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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7장 28~2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표준새번역>
2020년 4월 12일 부활주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부활 주일 그 이후 월요일, 그리고 오늘 화요일...아직은 부활주일에 했던 결심이 작심삼일이 아니라 잘 유지되고 있으십니까? 우린 부활 주일 그 이후에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요? 저는 오늘 부활 이후 우리가 집중하고 몰입해야 할 한 가지 화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되었던 길고 긴 ‘산상수훈’이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끝으로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나 듣는 내내 지겨움을 느꼈을까요? 하품을 했을까요? 졸음이 몰려왔을까요? 아무리 짧게 잡아도 몇 시간은 족히 말씀을 들어야 했을 터인데...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만약 2020년 현재에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면 어떤 분위기였을지 한 번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확실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지금도 그렇듯이 당시의 많은 무리들이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질문 거리들이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성경은 듣는 이들에 대해서는 전혀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본문을 미루어보건대 그들은 숨죽인 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어떤 이도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으며 끝까지 경청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특별한 이야기들이 있었다면 기록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장 9절에 보니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라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청중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28-29절에 기록한 대로 ‘권위’가 있었기에 숨죽여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숨죽인채 몰입한 청중이 있었던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긴 설교 한편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감상평과 한 줄 평은 마태복음 저자가 전하는 대로 ‘권위’였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권위! 바로 그 권위를 경험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권위’란 말은 참 좋은 뜻의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안 좋은 예로 사용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유교권인 나라에서 ‘권위’라고 하면 뭔가 답답하고, 꽉 막힌 느낌을 줄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권위'적인 아버지, '권위'적인 선생님 등으로 표현되어 질 때는 그 아버지나 선생님이 그렇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권위가 강제적이고 독단적인 느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권위'가 아니라 '권위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권위적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권위적이라고 느낀 것이 아닙니다. ‘권위’! 그 자체를 느낀 것입니다. 한글 사전으로 보면 권위란 “남을 지휘·감독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 또는 “일정한 부문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 또는,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권위적'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아니라 '권위'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정말 맞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권위적인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은 권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에게서 ‘권위’를 느낀 것입니다. 그랬기에 놀랐습니다.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가치였던 ‘권위’를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사람들을 무엇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권세’를 경험하게 된 것일까요?
첫 번째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권위가 있는 척했던, 권위적인 율법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는 율법학자들과는 다르게 스스로 가지려고 하는 권위가 아니라, 하늘에서 부여한 권위가 느껴진 것입니다. 그 하늘로부터 주어진 권위는 ‘말씀’ 그대로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을 믿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오랜 시간동안 형성된 장로들의 전통과 자신 나름대로의 해석과 자신들의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인데 인간의 권면처럼 더욱 느껴지게 되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로부터 바리새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 사람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손을 깨끗이 씻는 정결의식을 거친 뒤에야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장로들의 전통이 법이 되어버린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까지 사용한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오류가 시작됩니다. 자신이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 말씀을 도구 삼아,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권위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권위를 가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에 바로 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자마자 수문 앞 광장으로 모든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잠시 그 현장으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8장 1~3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한꺼번에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학자 에스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라고 청하였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에스라 제사장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나왔다. 거기에는,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나와 있었다. 그는 수문 앞 광장에서,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에게 새벽부터 정오까지, 큰소리로 율법책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려 새벽부터 정오까지 6~12시까지 6시간을 넘게 큰 소리로 율법책을 읽어주었던 학자 에스라가 바로 율법학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신대로 학자 에스라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 즉 ‘신명기’로 알려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큰소리로 읽은 것 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한 구절도 에스라의 생각이, 신념이, 전통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이기에, 그대로 전할 때 에스라의 선포에서 권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 5-6절입니다.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이 모습이 에스라의 모습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에스라는 그저 높은 단 위에서 책을 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큰 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던 것뿐입니다. 이것이 설교자들의 고유 역할인 '말씀의 통로'입니다. 말씀이 ‘나’라고 하는 필터를 거쳐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통로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어질 때 나타나는 놀라운 능력이 바로 ‘권위’입니다. ‘태조왕건’이라던가 ‘불멸의 이순신’ 같은 사극을 보면 왕의 명령을 들고 온 사자가 “어명이오” 하고 외칠 때가 있습니다. 근데 그 소리를 듣고서는 모두 바닥에 납작 엎드립니다.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모두 알고 계시는 것처럼 그 편지를 들고 온 전령이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령은 그저 한 명의 전령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어명’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전해야 할 ‘왕의 명령’을 그대로 읽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권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의 명령이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아니면 리더들이 조심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불필요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잣대로 필터링하면서 변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더 좋은 전달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나의 신념이나 생각을 담고자 하는 노력이라면 그것은 결국 목회자 스스로 권위적이 되려고 하는 모습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짜 목회자나, 리더가 권위가 있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그대로 전하는 통로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명령한 말에 한 마디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전했던 모세였기에 모세의 말에도 권위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명령처럼 우리는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통로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권위를 경험하게 된 이유는 바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들었던 재미’에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부분의 권위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따분하고 지루합니다. 혹시 그 옛날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 기억나십니까? 굉장히 유익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셨지만 지금 우리 기억에 남은 것은 개그맨들이 패러디한 재미난 모습 밖에는 없습니다. 옥동자 정종철씨가 하던 에코가 걸린 교장선생님의 목소리 “여러부~우~~운~~운~~” 이런 것으로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따분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오래 들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재미없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버티고 버티어 보지만 자꾸만 무거운 눈꺼풀이 잠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길고 긴 산상수훈의 설교시간동안 한 사람도 ‘졸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권위를 경험했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들었던 재미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재밌습니다. 왜 재 미있는 줄 아십니까? 바로 나를 향한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향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권위와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초대를 받아서 완전히 그 말씀에 푹~빠졌다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 응한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아멘! 예수님과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토록 사랑하는 그 분과 함께 대화를 이어간다면, 그 분의 유쾌한 말씀을 목전에서 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몰입하면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꿈꾸면서 써내려간 책 시리즈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함께한 저녁식사, 예수님과 함께한 가족회의, 예수님과 함께한 가장 완벽한 하루 등등 읽어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예수님과 그렇게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로 허락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원한다면 이 예수님과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연한 그것이 너무도 해보고 싶은 소원이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우리 삶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희망하는 것이 되었을 때는 분명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포인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박소현’이라는 탤런트가 꽤 오랫동안 진행중인 SBS 라디오채널 107.7채널에 ‘박소현의 러브게임’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매일 저녁 6시면 진행이 됩니다. 그 프로그램 중 6시 30분만 되면 ‘러브게임의 법칙’이라는 순서가 진행됩니다.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결혼하고' 하는 청취자들의 이야기를 재밌게 편집해서 내보내는 그런 상상하면 뻔한 그런 순서의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그 뻔한 순서가 그 프로그램 중 시청률이 가장 높습니다. 보통 3~4%만 되어도 시청률이 높은 편인데, 순간 시청률이 20%를 넘어설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그 흔한 사랑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요? 왜 사랑이야기가 나오는 드라마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을까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그 드라마를 볼 때만큼은 왜 세상 근심 걱정 구름이 다 사라질까요? 왜 숨죽여 남녀주인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까요? 왜 같이 눈물을 흘릴까요? 왜 중요한 부분에서 끝나면 화가 나면서도 예고편을 기다릴까요?예고편을 보면서 다음주 다시 방솔할 그 시간을 기다릴까요?
바로 권위와 재미가 있긴 때문입니다. ‘사랑’이 주는 권위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국경도, 인종도, 나이도, 환경도 모든 것을 초월하게 만드는 그 힘! “The Power of Love”에 대해서는 전세계가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요한1서 4장 8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실로 권위를 가집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권위에 재미까지 더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때 바로 ‘몰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어떤 환경이라도 ‘몰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권위와 재미의 콜라보는 '시간순삭'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어려운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요즘 예배 때마다 ‘몰입’하고 계십니까?예배가 시작하기 전부터 준비하고, 예배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하나님께 정신없이 빠져들어 찬양이 끝나고, 기도가 끝나고, 설교가 끝나고,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쉽다고 느끼실 정도로 몰입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너무 좋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께 ‘몰입’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죄송합니다만 혹시 그 반대입니까?
요즘 하나님과 1대1로 만나는 ‘몰입’의 시간이 있으십니까?
삶 가운데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몰입’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혼란하고 어지럽고 답답한 세상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몰입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혹시라도 오늘도 세상의 소리에, 다른 사람의 소리에, 내 속의 수많은 복잡한 감정에 ‘매몰’되어 계십니까?
우리의 신앙은 권위 있는 말씀 속에서 느끼는 재미를 통해 성장합니다. 혹시라도 여기서 재미라는 단어를 그저 단순히 ‘웃기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말씀드리는 ‘재미’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느낄 수 있는 모든 ‘행복한 감정’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 감정을 모두 느낀 적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이 감정으로 넘쳐났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샌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재미에서 멀어지자 우리의 신앙은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권위의 말씀이 자꾸만 권위적으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간절히 소망합니다. 간절히 요청합니다. 다시 그 날의 충만했던 권위와 재미를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한 번 몰입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시간만이라도, 기도시간만이라도 완전히 몰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 그 차체의 권위가 주는 그 진짜 ‘재미’를 다시금 경험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바로 지금 여기, 오늘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편지로 받아보시길 소망합니다.
혹시 아무리 생각해도 참 어려운 일이라고 느껴지십니까? 여기 한 가지 위로가 있습니다. 저렇게 산상수훈을 권위 있게 경험했던 무리들도, 직접 현장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무리들도, 가장 앞자리에서 그 말씀을 생생하게 들었던 제자들도 모두 그 자리에서는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권위를 경험했지만 그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은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아멘! 권위를 경험했다면 그 권위를 나의 삶으로 바꾸시고, 그대로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청개구리처럼 말을 안 듣던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변화되었을 때 그들이 행하기 시작한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뭐 엄청나게 새롭고 큰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미 들었던, 이미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면서 산 것입니다. 그저 말씀대로 살아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듣고 그대로 행하면 ‘몰입’은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산상수훈의 설교를 들었던 그 무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갑니다. 혹시 말씀이 주시는 ‘권위’를 성경을 읽으시거나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경험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권위’ 때문에 감탄하고 놀라셨습니까? 혹시나 다른 율법학자들과 같지 않다고 느끼셨습니까? 온전히 몰입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몰입’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살아낼 때가 온 것입니다. ‘권위’이신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잊지마십시오. 언제나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마무리 되지만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또 다른 예배, 즉 삶의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예배에서도 승리하셔야 합니다. 그 삶의 예배에서 들은 그대로 행하시는 반석위에 세운 집으로 살아내셔야 합니다. 매일을 승리하시고, 권위이신 말씀의 재미를 통하여 언제나 하나님께 ‘몰입’하게 되는 예배자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부활 그 이후...이제 하나님께 '몰입'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찬양에, 예배에 온전히 몰입하시는 부활 이후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