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수도원제도
초기의 그리스도교 수도원 공동체는 이집트 사막에서 시작되었다.
사막 교부(Desert Fathers)의 전통을 가장 잘 대표하는 사람은 4세기초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모아 최초의 수도원 공동체를 조직한 이집트의 은수자 성 안토니오(250~355경)이다. 이들 이집트 수사들과 수녀들은 가족관계·성관계·재산을 포기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했다. 이러한 생활의 목표는 유혹과 영적 싸움을 계속함으로써 개인의 구원을 성취하거나 하느님과 연합을 이루는 데 있었다.
또다른 예는 성 바실리오스(329경~379경)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누이 마크리나 2세(327~379)와 함께 카파도키아에 있는 그들 가족 소유의 토지에 남자와 여자를 위한 수도원을 하나씩 세웠다. 바실리오스는 대수녀원장이나 대수도원장이 감독하는 공주(共住)수사 수도원에서 여전히 엄격하고 금욕적이기는 하나 덜 가혹한 생활의 방침을 택했다. 이 수도원 회칙의 또 다른 특징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보다는 사회에 대한 봉사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제도는 4~7세기 비잔티움 제국시대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으며, 1050년 키예프, 1354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이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조직적인 수도원 생활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에 들어 온 것은 그보다 늦었다. 이 제도가 5세기에 유럽에 도달했을 때 히포의 아우구스티노와 그외 사람들은 형태를 바꾸어 받아들였고, 이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들과 수녀들의 생활방식으로 삼았다. 이집트의 금욕주의적 훈련은 갈리아의 수많은 개별 고행자들과 은수자들에 의해 거의 원래 형태대로 지켜졌으며, 그 핵심 지도자는 투르의 주교 성 마르티노(316~397경)였다.
마르티노가 지도했던 큰 규모의 마르무티에 대수도원에서는 전도자들이 온 지방으로 나갔다. 갈리아의 수도원제도는 특히 아일랜드에 뿌리를 내렸으며, 그곳에서 높은 수준의 문학을 발전시켰고, 서쪽의 작은 섬들과 영국 북쪽과 남쪽의 켈트 주변 지역을 지배했다.
라틴 수도원제도를 확립한 사람은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480경~547경)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몬테 카시노에 있는 그의 수사들을 위해 회칙을 만들었는데, 그 회칙의 훈계와 경구가 독창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그 자체는 훌륭한 문서로서 공주수도원 생활형태의 탁월함, 대수도원장의 권위, 적당한 금욕생활, 주야로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기도와 찬송의 예배인 성무일도(聖務日禱)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베네딕토 회칙을 따르는 은수자들은 수도원에 들어올 때 순명, 견실한 수도원생활, '회개'(conversio), 즉 습관의 변화를 서약해야 했다.
전통적으로 청빈과 정결의 서약이 이 '회개'의 일부로 간주되었는데, 이 회칙은 점차 확산되어 결국 다른 회칙들을 대체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 전반을 통해 수도원제도는 그리스도교의 전파, 교황들의 권위 향상, 학문의 보존과 증진 등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 시기에는 경제적·문화적 영향력도 컸다.
그리스도교 수도원제도의 가장 중요한 개혁운동은 8세기초 아니안느의 베네딕토, 10세기의 클뤼니와 그 밖의 지방에 있던 베네딕토 수도회, 12세기에 시토 수도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탁발 수도회(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설립되고 13세기에 대학들이 전성기에 이르자 전통적인 수도원제도는 문화적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다시 서서히 본래의 목적을 회복하여 사회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지만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성화의 길을 제시하게 되었다.
19세기에는 수도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정교회, 영국성공회, 일부 개신교회의 수도원들이 세워졌고 테제 공동체 같은 에큐메니컬 집단도 생겨났다.
동양 종교의 수도원제도
동양 종교 초기 수도승의 유형은 은둔자나 고독자였을 것이다. '스라마나스'(Śramaṇas : 산스크리트로 '은둔자')는 인도에 최초의 원시 드라비다인이나 선(先)아리아인이 정주했던 지역에서는 BC 1500년경 이전부터 있어온 것 같다. 초기 힌두교 시대(BC 600경~200경)에는 엄격하게 조직된 공동생활을 하지는 않았으나 무리를 이루어 사는 은둔자들(ashrams)이 있었다.
조직된 수도원 생활을 영위했다고 할 수 있는 종교로서 최초라고 할 자이나교의 수도원은 아시람 공동체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설립자로 전해지는 마하비라는 그의 추종자들을 신앙을 확고히 고백한 남·녀 수도승과 신앙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덜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평신도로 나누었다. 후에 자이나교는 두 종파로 나뉘었으며, 그중 하나가 여자 수도승을 승인하지 않는 디감바라스파이다.
자이나교는 극단적인 형태의 극기와 금욕을 실천했다. 자이나교 수도승은 동물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피하며 일부는 옷을 전혀 입지 않고, 또 많은 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단식을 했는데, 이러한 규율의 엄격성은 20세기에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불교는 수도 형태가 매우 뚜렷한 종교이다. 불교의 수도원은 '상가'(saṅgha)라는 조직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도교의 베네딕투스 수도회 수사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수도승들도 자기탐닉과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2가지 극단을 피하고 대개 온건한 규칙을 지킨다. 또한 자이나교도처럼 불교도들도 계급 구별을 무시했다.
원래 수도승과 평신도들은 서로 지극히 가까웠으며, 이 전통은 동남 아시아의 소승불교 국가들에서 지속되어왔다. 여승의 수는 결코 많지 않았는데, 석가모니는 여자를 받아들여 수도원을 이루는 것을 몹시 꺼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많은 여자들이 승려가 되었으며, 그들은 남자 수도승들과 떨어져 지냈고, 항상 남자 수도승보다 열등하게 여겨졌다. 선불교 제도는 간소한 식사, 단순한 의복, 수도생활에서 명상과 노동의 의무를 강조하면서 초기 수도원의 엄격성으로 돌아가고자 힘썼다.
도교 역시 몇몇 수도공동체를 발전시켜 명상을 했는데, 불교의 수도공동체와 다소 비슷하다. 힌두교에서는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상카라(Śaṅkara)가 9세기에 아마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4개의 수도공동체를 세운 듯한데, 이들은 오늘날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상카라의 규율에는 수도회의 수장이 없으며, 각 대수도원장이 후계자를 지명했다.
그는 자기 구역을 여행하면서 힌두교 경전에 따른 법(Dharma)을 설파했다. 불교와 자이나교의 수도공동체나 중동과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힌두교의 수도공동체도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의 수도원제도
수도생활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수도승 또는 수행자라고 하고, 이슬람에서는 수피라고 하며, 가톨릭에서는 수도자라고 한다. 개신교에는 특별히 수도자라는 계층은 없으나 항시 기도생활을 권장한다는 면에서,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는 금식기도를 권장한다는 면에서 일반신도에게 수도생활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동학 등 한국 고유의 종교에서도 수련생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도생활이 그 성격과 내용은 다를지라도 모든 종교에서 필수적인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수도원제도가 정착되어 있는 종교는 불교와 가톨릭인데 한국불교는 교단 자체가 수도 도량장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신도 교화장과의 구분이 쉽지 않다.
가톨릭은 교단이 사제·평신도·수도자로 구성되어 있어 수도자가 교단 형상에 중요한 인적 요소인 만큼 수도원제도가 가장 독특한 형태로 체계화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제도라고 하면 가톨릭 수도회를 의미하는 것이 상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