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 3년(928)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냈다. “엎드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상서(尙書) 반(班)씨가 전한 바의 조서 한 통과 아울러 족하의 사정을 서술한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중국 사신이 조서를 가지고 왔고, 흰 비단에 쓴 그대의 좋은 편지에서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조서를 받들어 보니 비록 감격을 더하였으나 그대의 편지를 뜯어 보니 혐의를 지울 수 없습니다. 이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제 뜻을 펴 전하려 하오. 저는 위로는 천명을 받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맡고, 천하를 다스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난 번에 삼한이 액운을 당하여 전국이 흉년으로 황폐해져 백성들이 많이 도적에 속하였고, 모든 농토는 농작물이 말라 붉은 땅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변고를 막고 나라의 재앙을 구제하기 바랐습니다. 이에 스스로 선린을 하고 우호 관계를 맺어 수천 리의 농토가 편안히 농사지어지고, 7∼8년간 병졸이 쉴 수 있었습니다. 을유년(925) 10월에 이르러 문득 일을 일으켜 교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대는 처음 적을 가볍게 보고 직진하였으니 마치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침내 어려운 줄을 알고 용감히 퇴각하였으니 마치 모기가 산을 등진 것처럼 신중한 조처였습니다. 손을 모으고 말하기를 하늘을 두고 맹세하여 금일 후에는 길이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진실로 혹 맹서를 어긴다면 신이 벌을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또한 창을 씀을 멈추는 무(武)를 숭상하며,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이루겠다고 기약하였습니다. 드디어 겹겹으로 포위한 것을 풀어 주고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인질의 보냄을 사양하지 않아 오직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제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인데, 맹세할 적에 바른 피가 마르기도 전에 음흉함이 다시 발작하여 벌과 전갈의 독을 생민에게 쏟으며, 이리와 호랑이의 광기가 서울 근처를 가로막아 금성이 급박하여지고, 어가가 놀라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의리를 지켜 주(周)나라(여기서는 신라를 지칭)를 높임을 누가 환공(桓公), 문공(文公)의 패업과 비하겠습니까? 틈을 타서 한(漢)나라 전복을 도모한 사람으로 오직 왕망과 동탁의 간사함을 볼 뿐입니다. 왕의 지존한 분으로 하여금 굽혀 그대에게 자식으로 칭하게 하여, 높고 낮은 상하의 질서를 잃어버리게 하였습니다. 신라의 상하가 함께 걱정하기를 큰 보필자의 충순함이 있지 않으면 어찌 사직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마음에 악을 숨기지 않았고, 뜻이 왕을 높임에 간절하다고 하여 장차 조정에 끌어들여 나라의 위태로움을 붙들게 한 것입니다.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이익을 보기 위하여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임금을 목베고 궁궐을 불질렀으며, 신료들을 죽여 젖을 담고, 관료와 백성을 도륙하였으며, 종실의 여자를 취하여 같은 수레에 태우고 보물을 바리에 실어갔으니 이 큰 죄악은 걸왕 주왕보다 더하고, 불인함은 제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보다 심합니다. 저는 왕의 죽음에 대한 지극한 원한과 해를 돌리려는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사냥함을 본받고, 견마(犬馬)의 부지런함을 바치기로 참으로 길이 서약했습니다. 다시 방패와 창을 든 후 느티나무와 버들잎이 두 번 바뀌는 사이에 육지의 공격에서는 우뢰같이 달리고 번개같이 공격하였고, 해전의 공격에서는 호랑이가 뛰고 용이 날 듯하여, 움직였다 하면 반드시 공을 이루었고, 활을 들었다 하면 빗나감이 없었습니다. 해안에서 윤빈을 쫓을 때에는 빼앗은 갑옷이 산처럼 쌓였고, 성 언저리에서 추조(鄒造)를 사로잡을 때에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연산군(충남 논산군 연산면)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 앞에서 길환(吉奐)을 목베었고, 마리성(馬利城, 경남 함양군 안의면) 언저리에서 수오를 군기 앞에서 죽였으며, 임존성(충남 예산군 대흥면)을 함락하던 날 형적(邢積) 등 수백 명의 목숨이 버려졌고, 청주를 격파할 때에는 직심(直心) 등 네 다섯 명이 머리를 바쳤으며, 동수(桐藪, 대구 팔공산 동화사 부근)에서는 깃발을 바라다보고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 경북 성주군 성주읍)에서 입에 구슬을 물고(銜璧) 투항하였고, 남쪽에서는 강주(康州, 경남 진주시)가 귀부하였고, 서쪽에서는 나부(羅府, 전남 나주시)가 복속해 왔습니다. 치고 공격함이 이와 같으니 (전국을) 수복할 날이 어찌 멀겠습니까? 반드시 지수(沚水, 중국 하북성 원씨현 서쪽을 흐르는 지하)의 군영에서 장이(張耳)의 천 갈래 원한을 씻고, 한왕(漢王) 유방이 오강(烏江, 중국 안휘성 화현 동북쪽을 흐르는 강) 가에서 항우를 크게 격파한 공을 이루어, 마침내 전쟁을 종식하고 천하를 길이 맑게 하기를 기약하는 바입니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운명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오월왕 전하의 덕이 넉넉하여 먼 곳까지 포용하며, 어짊이 깊어 작은 나라를 사랑하여 궁성(丹禁, 붉게 칠한 왕의 궁성)에서 조서를 내어 청구(靑丘)의 난리를 그치라고 타일렀고, 이미 가르침을 받들었으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공경스럽게 조서의 뜻을 받들어 흉한 마음을 거둔다면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해동의 끊어진 계통을 이을 수 있지만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