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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
박지원 지음
혼자 있기 무서워서 무서운 이야기를 즐긴 겁 많은 천재
“나는 어려서부터 담이 작고 겁이 많아서 혹시 낮에도 빈 방에 들어가거나 밤에 작은 등불을 보게 되면 머리털이 서고 맥박이 뛰었다. 올해 내 나이 마흔 네 살이건만 그 두려움 타는 성질은 어릴 때와 마찬가지다.”
박지원이 청나라를 여행하고 쓴 『열하일기』에 겁 많은 자신의 성격을 실토한 부분이다. 실제로 어렸을 때 박지원은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아이였다. 다 성장해서도 마음이 약하고 예민해서 잔걱정이 많았다. 심지어 박지원은 새로 아이를 낳은 부인이 저녁에 피곤하게 자다가 만일 잠결에 젖이 아이의 입을 눌러 숨이 막히게 되면 어쩌나 염려해 갑자기 밤중에 일어나 걱정했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심약하고 겁이 많은 성격이라 스무 살 즈음에는 우울증과 유사한 병에 걸렸는데, 밤낮으로 눈을 붙이지 못하고 삼사 일을 지내기도 했다. 박지원은 이 불면증을 견디기 위해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마을에서 유행하던 기이한 이야기를 즐겼다. 이것이 바로 이후에 박지원이 쓴 작품에 영감을 주게 되었다.
겁이 많았던 성격에 비해 박지원은 어려서 기억력이 좋고 다른 사람의 흉내를 잘 내서 종종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다섯 살 때 전라도 관찰사가 된 할아버지를 따라갔는데 관아의 생김새와 칸 수를 한 번만 보고도 모두 기억해냈다. 또한 여덟 살 때는 큰누나 앞에 누워 매형의 어눌하고 정중한 말투를 흉내내 누이를 당황하게 했다. 이런 박지원의 남다른 자질은 모두 그의 문학수업에 긴요하게 쓰였다. 십대 후반에 벌써 『이충무공전』을 지어 사마천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평을 받고, 열아홉 살에는 당시 문단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영민했다. 『박연암 선생전』을 지은 김택영은 “연암은 우뚝한 얼굴에 뜻과 기상이 툭 트이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어려서부터 이미 평범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적을 정도였다.
조선후기 아웃사이더가 가진 날카로운 풍자정신
박지원은 조선 영․정조 때의 실학자이자 소설가다.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이다. 대대로 문장을 잘하는 명문귀족 집안에서 아버지 박사유, 어머니 함평 이씨 사이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글공부를 하다가 16세에 이보천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고 이보천에게 『맹자』를, 처숙인 이양천에게 『사기』 등을 배웠다. 그 후 3, 4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 19세의 어린 나이에 당대 문단에 명성을 떨쳤다.
20세 전후에는 우울증으로 보이는 정신질환으로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박지원은 23세에 모친을, 31세에 부친을 여의는 등 불운을 맞았다. 집안이 본래부터 청빈했고, 가정의 법도가 엄격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벼슬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현숙한 형수가 연암을 주로 양육해 부모보다는 형과 형수에게 남다른 애정을 느꼈다. 이 같은 성장환경으로 박지원은 재능은 있으나 세상에 쓰지 못하고 불우하게 살아가는 부류들과 사귀면서 지낸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조선사회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문제점을 비판하는 계기가 된다.
연암은 과거에 계속 낙방하여 장년이 되어도 벼슬을 하지 못했다. 연암이 과거에 입격하지 못한 것은 능력부족이라기보다는 과거시험 과목이 아닌 천문지리, 병학, 농경, 경세와 같은 다른 학문에 전념한 탓인 듯하다. 그는 35세 이후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홍대용 및 사가(四家: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이석우 등의 조선후기 시인들) 시인들과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 제도의 모순, 농공의 이익과 폐단 및 초목, 조수 등을 이야기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실학에 몰두했다. 이때 정조가 등극했는데,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세손 때부터 그를 지켜주던 홍국영으로 하여금 중요한 정사를 처리하게 했다. 홍국영은 이조판서인 홍낙영을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몄는데, 이때 홍낙영과 한 패로 몰린 박지원은 아예 황해도 연암협으로 들어가서 둔거했다. 그는 자신이 너무 굳세고 정직하여 칼자루를 너무 노출시켜서 이런 화를 당했다고 생각하고는 평범하게 행동하며 명예를 피하고 모든 것을 감출 뜻을 갖기도 했다.
연암협에서 둔거한 지 2년 후 홍국영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연암은 한성으로 돌아왔다. 그때 박제가의 삼종형인 박명원이 청나라 고종의 70세 탄신일[수경(壽慶)]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를 수행하여 열하(지금의 중국 승덕지방)를 기행했다. 그로서는 단순한 중국 유람이 아니어서 청나라의 선진문물제도와 새로운 사회상에 자극받고 크게 감동했다.
그는 귀국 후 『열하일기』 25편을 저술했다. 연암은 이 책을 통해 청나라 문화를 소개하고,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하고 개혁을 논했다. 폐쇄적이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실학과 북학사상이라는 새로운 실사구시와 이용후생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50세에 비로소 한성부 판관과 면천군수, 안성현감 등의 벼슬에 올랐다.
안성현감으로 재임할 때 남공철이 『열하일기』의 문체가 경서와 고문을 본받지 않아 기이하다는 글을 정조에게 올린다. 정조는 고문과 경서를 본받은 글을 올려 속죄의 뜻을 표시하라는 명을 내린다.
연암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풍자와 사실주의적 표현이다. 봉건사회가 무너져가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움직임이 태동하는 격변기를 살면서 연암은 그 모든 추이를 풍자를 통해 직시하며 비판했다. 또 한편 그는 평민들의 삶의 세계로 의식을 확장하면서 당대 서민층의 삶과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박지원은 고문을 반박하고, 참다운 문학의 길은 화석화한 옛말과 경험의 답습이 아니라, 그 진정한 의미를 음미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에는 『열하일기』와 문집 『연암집』이 있고,『허생전』『호질』『예덕 선생전』『광문전』『양반전』 등의 작품이 있다.
▣ Short Summary
정선군에 한 양반은 어질고 현명했지만 가난해 관아의 환자(각 고을의 곡식창고인 사창에서 꾸어주는 곡식)를 타다 먹고는 그것을 갚지 못했다. 감사가 순시하다가 이 고을 관아에서 환곡을 빌려주고 못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빚을 갚지 않는 양반을 잡아들이라고 했다. 곧 잡혀갈 것을 알게 된 양반은 환곡을 갚을 길이 없어 울고만 있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부인이 평생 글읽기만 좋아하더니 정작 필요한 일은 하지 못한다고 남편을 비아냥거렸다.
한편 건너 마을에 배운 건 없어도 돈은 많은 부자가 이 양반의 일을 듣고 자식들과 함께 환곡을 갚아주고 양반직책을 살 것을 의논했다. 부자에게 양반은 가난해도 고귀한 사람이지만 자신은 돈이 많아도 비천한 존재일 뿐이었다. 부자는 빚진 환곡과 양반자리를 바꾸자고 양반에게 제의했다. 마침 환곡을 갚지 못하여 걱정이 태산 같던 양반은…….
양반전
박지원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양반 글읽기를 좋아하고 어질지만 생계를 꾸릴 능력이 없어 관가에서 환자를 타다 먹는 다. 그러나 환자 빚이 쌓이고 갚을 길이 없자 고심한다.
양반의 아내 글만 읽고 생활능력이 없는 남편이 급기야는 환자를 갚지 못해 잡혀갈 지경이 되 어 울고만 있자 그 무능함을 비아냥거린다.
부자 돈은 많으나 신분이 비천하여 항상 양반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 각한다. 마침 양반이 환자를 갚지 못해 잡혀가게 되자 자신이 환자를 갚고 양반이 되고자 한다.
군수 감사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양반을 잡아들여야 했는데 이웃의 부자가 양반을 대신 사려는 것을 알고 매매의 공정성을 위해서 증서를 작성한다.
무능한 양반의 일상
“당신은 평생 글읽기만 좋아하더니 고을의 환곡을 갚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군요. 쯧쯧 양반, 양반이란 한 푼 어치도 안 되는 그 놈의 양반, 에잇, 더럽소.”
양반이란 사족(士族)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정선군에 한 양반이 살았다. 이 양반은 어질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매양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으레 몸소 그 집에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 양반은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고을의 환자(還子)를 타다 먹은 것이 쌓여서 천 석에 이르렀다.
강원도 감사가 군읍을 순시하다가 정선에 들러 환곡(還穀)의 장부를 열람하고 크게 화가 나서 “어떤 놈의 양반이 이처럼 군량(軍糧)을 축냈단 말이냐?” 하고, 곧 명해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게 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힘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차마 가두지 못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양반 역시 밤낮 울기만 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 부인이 성을 냈다. “당신은 평생 글읽기만 좋아하더니 고을의 환곡을 갚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군요. 쯧쯧 양반, 양반이란 한 푼 어치도 안 되는 그 놈의 양반, 에잇, 더럽소.”
마을 부자의 불만과 제안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항상 비천하지 않느냐. 말도 못하고, 양반만 보면 굽신굽신 두려워해야 하고, 섬돌 아래에 엎드려 절하면서 코가 땅에 닿도록 무릎걸음으로 설설 기어야만 하는구나!”
그 마을에 사는 한 부자가 자식들을 불러들였다.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항상 비천하지 않느냐. 말도 못하고, 양반만 보면 굽신굽신 두려워해야 하고, 섬돌 아래에 엎드려 절하면서 코가 땅에 닿도록 무릎걸음으로 설설 기어야만 하는구나!”하고 아버지가 탄식을 하자 큰아들이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는 재물을 쌓아두고도 밤낮 이 꼴로 살아가야 하니 부끄럽고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지금 저 건넛마을 양반이 가난해서 환곡을 갚지 못해 몹시 난처한 모양이다. 그대로 가다가는 양반 신세를 보전하지 못할 것 같은데, 내가 그 양반을 사서 행세하면 어떻겠느냐?” 하면서 자식들의 눈치를 살피자 작은아들이 불쑥 말했다. “우리가 양반을 사죠! 그 양반 대신에 환곡을 갚아주고 양반 감투를 사버리면, 재물 많겠다, 한번 거드럭거리며 살게 되잖겠어요?”
부자는 즉시 양반의 집으로 달려가서 환곡을 갚아 줄 테니 양반신분을 넘겨달라고 했다. 양반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잡혀갈 날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라, 이게 웬 떡이냐 싶어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
양반 매매증서 작성
사사로이 사고 팔면서 증서를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송사의 빌미가 될 수 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해서 이 마을의 백성들을 증인으로 삼고 증서를 만들어 미덥게 하되 내가 마땅히 거기에 서명할 것이다.
그리하여 부자는 양반이 빚진 환곡 일천 석을 당장 관가에 실어다가 갚으니,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군수였다. 어쨌든 양반이 죄를 면하게 되었으니 그 일을 치하도 하고 위로도 할 겸 환곡을 갚게 된 연유를 알아보고자 군수는 몸소 양반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에 양반이 벙거지를 쓰고 짧은 잠방이를 입고 얼른 뜰에 엎드려 ‘소인’이라고 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부축하고 “귀하는 어찌 이다지 스스로 낮추어 욕되게 하십니까?”하고 말했다. 양반은 더욱 황공해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엎드려 아뢰었다. “황송하오이다. 소인이 감히 욕됨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오라, 이미 제 양반을 팔아서 환곡을 갚았습지요. 동리의 부자 사람이 양반이올습니다. 소인이 이제 다시 어떻게 전의 양반을 모칭(冒稱)해서 양반 행세를 하겠습니까?”
군수는 감탄해서 말했다. “군자로구나, 부자여! 양반이로구나, 부자여! 부자이면서도 인색하지 않으니 의로운 일이요,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니 어진 일이요, 야비하고 천박한 것을 싫어하고 지위가 높고 귀한 것을 사모하니 지혜로운 일이다. 이야말로 진짜 양반이로구나. 그러나 사사로이 사고 팔면서 증서를 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송사의 빌미가 될 수 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해서 이 마을의 백성들을 증인으로 삼고 증서를 만들어 미덥게 하되 내가 마땅히 거기에 서명할 것이다.”
그리고 군수는 관아로 돌아가서 고을 안의 사족 및 농부, 장인, 상인들을 모두 불러 관아의 뜰에 모았다. 부자는 양반들이 늘어앉은 오른쪽에 가서 앉았고, 양반신분을 판 그 양반은 아전들이 늘어선 섬돌 아래에 섰다.
양반이 지켜야 하는 까다로운 습관들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 국을 먼저 훌쩍 떠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건륭(乾隆) 10년(영조 21년 1745년) 9월 ○일. 이 증서는 양반을 팔아서 환곡을 갚은 것으로 그 값은 천 석이다. 양반은 여러 가지로 일컬어지나니, 글을 읽으면 선비[(士)]라 하고, 정치에 나아가면 대부(大夫)가 되고,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다. 무반(武班)은 서쪽에 늘어서고, 문반(文班)은 동쪽에 늘어서는데, 이것이 ‘양반’이니 너 좋을 대로 따를 것이다.
야비한 일을 딱 끊고, 옛것을 본받고, 뜻을 고상하게 할 것이며, 늘 오경(五更)만 되면 일어나 황에다 불을 당겨 등잔을 켜고서 눈은 가만히 코끝을 보고 발꿈치를 궁둥이에 모으고 앉아 『동래박의(東萊博義)』를 술술 읽어야 한다. 굶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뎌야 하며, 가난을 입에 담지 말며, 할 일 없이 앉아 있을 적에는 아래위의 윗줄을 딱딱거리며, 뒤통수를 톡톡 치고 잔기침을 하며, 입을 다셔 침을 삼켜야 하느니라. 탕건이나 갓은 소매자락으로 모자를 쓸어서 먼지를 털어 물결무늬가 생겨나게 하고, 세수할 때 주먹을 비비지 말고,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여종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신발을 땅에 끈다. 그리고 『고문진보(古文眞寶)』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개의 글자를 쓰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 국을 먼저 훌쩍 떠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막걸리를 마신 다음 수염을 쭈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볼에 우물이 파이게 하지 말고, 화난다고 처를 두들기지 말고, 성내서 그릇을 내던지지 말고,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말고, 노복들을 야단쳐 죽이지 말고, 마소를 꾸짖되 그 판 주인까지 욕하지 말고, 아파도 무당을 부르지 말고, 제사 지낼 때 중을 청해다가 재를 드리지 말고, 추워도 화로에서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소 잡는 일을 하지 말고, 돈을 가지고 놀음을 하지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양반 품행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 증서를 가지고 관에 나와서 마땅히 송사를 할 것이다.
성주 정선군수 서명. 좌수, 별감 서명.
이에 통인(관아에서 잔심부를 하는 사람)이 탁탁 도장을 찍는데, 그 소리가 마치 북소리 같고 찍혀 있는 도장은 밤하늘에 북두성이 널려 있는 것 같았다.
양반을 다시 보게 된 부자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양반이란 게 참으로 맹랑한 것이구료. 나으리네들은 나를 장차 도둑놈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부자는 호장이 증서를 읽는 것을 쭉 듣고 한참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양반이라는 게 이것뿐입니까? 나는 양반이 신선 같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다면 너무 재미가 없는 걸요. 원하옵건대 뭐 좀 이익이 있도록 문서를 바꾸어 주옵소서.” 군수는 괘씸하게 여겼으나 환곡을 갚아 준 공적을 생각하여 ‘양반증서’를 다시 고쳐 주었다. “하늘이 백성을 낳을 때 넷으로 구분했다. 네 종류의 백성[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사이니 이것이 곧 양반이다. 양반의 이익은 막대하니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대충 글을 익히면 크게는 문과급제하고 작게는 진사가 되느니라. 문과에 급제하면 홍패(紅牌)를 받는데 길이 약 두 자 남짓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백 가지 물건을 갖출 수 있으니 그야말로 돈자루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진사가 나이 서른에 처음 관직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이 있는 음관이 되고, 잘 되면 남행으로 큰 고을을 맡게 되어, 귀밑이 일산의 바람에 희어지고, 배가 요령소리에 커지면, 방에는 기생이 귀고리로 치장하고, 뜰에 곡식으로 학을 기른다. 가난한 양반이 시골에 묻혀 있어도 허가 없이 이웃의 소를 끌어다 먼저 자기 땅을 갈고 마을의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너희들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끄덩이를 휘휘 돌리고 수염을 낚아채더라도 누가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호장이 그 증서를 여기까지 반쯤 읽어내리자 부자는 갑자기 손을 내저으면서 “아이고, 맙소사!” 하고는 숨을 헐떡이며 하는 말이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양반이란 게 참으로 맹랑한 것이구료. 나으리네들은 나를 장차 도둑놈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그리고는 발딱 일어나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달아났다. 부자는 평생 다시 ‘양반’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양반, 부자, 그리고 군수에 대한 판단
정선의 양반이 어질고 현명하다고 서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바람직한 인물은 아니다. 그가 글만 읽고 다른 것을 할 줄 모르는 무능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선비가 글을 읽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개인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양반이 글을 읽는 것은 세상을 경영하고 모든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양반은 존경받는다. 이런 생각은 연암뿐 아니라 선비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기본적인 의식이다. 정선 양반은 오히려 자신만을 위해 개인적으로 글을 읽었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수 있는 존재다.
두 번째로 부자에 대해 생각해보자. 조선후기로 오면서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고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몰락양반들이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경제력을 갖춘 평민들이 등장하면서 경제력에 의한 신분매매가 실제로 이루어져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그러나 부자가 양반권을 포기하고 물러난 것은 이것이 금지된 행위였기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양반이라는 신분이 자신이 생각하던 신선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다. 오히려 문서를 통해 그에게 제시된 양반은 신선이 아니라 도적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부자가 양반권을 포기한 것은 비록 신분이 낮고 천한 생활을 계속 하더라도 도적이 될 수는 없다는 건전한 사상을 보여준다. 부자가 처음에 양반을 사려 했을 때는 양반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양반권을 획득하는 것이 재물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양반전>에서 부자는 인간적인 욕구와 건전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군수는 정선 양반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또 한편으로 그의 가난에 동정을 보내며 감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차마 가둘 수 없는 마음 약한 부분을 보이기도 한다. 군수는 시종일관 목민관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양반매매 사실을 알고는 부자를 칭찬하며 사사로이 매매하면 나중에 송사의 빌미가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서는 문서를 작성해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증서 내용에 불만을 가진 부자를 위해 문서의 내용을 고쳐주는 세심한 배려도 보인다. 군수가 만든 증서로 인해 결과적으로 부자가 양반권을 포기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수가 이것을 사전에 의도했다고는 볼 수 없다. 군수가 증서를 만든 것은 매매에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지 부자를 겁주어서 양반을 포기하려고 진작부터 계획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양반의 허례허식과 부당한 권리에 관한 증서
『양반전』은 그리 길지 않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반 이상의 분량이 군수가 작성한 두 개의 증서로 차 있다. 연암이 이 작품을 창작하면서 여기에 적지 않은 비중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첫 번째 증서에는 ①작성일자와 작성하게 된 이유 ②양반의 소재에 따른 다양한 명칭 ③양반이 된 부자가 지켜야 할 사항의 나열 ④본 증서에 이의가 있을 때 변경할 수 있는 방안 ⑤군수, 좌수, 별감의 서명이 들어 있다. 이 증서에서 부자가 지켜야 할 사항들은 주로 양반의 생활태도에 해당하는 것들로 양반을 규정하는 지엽적이고 현상적인 항목들이기에 이후 양반의 권익을 논하는 두 번째 증서의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내용과는 구별된다. 이 증서는 실생활과 동떨어진 당시 양반의 허례허식적인 생활과 관습을 풍자한 것으로, 연암 특유의 기지가 잘 드러난 대목이다.
반면에 이 증서의 목적이 양반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자를 물러서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 증서에는 서민이 지키기 힘든 양반의 생활규범이 나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번째 증서의 내용이 양반에 대한 부정적인 상을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첫번째 증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보는 것이 좋겠다. 부자는 이 첫번째 증서의 내용을 보고 양반을 포기하는 데는 이르지 않고 단지 양반이 재미없는 신분이라고만 생각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부자가 양반권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문서가 아니다. 때문에 이 증서는 서민이 지키기 힘든 생활규범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누가 보더라도 허례허식이 분명한 양반의 습관을 나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번째 증서는 ①선비의 존귀한 위치 ②양반의 권익 ㉠문과급제자의 이익과 권리 ㉡진사의 이익과 권리 ㉢궁한 양반의 이익과 권리를 이야기한다. 두번째 증서는 양반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백성들을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양반의 부도덕한 행위들을 풍자한다. 양반의 행위로 인해 일어나는 세태를 풍자 비판한 것으로, 이성과 도리에서 벗어난 사람들과 그 행위, 인간의 과오와 범죄, 단점, 죄악 등을 두루 풍자한 연암의 사회․역사의식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군수가 작성했기 때문에 양반 자신에 의한 양반폭로이며 자기실토이기도 하다.
흔들리는 신분질서, 다른 시각으로 양반보기
『양반전』이 씌어진 시대는 조금 특수하다. 이 시대상황을 알면 연암이 양반전을 쓴 의도를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다. 당시는 성리학을 기초로 한 유교 이념이 그 권위를 잃고, 봉건적 경제체제와 사회신분제도를 비롯한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가 흔들리던 때였다. 일반 서민들은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근대문학의 선구자였던 박지원은 『양반전』에서 양반 신분 매매를 통해 봉건계급 제도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것을 타파하려고 했다. 선비(양반), 농부, 장인, 상인을 구별하는 것은 단순한 직업상의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양반은 생산적인 활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다. 부자가 자식들을 불러모아 양반을 사려고 의논하는 부분에는 부자지만 가문이 천한 인물과, 출생은 고귀하지만 가난한 인물 사이의 계급질서가 잘 나타나 있다. 천한 부자가 가난한 양반에게 굽신거려야 한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가 경제적 능력보다는 타고난 혈통에 따라 위계가 정해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과연 양반은 다른 모든 신분보다 위대한 신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증서를 보면, 양반은 생활 중 지켜야 할 항목만 많고, 별 하는 일도 없이 권위만 내세우는 족속이다. 이 이야기는 선비의 시각에서 서술된 것이 아니라 부자의 시각에서 서술되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다. 처음에는 양반을 존경해 마지않던 부자가 이야기의 결말에 가서는 양반되기를 포기하고 도망간다. 그 부자에게 양반은, 잘 몰랐을 때는 ‘신선’이었지만 실상을 파악한 후에는 ‘도둑’이다. 『양반전』은 부자가 양반에 대해 가졌던 인식이 바뀌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양반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연암은 양반증서의 매매과정을 통해 신분제도가 다른 물건이나 상품과 마찬가지로 매매될 수 있는 것임을, 변동될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양반이 지켜야 할 세세한 생활습관을 보여주고, 또 양반이 누리는 정당하지 못한 권위를 폭로함으로써 양반이 생활이나 도덕적인 면에서 결코 다른 계층보다 우월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반인 박지원이 신분질서의 문란으로 붕괴되기 시작한 봉건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보다 더 날카로운 지성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연암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박지원의 생애와 작품
1737 2월 5일, 한양성 서쪽 치동에서 아버지 사유, 어머니 함평 이씨의 이남이녀 중 막내로 태어 남. 조부 필균은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1739~47 어려서 기억력은 좋으나 겁이 많은 아이로 성장.
1752 처사 이보천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고 장인에게서 『맹자』를, 처숙인 이량천에게서 『사 기』『좌전』 등을 배웠다.
1755 처숙이자 스승이었던 이량천이 사망한 후 그를 제사지내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이 문집에 남 긴 최초의 본격적인 문장이었다. 연암은 이량천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방황을 시작하게 되었 다. 『마장전』과 『예덕 선생전』도 이때쯤 창작했다고 추정된다.
1756 시 「원조대경」을 지었는데 문집에 남긴 최초의 시였다. 겨울에는 봉원사에서 독서하면서 기이한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1757 『민옹전』을 창작. 『광문자전』도 이때쯤 창작. 불면증과 우울증이 더욱 깊어져 병을 견 디기 위해 전을 지었다.
1759 어머니 함평 이씨 사망. 청나라 실학자 서건학이 쓴 『독례통고』를 필사하면서 실학에 관 심을 가졌다.
1760 조부 필균 사망. 이때부터 연암은 곤궁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조부는 30년 동안 벼슬을 살았지만 남긴 재산은 백금도 되지 않아 하나뿐인 노복에게 거친 밥도 배불리 먹일 수 없었 다고 한다.
1761~65 여기저기 떠돌며 공부와 유람을 함.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백지 혹은 미완의 답안지를 내 거나 그림을 그린 답안지를 제출하여 합격하지 못했다.
1767 부친 사망. 대장 이장오의 별장인 삼청동 백련봉 아래로 이사하면서 이덕무, 이서구, 유득 공 등과 이웃해 살았다.
1768 19세인 박제가를 만나 가르치기 시작. 이때부터 북학파가 형성됐다.
1769 16세인 이서구가 연암의 제자가 된다.
1770 소과(小科)에 수석합격하여 영조 앞에서 답안지를 읽음. 친구의 권유로 회시에 응시했으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았다.
1771 다시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기로 결심.
1777 장인 이보천 사망. 『제외구처사유안재이공문』을 짓다.
1778 홍국영으로 인한 화를 피하기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연암협으로 이주. 여러 뜻있는 선비들 이 자주 연암협을 방문했고 여러 제자들이 배움을 청했다.
1780 홍국영이 정권을 잃게 되자 서울의 처남 집으로 이주.
5월에 박명원이 청나라 고종 70세를 축하하는 사신이 되어 청나라로 가게 되자 동행하여 청 나라를 방문했다. 이때 그의 사상과 문학을 집대성한 『열하일기』25편의 초고를 작성하고 『호질』과 『옥갑야화』도 수록하였다.
1783 『열하일기』완성. 삼포에 있는 박명원의 정자에서 지냈으며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틈 틈이 방문했다.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친 홍대용이 죽다.
1785 박남수는 『열하일기』가 경서와 고문을 본받은 글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판.
1786 이조판서였던 유언호가 추천해서 선공감역을 맡게 됐다.
1787 부인 전주 이씨와 큰며느리 이씨의 상을 당해서 식사할 곳조차 없었으나 재혼은 거절하다.
1789 평시서 주부로 승진. 의금부의 도사로 전임. 이후 사헌부 감찰로 전임되나 부임하지 않음.
1790 연암협 가까이의 제릉령으로 전임되어 15개월 근무한다.
1791 한성부판관으로 전임. 흉년으로 모여드는 상인을 정부가 막으려 하자 연암은 상인의 권리, 관개입 거부, 물건의 유통에 대한 이론을 펼쳤다.
1792 안의현감으로 부임해 안정된 관직생활을 했다.
1793 고문과 경서를 본받은 글을 지어서 『열하일기』의 죄를 속죄하라는 하교를 받다.
임술회의 처인 밀양박씨가 음독자살하자 『열녀함양박씨전』을 짓다.
1796 안의현감에서 해임되어 경직(京職)으로 전임. 겨울에 제용감주부에 제수되었다가 금부도사, 의릉령 등에 전임했다.
1797 고문과 경서의 문체를 따른 글로 제주도 사람인 이방익의 표류사건을 적은 『서이방익사』 를 짓다.
1798 왕명으로 농사에 관한 책을 모으다.
1799 연암협에서 『과농소초』 편찬.
1800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양양부사로 부임.
1801 봄에 관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갔다.
1802 봄에 연암협에 들어가서 정자를 짓고 수개월간 머물다. 그러나 눈이 어둡고 팔이 마비되는 증세가 생기며 건강이 나빠졌다.
1804 여름을 지내면서 병이 심해지자 약을 물리치고 죽음을 준비했다.
1805 제동에 있는 집에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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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류정월
서강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트릭스터(trickster)담의 문화기호학적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고 동 대학 박사 과정 중에 있다. 그외 주요 논문으로 「‘거짓말 이야기’에 대한 고찰」․「‘용재총화’ 연구」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