령 5백여년 이상 되고, 높이가 20m 정도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녹우당 앞에 있어서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종가이다. 고산의 4대 조부인 이정(李貞,호 어초은(魚樵隱)) 1467~1543)은 해남 윤씨의 득관조(得貫祖)로서 해남의 거부 초계(草溪) 정씨의 외동따님과 결혼하여 그 재산을 잘 관리하였으며, 이 곳 연동에 삶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이집 사랑채는 효종이 왕세자 시절의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 수원집을 현종 9년(1669)에 해상 운송하여 이곳에 이전한 것이다. 이집의 건축은 풍수지리에 따라 뒤편의 덕음산(德陰山)을 진산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있다.
고산 윤선도가 사색당쟁의 정치싸움에서 밀려나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시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풍류객과 교유하던 곳을 더 알려진 이 집은 대문, 안채, 사랑채, 어초은과 고산의 사당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그 규모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호남지방의 양반층의 집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평가를 받아 사적 167호로 지정돼 있다. 특히 이 사랑채를 녹우당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랑채 앞에는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소낙비 쏟아지듯이 우수수 떨어진다고 하여 녹우당으로 불리운다는 설(說)과 뒷산의 5백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서 바람에 스치면 우수수 가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해서 붙인 설이 있다. 이 녹우당 편액은 공재 윤두서(정다산 외증조부)의 친구이자 실학자 성호 이익의 이복형인 당대 명필이며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원조인 옥동(玉洞) 이서(李敍)의 글씨이다.
14대 증손인 초로의 신사 윤형식 선배로부터 윤고산과 해남윤씨의 역사를 듣고 이 집안의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해남 윤씨의 대대로 전해오는 문화적 유물, 특히 이중에는 국보 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보물인 ‘윤씨가전고화집’(482), ‘고산수적관계문서’와 ‘노비문권’(483) 등을 보았다.
조선시대 수많은 유명한 유학자, 정치인, 시인, 묵객이 있지만 해남 윤씨의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물의 보관과 전시상태는 어느 누구도 따를 자가 없다. 가사문학의 원조인 서인의 거두 정송강도 그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송강 유물을 접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해남윤씨는 모든 재산과 유품관리를 종손이 책임지고, 그 풍부한 재력과 함께 잘 관리하여 왔고, 특히 고산의 16대 손부(孫婦) 경주 이씨는 6.25동란 중에는 가전서화(家傳書畵)와 곡적(曲籍) 등을 종가 안방 다락의 속다락에 넣고 보관을 철저히 하였으며 보길도에 있는 멸실되어가는 유물, 전집을 이곳으로 옮겨와 잘 정돈함으로써 현재의 우리들은 해남윤씨의 문화, 예술감각을 손쉽게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해남윤씨 특히 윤고산은 덕을 베풀고 노비를 자립시키는 등의 인본(人本), 애민주의(愛民主義) 사상을 펴왔고, 이러한 사상은 3대 환란인 동학란, 한일합방 후 일제치하 및 6.25동란을 무사히 지낼 수 있게 하였다. 동학란때에는 동학군이 이 집을 보호하였으며 6.25동란때에는 호재집(종의집) 20여집을 없애버린 덕을 베푼 결과 이들이 해남윤씨 가족을 보호하는 의리를 지켜줌으로써 무사할 수 있었다.(삼개옥문:三開獄門 적선지가:積善之家).
고산은 서울 연화방(현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고, 8세때 큰 집에 입양하여 해남윤씨의 대종을 이었다. 윤고산은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성격이 강직하여 불의와의 타협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인의 거두인 그의 일생은 서인들과의 당파싸움에서 희생이 된 적이 많아 오랫동안의 유배생활과 낙향생활에서 그의 문화적 배경이 이루어졌으며 현실 도피와 같은 선계(仙界)의 추구 등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유물전시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윤고산이 자연을 벗한 노래, 오우가의 친필 책자인 산중신곡(山中新曲), 국어미(國語美)의 극치 어부사시사를 볼 수 있고, 금쇄동기(金鎖洞記) 고산 양자입문서, 장원급제 답안지 등 각종 서적, 문집, 문서가 잘 보관, 전시되어 있어 이 유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윤고산이 살아 있는 듯 하다. 또 하나의 자랑은 국보 240호로 지정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보물로 지정된 윤공재와 그의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의 3대 작품을 모은 〈가전화첩(家傳畵帖)〉이다. 공재는 조선시대 후기 화가의 백미로서 삼재(三齋:공재 윤두서, 겸재 정서, 현재 심사정) 중의 한 분이다. 공재선생은 그림 외에 수학, 지리, 금석학, 병서 등에 밝은 실학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고, 임진왜란을 겪은 후의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일환으로 군사용으로 일본지도를 완성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사실이다.
공재의 그림은 자화상, 조어도(釣魚圖), 백마도(白馬圖), 격용도(擊龍圖) 등이 있으며 조선조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남농학파의 거두인 소치 허연(許練)도 공재 손자 윤용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윤고산의 유물관은 잘 보관 정리된 상태에서 우리 후손에서 주옥같은 문화적 유산으로 깨우침을 주고 있다. 종손 윤형식 선배는 이곳을 찾아온 손님을 위하여 녹우당 정원을 개방하고, 뒷산에서 재배하고 있는 녹차를 이번 가을부터는 대접하겠단다. 그 흐뭇한 말씀을 뒤로 고 윤고산이 신선과 같이 살고 떠난 보길도로 향하였다.
녹우당을 떠나 해남 갈두부락 토말까지 달려오면 이곳이 우리 한반도의 제일 끝이라는 설레임과 그 옛날 보길도를 여러 번 드나들며 스쳐간 고산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다. 이어 눈앞에 펼쳐지는 산줄기와 바위섬, 조용하고 아담한 어촌풍경을 만끽하면서 보길도로 향하는 금영호에 나그네의 몸을 싣는다.
보길도는 해남반도의 남쪽끝 토말에서 12km 떨어져 있는 다도해 국립공원 해상에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어머니와 같은 포근함과 잔잔한 물결을 해치면서 내해(內海)를 빠져나가 섬과 섬을 돌아가며 1시간 30분가량 항해하다 보면, 태고적부터 비바람에 씻기고 파도에 닳아진 바위들이 크고 작은 절벽을 이루고, 신비스러운 여러 가지 모습을 띤 조각바위 등으로 둘러쌓인 조그마한 무인도와 같은 평화로움을 만난다. 복잡한 도회지에서 쌓인 피로함과 상념들을 일시에 잊을 수 있다.
운설과 함께 편안함을 주는 남해 다도해상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남은 인생여정도 이와 같이 편안하기를 기원하며 다정히 손잡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보길도 청별선착장에 이르게 됐다. 이곳은 윤고산이 신선과 같이 지내고 떠난 보길도 부용동의 입구로서, 이 일대 앞바다는 「어부사시사」배경의 현장으로 고산 문학의 산실이 되는 곳이다.
춘가(春訶)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어라 배 띄어라
썰물은 물러 가고 밀물이 밀려 온다.
찌그덩 찌그덩 어영차
강촌의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하가(夏訶)
연 잎에 밥을 싸고 반찬을랑 장만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삿갓은 썻다마는 도롱이는 갓고 오냐
찌그덩 찌그덩 어영차
무심한 갈매기는 나를 쫓는가 저를 쫓는가
추가(秋訶)
커다란 물고기가 몇이나 걸렸느냐
배 저어라 배 저어라
갈대꽃에 불을 붙여 골라서 구어 놓고
찌그덩 찌그덩 어영차
진흙병을 기울여 바가지에 부어 다고
동가(冬訶)
간 밤에 눈갠 후에 경물(景物)이 다르구나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앞에는 유리바다 뒤에는 첩첩옥산
찌그덩 찌그덩 어영차
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계가 아니로다
- 어부사시사 40수 중 1부 -
보길도 기행은 윤고산의 생애와 사상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 섬이 갖고 있는 천해의 아름다움이 평범한 다른 섬의 아름다움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고산의 보길도와의 첫 인연은 51세 되던 해인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이 강화로 내려가자, 해남 연동의 고향에 돌아와 있던 고산은 자제(子弟)와 집안의 노복 수백명을 모아 배를 타고 밤낮을 무릅쓰고 북상하여 정월 29일 강화에 이르렀으나 때가 늦어 강화가 이미 적에게 함락된 후였다.
그때 인조가 영남으로 피신했다는 소문을 믿고 향리로 돌아가던 뱃길에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에 울분한 그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을 결심으로 향리를 거치지도 않고 속세를 떠나 살기 위하여 탐라로 내려가다 풍랑을 만나 잠시 기착한 곳이, 문제의 보길도이다.
이 섬은 산과 내가 아름답고 아늑하여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킬 만한 곳이다. 고산은 탐라로 가는 것을 멈추고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이곳을 「산들이 둘러 있어 바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맑고 소쇄하고 절승(絶勝)하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있는가」라 하여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밑에 낙서제(樂書濟)를 세워 본격적인 은둔생활을 하며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윤고산의 지역별 거주를 살펴보면 서울에서 40년, 유배지에서 14년 양주, 수원에서 1년, 해남 연동 6년 7개월, 성산 2년, 해남금쇄동 9년, 보길도 12년 8개월을 보냈고, 관직은 광해군, 인조, 효종조를 거치면서 효종의 사부, 승지, 공조, 예조 참의에 봉직하였다. 남인의 거두로서 서인과의 정치적 논쟁에서 3회에 걸쳐 유배를 갔고, 그 유배생활이 14년이나 되었다. 특히 효종 승하 후 서인들의 득세로 73세의 나이에 험한 함경도 삼수에 귀양을 가게되고, 80세가 되어서야 유배에 풀려 꿈에 그리던 부용동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84세인 현종 9년(1671)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후 고산은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같이 유배와 은둔을 번갈아 하며 세월을 보내온 고산은 이곳의 정착을 계기로 평소 동경했던 주자의 은둔자적 생활을 실현하게 된다. 해남 윤씨 집안의 장자 상속으로, 또한 풍부한 재력으로 진도 굴포리와 완도군 도화도에 약 330여 정보의 간척사업을 한 대지주로서, 효종의 사부시절, 궁중에서 보고 느낀 조원(造園)의 안목으로 보길도의 천혜적 자연경관을 살려 나름대로의 이상향을 꾸몄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시름 많은 정치권과 발을 끊고, 강호(江湖)에 묻혀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살고자 했다. 이 골짜기에 무려 25개의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온 섬을 뜨락으로 삼아서 자유분방하면서도 은밀한 자기 공간을 만들어냈다. 비록 자연을 개조하여 재구성했지만 전혀 인공의 티를 드러내지 않고 자연속에서 하나가 된 훌륭한 건축문화, 조경 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고산의 풍류와 유홍이 이와 같다면 현재의 우리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객이라 할 수 있다.
북경의 이화원, 소주의 졸정원등 수백의 커다란 정원이 현존하는 중국의 인공적인 정원에 비하면,자연 그대로 살린 이 곳 세연정을 비롯한 보길도의 정원은 가히 자연미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손수 가야금과 거문고를 뜯기도 하고 가무를 즐기면서 하루도 이와 같은 음악이 없으면 세간의 근심을 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주자를 사모했던 은둔자의 생활터인 낙서재,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던 동천석실, 소요와 풍류로 세상사는 시름을 씻던 세연정..... 고산은 봉림대군(효종)의 사부시절 궁중에서 보고 느낀 원림에 대한 안목으로 궁궐의 비원 못지 않은 꿈의 세계를 이곳 보길도에서 실현해 냈다.
필자는 이와 같이 아름다운 보길도의 고산 유적지를 돌아보면 그 옛날 양반들이 즐겼던 멋과 풍류의 스케일에 대한 놀라움과 또한 세상을 버리고 깊은 섬에 은둔한 삶치고는 너무 호사스럽다는 실망감이 교차하곤 한다.
많은 육지사람이 고산의 채취와 시심(詩心)을 느끼기 위하여 보길도를 찾는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흔히 세연정(洗然亭)과 그 주변의 동백 나무숲만을 보고 오는데 고산의 살았던 자취를 느끼려면 세 곳을 함께 둘러봐야 한다.
첫째, 고산이 거처하던 락서제(樂書濟)와 곡수당(曲水堂)이다.
지금이야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대로로 변했지만 당시에는 좁다랗고 꼬불꼬불한 세로길을 세연장에서 3km 쯤 더 올라간 격자봉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풍수지리설로서는 보길도에서는 가장 손꼽히는 명당으로서 좌청룡, 우백호가 호위를 하는 연꽃과 같은 지역, 이곳에 낙서재, 곡수당이 있다. 지금은 집터밖에 없지만 고산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며 책이나 보고, 시심(詩心)을 달래보고 즐기면서 살겠다던 의지가 담겨있다. 이곳을 사람들은 ‘큰 터’라고 부르고 있다.
고산은 이 낙서재에 무민당(無悶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그 의미는 세상사를 피해 사는 풍류객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당호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폐허가 되고, 몇 조각의 기와조각들과 주춧돌들에 푸른 이끼만 끼어 있을 뿐이다.
둘째, 낙서재 건너편 바위산 중턱에 있는 석실(石室)이다. 해발 100여m쯤 올라가면 산중턱에 천여평 공간에 돌계단과 석문, 반석, 정자 등이 있는데, 이곳은 고산이 다도(茶道)를 즐기고 신선과 같이 살면서 부용동 전경을 바라보며 인생을 조감한 곳이다. 당시에는 낙서재와 석실간에 요즘의 케이블카와 같은 도르레식 줄을 연결하여 음식을 이곳까지 운반하였다고 하니 그 풍류를 가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산중턱에 있는 이곳을 오르기가 힘들다고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지만, 이 석실에 와보면 고산의 멋들어진 삶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산을 달 밝은밤 이곳에 올라 격자봉위로 솟는 달을 완상하며 선계의 삶을 희구하였다고 한다.
셋째, 석실에 감도은 저녁연기(부용동 팔경중 하나)속을 바라보며 고산이 심혈을 기울여 자연과 인공미를 조화하여 만든, 조선시대 전통 민간 정원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정원인 세연정이다. 세연정은 부용동 계곡을 돌로 판석을 세우고 만든 계곡정원으로, 이름 그대로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고산은 세연정을 “번화하고 청정(淸淨)하여 일국의 재상의 그릇이 될 만한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 정자를 지어 세연정이라고 부르고, 이곳에서 고산은 음악과 춤과 시와 인생을 관조하였다.
세연정의 한가운데 누대를 쌓고 노송을 심었으며 이 경치는 부용동팔경 중의 하나이다.
세연지 연못 주위에 동대(東臺)와 서대(西臺)를 쌓고, 이곳에서 아름다운 동녀들이 동.서대로 나뉘어 서로 마주보면서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게 하였다. 고산은 이 세연지에 비치는 무희의 모습을 즐기고 오우가와 어부사사사를 장단에 맞추어 멋들어지게 불렀다고 한다.
3. 고산 윤선도와 송강 정철
고산과 송강은 조선시대 시가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우리들은 흔히들 이 두분의 위치를 당나라의 이백과 두보(杜甫)에 견주기도 한다.
송강은 이백에, 고산은 두보에 가깝게 놓인다. 송강은 이백처럼 낙천적이며 호탕한 성격과 화려한 필치를 구사했고, 고산은 두보와 같이 염세적이며 진지한 자연과 담백한 작품을 보였다. 고산과 송강은 너무나 유사한 삶을 살았음에도 서로 다른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공통점을 보면 첫째, 고산과 송강은 호남의 토양에서 문학적 성장을 한 분들이다. 그들은 각각 해남과 창평(담양)에서 명작을 만들었고 생애의 중요한 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현재까지 전라도를 “예향” 또는 “문향”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두 분이 이 곳 문학의 정신적인 지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둘째, 고산과 송강은 다같이 한 많은 유배생활을 통해 문학적 금자탑을 이룩해 냈다. 정치적 좌절을 극복하고 유배생활을 통하여 진정한 예술혼을 발휘하였다. 이들이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였다면 이와 같이 화려한 문학적 성취는 가능하였겠는가.
셋째, 고산과 송강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소년기에 뜻하지 않은 일로 남도에 오게 되었고, 쟁쟁한 문장가들에 사사하여 20대에 정계에 나가서 각각 남인과 서인의 맹주로서 용맹한 투쟁력을 발휘했으나 결국 반대세력에 떼밀려 불우한 말년을 보내야 했던 사실 등 전체적인 생애의 흐름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비슷한 삶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인생은 너무나도 달랐다. 고산은 모든 면에서 유복하였고, 송강은 생활이 가팔랐다. 둘다 10대 이전에 서울에서 남도로 옮겨갔지만 고산은 갑부인 해남 윤씨 종가의 양자로 입적되어 귀하게 자랐고, 송강은 창평의 외갓집에서 드난살이를 해야 했다. 유년시절의 환경이 두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미쳐 정치활동이나 작품세계에서 이질성을 나타낸 것이다.
송강은 관직을 떠나 초야에 머루르면서도 끝까지 충군(忠君)에의 연심을 강조하여 기회가 닿는 대로 정계에 복귀할 것을 기대하여 한결같이 군왕에 대한 사모의 정을 작품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고산은 송강의 이념적 태도와는 달리 산수에의 향수에 바탕을 두고 자연에 대한 시인적 감동과 그리고 예술가적 우수성을 보여주는 한극에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고산은 피를 피했고, 송강은 피를 불렀다. 고산이 그의 호처럼 고고한 스타일을 유지했다면 송강은 그의 호마냥 도도한 강물의 돌아감이 있었다.
우리들은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쌍벽인 고산의 잔잔하고 섬세한 작품을 통하여, 송강의 화려하고 대담한 어법을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표운).9,1996
첫댓글 담양의 먹거리는 신식당의 떡갈비, 민속식당의 죽순회 그리고 추어탕과 담양 순대가 지나가는 나그내에게 입맛을 돋아 줄 것입니다. 해남은 그 유명한 천일식당의 한정식입니다. 비슷한 호남식 한정식 음식점이 몇개 더 있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여행에 참고가 많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