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일본은 백제의 강역이었다-1
2012년 9월
곽경, 역사왜곡바로잡기 포럼
조어도(釣魚島, 댜오위다오)에 대한 중국·일본의 분쟁의 파고가 곧 독도까지 밀려오게 되어 우리는 무언 중에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 대마도에 대한 우리의 영유권을 주장함으로서 독도 문제에 대응하자는 해결책이 관심을 끌기도 하는데, 이 방안도 결국은 역사문제와 결부되는 것이다.
독도와는 별개로 일본과의 사이에 반드시 짚어야 할 역사문제로서, 일본의 근대사 외에 고대사의 왜곡 문제가 있는데, 이 고대사의 왜곡이야말로 임진왜란과 근대에 있었던 일본침략의 정신적 바탕이 된 것이다. 결국 일본이 독도를 넘보는 것도 고대사의 왜곡된 해석을 오랫동안 반복하여 국민들에게 주입시켜 침략근성을 키운데서 나오는 결과로, 우리는 역사의 시정을 등한히 하여서는 안되며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끈질긴 노력으로 달성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국가 탄생 과정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이 등장하고, 아리송한 이름의 신들이 신라에서부터 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일본이란 땅으로 건너오는 것으로 역사는 시작하고 있다. 일본고대사에서 한반도의 비중은 막대하여, 우리가 일본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외면하여 흘려버리려고 해도 절대로 그렇게 될 성질이 아니며, 미래에도 지금의 독도·대마도의 문제처럼 계속하여 망령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일본 고대사가 엉뚱하게 해석되고 왜곡되어 온 일은 에도 막부 시절의 국학이라는 시류가 등장하기 훨씬 전 우리의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때부터 형성되어 오랜 기간동안 일본인들의 건전한 정신을 망가지게 하였는데, 그러한 정신을 바로잡는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 영향은 일본의 허구적인 고대사라며 관심을 끊고 지내더라도 한반도의 우리에게 두고두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이라는 역사에서 그대로 증명되고 있는 일이다.
백제사와 일본의 국가기원에 대하여는, 성격상 심각한 논쟁이 여러번 계속되었지만 그간 고대사의 수상한 실타래를 명확하게 풀어주는 단서가 없었고 모든 쟁점이 평행선을 긋는 형국이었다. 필자는 오래전 단재 신채호 선생, 김성호 씨, 윤영식 씨 등 세분 역사가가 쓴 백제와 일본 고대사에 대한 연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세분의 저서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일관된 큰 흐름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고대 한·일 양국의 상고사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계획은 없으나, 비 전공자인 필자한테도 고대사의 큰 줄거리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한·일 고대사 논쟁의 종결자로 떠오른 역사적 사실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반화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관심조차도 끌지 못하는 데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며, 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차원에서의 논리로 이 문제를 제기해 보려고 한다.
이글은 그간 읽은 세 권의 책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의 국가기원에 대한 왜곡된 역사가 제대로 규명되어, 일본의 침략성의 원인이 밝혀지고 시정되었으면 하는 희망이다. 그 세분의 저서는 아래와 같다.
세 분의 저서와 초판 시기:
신채호 “조선상고사” 1931 조선일보 연재
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1982년 초판
윤영식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 1987년 초판
1. 단재 신채호의 <쇼도꾸 태자= 근초고왕>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성덕태자 는 백제 근구수왕의 기록을 훔쳐다가 만든 가짜의 인물로 의심하고 있는데 아래에 그 부분을 인용하였다.
“근구수왕의 무공에 대한 기록만 이같이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에 관한 것도 많이 삭제되었으니, 이를테면 근구수왕 10년은 태자로, 10년은 대왕으로 백제의 전권을 잡았는데 본기에 근구수왕의 문화적 사업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겨우 박사 고흥을 얻어 백제서기(書記)- 백제사를 지은 한가지 밖에 없다.
그러나 나(신채호 선생)는 일본사의 성덕태자의 사적이 거의 근구수왕의 것을 훔쳐다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이로 미루어 “성덕태자가 헌법 17조를 제정했다”고 하는 것과 “불법을 들여 갔다”고 하는 것은 일본인이 근구수왕의 공적을 흠모하여 이를 본떠다가 저 <성덕태자 전> 가운데 넣은 것이 분명하다.” <그림은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사>
신채호 선생은 그분의 사상이나 체질상 일본사를 깊게 연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선생의 이러한 주장이 나온 지 50년이 지난 후, 김성호와 윤영식 두분의 역사가가 동일한 의문을 가지고 일본고대사에 접근하고 있는데, 선생보다는 훨씬 방대하게 일본사를 파고 들어간 점이 눈에 띄인다.
2. 김성호의 <일본서기의 8인= 실제는 4인>설
김성호 씨는 신채호가 주장한 <성덕태자= 근구수왕>이라는 주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서기의 신대기에 나타나는 8명의 등장인물이 실제로는 4명이며, 이를 각각 두명으로 나누어 서기에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부적인 진위는 어찌되었건, 단재 신채호 선생과 맥락을 같이하는 주장으로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흐르고 있는, 이중적으로 기술되었다는 사실만은 정확하게 캐치하고 있다. 아래에 해당부분을 인용한다.
“결국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저자들은,
經津主神(도해자)과 大物主神(정착자)을 이분하고
瓊瓊杵尊(천강자)과 崇神天皇(정착자)을 이분했으며(江上 교수 지적)
卵 生 女(도해자)와 神功皇后(정착자)를 이분했듯(三品 교수 지적)
神武天皇(도해자)과 應身天皇(정착자)으로 이분함으로서(江上 교수 지적)
<아래는 한자세대가 아닌 분들의 편의를 위하여, 일부를 중복하여 기술하였다.>
경진주신(도해자)과 대물주신(정착자)을 이분하고
경경저존(천강자)과 숭신천황(정착자)을 이분했으며(강상 교수 지적)
난 생 녀(해도자)와 신공황후(정착자)를 이분했듯(삼품 교수 지적)
신무천황(도해자)과 은신천황(정착자)으로 이분함으로서(강상 교수 지적)...
응신천황을 은폐하였다. 기내조(畿內朝: 천황가)의 전신인 비류백제를 끊어버린 대신, 비류계의 담로(식민지)였던 야마도를 전신으로 끌어들이고, 그의 기원을 BC 660년으로 소급시켜, 천황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일본 열도만을 지배해 온 이곳의 원주민으로 자처했던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편수된 것임을 강상(江上) 교수도 지적한 바 있다.”
고 말하고 있으며, 그 외에 신대기의 여러 등장인물들의 존재가 허구적이었슴을 밝혔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수 있듯이 일본 국가기원은 백제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신찬성씨록을 많이 참조하였다. 또 그의 저서에서는 동일인물이 이름만 달리하여 중복 출현하는 경우를 정확히 집어내어 일본사기와 고서기의 신빙성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표명하는데 그 일부분은 아래와 같다.
黛弘道 교수도 “숭신천황(10대천황)과 대물주신(황손 瓊瓊杵尊를 맞이하여 邪馬臺國을 세움)의 깊은 관계는 일본서기와 고사기로 보아 명백하다”고 단언했다... p164
일본사학계에서는 신대기가 천황가의 신성을 위해 꾸며진 정치적 주장으로 보는 견해가 없지 않다... p157
제10대 숭신이 御肇國天皇(시조)이라면, 제9대 이전의 천황들은 가구적 존재에 불과함이 자명해진다... p164
江上교수는 응신을 숭신에 연결시킴으로서 숭신이 일본 열도로 건너간 최초의 기마집단으로 여겼다... p197
3. 윤영식 씨의 <33 천황= 실제는 10명>설과
물부·대반 양 가계도 및 백제·왜 통합 왕력표
윤영식 씨는 그의 저술 에서,
신채호의 <성덕태자=근초고왕>이라는 학설과
김성호의 <일본서기상의 8인= 실제로는 4인>이라는 학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33인의 천황이 실제로는 아래와 같이 10명인데, 이를 33인으로 늘여서 기재하였다고 결론을 짓고 있으며, <물부· 대반의 양 가계도 및 백제·왜 통합 왕력표> 를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다.
“일본서기 상에 기재된 천황 전부를 일별하였고, 이 천황들을 분식(扮飾) 처리된 인물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단 신무의 다음 팔대(八代)는 제외하였다.
물부계(物部系, 백제계)
1. 근초고왕 近肖古王··· 履中, 仁賢
2. 근구수왕 近仇首王··· 垂仁, 景行, 允恭, 敏達, 天武
3. 무내숙이 武內宿禰··· 成務, 仁德, 用明
4. 침 류 왕 枕 流 王··· 仲哀, 顯宗, 孝德
대반계(大伴系, 가야계)
1. 아리사등 阿利斯等 淸寧, 宣化
2. 예진별명 譽津別命··· 反正, 安閑, 安康
3. 예전별명 譽田別命··· 神武, 崇神, 應神, 雄略, 繼體, 崇峻, 天智
4. 반 장 희 磐 長 姬··· 神功, 皇極, 齊明
5. 삼취옥희 三炊屋姬··· 推古, 持統
6. 동 성 왕 東 城 王··· 武烈, 欽明, 舒明
일본서기(日本書紀) 및 고사기(古事記)에 등재된 신대기의 33인의 천황이 물부씨 4명, 대반씨 6명 해서 모두 10명뿐이다. 이중 백제왕이나 왜왕으로 즉위한 일이 없이 <紀·記>상에 등재된 무내숙이, 아리사등, 예진별명, 반장희, 삼취옥희를 제외하면 백제의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 동성왕 그리고 왜왕 찬(讚)의 다섯 왕에 불과하다.
중국 사서에도 보이고 본서에서도 실재하였던 것으로 확인된 왜왕 진, 제, 무 등 진왕계 인물들이 보이지 않음을 볼 때, 이는 신분이 국신(國神)으로 분류되었음으로 인해 천신계(天神系) 중심으로 쓰인 <紀·記> 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고 본다.”
윤영식 씨의 연구에서는 세부적인 면의 진위를 따지기에 앞서서 전체적인 흐름을 볼 필요가 있으며, 단재 신채호 선생 및 김성호 씨의 연구와 맥락을 같이 하는 주장으로 일본서기, 고사기와 신찬성씨록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구체적이고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음을 볼 때 “일본의 국가기원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종결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저서가 나온지 50여년 후의 김성호· 윤영식 두분의 저술에서 일본사를 읽어 찾아낸 흐름이 서로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이는 일본사의 핵심부분을 찾아낸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4. 왕인과 아직기, 그리고 신도(神道)의 재해석
왕인과 아직기에 대한 아래의 설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해 온 일본의 고대사에 대한 상식으로, 초등학교 학생들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여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원조가 되어 일본사회의 정치·경제와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사카 히라카타시에 있으며, 1938년 5월 오사카부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인>에서
근초고왕 또는 아신왕 때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으며, 무왕 때 관륵(觀勒)은 천문· 역법· 지리 등을 전하고, 성왕 때 화공· 와공(瓦工)과 경사(經師)· 율사(律士)· 의사들을 보냈다. 이와 같이 삼국 중 백제문화는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두산백과>에서
그러나 이러한 왕인 박사 등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을 넘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얘기임을 알 수 있다. 왕인이 천자문 한권과 논어 10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사가 이상하고, 천문·역법·지리 등이 전해졌다는 내용과 그 밖에도 화공(畵工)·와공(瓦工)과 경사(經師)·율사(律士)·의사들을 보내어 백제문화가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는 기록이 상식 이하이다. 이는 오늘날로 따지면 선진기술인 반도체제조법, 자동차제조법, 원자력발전소 건설기술 등을 전수해주러 당시의 미개지역인 일본에 기술자를 대량으로 보냈다는 식의 기록으로, 바꾸어 말하면 이 내용은 문화를 몽땅 옮겨줬다는 얘기와 다름없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성립하기가 힘든 논리이다.
이는 마치, 미국 신대륙에 유럽인들이 철자법사전 한권과 그리스 철학서적 열권을 전해 주고, 유럽에서 천문· 지리· 화공의 기술자와 법률가· 학자· 의사들을 보내었으므로, 미국은 유럽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기록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실제로는 유럽인들이 미국에 문화를 전해준 것이 아니고, 유럽인들이 대거로 미국 땅에 건너와 인디언들을 싹 없애고 그대로 미국인이 되었는데, 여기에 유럽인이라는 흔적을 없애려고 문화전수와 도래인이라는 말을 붙이는 식으로 왜곡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타고간 메이플라워 등의 선편과 출발지· 도착시간· 승객명단 등의 기록이 분명히 있는데도 유럽에서 건너온 사실은 지워버리고, 단순히 도래인들이 미국에 문화를 전하였고 미국은 유럽문화의 영향을 엄청 많이 받았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사실은 도래한 유럽인들이 바로 미국인 자신이므로, 자기가 자기자신과 문화적 영향을 서로 주고 받았다는 식의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윤영식 씨의 연구에서는 위의 의문의 기록에서 보이는 왕인과 아직기 두 사람을,
왕인 = 근구수왕(백제 14대왕)
아직기= 아신왕(백제 17대왕)
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그리고 가락국왕 아리사등과 그의 두 아들, 그리고 그들의 이명(異名)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는데 이는 책의 한참 앞부분인 48쪽에서만 나온 것으로, 紀·記 상에 표기된 이명을 다 합친다면 이것은 극소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윤영식씨의 책 내용의 대부분은 등장인물의 이명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작업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리사등: 大俣王, 築紫君, 宣化천황, 己能末多干岐 등 9개의 이름
예진별명: 本牟智和氣明, 백제달솔日羅, 品遲(호무지), 火焰王, 火中君 등의 7개,
예전별명: 신라국왕자 天日槍, 천지일모, 伊蘇志, 譽田천황, 應神천황, 繼體천황, 神武 천황, 上植葉황자, 賀美惠波王, 築紫火君 등 무려 20개의 이름이 있다.
그 외에 紀·記 상에 나타나는 숱한 등장인물도 모두 이런 식으로 분식, 변조 등으로 처리되고 있슴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신도(神道)나 신사(神社)의 유래도 모두 풀어지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조상신을 수없이 쪼개어 이름을 달리하여 봉안한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5. 후지와라 사다모또 (藤井貞幹 1732~1797)
일본의 고대사서들이 반도어로 지어졌다는 것을 일본의 학자가 솔직히 고백한 글이 있다. 에도(江戶)시대 고증학자 후지이 데이칸(藤井貞幹)의 쇼코하쓰(衝口發)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글이 재일사학자 김달수 선생의 책에 인용되어 있다.
『일본기(日本紀)를 읽으면 처음 이 나라가 마한·진한의 이한(二韓)에 의해 열렸고, 아울러 변한(弁韓)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는다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옛날부터, 한(韓)으로부터 일이 비롯되었다는 것이 숨겨져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 나라 것만으로 무엇이나 다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어(韓語)를 왜어(倭語)로 보고서 가지가지 설(說)을 내세운 나머지 마침내는 그 본뜻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결국 일본역사는 馬韓· 辰韓의 二韓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한편 변한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읽었다면 진정 일본기를 읽었다고 할 수 없다. <古代日朝關係史入門, 김달수, 築摩書房, 159p>』 *여기에서의 일본기는 일본서기를 말함
필자가 에도시대의 고증학자였던 후지와라 사다모또에 대하여 위키피디아에서 다시 찾아본 글은 아래와 같다.
藤 貞幹(とう ていかん、1732年-1797)は、江戸時代中期の有職故実研究家。諱は藤原 貞幹(ふじわら さだもと)。字は子冬。通称・叔蔵。号は無仏斎・蒙斎・瑞祥斎・好古など。京都の佛光寺久遠院院主玄煕(権律師、日野家出身)の子。日本の文献学・目録学の祖とも言われている。なお、姓を「藤井」と称したとする説もあるが、誤伝によるもので事実ではない。
父親と同様に僧侶になるべく育てられ、11歳で得度する。だが、仏教の教えに疑問を抱いて18歳で家を飛び出して還俗、日野家の本姓である藤原を名乗った。宗家の日野資枝から和歌を、高橋宗直から有職故実を、持明院宗時から書道を、後藤柴山・柴野栗山から儒学を、高芙蓉から篆刻を学んだほか、雅楽・篆書・草書・金石文などに精通し、韓天寿や上田秋成とも親交を有した。後に水戸藩彰考館に招かれて『大日本史』編纂にも関与している。日野資枝の実弟で宝暦事件で逼塞していた裏松固禅と意気投合してその家臣となり、『大内裏図考証』の執筆を助けた。だが、その一方で発掘された出土品などを吟味して厳密な考証の必要を唱えて記紀の記述と言えども無条件でこれを支持すべきではないと主張し、神武天皇の在位を600年繰り下げて神代文字の存在を否定した『衝口発』を著すが、これが国学者達の反感を買い、特に神武天皇や素戔嗚尊(その正体を新羅の国王であるとした)の問題については本居宣長が『鉗狂人』を著して貞幹の考証が杜撰であると主張し、逆に上田秋成が貞幹を擁護して宣長の姿勢を非難するなど激しい「日の神論争」等の論争を招いた。他にも『百官』・『国朝書目』・『逸号年号』・『伊勢両大神宮儀式帳考註』・『古瓦譜』など自著多数がある。
위의 후지와라의 글은 비중이 있는 글이므로 그 원문을 그대로 옮겼으며, 그 일부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藤 貞幹(도오 데이깡、1732年-1797), 휘는 藤原貞幹(후지와라 사다모또). 성을 藤井이라고도 하나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일본의 문헌학· 목록학의 시조라고 이른다. 승려가 되는 교육을 받았으나 환속하여 여러 스승에게서 와가(和歌), 有職故実, 서도, 유학, 전각을 배웠으며, 雅楽・篆書・草書・金石文에 정통하였고 『대일본사』의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大内裏図考証』의 집필을 도운 적 있는데, 출토 유물의 엄밀한 고증의 필요를 제창하여 記紀 에 기술된 내용이라도 무조건 따르면 안된다고 주장하여 신무천황의 재위를 600년 끌어내려서 신대문자의 존재를 부정한 『衝口発』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국학자들의 반감을 얻었고 특히 신무천황과 소전명존(素戔嗚尊: 그의 정체를 신라의 국왕이라고 하였다)의 문제에 있어서는 本居宣長이 『鉗狂人』을 지어서 貞幹의 고증은 杜撰(전거가 제대로 안되어 틀린데가 많은 저술)이라고 주장하였고, 반대로 上田秋成은 貞幹을 옹호하여 宣長을 비난하는 등 격렬한「日の神論争」등의 논쟁을 불렀다.
6. 백제와 왜(倭)에 관한 수많은 책들.........
백제와 왜에 대한 의문을 품고 쓴 글들은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한도 끝도 없이 널려 있다. 그리고 몇십년전의 도서관에서도 지금의 제목과 비슷한 책들이 수없이 많았다. 모두 역사의 이면에 숨겨져 있었던 진실로서, 한가지 또는 그 이상의 단서를 발견하여 쓴 책들일 것이며, 이들의 전체를 실을 시간도 지면도 없어서 제목만을 올렸다. 이러한 책들은, 일부는 서로 모순과 오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고대사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지금까지 기술된 역사서보다 더 진실된 탐구서라고 볼 수 있으며, 당연히 보완 연구되어 일본과 한국의 고대사가 새로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속의 백제·나라(奈良)> 홍윤기 저, 한누리 미디어, 2009
<일본, 또 하나의 한국> 부지영 저, 寒松, 2009
<다시 찾은 한국 고대사 해외유적> 신형식, 주류성, 2012
<한국 고대사의 비밀> 김은석, 살림터, 2012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김운회, 동아일보사, 2010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百濟> 홍윤기 저, 한누리 미디어, 2010
<일본, 한국 이주민의 나라> 이성한, 큰책미래, 2012
<일본의 첫 왕은 한국인이었다> 이종기, 동아일보사 1997
또 인터넷에 내용의 일부가 소개된 책들은 아래에 옮긴다.
<패왕 후히토> 구로스 기이치로 저, 오근영 역, 태일출판사, 1997
<일본을 정복한 한국인 이야기> 프랭크 호소노 저, 신동란 역, 남도 1997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Dr. Jon Carter Covell, 2001
<일본고대사>고바야시 야스꼬(小林惠子) 저
일본 제40대 천무천황(天武天皇)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인가?
http://blog.daum.net/osowny/13947721
<신라 문무왕의 생부는 연개소문이다?>
http://cafe.naver.com/coreaspirits/1310
<연개소문을 생각한다>, 강준식 저
http://cafe.naver.com/bunkaing/997
7. 결론
7-1. 일본사 연구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어휘들:
앞에서 필자는 “유럽인들이 타고간 메이플라워 등의 선편과 출발지· 도착시간· 승객명단 등의 기록이 분명히 있는데도 유럽에서 건너온 조상들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단순히 도래인들이 미국에 문화를 전하였고 미국은 유럽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기록하는 식으로, 도래한 유럽인들이 바로 미국인 자신인데 자기가 자기자신과 문화적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관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일본고대사 기록의 핵심인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오래전에부터 거주하던 미국인과 새로 도래한 유럽인들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던 것처럼 변조하여 기록한 것으로, 이러한 이유에서 세 분 역사가는 이들 고서적들을 <위서, 위기, 허기>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일본고대사 연구에서 세 분의 역사가가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대한 연구에서 사용한 단어와 어휘들은 각각 아래와 같다. 50년이라는 시대를 넘어 세 명의 역사가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어휘들은 억지로 짜 맞추어진 것은 아니며, 앞으로 누가 일본사를 연구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의미의 어휘나 용어가 사용될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 밖에 없는 성격인 것이다. 참고로, 김성호와 윤영식 두분의 연구는 독자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으로 보이며, 내용에 있어서도 서로가 참고한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사용한 어휘:
기록의 삭제, 훔쳐다 만든 것, 본떠서 끼워넣기 등
김성호 씨가 사용한 어휘:
이중, 이분법(二分), 공백기를 은폐, 6대의 계보를 가구(假構)시킴, 이원화(二元化), 가공(架空), 동명실체(同名實體), 동일실체(同一實體), 허구적 존재, 위사(僞史)체계, 만세일계(一系)의 위기년(僞記年), 가구(假構)적 존재, 무수한 위작(僞作)의 관제, 가구(假構)된 황통(皇統), 고고학적인 사도(詐道) 등
윤영식 씨가 사용한 어휘:
위사(僞史), 이중구조, 표리(表裏), 암호서(暗號書), 동일인물, 분식(粉飾)처리된 인물, 암호의 해독표, 허기(虛記), 위조된 국가, 실연대와 가공연대의 이원화(二元化) 등
7-2. 일본 국가기원에 대한 종결자: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다양한 전거와 풍부한 사료, 그리고 수많은 목격자(발굴자)들의 증언, 일본 현지 방문자의 가슴에 와닿는 느낌 등으로 고대사를 제대로 서술할 수 있음에도, 아직까지 한국·일본의 고대사에 대한 역사교육이나 연구가 이러한 시각에서 진행되어 온 것은 없고 몇십년 전 비전문가가 목격한 그대로 답보하고 있는 것이 한국과 일본의 현실이다.
윤영식 씨는 그의 저서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에서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나타나는 방대한 의문을 거의 남김없이 해독해내고 있슴을 알수 있는데, 이러한 연구는 다른 어떤 류의 해석보다 본질에 접근한 것으로 일본고대사 특히 일본의 국가기원을 파헤친 연구에서는 종결자가 아닌가 싶다. 일본 고대사의 왜곡된 사실을 간파한 단재 신채호 선생과 김성호 씨,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발전시켜 일본고대사의 구석을 남김없이 파헤친 윤영식 씨의 연구가 어느 누구의 눈에도 뻔한 역사적 사실임이 감지되는데도 수십년간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슴은 참으로 의아한 일로서, 그의 저서가 일본의 국가기원에 대한 종결자의 자리를 제대로 찾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