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의 가치사전
이것은 지은이의 방대한 지식과 함께 주관적인 의견이 반영되어 있다.
‘효라는 것은 봉양하는 것을 일컫는다. 개와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봉양함이 있다. 공경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구별하겠느냐?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 효도가 개와 말을 먹여 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공자
미개한 소규모 사회에서는 지도자는 있되 지배자는 없다. 브라질 인디언에게 우두머리란 힘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짜증나고 귀찮은 일을 해야 하는 일꾼에 불과했다.
현대인들이 부나 권력의 추구를 유일한 삶의 목적으로 삼는것은 그 외에 더 이상 추구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권력 - 강함의 증거가 아니라 약함의 증거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남을 지해하는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세계의 지배자고팠던 알렉산더 대왕의 비석 ‘ 온세상이 마음에 차지 않던 그였지만, 이제 무덤하나로 충분하다’
산업화의 핵심에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노동으로 돈을 벌고 자신이 복무하는 조직에 영혼조차 기꺼이 내놓는 충성스런 ‘조직인간’의 탄생이 있다. 분업은 생산물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도 바꾸어 놓았다. 프롬은 ‘ 어떤이는 심한 불안감과 고독감에 사로잡혀 계속 일하고, 또 어떤이는 야망이나 돈에 대한 욕심에 쉬지않고 일한다. 이런 경우 그들은 열정에 속박된 노예이고, 계속 쫓기는 그들의 활동은 사실상 수동적이다.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라 수난자이다.
노동은 경제적 의미만을 부여받는 한, 노동은 즐거움이 될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돈’을 벌기위해 일할 뿐이다. 돈을 벌기 위한 노동에는 휴식이 있을수 없다. 돈이 가져다 주는 만족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누리고 무엇을 할때 ‘ 이것을 왜 하면 안되는가’보다 ‘이것을 왜 해야하는가?’를 물어라
자유를 가로막는 것은 내부에도 있다. 무의식과 습관이다.
인류애 간디‘ 길이야 말로 목표다’ ‘가까운 친족에게 화내지 않는 사람은 믿을만하다. 낯모르는 사람에게 자기성미를 억제하는 것은 누구나 잘할수 있다’
소비의 진정한 목적은 최소의 소비로 최대의 만족을 얻는것이다.
교육은 무조건적인 선이 아니다. 교육이 중요한 것은 ‘선’이 아니라 그 치명적인 ‘영향력’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의 부패가 가장 나쁜것이므로’
인도의 언어에는 가르침이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배우는 것을 도울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가르칠수 는 없기 때문이다. 우파티샤드‘ 나의 학생들이여, 여러분들은 무엇이든 내게서 선한것을 발견하면 따르시오. 그러나 선한것을 발견하지 못하거든 결코 따르지 마시오’
오늘날 교육의 가장큰 문제점은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지식이라도 내면화된 지식과 그렇지 않은 시직은 하늘과 땅차이이다. 헬렌켈러는 두 살때 선생님의 도움으로 글쓰기를 배웠다. 설리번은 ‘ 우리는 펌프로 갔다. 나는 펌프질을 하며 헬렌에게 컵을 입구의 아래쪽에 대고 있도록 했다. 찬물을 길어 컴을 채웠을때 나는 헬렌이 내민 손바다에 water이라는 글자를 썼다. 아이의 손에 흐르는 물의 차가운 느낌과 직접 연관된 물이라는 단어는 헬렌을 놀라움으로 갑자기 멈추어 서게 했던 것이다. 아이는 물이라는 글을 반복해서 썻고 이내 펌프와 울타리등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리고 내이름을 물었다. 나는 아이에게 내 이름을 써주었다.’ 설리번이 헬렌에게 이전에 물이라는 단어를 설명해 주었다. 컵속에 물을 헸갈리지 않게... 그러나 그때 헬렌은 그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우물가으 차가운 감촉으로 물을 풍부하게 체험했을때 헬렌은 현실과의 연관성을 깨닫고 새롭고 감동적인 경험으로 물을 내면화할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학생들은 생기없는 관념을 주입하고 외운다.
유협 <문심조룡> 사람에 따라 글쓰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 생각이 정밀한 사람은 글을 짧고 간결하게 쓰는데, 학색이 부족한 사람은 글을 짧고 부족하게 쓴다. 박식한 사람은 글을 풍부하고 상세하게 쓰는데, 생각이 난삽한 사람은 글을 번다하게 쓴다. 논리적인 사람은 글을 명료하게 쓰는데, 생각이 천박한 사람은 글을 노골적으로 쓴다. 사상이 깊은 사람의 글은 인용이 풍부하여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어려운데, 단순히 그런체를 하는 사람의 글은 그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이간은 인쇄물을 대할 때 능도적으로 반응하지만, 텔레비전을 볼때는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뇌파의 활동은 느려지고 팔다리는 마비된듯 움직임이 업삳. 우리는 피비시청을 여가 ‘활동’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여가‘수동성’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