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윤리적 이견 일치시켜 나가야 일부 분야만 상세히 규정…대리모·인간대상 연구등은 정책 자체 없어
의료윤리연구회(회장 이명진)는 지난 5일 11번째 연구모임을 가졌다. '생명·의료윤리와 법의 만남'을 주제로 한 세번째 시간인 이날 연구회는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최경석 교수가 '한국의 생명의료윤리 정책 현황과 발전방향'을 강의했다. 강의후에는 토론이 이어졌으며 홍성수 운영위원(대한이비인후과개원의사회장)이 사회를 맡았다.
최 경 석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교수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 운영위원 철학박사
생명의료윤리의 쟁점들과 관련된 국내 정책의 현황은 간단히 말하자면 일부 영역은 지나치게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지만 일부 영역은 아예 어떠한 법령이나 학회의 지침조차 없는 불균형 상태에 있다. 배아연구, 유전자검사, 연구 및 치료와 같은 영역은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 의해 지나치게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고, 장기 관련 영역은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의해, 낙태는 '형법'과 '모자보건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모자보건법'의 낙태 허용 사유는 부와 모를 중심으로 규정되어 있어, 배아 및 태아에 대한 일부 유전자검사 항목을 허용하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과 정합적이지 않다. 보조생식술이 야기하는 부와 모의 결정 문제는 새로운 의학기술을 반영하지 못한 '민법'의 조항에 따라야 하는 문제가 있고, 대리모에 대한 문제는 아예 법령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정책 자체가 없는 실정이다. 인체유래물연구를 포함하여 인간대상연구 일반에 대한 법령이 없고, 의약품임상시험의 경우에만 '의약품임상시험관리기준'이란 식약청의 고시가 있을 뿐이다. 죽음의 기준에 대해서는 심폐사를 법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혹자는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장기기증을 희망하는 자에 한해 전뇌사를 인정하고 있다고 보기도 하지만, 정작 법령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살아 있는 자와 뇌사자, 사망한 자를 구분하고 있어 이러한 해석 또한 충분히 옳다고 보기 어렵다. 연명치료중단이나 안락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병원이나 의사협회의 가이드라인 정도가 있는 정도이고 연명치료중단에 대한 대법원 판례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생명의료윤리의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합의가 부재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윤리적 이견에 직면하여 정책적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합의를 위한 의사소통의 장이 현실적으로 많지 않고, 상호 존중을 통한 대화와 협력이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소양 역시 서구 사회에 비해 성숙하지 못한 것도 우리의 현실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생명윤리정책'(bioethics policy)이란 분야가 학술적 차원에서 개발될 필요가 있다. 생명윤리정책이란 분야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생명의료윤리학의 학문적 성격과 서로 구별되어 이해될 필요가 있는 생명윤리 및 생명윤리학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생명의료윤리학(biomedical ethics)을 '응용윤리학'(applied ethics)이라 부르지만, 이것은 규범윤리학에서 개발된 규범들 또는 이론들을 특수한 전문영역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는 잘못된 기획을 전제로 한 명칭이다. 이와 같은 적용으로 생명의료윤리학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생명윤리학에서 예전 규범윤리학의 연구에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생명윤리학, 의료윤리학 또는 생명의료윤리학은 차라리 '실천윤리학(practical ethics)'이라 불리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의료윤리학을 단지 윤리학의 한 분야로만 이해하는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다. '생명의료윤리' 또는 '생명의료윤리학'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영어의 'ethics'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에서도 '윤리'가 '규범의 체계'를 의미하는 경우와 '윤리학'이란 학문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학문을 의미하는 경우에는 '윤리학'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넓은 의미의 생명윤리 또는 생명윤리학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공동체의 바람직한 접근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활동을 의미하며, '생명'에 대한 외경의 요청과 함께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숙고되어 온 주제로서의 생명에 대한 윤리적 담론을 포함한다. 그래서 인간 및 동물 등 생명을 지닌 존재자의 생명존엄성에 대한 담론을 뜻한다. 필자는 이것을 '생명철학' 이나 '생명사상'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생명윤리는 좁은 의미의 생명윤리 또는 생명윤리학이다. 이것은 의생명과학의 발달로 야기된 새로운 문제를 다루는 연구 분야를 지칭한다. 좁은 의미의 생명윤리는 우선, 의료인이나 의생명과학 연구자의 전문직 수행과 관련된 윤리 즉 전문직 윤리(professional ethics)를 의미한다. 이 경우 생명윤리와 법조윤리, 언론윤리, 공직자윤리 등과 같은 종류이다. 그러나 생명윤리학은 이러한 규범들 및 그 체계에 대한 이론적 연구, 개별 윤리적 쟁점들에 대한 학문적 탐구를 의미하면서 윤리학의 한 분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의생명·과학의 발달에 따른 윤리적.법적.사회적 문제에 대해 탐구하는 학제적 연구 분야로 생명의료윤리학을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ELSI(Ethical, Legal, Social Implication) 연구는 생명윤리의 학제적 연구를 의미한다. 따라서 생명윤리, 생명윤리학, 생명윤리정책이 개념적으로 구분될 필요가 있다. 우선, 생명윤리는 의사 및 생물학자의 전문직 윤리로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 규범들의 체계를 의미한다. 생명윤리학은 생명윤리적 문제에 대한 학문적 탐구 영역으로서, 학제적 성격의 연구 분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명윤리적 문제들은 어느 한 학문분야의 접근만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윤리정책은 생명윤리적 문제에 대한 다양한 윤리적 이견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정책적 문제에 대한 탐구 영역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윤리정책은 새롭게 개발될 필요가 있는 연구 분야다. 이 분야는 생명윤리의 문제에 대한 정책 입안 및 정책 결정과 관련된 영역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학제적 연구 분야이다. 주요 연구과제는 윤리적 쟁점들에 대한 정책 수립시 어떤 정책이 가장 바람직한지 평가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것이다. 아울러 생명윤리정책이란 연구분야는 정책 입안의 모델에 대한 연구, 윤리적 문제의 이성적 불일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연구, 이성적 불일치라 판단되는 문제에 대한 정책적 결정 방식 및 그 정당성에 대한 연구 등을 포함한다. 이와 같은 생명윤리정책이라는 연구 분야가 필요한 것은 전통적인 생명윤리학의 한계와 관련이 있다. 단순히 자신의 윤리적 가치체계나 세계관에서 정당화되는 윤리적 해답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서로 다른 다양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지닌 다원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생명윤리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고착되어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윤리적 해답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해당 문제를 공적 이성이 발휘되어야 하는 법이나 정책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윤리적 이견들 그러나 이 이견들이 이성적 불일치라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상호 존중의 태도를 가지고서 대화를 통해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다. 생명윤리, 생명윤리학, 생명윤리정책은 상호보완적이며 협력적인 관계에 있다. 생명윤리의 규범체계가 제기하는 학술적 문제는 생명윤리학의 연구대상이고, 생명윤리학 연구를 통해 산출된 윤리적 이견들은 다시 생명윤리정책의 탐구대상이며, 이를 통해 확립된 믿음들 중 일부는 다시 생명윤리의 내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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