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장달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한 25명중에
우리 집안(인동 장씨 남산파)과 관련된 분이 두분이 계시는데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입니다.
여헌 후손으로 인동 신촌(세올)에 정암(貞庵) 장지화(張志和) 공에게 아들 둘과 딸이 한분이 계셨는데 둘째 아들 통덕랑 세철(世喆) 공의 부인이 왕산 허위 선생의 따님이고,
정암공의 따님이 심산 김창숙 선생의 부인이 되셨으니 왕산 선생의 따님이 심산선생의 처남댁이 된 것입니다. 참고로 심산선생의 어머니도 인동 장씨이시고, 심산 선생의 따님(달수 조모)도 세올 장세형(張世泂 여헌 종손 장세명의 생가 동생) 공의 배위가 되셨습니다.
본 자료는 건국훈장 공훈록에서 발췌하여 편집했습니다. 장달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총 25명
=목차= 가나다 순
1 강우규(姜宇奎) 대한민국장 1962 의열투쟁 평남 덕천
2 김구(金九) 대한민국장 1962 임정・중국방면 황해 해주
3 김규식(金奎植) 대한민국장 1989 임정・중국방면 경기 양주
4 김좌진(金佐鎭) 대한민국장 1962 만주・노령방면 충남 홍성
5 김창숙(金昌淑) 대한민국장 1962년 서훈. 임정・중국방면 경북 성주
6 민영환(閔泳煥) 대한민국장 1962년 추서 의병 서울
7 서재필(徐載弼) 대한민국장 1977년 추서 애국계몽운동 전남 보성
8 손병희(孫秉熙) 대한민국장 1962년 추서 3・1운동 충북 청원
9 신익희(申翼熙) 대한민국장 1962년 추서. 임정・중국방면 경기 광주
10 안중근(安重根) 대한민국장 1962년 추서. 의열투쟁 황해 신천
11 안창호(安昌浩) 대한민국장 1962 임정・중국방면 평남 강서
12 오동진(吳東振) 대한민국장 1962 만주・노령방면 평북 의주
13 윤봉길(尹奉吉) 대한민국장 1962 의열투쟁 충남 예산
14 이강년(李康秊) 대한민국장 1962 의병 경북 문경
15 이승만(李承晩) 대한민국장 1949 임정・중국방면 황해 평산
16 이승훈(李昇薰) 대한민국장 1962 3・1운동 평북 정주
17 이시영(李始榮) 대한민국장 1949 임정・중국방면 서울
18 이준(李儁) 대한민국장 1962 애국계몽운동 함남 북청
19 임병직(林炳稷) 대한민국장 1976 미주방면 충남 부여
20 조만식(曺晩植) 대한민국장 1970 학생운동 평남 강서
21 조병세(趙秉世) 대한민국장 1962 미주방면 경기 가평
22 조소앙(趙素昻) 대한민국장 1989 임정・중국방면 경기 양주
23 최익현(崔益鉉) 대한민국장 1962 의병 경기 포천
24 한용운(韓龍雲) 대한민국장 1962 3・1운동 충남 홍성
25 허 위(許 蔿) 대한민국장 1962 의병 경북 선산
1 강우규(姜宇奎) 대한민국장 1962 의열투쟁 평남 덕천
강우규(姜宇奎) 1859. 6. 5~1920. 11. 29
호: 일우(日愚)
평남 덕천(德川)사람이다.
그는 소년시절에 부친을 따라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龍源面) 영덕리(靈德里)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한학에 전념하다가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고국을 떠나 1910년 경술국치를 맞게 되자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건너갔으며 다시 길림・시베리아・연해주 등지를 편답(遍踏)하고 길림성 요하현(遼河縣)에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에 종사하였다. 1919년 국내의 3・1독립운동에 호응하여 만주・노령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그해 5월 노령의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에 참가하여 노인단을 대표하여 조선총독을 폭살할 계획을 품고 폭탄을 구입하여 허형(許炯)과 같이 원산을 거쳐 동년 8월 5일 목적지인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안국동 김종호(金鍾鎬) 집에서 숙식하면서 동지 허형(許炯)으로 하여금 신임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의 사진과 부임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하여 9월 2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경주읍 최준(崔浚)에게 보내는 공한을 허형(許炯)에게 건네준 후 남대문 정거장에 나가 재등실 일행이 마차를 타려는 순간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차 앞 십여보 지점에서 폭발하였고,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은 인해(人海)를 이루었던 군중들과 관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단 한 개의 파편이 재등이 탄 마차 후면에 맞아 재등의 혁대를 스쳤을 뿐 정무총감 수야연태랑(水野鍊太郞)은 경미한 부상만을 입고 만철이사(滿鐵理事) 구보(久保)와 미국 뉴욕시장의 딸 허리슨 부인 등 37명의 부상자를 내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중 일경 말홍우삼랑(末弘又三郞)만 파편이 왼쪽 엉덩이를 관통하여 9월 11일에 절명하였고 대판(大阪) 조일신문(朝日新聞) 귤(橘) 특파원은 파편이 복부로 들어가 동년 11월 1일에 사망하고 산구간남(山口諫男) 특파원은 오른쪽 어깨에 중상을 입어 팔을 절단하였다. 이 거사는 "한일합방은 한국민의 원하는 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세계여론을 기만하던 일제의 흉계를 폭로, 한국민의 정기를 표현하여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케 하였다. 일경의 눈을 피해 빠져 나온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거사 장소를 빠져나왔다. 거사장소를 빠져 나온 후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허형(許炯)을 만나 재거사를 계획하면서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가회동 장익규(張翊奎) 집과 간호부 오명숙(吳明淑)의 주선으로 사직동 임승화(林承華) 집 등을 전전하다가 동년 9월 17일 사직동에서 일제의 주구 김태석(金泰錫)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그는 일제 검사가 "감상이 어떠냐?"고 묻자, "단두대상(斷頭臺上) 유재춘풍(猶在春風) 유신무국(有身無國) 기무감상(豈無感想)"이라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을 당하니 향년 65세였다. 그는 한편으로 의열투쟁 뿐만 아니라 문화계몽사업에도 힘을 써 6개소의 학교와 3개소의 교회 및 1개소의 노인단(老人團), 민회(民會) 2개소를 조직 운영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 김구(金九) 대한민국장 1962 임정・중국방면 황해 해주
김구(金九) 1876. 7. 2~1949. 6. 26
호:백범(白凡) 이명:김창수(金昌洙), 김구(金龜)
황해도 해주(海州) 백운방(白雲坊) 기동(基洞)에서 김순영(金淳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893년 정초에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종지(宗旨)를 듣고 동학(東學)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昌洙)라 개명하였다. 같은 해 말에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報恩)에서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894년 4월초에는 팔봉 접주(八峰接主)로 임명되었으며 9월에는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여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고 했으나 불행히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동학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규율을 잃고 백성의 원망을 사게 되자 백범은 연소한 몸으로 이를 수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신천군(信川郡)에 사는 안태훈진사(安泰勳進士)를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인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는 16세로 그의 부친을 따라 정병을 이끌고 동학군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곳에서 당시에 명망이 높은 해서 거유(海西巨儒)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듬해 2월에 안악군(安岳郡) 치하포에서 우연히 편의(便衣)를 입은 일본군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자는 토전양량(土田讓亮)이라는 일본군 중위였다. 백범은 그 자를 발견하자 격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자리에서 그 자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는 포고문을 길거리 장벽(墻壁) 위에 대서특필하고 자기 성명과 주소까지 명백히 기입해 놓은 뒤 유유히 그 곳을 떠났다. 그 뒤 5월 11일 집에서 체포되어 해주옥에 구금되었으며 7월 초 인천감리영으로 이감되었다. 그리하여 1897년 7월에 사형이 확정되었고, 다음달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1898년 3월 9일에 탈옥하여 전국을 방랑하다가 늦가을에 공주 마곡사(公州 麻谷寺)에 들어가 삭발하고 중이 되었으며 법명은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1899년 늦가을에 환속하여 고향에 돌아온 뒤 이름을 김두래(金斗來)로 고치고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그 뒤 무주 유인무(柳仁茂)의 집에 머무르면서 이름을 구(龜), 자를 연상(連上), 호를 연하(連下)로 고쳤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준(李儁)・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그 이듬해에 해서교육회총감(海西敎育會總監)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황해도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생활을 하였다. 1908년 독립지사들의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10월에 송화군(松禾郡)으로 강연을 나갔다가, 때마침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살해하고 난 직후였으므로 공모의 혐의를 받아 다시 투옥되어 몇 달 후 해주(海州)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석방되었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양기탁(梁基鐸)의 집에 모여 비밀결사 회의를 갖고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이시영(李始榮)・안태국(安泰國) 등 여러 애국 영수들과 대계를 공모, 이동녕을 비롯하여 이시영일가는 중국 남만주(南滿洲)에 가서 독립을 위한 전초기지를 마련하기로 하고 양기탁, 백범은 기부금 모집의 책임을 맡아 동분서주하였다. 1911년 일본 경찰은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되는데 이에따라 백범도 2년형을 언도받고 수감 중, 안명근(安明根)의 "데라우찌(寺內總督)암살사건"의 계획이 탄로되자 이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형을 언도, 17년형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후 일제의 명치(明治)천황 부처가 연달아 죽게 되어 두 번이나 감형되고 그 후 다시 몇번의 경전(慶典)으로 감형되어 5년 후인 1915년에 출옥하게 되었다.
1919년 3・1 만세 시위 사건에 가담한 뒤,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이동녕(李東寧)을 만나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 4월 9일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되었으며 1926년 12월에는 임시정부의 원수(元首)인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1927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고 국무위원에 취임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임시정부는 일본의 극심한 탄압과 젊은층들의 맹목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의 심취와 자금난으로 그 기강이 차츰 흔들리기 시작하여 피치 못할 시련을 겪게 되었다. 1928년에 이동녕・이시영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여 민족 진영의 단합을 꾀하였다. 1930년에 국무령(國務領)에 재선되었으며,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에 취임하였다. 한인애국단은 무력적인 행동이 없이는 한국 민족의 광복을 달성할 수 없으며 최소의 역량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수단과 방법이 아니고는 한국민족이 영원히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탄압에 항거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호소할 길이 없다는 불굴의 신념하에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1932년 1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李奉昌)을 동경(東京)으로 파견하여 일본 황제를 저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봉창은 10월 10일 일제의 단두대에 피를 뿌리고 순국하였다. 그 뒤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로 하여금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의 천황생일을 경축하기 위한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게 함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윤봉길 의거 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임정요인들과 함께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으로 피신하여 지냈다. 1933년 5월에는 중국의 장개석총통(蔣介石總統)을 만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할 것을 결정한 뒤, 조국의 독립을 위한 독립지사들의 군사교육을 시켰다. 1935년 11월 가흥(嘉興)에서 임시의정원 비상회의를 열어 기구를 강화한 뒤 국무위원으로 개선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조경한(趙擎韓)・차이석(車利錫)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였고, 임시정부는 진강(鎭江)으로 옮기게 되었다. 1938년에는 민족주의 삼당(三黨) 통합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南木廳)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을 받아 1개월동안 입원, 가료하였으며 중・일 전쟁발발로 임정을 진강(鎭江)에서 장사(長沙)로, 다시 광동(廣東)으로, 또다시 유주(柳州)로 옮겨다녔다. 1939년 다시 장사(長沙)로 옮겼으나 이곳이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총통(蔣介石總統)의 도움으로 중경(重慶)으로 옮긴 뒤 임시정부 주석(主席)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1940년에는 중경(重慶)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각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섬서성 서안(陝西省西安)에 상주케하여 무장부대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重慶)으로 옮긴 뒤, 임시정부의 임시약헌 개정과 더불어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 공포됨에 따라 대일항전에 진력을 다하였으며 연합군과 함께 중국 각지에서 많은 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主席)으로 임명되었으며, 섬서성 서안(陝西省西安)과 안휘성 부양(安徽省阜陽)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써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 훈련(OSS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에 대한 반탁 국민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가 조직되어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년 1월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副主席)에 취임하였으며 5월 제2차 미・소공위(美蘇共委)가 열리자 반탁 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결의안을 지지하였다. 1948년 4월 19일에는 남북 협상차 평양에 갔다 왔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하수인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이와같은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3 김규식(金奎植) 대한민국장 1989 임정・중국방면 경기 양주
김규식(金奎植) 1881. 1. 29~1950. 11. 15
호:우사(尤史)・죽적(竹笛)・김성(金城)
이명: 중문(仲文)・일민(一民)・왕개석(王介石)
경기 양주(楊州)사람이다.
미국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고 1919년 2월 한국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며, '한민족의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의 독립국가로의 복귀에 관한 청원서'와 '한민족의 주장'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여 일제침략의 악랄함과 한국 독립의 필연성을 호소하였다. 동년 8월 6일에는 외신기자 클럽에서 80여명의 각국 유력인사가 초청된 가운데 한국독립의 타당성과 일제침략의 흉계를 폭로하는 등 5개월동안 동분서주하며 세계 여론에 호소하다가 여운홍, 김탕과 함께 동년 8월 9일 미국으로 갔다. 1919년 8월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군자금을 임정에 송부하는 한편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고조된 분위기를 활용하여 한국독립문제가 미국하원에서 상정 토의되도록 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임시정부 학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 1월 상해로 돌아와 임정에 합류하였다. 1922년 1월 소련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인 대표 52명중 1인으로 참석하여 몽양과 함께 의장단에 선발되어 활동하였으나, 기독교 신자인 우사가 공산당식 유물론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1923년 1월 3일에 소집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는 일정을 불신한 결과 창조와 개조의 양분된 논란으로 일관하다가 결렬되었다. 가장 좋은 공론(公論)의 수렴을 목적으로 내걸었으나 갑론을박, 의견개진으로만 시간을 낭비하였다. 더욱이 공산계의 인적 재정적 침투로 인해 소기의 목적도 거두지 못한채 침체국면에 빠진 임정을 우사와 원세훈이 재정비 강화하는데 비중을 두었다. 이때 우사(尤史)는 원세훈(元世勳) 등과 같이 북경・천진 등을 왕래하며 회의소집에 정열을 바친바 있었다. 우사(尤史)는 창조파에 의해 국민위원회의 위원직과 내무위원장직에 추대되어 192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갔고 1925년에는 니콜리스크까지 가서 문창범・윤해・신숙 등과 어울려 담론도 폈었으나 다시 상해(上海)로 추방당해 왔다. 소련은 이처럼 약소민족의 지도자를 거창한 이론처럼 지원하는게 아니고 추방해 버리는 혹독한 정책을 함부로 펴곤 하였다. 시베리아에 체류하고 있던 독립운동가가 소련과 공산주의자를 못마땅하게 대했던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우사(尤史)는 임정요인과 더불어 광복투쟁의 의욕을 잃고 교육계에 관심을 갖었다. 그가 상해(上海) 복단대학(復旦大學) 등에서 영문학을 교육했던 것은 정치활동이나 광복투쟁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의하던 그 대학이 프랑스 조계내(租界內)에 있지 않았었으므로 일본영사관에 의해 항상 체포의 위험이 뒤따랐다. 그는 체포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김중문(金仲文)・여일민(余一民)・왕개석(王介石) 등 가명으로 활동했었다. 여기에 건강상태도 좋지 않아 그는 교수생활도 해 나갈 수 없었다. 그는 1927년 천진(天津)으로 옮겨가 1929년까지 북양대학(北洋大學)에서 교수생활로 자녀와 생계를 꾸려나갔고 1927년 2월에는 유자명(柳子明) 등과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 그 회장으로 추대되어 급진파와 기맥을 통하면서 독립투쟁을 지속화 시켰다. 이 연합회는 기관지로『동방민족(東方民族)』을 간행(中・英・韓國語)하여 각국에 발송하고 비밀지부도 설치 운영하였다. 1931년 9・18사변(만주사변)이 일어나 일제가 동삼성일대를 점령하고 다음해 3월 괴뢰「만주국」(滿洲國)을 수립, 침략의 정당성을 내외에 알렸다. 국제연맹에서도 일제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리튼(Lytton)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관심이 동삼성으로 집중되었다. 이 기간에 김구에 의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투탄의거(1932. 4. 29)가 일어나 임정은 현재 마당로 306-4 청사(1926~32)를 떠나 항주(抗州)로 갔고 요인들은 가흥・소주・무석・진강・남경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피신하였다. 이때 중국측에서는 국민정부와 민간인이 연합하여 민간외교사절을 구미에 파견하기로하고 수석 전권에 북양대 교수 김규식을 선임 파견하였다. 그는 20여명의 외교전문가를 대동하고 수백만원의 군자금까지 보조받아 활기를 띠었다.(동아일보 1932. 11. 5) 우사(尤史)는 통일 전선을 구축해야 「힘」도 발휘할 수 있고 공신력도 있다는 여망에 따라 한독당(김두봉), 조선혁명당(최동오), 의열단, 한국혁명당, 광복동지회의 대표를 모이게 하여 1932년 10월 25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였다. 그는 1933년 4월 5일 나성(羅城)에서 500여명이 모인 구류노류대학에서 한국독립에 관한 연설을 해서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것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미국인을 탄복케 하였다. 이 동맹을 주축으로 중한민중대동맹(中韓民衆大同盟)을 결성하고 그 다음해인 1933년 그 대표자격으로 북미각지에 가서 독립운동자금 약 8천불을 모집해 왔다. 그는 통일동맹을 결성하던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의 송병조・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이 되었다. 4・29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침체・교착상태에 있던 임정은 보다 활기를 띠었고, 내외의 작전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도산 안창호와 춘산 이유필이 상해에서 윤의사의거와 관련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당해 실형을 선고 받은 것이 이 무렵이었다. 상해에 왔다가 남경(南京)으로 가서 의열단의 김원봉, 의열단원인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의 유자명 등과 친분을 두터이하여 무장항일투쟁에 동조 호응하였다. 김원봉이「4・29」 직후 남경으로 가서 남경 중앙군관학교내에 한국지대를 설치, 무관을 양성하였는데 그도 20명의 교관중 한 사람으로서 군사 교육을 실시하였다.
통일전선을 성립시켜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강조해온 그는 1935년 6월 20일부터 7월 3일까지 한국독립당(신당참여 찬성파:조소앙・박창세),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이청천계), 조선의열단(김원봉・윤세주), 대한인독립당(하와이), 미주대한국민회, 뉴욕 대한인교민단, 하와이 대한민국회, 하와이혁명동지회의 9개단체대표 32명으로 하여금 남경에 모여 혁명단체대회를 열게하였다. 여기서 단일당의 숙원이 달성된 셈인데 이것이 조선민족혁명당이었다. 1935년 7월 5일에 이 당이 조직완료됨으로써 한국 대일전선통일동맹은 동시에 해체되었다. 그 당의 실력자인 김원봉은 동당의 총서기였으나 주석으로 우사(尤史)를 추대하였다. 그는 귀국한 직후인 1946년 2월 18일 동당 주석의 직책을 사퇴하였다.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분명한 17개조의 강령의 대부분은 우사의 사상이나 경륜이 담겨 있으리라 믿는다. 우사는 약산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인정치 않고 다소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로 규정한 것 같다. 약산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모르고 환상속에 끌려다닌 사람이라고 보았다. 조선민족혁명당은 통일정당으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1936년에 조소앙이 이탈했고 다음해에는 최동오・홍진・이청천이 차례로 탈퇴하였다. 1938년에도 최창익이 결별선언을 하고 물러나는 등으로 인해 통일성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였다. 남경의 중앙정치학원에서 교편을 잡던 우사는 7・7(1937) 중일전쟁이 발발되기 전인 1935년 사천성 성도(四川省 成都)로 가서 실천대학의 교수로 안전한 생활을 누렸다. 임정에 몸담고 있으면서 위험성이 가중될 때 우사는 용케도 이 위기를 모면하곤 하였다. 그것이 청장년층의 임정고수파로부터는 비협조자로 지적된 사항이기도 하였다. 20여년의 교수생활이 임정 당시 광복운동시기에 있었다는 것도 백범・우남・몽양등과 그 투쟁방법상의 차이를 던져준다. 중국국민당 정부의 권유로 백범과 약산이 공동전선을 폈는데 그 때가 1939년 5월이었다. 그것은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민혁당이 임정에 참가함으로써 좌우가 합작된 것으로 보인다. 1942년에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合編)되었으며 민혁당계열이 의정원 의원으로 정식 참석하였다. 우사(尤史)는 1942년 10월 장건상과 같이 임정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보선되었으며 1944년 2월에는 주석・부주석 지도체제로의 5차개헌에 따라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비록 그가 부주석에 선임되었다고 했으나 '투표권도 없는 투명치 않은 자리'인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선전・외교・군사문제에 주력한 것으로 보이며 각 당파의 합작적 요식행위에 따라 김원봉이 군무부장에 선임된 케이스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한독당대 민혁당의 대립을 완화하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일원화(一元化) 권유도 받아들여야 했기에 우사(尤史)가 그 인품이나 경륜・비중・능력 등으로 보아 가장 적임자라해서 선임된 것이다. 이런 좌우익파의 갈등은 1943년 민혁당측이 한독당의 김구(金九)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혁당의 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入閣)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 속에서 그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45년 11월 23일 백범 등과 귀국할때까지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사(尤史)는 1942년 10월 11일 400명 규모인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를 손과(孫科)・김구・김원봉 등과 중경에서 조직 문화와 혁명사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어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측의 오철성(吳鐵成) 등과 한국측의 엄항섭(嚴恒燮)・안원생(安原生) 등을 설득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이는 한교의 생활증진과 독립운동의 진행을 촉진함에 기여하였다. 두 단체는 우사(尤史)의 독립의지에 탄복한 나머지 광복운동의 지원(支援)을 위해 중국측에서 서둘러 조직한 것이다. 임정은 1945년 3월에는 우사와 조소앙(외무부장)・정환범(鄭桓範)・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회의에 파견코자 국민당정부의 지지와 군자금까지 결재되었으나 미국의 거부로 참석치 못하였다. 광복 후 그가 좌우합작 남북협상을 주도한 것은 30여년을 통일과 대동단결을 주장한 맥락때문에서였다.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어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4 김좌진(金佐鎭) 대한민국장 1962 만주・노령방면 충남 홍성
김좌진(金佐鎭) 1889~1929 호: 백야(白冶)
충남 홍성(洪城)사람이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무관학교(大韓帝國武官學校)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가산을 팔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고 지방 청년자제들에게 신학문을 교육시켰다. 1907년 다시 상경하여 노백린(盧伯麟)・윤치성 등과 함께 조직적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홍성(洪城)에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설치하고 민중의 계몽에 노력하는 한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창설하여 지방에 있는 유능한 자제를 뽑아 서울에 유학케 하였다. 1908년에는 서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지내고 청년학우회원(靑年學友會員) 및 한성신보(漢城新報) 이사로서 민족정신의 고취에 진력하였으며, 1910년에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였을 때에는 이창양행(怡昌洋行)이란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집합처로 삼는 한편 남북만주와 연락하는 비밀기관으로 하였다. 1915년에는 노백린・신현대(申鉉大)・윤홍중(尹洪重)・박성태(朴性泰)・기명섭(奇明燮)・김홍두(金弘斗)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이 주도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참가하여 국내 각지를 통하여 항일운동에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西大門)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7년 출옥하자 일경들은 또다시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며, 이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8년 봄에는 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인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서일(徐一)・여준(呂準)・정신(鄭信)・유동열(柳東說)・신팔균(申八均) 등 38인(人)과 함께 서명하여 발표하였으며, 동년 8월 7일에는 서일・현천묵(玄天默)・계화(桂和)・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奎植)・이범석(李範奭)・조성환(曺成煥)・박성태・정신・김찬수(金燦洙)・박두희(朴斗熙)・홍충희(洪忠熹)・이홍래(李鴻來)・윤창현(尹昌鉉)・나중소(羅仲昭)・김성(金星) 등과 함께 정의단(正義團)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임전태세의 군정부(軍政府)를 편성하고 그는 북로사령부 제2연대장겸 간북총판국(墾北總瓣局) 재무참사(財務參事)로 일하였다. 그 후 동년 12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고 개칭하고 진용을 정비할 때에 총사령관으로서 총재 서일을 보필하는 한편,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고 400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1920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시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대의 특별한 호의로 동북만주의 독립군 부대는 노령해삼위(露領海蔘威)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 많은 군자금과 무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 육군성(陸軍省)은 중국 군벌 장작림(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하는 한편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다가 남하하는 일본군 제19사단과 나남(羅南) 제20사단에 명령하여 북로군정서를 협공하게 하였다. 이에 그는 장백산(長白山)중으로 들어가서 좀더 독립군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를 출발하여 행군을 계속하여, 동년 10월 16일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3대대가 무산(茂山)으로부터 습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곧 임전태세를 갖추어 동월 18일에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전방 삼림속 유리한 전투지점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의 내습을 대기하고 편의대(便衣隊)로 하여금 적의 병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한편 적진 부근의 교포를 시켜 독립군의 병력이 미약하고 투지가 없다는 정보를 흘려 적으로 하여금 독립군을 경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독립군을 2개중대로 편성하여 제1중대는 그가 직접 지휘하고 제2중대는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병력이 보잘 것 없다는 말을 듣고 동월 20일 의기양양하게 청산리를 3면으로 포위하고 기병대 일부를 가지고 대담하게 아무 저항도 받지않고 백운평 삼림을 점령하였다. 이때 그는 주도면밀한 작전지휘로 백운평 전방에 매복한 독립군에게 일제 사격을 명령하여 적의 전위부대를 전멸시켰으며 계속적인 전투를 통하여 일본군 가납(加納)연대장을 비롯하여 3,300여명을 섬멸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소수의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일군을 물리친 전사상(戰史上) 보기드문 대승리였다. 그는 이곳 주민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부하들을 인솔하고 밀산(密山)으로 이동, 밀산에 집결한 10개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1년에는 전 독립군을 인솔하고 노령(露領) 이만으로 건너갔다가 뒤에 자유시(自由市)로 다시 이동했으며 1922년에는 소련당국의 배신으로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후 북만주 영안(寧安)으로 탈출하여 1925년 3월 15일에는 김혁(金赫)・최호(崔灝)・나중소(羅仲昭)・조성환・박성태・유정근(兪正根)・허빈(許斌)・정신・이일세(李一世) 등과 함께 전 북로군정서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으며, 그는 군사부 위원장겸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부교장으로서 교장 김혁 등과 아울러 독립군 간부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동년 10월 10일에는 상해(上海)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그를 임시정부 국무원(國務員)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고 계속하여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며 대일항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7년 2월 신민부 본부가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아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이하 12명의 간부가 체포되니, 그는 신민부를 재정비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신민부를 통찰하는 한편 중국구국군사령관(中國救國軍司令官) 양우일(楊宇一)과 회담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취하기로 합의하고 동년 8월에 중국 국민당 동삼성공작책임자 공패성(貢沛誠)・장령(將領) 악유준(岳維峻)・사가헌(史可軒) 등과 회동하여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을 조직하고 일본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던 중 일제의 압력을 받은 장작림(張作霖)이 공패성・사가헌・악유준 등을 체포하고 탄압함으로써 좌절되었다. 1928년에는 참의부(參議府)・신민부・정의부(正義府)의 3개 단체통합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으나 각 단체의 이해 관계로 실패하고 혁신의회(革新議會)만을 구성하였다. 1929년에는 정신・민무(閔武)・김종진(金宗鎭)・이을규(李乙奎)・유운초(劉雲樵)・한규범(韓奎範)・이종주(李鍾柱)・조각산(趙覺山)・이달(李達) 등과 함께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주석(主席)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영안현 일대의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중동선 산시역(山市驛) 부근에 정미소를 설치하고 동년(음) 12월 25일 정미소에서 작업을 하던 중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종전의 부하이며 일제 고등경찰에게 포섭되었던 김일성(金一星)의 교사를 받은 고려공산단(高麗共産黨) 청년회원이며 재중청년동맹원(在中靑年同盟員)인 박상실(朴尙實)이 등 뒤에서 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이 민족의 큰 별이던 그는 이 뼈아픈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분하고도 원통한 일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5 김창숙(金昌淑) 대한민국장 1962년 서훈. 임정・중국방면 경북 성주
김창숙(金昌淑) 1879. 7. 10(음)~1962. 5. 10(양)
자: 문좌(文佐) 호: 심산(心山), 벽옹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칠봉동(七峰洞)에서 김호림(金頀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창숙이지만 우(愚)라고 개명한 일도 있다. 자(字)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지만 일제에 피수(被囚)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서 앉은뱅이가 되어 벽옹이란 별호(別號)도 붙었다. 성품이 곧아서 평생을 불의・부정・불법과 타협하는 일이 없었으며 누구에게나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규탄을 서슴치 않았다. 심산은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 등으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으로부터 시작되는 주리설(主理說)도 전수받았다. 이러한 성장과정으로 인하여 심산은 일찍부터 성리학자로서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서구근대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된 개화(開化)와 외국의 것으로부터 내것을 고수하자는 척사(斥邪)가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지게 되고 동시에 외세(外勢)와 저항이라는 사회변혁 속에서 전통적 유학자의 길에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지킬 수 있는 구국부민(救國扶民)으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심산의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5적소(請斬五賊疏)라는 을사5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는데서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성주경찰서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 즉시 그는 이승희와 함께 시베리아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노모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효심(孝心) 때문에 중단하고 계속 국내에서의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의 빚을 갚고 자립경제를 함으로써 일본을 물리치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시작되자 그는 이 일에 앞장서서 활동하였으며,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성주지부(星州支部)를 결성하여 총무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는 유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향리에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민족주의교육을 하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韓日合倂論)을 제기하자 심산은 고향인 성주에서 유림들을 모아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건의서인 연서(連署)를 작성 중추원(中樞院)에 제출하고 각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경(日警)에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그러나 계속 기울어진 국세(國勢)는 마침내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되자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으로 그는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오로지 성리학만을 공부하였다. 그의 학문적 실력은 이때 닦아졌다.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에 총총히 상경하여 민족대표에 유림계(儒林界)가 빠진 것을 통분하며 거족적인 민족운동에 유림계도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하였다. 다른 기회에 참여키 위하여 그는 영남・호남・호서의 유림중진을 설득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인 장서(長書)를 작성케 하였다. 이 장서는 그 이외에도 이중업(李中業)・곽대연(郭大淵)・유준근(柳濬根)・김황(金榥) 등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連署) 날인하였다. 인쇄되어 국내의 각도 향교 등에도 배포되었으며 원본은 심산이 동년 3월말 휴대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로 우송케 하였다. 이 결과 제1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침체되었던 유림계는 한말구국을 위한 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으로 망명한 심산은 상해에서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신규식(申圭植)・김구(金九)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조직하였다. 이에 1919년 4월 25일 임시의정원 제3차회의의 결의에서 도지역별 의원을 선출하는 위원회를 개최, 4월 30일부터 열린 제4차회의에서 심산은 김정묵 등과 함께 의정원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동 5차회의에서 그는 교통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부의장직에도 당선되어 구국활동을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한편 심산은 그의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화국민당(中華國民黨)의 손문(孫文)을 비롯하여 오산(吳山)・서겸(徐謙)・장병린(章炳麟) 등과 교통하여 한・중공동 항일운동을 추진토록 하였다.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국독립후원회(韓國獨立後援會)의 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광동의 중국공교회원(中國孔敎會員)인 임복성(林福成)과 교유하면서 그곳 중의원(衆議院)에 나가 연설한 바도 있었다. 따라서 그곳 광동에는 한국독립운동 후원회가 조직되었다. 1920년에는 상해에서 임복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였으며, 천진(天津)에서는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기관지 천고(天鼓)를 간행하였다. 1923년 1월 민족의 단합을 위하고 임시정부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자대회(國民代表者大會)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이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양분되었고 이때 심산은 창조파의 국민의회대의원으로 추대되었다. 구국항쟁의 일념에 있던 그는 이때 민족운동의 분열을 우려하여 참가치 않았던 것이다. 1925년 이승만(李承晩) 임시대통령의 위임통치(委任統治) 주장이 문제되자 그는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이를 성토・탄핵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파면시켰다. 한편 국내외적 변화에 따른 임시정부의 광복운동이 침체하자 심산은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李會榮)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서 동삼성(東三省) 일대에 한인교포들을 모아 집단거주지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산업의 추진,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여 국내로 진입하는 독립전쟁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으로 만몽(滿蒙) 접경지에 황무지 3만정보(町步)를 무상 조차하였고 이의 개간자금 모집을 위해 1925년 8월 그는 김화식(金華植)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경기・충청・경상지역에서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전개했으나 계획대로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그는 국내에서의 잔학한 일제 식민지통치 아래 점차 상실되는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결사대(決死隊)를 파견, 각종 식민지기관을 파괴하기로 하였다. 1926년 이동녕・김구・김원봉(金元鳳) 등과 상의, 1차로 의열단(義烈團)의 나석주(羅錫疇)를 파견하여 1926년 12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케 하였다. 국내의 유림들도 그를 도와 모금운동을 하였고 이에 600여명의 유림이 투옥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다. 1927년 5월 심산은 병으로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 공제의원(公濟醫院)에 입원중 일본 밀정에 발각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4년형을 언도받은 그는 변호도 공소도 거절한 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이때 심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그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림재단을 정리한 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육영사업을 목적으로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강인한 정신은 반민족 반민주적인 독소를 제거키 위해 전환되었다. 즉 1951년 독재정권인 이승만대통령에게 하야경고문(下野警告文)을 내어 부산형무소에 또다시 투옥되었다. 출옥후 1952년 2・4정치파동 때 국제구락부사건(國際俱樂部事件)을 주동하여 재차 투옥되는 등 그의 민족을 위한 불굴의 의지는 지속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을 수여하였다. 저서에 자서종요(字書綜要)와 벽옹70년 회상기 등이 있다.
6 민영환(閔泳煥) 대한민국장 1962년 추서 의병 서울
민영환(閔泳煥) 1861. 7. 25~1905. 11. 30
서울 견지동(堅志洞)에서 태어났다.
1878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순조롭게 역임하였으며,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명성황후의 친족이었다. 부친은 민겸호(閔謙鎬)로서 임오군란 때 피살되었으나, 민영환은 온순하고 청렴하였으며 애국심이 매우 강하였다.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에 개화사상을 갖게 되어 개화정책을 지지하였다. 갑오경장추진내각이 추진되었을 때에는 1895년에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1896년 2월의 아관파천 후, 3월에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가서 제정러시아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그해 10월에 귀국하여 의정부찬정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897년에는 다시 영국・독일・러시아・이태리・프랑스・오스트리아의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재차 유럽 여러 나라들을 순방했으며, 이 때 특명전권공사를 겸하여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다이아몬드 축하식에도 한국사절로 참석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여행에서 각국의 정치・경제・군사・문화의 발전상을 견문하고 돌아와서 고종에게 우리나라도 대대적인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고 민권을 확장하여 독립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하자고 건의했으나 시행되지 못하고 그의 건의에 따라 육군제도만을 개혁하였다. 1898년부터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이 지도하는 독립협회(獨立協會)가 본격적인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자, 적극적으로 이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의회(議會)를 개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관료로서 정부 내의 적극적인 독립협회 지지자가 되었다. 독립협회가 1898년 10월 초부터 수구파 7대신의 퇴진과 개혁파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철야 상소시위를 연일 감행한 결과 1898년 10월 12일 박정양(朴定陽)을 수반으로 한 개혁파 내각이 수립되었을 때에는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에 임명되어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고 개혁파정부의 실권자로서 독립협회 운동을 지원하였다. 박정양・민영환 정부는 즉각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제안을 받아들여 한국역사상 최초의 의회(議會)를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1898년 11월 2일 중추원(中樞院)을 의회로 개편하고 의회설립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민영환 등과 독립협회가 공화정(共和政)을 수립하려고 한다는 수구파의 모략전술로 의회설립운동도 좌절되고 그도 파면당하였다.
1902년 이상재・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 등과 개혁당(改革黨)운동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다가 이상재는 투옥되고 민영환은 견책당하였다. 그는 황실의 친척이므로 곧 복직되어 참정대신, 탁지부대신, 원수부(元帥府) 회계국총장,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 헌병사령관의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였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하고 침략정책을 자행하자, 그는 고급관료로서 이를 격렬하게 성토하다가 일본군의 압력과 친일적 각료들과의 대립으로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빼앗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을사조약에 서명한 5적을 처형할 것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요청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지 아니하므로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한문(大漢門)밖에 엎드려 대답을 기다렸으나 일제는 조병세와 민영환 등을 체포하였다. 석방된 후에는 상소운동의 효과가 없음을 통감하고 죽음으로써 국민에게 고하여 국민을 분기시켜서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킬 결심으로 유서 2통을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그의 유서 중 국민에게 고하는 유서에서는 「아,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다다랐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 우리민족의 운명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맹세하는 사람은 살아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은 죽음으로써 황은을 갚고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황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형제여, 천만배나 분려(奮勵)를 더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마음을 합하고 힘과 힘을 아울러 우리 자유독립(自由獨立)을 회복할지어다.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겠노라.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한다.」고 하여 온 국민이 죽음을 맹세하고 분발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그는 각국 공사관에게 보내는 유서에서 일본의 한국침략 사실을 환기시키고 자유독립을 위하여 일어선 한국 국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그의〈자결〉과 국민에게 드리는〈유서〉는 각 신문에 일제히 상세하게 보도되어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게 하는데 큰 계기를 만들어 주고, 나라가 독립을 찾아야 한다는 모범을 죽음으로써 가르쳐 주었다.
정부는 그의 애국심과 국권회복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7 서재필(徐載弼) 대한민국장 1977년 추서 애국계몽운동 전남 보성
서재필(徐載弼) 1866. 11. 18~1951. 1. 5
전라남도 보성(寶城)군 문덕(文德)면 가천(可川)리에서 태어났다.
7세에 서울에 올라와서 외숙의 집에서 공부하다가 14세 때에 왕이 친히 보이는 전시(殿試)에서 장원급제하였으며, 김옥균(金玉均)을 알게 되어 그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김옥균의 주선으로 1883년 4월에 일본의 호산(戶山) 육군학교에 유학하여 이듬해 5월에 귀국해서 김옥균과 함께 사관학교를 설립하려다 수구파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김옥균・박영효(朴泳孝)・박영교(朴泳敎)・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서 신정부의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정령관(正領官)을 맡았으나, 청국의 군사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정부가 망명객들을 박해하자 1884년 4월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여 고학으로 죠지・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암스트롱양과 결혼하여 미국에 귀화하였다. 죠지・워싱턴대학에서는 병리학 강의를 맡았으며 세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94년 7월에 본국에서 갑오경장 추진 내각이 수립되어 갑신정변 때의 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고, 옛 동지인 박영효가 1895년 미국을 방문하여 그의 귀국과 외부협판직의 담당을 요구하자 조국의 개화독립에 봉사하기 위하여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정세를 관찰해보고는 입각하는 것보다 국민계몽을 하는 것이 더 필요함을 절감하고 입각을 거절한 다음 개화파의 도움을 받아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은 한문을 모르는 민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①국문전용, ②국문 띄어쓰기, ③쉬운 국어쓰기의 방법으로 발행되어 시대에 맞추어 국민의 독립사상 형성과 개명 및 진보에 큰 공헌을 했으며,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의 효시가 되어 그 후의 한국 신문과 언론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였다. 독립협회는 그 첫 사업으로 종래 중국을 사대하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한국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獨立門)을 세웠으며, 종래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獨立館)으로 고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의 다음 사업으로 토론회(討論會)를 조직하여 매주에 한 번씩 서울 시민들을 모아 나라의 독립과 개혁에 대한 토론을 시키어 국민의 자주독립 사상과 자유민권 사상을 고취하였다. 토론회는 모두 34회 개최되어 국민의 독립사상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당시 제정 러시아가 부산의 절영도(絶影島:지금의 영도)의 조차(租借)를 요구해 오고 친로수구파 정부가 이를 승인하려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여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조직해서 반대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도하였다.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궐기대회인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절영도 조차 반대 및 러시아의 재정고문과 군사교관 그리고 한・러은행의 철수를 결의하였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운동 결과 결국 러시아의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과 한・러은행을 철수하고 절영도 조차 요구도 분쇄하였다. 그는 국민들에게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제군주제도를 입헌제도로 개혁하고 의회를 설립하여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입법을 하고 외국과의 조약을 감독하고 비준하는 권한을 가져야 열강의 침략을 막는 정치제도가 만들어지고 국민의 지유민권도 신장된다고 계몽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국민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수구파들은 서재필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어 결국 수구파정부와 러시아 및 미국이 결탁하여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당하였다.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추방 후 개업했던 병원을 닫아 버리고 다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회의(在美韓人全體會議)」에서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外交通信部)를 설치하여 각국에 대한 한국독립의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14일에는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지지를 결의하고 국제연맹과 미국에 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919년 4월 25일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아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5월에 「한국친우회(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미국 상원의원들과 저명인사들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활동을 전개하도록 눈부신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8월에는 『한국평론(Korea Review)』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그 주필로서 한국의 독립을 전세계에 역설하고 선전하였다. 『한국평론』지는 1921년 12월에 재정난으로 중단될 때까지 매월 발행되어 한국의 주장과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21년 11월에는 세계 군축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했으며 1922년 1월에는 미국 대통령 하딩을 직접 면담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925년에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을 폭로・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 회의에서 감동적 연설과 활동을 하여 대리회장으로 선출되자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는 3・1운동 후 그 때까지 독립운동의 경비로 자기의 병원과 문방구점 등 재산을 팔아서 사재(私財) 7만 6천불을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 넣고, 1926년에는 완전히 움직일 수 없는 무일푼의 처지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자 일시 귀국하여 과도정부의 특별의정관에 선임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병석에서 조국의 불운한 명운을 통탄하다가 1951년 86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8 손병희(孫秉熙) 대한민국장 1962년 추서 3・1운동 충북 청원
손병희(孫秉熙) 1861. 4. 8~1922. 5. 19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원(淸原)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882년(고종 19)에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고종 21)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동학혁명군과 논산(論山)에서 합세하여,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에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1897년(광무 1)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1년(광무 5) 일본을 경유해서 상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으로 개명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전해듣고, 1906년(광무 10)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주로 취임하여 교세확장 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설하고 보성학교(普成學校)와 동덕학교(同德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공헌하였다. 1908년(융희 2) 박인호(朴寅浩)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 린(崔麟)·천도교 도사(道師)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하순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제반계획의 실행을 최 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基督敎)·불교(佛敎)에 대한 동지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 린이 최남선(崔南善)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그는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키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인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의 자기집으로 동지들을 불러 회합하는 자리에서,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정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벌일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명월관(明月館)지점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또 당일에는 이갑성(李甲成)에게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알리고, 회합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 당하기로 약속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李鍾一)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위에 놓고 회람케 한 후, 한용운(韓龍雲)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9 신익희(申翼熙) 대한민국장 1962년 추서. 임정・중국방면 경기 광주
신익희(申翼熙) 1892. 6. 9~1956. 5. 5
호: 해공(海公) 이명: 왕해공(王海公), 왕방우(王邦牛)
경기도 광주(廣州)사람이다.
1919년 김시학(金時學)・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이승훈(李昇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봉기할 것 등을 협의한 후 국내 동지들의 특파로서 대내외적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상해방면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 당시 상해는 지리적으로 동서 교통의 요지가 되어 있고, 또 일제(日帝)의 횡포 압제를 덜 받을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온 동제사(同濟社)의 조직 및 신시대, 신정세에 발 맞추어 활동하는 신한청년당원들의 활동이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성환(曺成煥)・신석우(申錫雨)・조동우(趙東祐)・신규식(申圭植)・선우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의 허름한 집을 임시사무소로 정하고 모여서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4월 10일에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議員)으로 하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官制),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을 맞게 된 것이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4월 25일 임시의정원법을 초안 낭독하여 가결, 채택케 하였으며, 임시정부의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의정원 제6차 회의인 1919년 9월 6일 오후에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통과가 있은 다음, 다시 정부 개조안 토의가 있었다. 정부 개조안의 내용은 한성정부의 기구와 각원을 그대로 통합 정부의 기구와 각원으로 하되 수반인 집정관 총재의 칭호를 대통령으로 고치는 것이었다. 그 중에도 기구에 있어서나 대통령 칭호에 있어서는 이미 통과된 헌법 제3장과 제5장에 의하여 결정을 본 것이니 여기서는 다만 인원의 선임 절차가 남은 것 뿐이었다. 그것도 국무원의 선임은 대통령의 직권에 속하는 것인즉 임시의정원에서 할 일은 헌법 제21조 5항에 의하는 임시 대통령의 선거와 제15조 4항에 의하는 국무원 임명에 대한 동의뿐인 것이었다. 따라서 먼저 대통령을 선거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헌법이 아직 발포되지 않았으니 대통령의 선거 방법을 새 헌법 중 임시대통령 선거 규정에 의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이었다. 만일 새 헌법에 의하여 임시대통령을 선거하기로 한다면 현정부는 이미 소멸된 것이며, 헌법의 발포권도 새로 선거된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라고까지 논의가 비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무차장인 신익희는 현정부는 아직 소멸되지 않았으며 초창기이니만큼 통상적인 준례만 따를 것이 아니라 장차 발포되리라 믿는 그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거함이 부득이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투표케 되었고 이승만(李承晩)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1919년 8월 그는 다시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가, 1920년 9월에는 외무총장이 되었다. 1922년 초에 개최된 태평양회의는 국민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는데 그 까닭은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의 실패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동태가 파탄적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운동이 고조되었으며, 같은 해 2월 8일부터 개막된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다. 3월 11일에 그를 비롯한 5명의 의원은 국민대표회의는 정부가 주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시국 수습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부결되었고 국무원은 총사퇴하여 정국은 혼란 속에 빠져 들어갔다. 따라서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의정원이나 국무원에서는 대통령에게 전보를 쳐서 속히 상해로 건너와 사태를 수습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대통령은 귀국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여 정국은 더욱 혼미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법정연구회(法政硏究會),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등이 조직되어 사태수습을 도모하였는데 이때 그는 시사책진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각처에서는 다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의 난립은 파쟁과 의견충돌만을 야기할 뿐 효과적이고 조직적인 광복운동에는 기여함이 적었다. 이리하여 독립지사들은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승적(大乘的) 견지에서 통일된 단체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임정」기치하에 단결하였다. 그 첫 시도가 유일독립당(唯一獨立黨)의 조직이었다.
1932년 1월 일본이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 급변하는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독립운동 세력의 총집결을 절감하고 또다시 통합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때 그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들 대표는 처음에는 선전공작에 주력하다가 마침내는 단일당의 창립에 합의하여 1935년 7월 5일에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다시 분열되어 1937년에 그는 김인철(金仁喆) 등과 함께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조선민족투쟁동맹은 좌익진영인 조선민족 혁명단, 조선혁명자연맹과 합하여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을 결성하였으며 우익진영에서는 1937년 7월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을 결성하였다. 그후, 1940년 5월에 광복진선에서는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광복군을 창건하였으며, 민족전선측은 동시에 따로 조선민족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독립운동 단체는 양대 진영으로 완전히 분립되었으나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양분된 광복운동에 일대전환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절박한 현실은 사상적 대립에 앞서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시키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민족 의용대는 광복군의 지대로 편입하게 되었고 민족전선의 간부들은 임시정부의 의정원에 들어와 독립이 될 때까지 항일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1942년 6월에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를 설치하기로 하고, 23일에 외교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여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 제공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장건상(張建相)・이현수(李顯洙)・이연호(李然浩)와 함께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박찬익(朴贊翊)・최동오(崔東旿)・김성숙(金星淑)・유림(柳林)을 연구위원으로 임명하여 그 진용을 보강하니 여기서 중대시국에 임시정부의 외교활동도 비로소 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때 그는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를 보게 되니 여기서 선전 업무는 좀더 강력히 집행할 수 있었다. 즉 이때 새로 설치된 선전부에는 총무・편집・발행의 3과와 함께 선전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체의 선전 사업과 각종 선전 지도를 총할하여 행하게 되었는데, 초대 선전부장에 김규식(金奎植)이 선임되었으며, 그는 조소앙(趙素昻)・엄항섭(嚴恒燮)・유림(柳林) 등과 함께 선전계획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즉 그는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0 안중근(安重根) 대한민국장 1962년 추서. 의열투쟁 황해 신천
안중근(安重根) 1878. 9. 2~1910. 3. 26
이명: 응칠(應七), 다묵(多默)
황해도 신천(信川) 사람이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친을 따라 총을 들고 도내에서 동학혁명을 빙자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무리들의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17세되던 1895년에는 부친을 따라 천주교(天主敎)에 입교하고 프랑스인 홍신부와 함께 선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27세되는 광무 9년(1905)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강구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집을 평안도의 진남포(鎭南浦)로 옮기고 재산을 기울여 삼흥(三興)학교・돈의(敦義)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국권이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李範允)・김두성(金斗星)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융희 2년(1908)에는 의군중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慶興)・회령(會寧)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후 다시 노령(露領)의 블라디보스톡・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을 만나 구국의 길을 강구하고 1909년 봄에는 김기열(金基烈)・백낙길(白樂吉)・우덕순(禹德淳)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여 일사 보국을 맹세하고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였다. 1909년 9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등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일찍부터 뜻을 같이하던 우덕순(禹德淳)을 만나 함께 거사하기로 한 다음 권총을 한 개씩 준비하였다. 그리고 하얼빈 방면으로 향해서 가는 도중 다시 유동하(劉東夏)와 조도선(曺道先) 두 사람을 만나 함께 참가하게 되었으며 거사장소를 남청(南淸) 철도의 교환점인 채가구(蔡家溝)와 하얼빈의 두 곳으로 정하고 우덕순은 채가구에서, 그는 하얼빈에서 기다리다가 엄습하기로 하였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9시경 이등박문이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 재정대신 꼬꼬흐체프와 함께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그는 권총을 빼들고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그는 다시 이등의 뒤를 따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총을 쏘아 일본 총영사 천상준언(川上俊彦), 비서관 삼태이랑(森泰二郞), 만주 철도이사 전중청태랑(田中淸太郞) 등을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일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대들자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거사의 성공을 알리는 개가(凱歌)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본국 동포들의 그 큰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조차 없는 것이었다. 또한 청・일전쟁 이래로 일본제국주의의 위협에 떨고 있던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군대해산이 있은 후 중국 상해로 가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예관 신규식(申圭植)의 다음과 같은 시 또한 당시 상황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1909년 11월 그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일제 관리들은 위세를 부리며 중죄인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저들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통렬히 공박하여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일제 관리 또한 그의 의로운 기개에 감복하여 특별히 우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판정에서는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등박문을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장의 신문에 대하여 이등박문은 누차에 걸쳐 대한(大韓)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양국간의 조약과 서명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독립을 빼앗으니 이것은 세계의 인도의 적이요, 우리 대한 신민(臣民) 만대의 원수인 즉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여 일제를 당황하게 하였다. 그는 또 이등박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불법무도한 일을 제 마음대로 하여 동양평화를 교란한 사실 등 15개조의 죄상을 들어 서면으로 저들에게 제출하여 다시금 이등박문을 논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등박문의 처단은 목적의 일부를 달성한 것이요, 정작 큰 소원은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임을 주장하였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의 공판을 받았던 그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하였는데 순국 직전에 그는 아우 정근(定根)・공근(恭根)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고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業)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면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조국이 광복된 지 45년이 지나도록 남북이 갈라진 채 그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오직 부끄러울 따름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1 안창호(安昌浩) 대한민국장 1962 임정・중국방면 평남 강서
안창호(安昌浩) 1878. 11. 9~1938. 3. 10
호:도산(島山)
평남 강서(江西)사람이다.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救世學堂:일명(一名) 원사우학교(元社宇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동회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로 발전함에 따라 평양에서 관서지부(關西支部)를 발기하고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자각(自覺)을 호소하였다.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간사업도 병행해서 추진하였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 가 로스엔젤레스에서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5년에는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여 상부상조 조국광복(相扶相助 祖國光復)을 목적으로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는 등 활동하였다. 1907년 고국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귀국하였으며, 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蕓)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 뒤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각 주요도시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차리는 등 정치・교육・문화의 여러 방면에 걸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를 창설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안중근(安重根) 의거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용산헌병대에 수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0년 일제 통감부(統監府)의 도산내각(島山內閣) 조직 권유를 일축하고, 거국가(去國歌)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다음 해 북만(北滿)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흥사단(興士團) 조직에 착수하여 무실역행・건전인격・단결훈련・국민개업(務實力行 健全人格 團結訓練 國民皆業) 등 정신개조(精神改造)를 목표로 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공립신문을 신한민보(新韓民報)로 표제를 바꾸어 발행하였다. 1919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를 내무총장에 선임하자 상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한 그는 연통제(聯通制) 실시, 독립신문 발간 등 독립운동의 방략을 지도하였다. 동년 7월 2일에는 임시사료편찬회를 구성하고 그 총재가 되어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 전4권을 편찬, 발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하여 해외 교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출연받아 임정을 꾸려나가도록 하였다. 같은 해 임정의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부 총판(總辦)에 임명되었다. 1920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대(對)미국의원시찰단준비위원장이 되어 북경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동년 8월에는 지방선전총판(地方宣傳總瓣)이 되어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만주등지에 배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세력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무위원을 인책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하였다. 1921년에 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뒤에 이 두 단체가 합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되었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그가 부의장에 선임되었으나, 이 회의도 임시정부의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대립되어 실패하자, 북만에 독립운동기지인 이상촌(理想村) 건립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의 독립운동 방략은 군사・외교・재정・문화・식산・통일의 6대운동으로써 후에 민족의 통일단합을 위한 대독립당(大獨立黨)을 결성하여 이를 실행할 것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남경(南京)에서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실력배양운동(實力培養運動)의 기초를 다졌다. 이해에 그는 군자금 확보를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26년에 돌아왔다. 중국에 돌아온 그는 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후보지를 물색하고,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발기 등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어 독립군의 주요 간부인 김동삼(金東三)・박창식(朴昌植) 등이 일경에게 체포된 뒤에, 김좌진(金佐鎭)・정신(鄭信) 등이 암살되는 수난이 계속되고, 이어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이상촌 건설은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상해로 되돌아 온 그는 1930년에 협동상조(協同相助), 소비합작(消費合作), 신용생산(信用生産) 등으로 생활역량(生活力量)을 넓히기 위한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하여 재상해한인(在上海韓人)의 합심 협력을 계획하였다. 1931년 1월에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하여 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흥사단보(興士團報)를 발행하는 등 민족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국민의 자질혁신(資質革新)과 청년 인재 양성 등 흥사단의 이념 구현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흥사단의 취지에 따라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자 설립목적이 동일한 동인호조사와 합병하여 공평사(公平社)로 개칭하고, 그 이사장에 취임하여 생활 역량을 증강시키기 위한 소비, 신용, 생산 등의 합작운동(合作運動)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만보산(萬寶山)사건으로 한중인(韓中人) 충돌사건이 일어나고 중국민의 한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자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 노병회(勞兵會), 교민단(僑民團), 학우회(學友會), 여자청년동맹, 애국부인회, 청년동맹 등의 각 단체를 연합하여 상해한인단체연합회(上海韓人團體聯合會)를 조직하게 되자 그는 흥사단 대표로 이에 참가하여 중국과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강화하였다. 1931년 10월에는 이시영(李始榮)・김사집(金思潗)・김철(金澈)과 함께 교민단 심판원(僑民團 審判員)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에 따라 일경은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조로 독립운동가의 일제 검거를 실시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보를 알고서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상해 하비로(霞飛路)에 있는 이유필(李裕弼)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동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작정인가?" 하는 물음에 그는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고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출옥한 그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지방을 순회하며 계몽 강연을 하였다. 그후, 평남 대보산(大寶山)에 은거하여 이상촌 건설을 계획하였으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同友會) 관계로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중병(重病)이 들어 동년 12월에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3월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2 오동진(吳東振) 대한민국장 1962 만주・노령방면 평북 의주
오동진(吳東振) 1889~1936
호:송암(松菴), 순천(順天)
평북 의주(義州)사람이다.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후 고향에 일신(日新)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폐교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振)・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광제(廣濟)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안병찬(安秉瓚)・김찬성(金燦星)・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오학수(吳學洙)・이춘근(李春根) 등과 함께 안동현(安東縣)에 대한청년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1920년 4월 20일에는 제2회 정기총회 비밀회의에 광제청년단 대표로 참석하여 의용대원의 경비부담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또한 1919년 10월 26일에는 김응식(金應植)과 함께 강변8군 임시 교통사무국 참사(江邊八郡臨時交通事務局參事)로서 지국시찰, 적십자회비 모집 등의 사명을 띠고 국내에 특파되기도 하였다. 1919년 11월 2일에는 안동임시의사회(安東臨時議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20년 2월에는 대한의용군사회・한족회・대한독립단 등이 통합되어 광복군사령부가 설치되자 제2영장에 취임하여 변창근(邊昌根)・홍식(洪植)・최시흥(崔時興)・김창곤(金昌坤) 등과 함께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해 8월에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하게되자 김동삼(金東三)・이탁(李鐸) 등과 협의하여 광복군을 국내에 파견, 일제의 고관과 중요 시설을 파괴함으로써 한국인의 자주성과 배일 의식을 보여주고자 결의하였다. 그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동년 7월에 안경신(安敬信)・임용일(林龍日)・정인복(鄭仁福) 등을 3대로 나누어 국내에 파견하였다. 안경신 일행은 입국 도중에 안주경찰서(安州警察署) 궁동종삼랑(宮東宗三郞)을 사살하고 평양에 들어가 평북경찰서로 사용될 신축 건물을 폭파하였다. 정인복 일행은 신의주(新義州)역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부를 파괴하였고, 임용일 일행은 선천(宣川)경찰서를 폭파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궐석 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았다.
1922년에 환인현 하구(桓仁縣河溝)에서 한족회・독립단・광복단・광복군총영 등 여러 단체가 통합하여 통군부(統軍府)를 조직하자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에 온 힘을 경주하였으며, 이어 통군부가 대한통의부(統義府)로 개편된 뒤에는 교통부장・재무부장・군사위원장으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그후 통의부내에서 내분이 일어나 의군부(義軍府)가 생기는 등 분열 현상이 생기자 1924년 이청천(李靑天)・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남만지역에 산재한 길림주민회・의성단・광성단 등을 규합하여 다시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다. 정의부에서는 처음 중앙행정위원으로서 이탁・현정경・이진산(李震山)・김용대(金用大)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이어 재무부장으로서 군자금 조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후에는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선임되어 일제와의 무력 투쟁을 지휘하였으며, 1926년 초에는 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통합을 위해서 화전현(樺甸縣)을 근거로 통일된 연립내각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1925년 10월 10일에는 임시의정원에서 이탁・김동삼(金東三)・이유필(李裕弼)・윤세용(尹世茸)・현천묵(玄天默)・윤병용(尹秉庸)・김좌진(金佐鎭)과 같이 국무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취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1926년 2월 18일에 해직되었다가, 1926년 10월 10일에 재임명되었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무장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상해에는 가지 않았다. 한편 1926년에 양기탁・고활신(高豁信)・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鐘大),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송헌(宋憲) 그리고 노령에서 온 공산주의자 최소수(崔素水)・이규풍(李奎豊)・주진수(朱陣秀) 등과 함께 길림성(吉林省) 영남(領南)호텔에 모여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그 위원으로서 정의부의 당군을 지휘하였다. 또한 그는 교민들을 위해서 농촌의 개발과 농민의 경제적 지위의 향상, 교육 및 보건・위생 등에도 관심을 갖고, 1927년 4월 1일 김기풍(金基豊)・김진호(金鎭浩)・김이대(金履大)・김원식(金元植)・김호(金虎)・김동삼・김정소(金定消)・김유성(金有聲)・곽종경(郭鐘敬)・곽우명(郭宇明)・노영무(盧永武)・지석보(知錫甫)・이욱(李旭) 등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여 재만한교 2백만의 생활개선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1927년 12월 16일 길장선 흥도진역(吉長線興陶鎭驛)에서 밀정에게 속아 신의주 경찰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이후 장장 6년여의 재판 끝에 1932년 6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형을 받았으며, 1928년 4월에는 정의부(正義府) 10중대원인 김여연(金汝連)・최봉복(崔鳳福) 등이 총사령관인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상고를 포기하고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었으며, 1934년 7월 19일에 20년형으로 감형되기도 하였으나 모진 옥고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3 윤봉길(尹奉吉) 대한민국장 1962 의열투쟁 충남 예산
윤봉길(尹奉吉) 1908. 6. 21~1932. 12. 19
호:매헌(梅軒) 이명:우의(禹儀)
충남 예산(禮山)사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德山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인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日帝)의 식민지교육을 배척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사설서당인 오치서숙(烏致書塾)에 들어가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에게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이때부터 그의 학업은 일취월장하였고 특히 시(詩)에는 발군이었다. 16세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한시(漢詩)를 보아도 그의 시재(詩才)는 짐작할 수 있다.
불후성명사기명(不朽聲名士氣明) 길이 남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밝고
사기명명만고청(士氣明明萬古淸) 밝고 밝은 그 기개 만고에 빛나리
만고청심도재학(萬古淸心都在學) 만고에 빛나는 마음 학문에서 우러나느니
도재학행불일성(都在學行不一聲) 부지런히 쌓아 그 명성 스러지지 않으리
그는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안 1920년대를 풍미했던 새 방향의 민족주의 운동에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그는 당시 민족운동의 기조적인 방향을 잘 제시하여 주었던 «개벽(開闢)» 등의 잡지와 <동아일보(東亞日報)> 등의 신문을 읽고 나름대로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7년 그는 구매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의 경제자립을 추구하였으며 독서회(讀書會)를 통해서 문맹퇴치에 힘썼다. 또한 1928년 부흥야학원(富興夜學院)을 설립하여 농민의 자녀를 교육시켰고 월례강연회(月例講演會) 등을 열어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지어 허례허식을 지양하는 교육정신과 주체적 민족정신의 확립과 근검・절약 그리고 근로정신에 대한 그의 의식을 표출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1929년에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월진회를 통해서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그리고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으나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전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한 그는 한인 동포 실업인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중국채품공사에 취직하여 말총모자 등을 만드는 직공으로 근무하며 한인공우친목회(韓人工友親睦會)를 조직해서 회장의 일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2년 이른 봄부터 그는 상해의 홍구(虹口) 일대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일본군 관계의 정보를 탐지하던 중 박진의 소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한인교포단장(韓人僑胞團長)인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만나게 되었다. 이 당시 김구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의혈투쟁을 계획하고, 그 첫 결실로서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으로 하여금 왜왕(倭王)을 폭사시키려 하였으나 불행히 성공치 못하였다. 하지만 이봉창의 의거는 중국내의 동포들과 독립운동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한민족의 독립투쟁에 대한 열기가 식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게 되었다. 또한 윤봉길에게는 일제(日帝)에 대해 새로운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김구를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론하고 의열투쟁의 기회를 열망하는 상태에서 1932년 4월 29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해사변으로 상해에 진주한 일본군은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며, 상해에 있는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 그리고 입장권만을 휴대하고 참가하라는 보도를 상해일일신문(上海日日新聞)에 보도하였다. 그는 이를 살신구국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였다. 그 이유는 그날의 전승경축식에는 상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軍)・정(政) 수뇌들이 그대로 이동하여 식장에 모일 것이며, 만약 그 원흉들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다면 이봉창의 동경의거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자긍심을 동료들에게 줄 수가 있을뿐더러 중국군이 막대한 희생을 내고도 이기지 못하였던 일본 침략군의 수뇌부를 폭파시키는 전과를 낼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신구국의 결심을 한 그는 의거 4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단원자격으로 김구 단장 앞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4월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고, 특히 28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그곳에 머물러 준비하는 축하식장의 팻말을 보고 도륙의 대상인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해군 함대 사령과 노무라(野村吉三郞)의 설 자리와 그 주위에 모일 인물들까지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4월 29일 일찍 한 교포 집에서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어깨에 메고 손에 들었다. 이 준비된 폭탄은 김구 단장의 요청으로 중국 상해 병공창(兵工廠) 창장 송식표가 기사(技師) 왕백수(王伯修)를 시켜 비밀리에 제조한 것으로, 병공창의 병기주임(兵器主任)이었던 김홍일(金弘壹)장군의 주선으로 김구-윤봉길로 전달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홍구공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새 시계를 김구 단장의 헌 것과 바꾸어 갖고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의 나머지를 김구 단장에게 돌려 주었다. 오전 7시 50분경, 그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투척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중앙의 식단(式壇)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에는 일본 관민이 정연히 도열하였고, 그 앞에 일본 학생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 그 뒤엔 일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식단 위에는 표적물인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자리잡았고, 그 좌우로 일제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주중공사(駐中公使) 시게미쓰(重光葵)・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貞次), 주중(駐中)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민단 간부 도모노(友野盛) 등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착석해 있었다. 그는 미리 보아두었던 뒷편의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오전 11시 20분경, 기념식의 첫순서인 관병식(觀兵式)을 끝내고 이어서 두 번째 순서인 축하식 순으로 접어들어 일본 국가가 제창되었고, 그것이 거의 끝날 무렵이 되었다. 드디어 11시 40분경, 운명의 시각이 되자 그는 도시락으로 된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걸매고 있던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그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의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라가와(白川義則)는 전신에 24개 처의 파편을 맞아 신음하다 5월 24일 사망하였고, 제9사단장 육군총장 우에다(植田謙吉)는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해군총사령관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는 실명하였다. 또한 주중공사 시게미쓰는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고, 거류민단장이며 상해 사변의 민간 원흉인 카와바다(河端貞次)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민단 간부인 도모노(友野盛)도 각기 중상을 입었다. 그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피체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그해 5월 25일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교외에 있던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그의 순국은 그의 뜻대로 한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민족의 마음 속에 살신구국의 높은 정신을 영원히 기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유시(遺詩)에서 의거 당시 그의 살신구국의 의혈정신과 일제치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 의열사의 소원을 엿볼수가 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25세의 나이로 이국(異國) 땅에서 순국한 그의 유해는 1946년 일본에서 박열(朴烈)・이강훈(李康勳)의 주선으로 본국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4 이강년(李康秊) 대한민국장 1962 의병 경북 문경
이강년(李康秊) 1858. 12. 30~1909. 10. 13
자:낙인(樂仁) 호:운강(雲崗) 이명:강년(康年)
이강년의 본은 전주이며, 경북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聞慶郡 加恩面 道胎里)에서 이기태(李起台)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벼슬하지 못한 한적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이강년은 1880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사과(副司果)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벼슬아치 출신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한 예는 극히 드물지만 민족적 정의감이 그로 하여금 동학의 척왜(斥倭) 운동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그는 농민군을 거느리고 관군에 대항하고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이어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 노골화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강년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자 결심하였다. 처음에 훈척(勳戚) 심상훈(沈相薰)을 찾아가 함께 거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가 응하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제천(堤川)에 유인석(柳麟錫)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1월 11일 출생지인 문경(聞慶)에서 봉기하였다. 그전에 그들의 기미를 알아채고 달아나는 안동 관찰사(安東觀察使) 김석중(金奭中)・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 등 3인을 생포하여 농암(籠巖) 시장에서 그들이 적의 앞잡이 노릇한 것을 규탄하고 효수(梟首) 하였다. 일련의 사건으로 소모한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安東)의 창의대장 권세연(權世淵)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1월 15일 고성(姑城)에서 적병을 맞아 교전하였다. 1월 29일 제천으로 유인석을 찾아 보고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로써 유인석의 막하에서 유격장(遊擊將)이 되었다. 이때 김상태(金尙台)・민순호(閔舜鎬) 등이 문경에서 거의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강년은 대체로 생장지인 충청도에서 활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월 1일 전군장 홍대석(洪大錫)과 함께 6초(哨)를 거느리고 수안보(水安保)의 병참을 공격하였으며, 2월 13일 9초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尹基榮)과 함께 문경 평천(枰川)으로 진군하였다. 4월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리는 관군에게 제천 의진이 패하자, 유인석은 거수지계(去守之計)를 정하고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이강년은 후군장(後軍將)을 맡아 유인석의 뒤를 쫓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영월(寧越)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小白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7월에 소백산에서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그는 단양 금채동(丹陽 金采洞)에 은신하였다. 1897년 4월 요동으로 건너가 유인석을 만나고 7월에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을미 의병 활동 중에 유인석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으므로 그 이후 호남・영남 지방의 선비들을 만나 성리(性理)・전고(典故)・예악(禮樂)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자기 수양에 골몰하였다. 또한 1899년 충주(忠州) 유림에서 화서(華西)의 문집을 출간할 때 충주에까지 가서 편집・간행・배포에 앞장섰다. 1907년 3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므로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단양(丹陽)・제천(堤川)・원주(原州)・연풍(延豊)・영월(寧越)・횡성(橫城)・강릉(江陵)・청풍(淸風)・충주(忠州)・문경(聞慶)・예천(醴泉)・영주(榮州)・봉화(奉化)・안동(安東) 등 3도 14군을 휩쓸며 적과 대적하였다. 특히 1907년 7월 5일의 제천 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여 사기가 충천하였고 이어서 경상・강원・충청 일대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이 때 군대 해산에 반대하여 동료 진위대(鎭衛隊) 군인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閔肯鎬) 의진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판서 심상훈이 원주 배양산(培陽山)으로 찾아와 노고를 치사하였다. 조정으로 돌아가 고종(高宗)에게 그 전과를 아뢰었다. 고종은 이강년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제수하며 다음과 같은 밀조(密詔)를 내렸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을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적 신하가 권세를 농락하여 4천년을 내린 종묘 사직과 3천리 넓은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지역이 되었도다. 생각하면 나의 실날 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 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도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쫓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京畿)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殉節) 할 것이다.…
이 때 주천(酒泉)에 40여 진이 모여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중군장 김상태(金尙台), 우선봉장 백남규(白南奎), 좌선봉장 하한서(河漢瑞), 전군장 윤기영(尹基榮), 우군장 이중봉(李重鳳), 좌군장 이용로(李容魯), 감군장 이세영(李世榮) 등의 편제를 갖추었다.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하여 문지동(文池洞)을 거쳐 마수막(馬首幕)에 이르러 충주(忠州)를 치고자 하여 산하의 의진을 풀어서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지키지 않아 충주진격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불당곡(佛堂谷)의 이주승(李胄承)의 집에 머물면서 『국수원류』, 『군계(軍戒)』12귀, 통고문(通告文) 등을 지어 군율을 가다듬었다. 이어서 풍기 도촌(豊基道村)에서 김기찬(金基燦)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金商虎)를 총살하여 친일행위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7월 30일 문경(聞慶) 주흘루(主屹樓)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였는데, 적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다. 원주에 묻어둔 탄환을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시켰으며, 이 때 공을 세운 이만원(李萬源)을 도총독장(都總督將), 권용일(權用佾)을 우군 선봉장에 임명하였다. 청풍의 조동교(趙東敎)・여주의 김현규(金賢圭)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다. 특히 김현규의진에는 해산군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8월 2일 적군이 초곡(草谷)에 이르러 대전하게 되자 조동교와 김현규가 군대를 이끌고 가버려 작전의 허가 드러나 모항령(毛項嶺) 전투에서 32명의 인명 피해를 보게 되었다. 다음날 혜국사(惠國寺) 승려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용기 백배하여 갈평(葛坪)으로 진격하여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투구 등을 노획하였다. 이튿날(4일) 다시 갈평에 나가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槐城)에서 적의 대장 과전삼태랑(戈田三太郞)과 육군 보병 대토촌(大土村)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6일에는 대승사(大乘寺)에서 적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8일 후군장 신태원(申泰元)이 문경 적성(赤城)에서 참패하여 아군 36명이 순국하였다. 이후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양 유치(楡峙)・영월(寧越)・병두(屛杜)・연풍(延豊) 등지에서 적과 대치하였으나 전세는 다소 불리하였다. 9월에 들어서면서 전 정언(正言) 김상한(金商翰), 전 군장(前軍將) 윤기영, 소모장 주광식(朱光植)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자 전세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대전하여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9월 27일 죽령(竹嶺)에서 다시 적 200명을 사로잡았으며, 10월 5일 단양 고리평(故里平)에서 적 80명을 사로잡을 수 있을만큼 강력해졌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산중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적과 대치하게 되자 전세는 불리해졌다. 10월 6일의 소백산정(小白山頂)에서의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10월 23일 풍기 백자동(栢子洞) 전투에서 다시 적 100명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이강년은 그간의 과로와 연이은 패전이 원인이 되어 득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12일 풍기 복상동(復上洞)에서 적을 만나 대적하였으나 그 결과는 대패였다. 이때 이강녕은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같이 패배한 때는 없었다"하고 탄식하며 부하 장령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다음해 봄을 기약하고 의진을 해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강년은 끝내 해산시키지 않았다. 11월 21일 전동 월계봉(錢洞 月桂峰), 12월 3일 낭천 간척리(狼川 看尺里) 그리고 12월 5일 경기도 건천(乾川)에서 각각 적과 대적하여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8년 2월에는 주로 경기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는데 용소동(龍沼洞)에서 적 백여 명을 사로잡은 것을 비롯하여 대청리(待淸里)・갈기동(葛基洞)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1908년에 이강년 의진이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로는 3월 12일의 강원도 인제(麟蹄) 백담사(百潭寺)의 전투와 안동 서벽(西壁), 4월 6일 봉화 내성(乃城) 전투 그리고 4월 8일의 안동 재산(才山)의 전투를 들 수 있다. 1908년 3월 12일 백담사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일… 적이 많이 들어오므로 쳐서 무너뜨렸다. … 이튿날 새벽에 파수병이 3번이나 급한 정세를 보고하기를 적 500여명이 북쪽에서 온다고 했다. 군중이 모두 나가 좌우로 독려하여 반 날을 격전하니 적이 크게 무너지므로 추격하여 무찔렀는데 적의 죽은 자가 수백여 명이며 우리 군사의 사상자도 수십여 명이었다. 이날 간성(杆城) 신흥사(神興寺)로 옮겨 주둔하고 군사들을 교련시켰다. 다음날 다시 오세암(五歲菴)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들 이강년의진은 하루를 교전하고도 여력이 남아 있어 군대를 이끌고 설악산(雪嶽山)을 넘나들며 훈련하였으니 이들의 능란한 기동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대는 일찍이 관동의진의 민긍호가 활약하던 지대로서 그가 체포된 후 곧 이어 이강년이 장악한 것이다. 이때 이강년은 이준명(李準明)・정원팔(鄭元八) 등 260명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산악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이강년은 강원도를 떠나 4월에 경북 일월산(日月山)을 거점으로 삼고, 산하 의병장인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顯)・김상태(金尙台)・정경태(鄭敬泰)・백남규(白南奎)・정연철(鄭連哲) 의진 4천여 명을 서벽(西壁)에 주둔시켰다. 이에 대하여 일군은 영천(永川)수비대를 파견하였으므로 이들과의 전투가 불가피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 수백 명을 사로잡고 2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 때 적들은 내성(乃城)으로 퇴군하였으며, 의진 역시 내성 쪽으로 행군하여 유진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적 수백 명이 영천으로부터 온다고 파수병이 고하였다. 이강년은 먼저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맞이하여 싸웠다. 반나절 동안 전투하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때 설치한 설복비계(設伏秘計)에 대하여 의진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의진이 안동 재산(才山)에 이르자 대구로부터 적의 내습이 있었다. 이강년은 이만원(李萬源)・권용일(權用佾)을 동구(洞口)에 매복시키고, 하한서를 왼쪽에, 성익현(成益鉉)을 오른쪽에 매복시키고, 백남규는 분병(分兵)하여 양쪽에 매복하도록 한 후, 이강년은 갑사(甲士)들을 거느리고 남산(南山)에 올라가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은 의병 복장으로 변장하고, 의병기를 들고 달려왔다. 적이 깊숙이 들어올 때를 기다려 복병이 일제히 사격을 하고 이강년은 산 위에서 독전(督戰)하였다. 탄환이 빗발같이 쏟아지자 적은 놀라고 짓밟혀 죽은 자가 과반이 되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달아났다. 아군의 사망자 10명, 부상자 8명이었다. 이상으로 알 수 있듯이 이강년이 10여 년간에 걸친 의병활동에서 비견될 바 없이 혁혁한 공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능숙하고도 대담한 전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강년은 6월 4일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의 탄환이 복사뼈에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도선봉(都先鋒) 하한서 및 7명이 전사하였다. 이들을 돌아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내가 잡힌 몸이 되었으니 별 수 없다. 전사한 사람들을 잘 매장하여 주기 바란다."고 부탁하고 제천으로 압송되었다. 처음에 일인들이 그의 부상을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거절하고 일음일식(一飮一食)하였다. 그나마 일본인이 가져다 주는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후 그는 이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서울로 압송된 후 평리원(平理院)에 이송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9월 19일(음)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으니, 그의 애국충정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을 추서하였다.
15 이승만(李承晩) 대한민국장 1949 임정・중국방면 황해 평산
이승만(李承晩) 1875. 3. 26~1965. 7. 19
호:우남(雩南) 이명:일수(一秀), 이승룡(李承龍)
황해도 평산(平山)사람이다.
3살 때 서울 남대문 밖 염동(鹽洞)으로 이사하였다. 1894년에 신긍우(申肯雨)의 권유로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으며 미국인 선교사 부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며 학비를 벌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진보적인 개화당 관계의 청년들과 많이 접하게 되었으며 외국의 문물을 섭취, 그 자신도 진보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다. 1896년에 서울에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였으며,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신문을 발간하고 주필이 되어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하였다. 이에따라 협성회보는 정부탄압이 심해져 폐간되었고, 그 뒤 매일신문(每日新聞)이라는 일간지를 발행하고 주필로서 계속 활동하였다. 그 당시 독립협회(獨立協會)는 서재필・이상재(李商在)・남궁억(南宮檍)이 주축이 되어 민권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898년에 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는 해산상태에 처하게 되었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되었으며, 이상재와 남궁억도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하는 전단을 배포하였는데 그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 감옥에서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獨立精神)」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로 「세계와 마땅히 통하여야 할 줄로 안다」고 하여 국제간의 외교, 다른 나라와의 통상, 외국인과의 친선 등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로 「새 법으로써 각각 몸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을 삼을 것」이라고 하여 주로 새 질서 추구, 생활개선, 낡은 사고방식에서의 탈피 등을 주장한다. 세째로 「외교를 잘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전제를 붙여놓고 국제사회와의 균등한 외교를 확보함으로써만 약소국은 열강에 끼어 살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네째로 「국권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치외법권을 물리칠 것, 민족적 자존심을 가질 것, 국기를 소중히 여길 것, 외국에 입적하지 말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다섯째는 「의리를 존중하라」고 하면서 정의와 대의에 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여 국가에 대한 국민적 모랄을 강조한다. 여섯째는 「자유권을 중히 여길지라」하여 민주주의의 기본인 개개인의 자유, 평등과 이를 확보하기 위한 권리, 의무에의 충실을 강조하고 있다. 1904년 노일전쟁이 발생하고 민영환(閔永煥) 등 혁신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7년만에 석방되어 11월에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바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학문을 접한 뒤 1910년에 귀국하였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되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이 총회의 연설에서 그는 기독교정신과 민주주의 이념인 자유・평등・인류애에 호소하면서 일본에게 약육강식당한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고 국제 여론은 마땅히 한국을 불합리한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주로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이라는 신문을 발간하였고, 박용만(朴容萬)・안창호(安昌浩)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동지들과의 연락 아래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도록 진력하여 김규식(金奎植) 등이 그 회의에 참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였으며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 병탄(倂呑)과 만주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였다. 1934년에 오스트리아 여성인 프란체스카 마리아여사와 결혼하였다.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그는 VOA를 통하여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을 실시하여 희망과 용기를 북돋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하여,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하였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16 이승훈(李昇薰) 대한민국장 1962 3・1운동 평북 정주
이승훈(李昇薰) 1864. 4. 25~1930. 5. 9
호:남강(南崗) 초명:인환(寅煥)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안북도 정주(定州)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07년(광무 11)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에 감동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소학교를 세우고,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건립하는 한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기독교 정신으로 바꾸어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1911년 5월 신민회 사건으로 거주의 제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해 9월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대구(大邱)와 경성형무소에서 4년 2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15년 가출옥하여 세례를 받은 뒤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목사가 되었다.
1919년 2월 상순 최 린(崔麟)・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남선(崔南善) 등이 중앙학교 안에 있는 송진우의 집에 모여, 한말(韓末)의 요직자와 기독교측의 동지를 포섭키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손병희(孫秉熙)를 민족대표로 삼아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와 의견서, 청원서를 작성키로 하고, 이를 최남선에게 일임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 최남선이 기독교측의 동지를 구하는 일을 맡았는데, 우선 기독교계에서 영향력이 있고 평소에 잘 알고 있던 그를 포섭하기로 하였다. 최남선은 2월 11일 사람을 중계하여 이승훈을 오산학교 경영의 일을 구실로 하여 상경케 하였는데, 이 때 최남선은 일본헌병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송진우로 하여금 김성수(金性洙)의 집에서 그를 만나게 하여 기독교측의 참가와 동지규합의 일을 부탁하였다. 이에 그는 즉각 찬성하고 동지의 규합을 위하여 당일로 서울을 떠나 선천(宣川)으로 가서, 이튿날인 12일 장로교 목사인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이명룡(李明龍)・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고, 유여대와 김병조의 인장을 위탁받고, 양전백과 이명룡에게는 상경하도록 하였다.
14일에는 평양의 기홀(紀笏) 병원에서 길선주(吉善宙)・신홍식(申洪植)에게 독립운동 계획의 취지를 설명하여 이 계획에 참여하도록 종용하였다. 그 후 상경하여 20일 밤에는 박희도(朴熙道)의 집에서 남감리파 목사 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오기선(吳基善)・신홍식 등과 만나 독립운동 계획에 대한 협의 끝에, 서울 및 각 지방에서 기독교측의 동지를 규합하여 이들과 함께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하고, 정춘수로 하여금 원산(元山) 방면을 담당케 하였다.
이튿날인 21일 그는 최린의 집에서, 최남선・최 린과 만나 전날 밤 박희도의 집에서 기독교측의 동지들이 모여, 기독교측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그들이 독립운동은 민족전체에 관한 문제이므로 종교의 종류를 불문하고 다함께 협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다시 동지들과 협의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대답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다. 이날 밤 다시 세브란스 병원내의 이갑성(李甲成) 처소에서, 박희도・오기선・오화영・신홍식・함태영(咸台永)・김세환(金世煥)・안세환(安世煥)・현 순(玄楯) 등과 만나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하다가, 결국 천도교측의 독립운동 방법을 확인한 후 결정키로 하고 이 문제를 함태영과 함께 담당하기로 하였다. 22일에는 최 린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으로 5천원을 원조받고, 함태영과 함께 천도교측의 독립운동계획을 물어보자, 최 린은 기독교 측의 계획대로 독립선언을 하지않고 독립청원서만을 제출하려면 연합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기독교측의 대표들과 모여 독립운동 계획의 방법을 숙의한 끝에, 천도교측의 주장에 따르기고 결정하였다. 이에 24일 함태영과 함께 최 린을 찾아가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동의하였으며, 그 방법으로 국장(國葬) 직전인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하고, 스스로 기독교측의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27일에는 이필주(李弼柱)의 집에서 박희도・이갑성・오화영・이필주・함태영・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 등과 모여,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이에 찬성하여 함태영을 제외하고 모두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天道敎)・기독교・불교(佛敎)측의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계획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7월에 가출옥으로 출감하였다. 출옥 직후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를 정비한 후, 1933년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사장에 취임했다가 1년만에 사임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오산학교의 경영에 힘쓰다가 산업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자면회(自勉會)를 조직하여 농가의 부수입을 올리게 하고,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공동 경작케 하는 등 농촌 부흥에도 진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7 이시영(李始榮) 대한민국장 1949 임정・중국방면 서울
이시영(李始榮) 1869. 12. 3~1953. 4. 17
호:성제(省齊) 자:성옹(聖翁)
서울 저동(苧洞) 사람이다.
17세 때인 1886년에 식년감시(式年監試)에 생원발해(生員發解)하여 관계에 투신한 뒤 1909년까지 형조좌랑(刑曹佐郞), 홍문관교리 수찬(弘文館校理 修撰), 승정원 부승지(承政院 副承旨),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 평남관찰사(平南觀察使), 중추원 칙임의관(中樞院 勅任議官), 한성 재판소장(漢城裁判所長), 고등법원 판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그는 조국의 운명이 날로 기울어져감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안창호(安昌浩)・이승훈(李昇薰)・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 등 동지들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관직에 있으면서 구국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위로는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과 아래로는 소영(韶榮)・호영(護榮) 등 형제의 가족 50여명을 이끌고 남만의 유하현 추가보(柳河縣鄒家堡)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이들의 뒤를 이어 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주진수(朱鎭洙)・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이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기지 설립에 찬성하고 속속 유하현 삼원보에 집결하게 되었다. 1911년 4월에는 이곳 대고산(大孤山)중에서 노천군중대회(露天群衆大會)를 열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창설하고 이상룡을 사장에 추대하여 일면 민생(民生), 일면 교육(敎育)이라는 두가지 목표를 내걸고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등 최초의 항일 구국의 자치단체로서 괄목한만한 활동을 벌였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에 교사를 신축하고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장하여 본격적인 독립군 간부 양성을 서둘러 1920년 동교가 폐교될 때까지 3,500여명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그 유명한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의 주축을 이루었다. 이 당시 일본 대판(大阪)에서 발행되던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는 "이시영(李始榮)은 만주(滿洲)의 무관왕(無冠王)이요 만주일대(滿洲一帶)의 살인강도두령(殺人强盜頭領)이라"고 표현할만큼 일본 전체가 그를 크게 주목하게 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대가 습격하여 무차별 학살과 방화, 약탈을 자행하니 그 참상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다시 북경(北京)으로 이주하여 중국의 원세개총통(元世凱總統)을 통하여 동삼성(東三省)의 한교(韓僑)문제를 원조하는 데 기여하였다. 1919년에 그는 북경에서 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조완구(趙琬九) 등 동지들과 모여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곧 이어 상해로 달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가 동년 9월에 재무총장에 전임되어 1926년까지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이 몇해 동안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에 고심한 것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의혈지사들이 그의 지시에 따라 국내에 들어와서 군자금은 수집하거나 혹은 비밀연락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일도 수없이 많았다. 1929년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그는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1931년에는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있기전에 미리 항주(杭州)로 가서 임정 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33년 임시정부를 개조(改造)하여 주석(主席)을 윤번제(輪番制)로 하게 됨에 따라 그는 다시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에 임명되어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1934년에 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 출판하여 우리 독립전선에 정신적 불길을 치솟게 하였다. 1935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확대되어 임시정부가 중경(重慶)으로 이전한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42년에는 다시 임시정부의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임정의 어려운 재정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독립운동 선상에서 고귀한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정식으로 대일전(對日戰)에 참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항복이 있었음에도 우리 손으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실시하지 못하였으며, 광복후에는 연합군의 개입과 민족내부의 사상분열로 남북이 분단되기에 이르고 말았다. 광복 후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18 이준(李儁) 대한민국장 1962 애국계몽운동 함남 북청
이준(李儁) 1858. 12. 18~1907. 7. 14
호:일성(一醒)
함경남도 북청(北靑)군 속후(俗厚)면 중산(中山)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에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의 검사보를 거쳐 검사로서 관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1월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에 가담하였다.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불법 상륙시켜 한국정부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가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는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에 가입하여 그 총무의 직책을 맡고 격렬한 반대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때 보안회의 회장은 송수만(宋秀晩), 부회장은 원세성(元世性)이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해산당하자, 그 후속단체로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였다. 대한협동회의 회장은 이상설, 부회장은 이준, 총무는 정운복(鄭雲復), 평의장은 이상재, 서무부장은 이동휘, 지방부장은 양기탁, 재무부장은 허위(許蔿) 등이었다. 대한협동회는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에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의 책임을 맡고 반(反)일진회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준을 6개월의 유배형(流配刑)으로 황해도 철도에 귀양보내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자, 이준은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동지들인 전덕기(全德基)・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최재학(崔在學)・계명륙(桂明陸)・김인즙・옥관빈(玉觀彬)・이승길(李承吉)・차병수(車炳修)・신상민(申尙敏)・김태연(金泰淵)・표영각(表永珏)・조성환(曺成煥)・서상팔(徐相八)・이항직(李恒稙)・이희간(李喜侃)・기산도(奇山濤)・김병헌(金炳憲)・유두환(柳斗煥)・김기홍(金基弘)・김구(金九)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먼저 「을사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회・2회로 도끼를 메고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체포당하든지 몇번이고 반복하기로 하였다. 제1회의 상소문을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두가 되고 다섯명이 연명으로 서명하여 대한문 앞에 몰려가서 상소운동을 시작하였다. 일제경찰이 출동하여 상소운동을 탄압하려 하자 이준 등은 가두연설을 하여 시민들과 함께 투석전을 하면서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일본군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탄압하고 이준 등 지도자 수십명을 체포하였다. 국권회복운동이 장기전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이준은 1906년에 국민의 애국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또 이 목적을 전국 각 지방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하여 그의 고향인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 단체로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여 지도하였다. 또한 이 해에 일제의 완전식민지화를 저지하려면 국왕이 조약체결의 전제권을 갖지 않고 의회가 이를 심의하고 동의케하는 제도로 개혁해야 함을 주장하여 입헌제도의 연구와 개혁을 추진하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헌정연구회가 확대개편되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6~7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덕기・이회영(李會榮)・박(朴)상궁 등의 도움을 받아 황제 고종에게 이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서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반하여 일제가 군사적 강압을 가하여 체결된 것으로 고종은 찬동한 바 없는 조약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였다. 고종이 이에 동의했으므로 극비리에 밀사(密使)로서 정사(正使)에 이상설, 부사(副使)에 이준과 이위종(李瑋鍾)이 임명되고 만국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가 준비되었다. 이상설은 이때 이미 망명하여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있고, 이위종은 주 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晋)의 아들로서 공사관의 2등참사관이 되어 페테르부르그에 있었다. 이준은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의 밀사로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가 출발하기 직전인 4월 초에 양기탁과 안창호(安昌浩)가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운동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었으므로 신민회에 가입했으나 곧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으므로 활동은 할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을 만나 밀사임명의 칙서를 전하고 함께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부르그로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특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약속받았다. 이준 등 세 밀사는 1907년 6월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가 방해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밀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또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7월 9일 각국 신문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서 행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밀사의 활동에 협조적이었던데 비하여,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준은 이에 분개하여 통탄하다가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한편 일제 통감부는 궐석재판에서 이준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 임병직(林炳稷) 대한민국장 1976 미주방면 충남 부여
임병직(林炳稷) 1893. 10. 26~1976. 9. 21
충남 부여(扶餘)사람이다.
1913년 이승만(李承晩)의 알선으로 도미(渡美), 오하이오대학에 재학중 한국학생평론(韓國學生評論)을 창간하고 그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였으며,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한 한인중앙학원, 한국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서재필(徐載弼) 등이 재미한인대회를 개최하자 동대회의 서기장(書記長)에 임명되어 독립운동 방략을 토의하였다. 이후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활약하면서, 일황(日皇)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초에는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黃鎭南)과 상해를 출발하여 파리, 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제국에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공세를 펴는 한편 한국의 독립을 적극 지원하던 영국인 G.L.쇼우와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1941년 4월 20일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회(海外韓族會) 대회가 개최되어 재미한족연합회(在美韓族聯合會)가 구성되자 그는 김호(金乎)・한시대(韓始大)・김병연(金炳淵)・송철(宋喆) 등과 집행부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42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국방경비대(韓人國防警備隊 일명:맹호대(猛虎隊))가 조직되어 김용성이 사령관에 임명되고, 그는 선전관 참위(宣傳官 參尉)로 임명되었다. 1943년에는 구미위원부 무관(武官)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韓美) 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여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0 조만식(曺晩植) 대한민국장 1970 학생운동 평남 강서
조만식(曺晩植) 1883. 2. 1~미상 호: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江西)사람이다.
15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1905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하여 재학중에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1908년에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했다. 1910년 명치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여 1913년 졸업하였다. 1913년 귀국 후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취임했고 1915년에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운동에 적극 참가하기 위하여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서 평양의 제2차 만세시위운동의 조직 책임자로서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월에 가석방되었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1921년에는 평양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로 시무하였다. 1922년 7월 평양에서 김동원(金東元)・오윤선(吳胤善) 등을 비롯하여 그곳 기독교청년회와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 김성수(金性洙)와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적극적 지지를 받아 1922년 12월 7일에는 동아일보가 물산장려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하여 서울과 지방의 반응이 컸으므로 1923년 1월 21일 서울에서 중앙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창립하고 전국 각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여 전국적인 물산장려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22년 11월에는 이상재(李商在)를 대표로 하고 조만식 등 47명이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하였다. 그는 이 교육운동을 매우 중시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29일에는 각계 대표 400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해서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을 발기했으며,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이해에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의 교장에 취임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얼마 후에 사임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역 앞에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民衆大會)를 개최하려다가 12월 13일 일제 경찰에 일시 구속되었다. 1930년 평양에서 체력향상을 위하여 창립된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에 선출되었다. 1931년 7월 만주에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서 한국인 학살이 자행되자 동지들과 함께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중심으로 만주에 있는 동포들의 보호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에 취임하여 경영난에 빠진 신문사를 수습하고 민족언론의 창달에 공헌하였다. 1934년 5월 국사・국어를 중심으로 한 국학연구단체인 진단학회(震壇學會)가 창립되자, 그 찬조위원으로 가입하여 이를 지원하였다. 일제 강점기간에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하여 여러차례 군자금을 모집하여 보냈으며, 국내에서는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43년 지원병(志願兵)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하러 온 일제의 조선군 사령관 이다가끼(板垣)와의 면담을 거절하고 한국 청년들의 징병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일제 경찰에 일시 구속되었다. 곧 석방되었으나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가 신사참배(神社參拜)거부로 폐쇄당하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은거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8・15광복후에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위원장과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고 반공노선에 입각한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평양고려호텔에 연금 1946년 1월에 행방불명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0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1 조병세(趙秉世) 대한민국장 1962 미주방면 경기 가평
조병세(趙秉世) 1827. ~1905. 12. 1
자: 치현(稚顯) 호: 산재(山齋)
경기도 가평(加平)군 가평면에서 태어났다.
185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사관(史官)이 되고 1874년에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1887년에 대사성(大司成)에 승진하고 이어 의주부윤(義州府尹)과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공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1889년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이 해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1893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7월의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중추원좌의장(中樞院左議長)이 되었다가 후에 사직하고 가평의 향리로 은퇴했다. 1896년에 폐정개혁을 위한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했고, 1898년에 의정부의정(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1900년에 다시 입궐하여 국정의 개혁을 건의하고 향리에서 은거하였다. 1905년에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조병세는 향리에서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니 내 세신(世臣)으로 따라서 죽음이 마땅하다」하고, 신병을 무릅쓰고 상경하여 고종황제에게 알현하기를 청하면서 상소를 올렸으나 황제는 인후증이 있다하고 면알을 사절하므로 부득이 사제로 물러나왔다. 이에 조병세는 1905년 11월 26일 궁내부 특진관 등 백관(百官)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 정청(庭請)하고 소두가 되어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었다. 황제는 「소장을 보건대 공분에서 나온 건의이므로 상량하여 조처할 것이니 경등은 양지하고 물러가라」고 비지를 내렸고 일본군이 이들을 몰아내었다. 조병세는 굽히지 않고 백관들을 이끌고 대한문(大漢門) 앞으로 나아가 계속해서 「을사조약」의 파기와 매국5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는 강경한 상소를 여러차례 올리고 항쟁을 계속하였다. 일제 헌병대는 조병세를 체포하여 일본헌병주재소에 구속했다가 노령이므로 이튿날 석방하였다. 조병세는 석방된 날인 12월 1일 표훈원(表勳院)으로 가서 다시 상소운동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일제 헌병대가 다시 출동하여 교자에 태워서 그의 족질(族姪)인 조민희(趙民熙)의 집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이에 조병세는 상소운동마저 할 수 없음을 알고 고종에게 드리는 유소(遺疏)와 국민들에게 보내는 유서 및 각국공사관에 보내는 유서 등 3통을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조병세는 국왕에게 남긴 유소에서 「신이 역신(逆臣)을 제거하지 못하고 늑약(勒約)을 취소시키지 못한즉 부득불 한번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하려는 고로 폐하께 영결을 고하오니, 신이 죽은 후에라도 진실로 분발하시어 결단을 내리셔서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 5역신을 대역부도한 죄로 처형하시어 천지신인에게 사례하시고 각국공사에게 교섭하여 위약(僞約)을 폐기하시고 국명(國命)을 회복하신다면 신은 비록 죽어 있다고는 하나 살아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말이 망녕되었다고 하신다면 즉시 신의 몸을 절단하시어 여러 적신(賊臣)들에게 내려주소서」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과 국권회복을 요구하였다. 그는 또한 국민에게 고하는 유서에서 「병세가 죽음에 임하여 국민에게 고하노니 오호라, 강한 이웃이 맹약을 어기고 적신이 매국하여 5백년 종사가 종막이 가까웠고 2천만 생령이 장차 노예가 되는지라, 차라리 죽어 버리지 차마 오늘의 이같은 치욕을 볼 수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지사가 피가 다하도록 울부짖을 때이다……내가 충분(忠憤)이 격동하는 바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상소문을 들고 궐문에서 절규하매 궐외에 엎드려 이미 옮겨진 국권을 떠받치고 빈사지경에 이른 생령을 구하려 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않고 대세 이미 틀렸으니 오직 한번 죽음으로써 위로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 인민에 사례하노라. 그러나 여한이 되는 것은 국세(國勢)가 회복되지 못하고 황상의 위엄이 행해지지 못하는 것이라. 우리 전국동포는 내가 죽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각자 분발하여 나라를 도와서 우리 독립의 기초를 길러서 나라가 망한 부끄러움을 설욕한다면 나는 비록 구천지하에서나마 춤추며 기뻐하리니 각자 힘쓰도록 하오」라고 하여 전국 동포가 국권회복운동에 분발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또한 각국공사에게 보낸 유서에서 여러나라가 공동협의하여 한국 독립의 회복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조병세의 〈자결〉과 유서 3통은 1905년 12월 3일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보도되고 전문이 게재되어 전국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고 국민들이 국권회복운동에 분발하는데 큰 자극과 격려를 주었다. 조병셍의 관을 안치한 곳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그의 애국충정을 기리고 국권회복을 다짐하였다.
정부는 그의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2 조소앙(趙素昻) 대한민국장 1989 임정・중국방면 경기 양주
조소앙(趙素昻) 1887. 4. 10~납북 이명:용은(鏞殷)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이다.
1911년 3월 일본(日本) 동경(東京) 명치(明治)대학의 법과에 유학하던 중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재망명길에 오른 이승만(李承晩)이 동경에 체류하는 기간동안 유학생에게 행한 강연으로 인하여 반일민족사상과 조국광복의 독립사상을 갖게 되었다. 1913년 중국 북경(北京)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조하여 혁명청년들을 훈련시키며 진영사(陳英士)・황각(黃覺) 등과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와 아시아 민족의 반일단체로서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 1915년 구국종교로서 민족의 대동단결과 정신적 유도를 목적으로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하였는데, 이는 단군(檀君)은 '독립사상(獨立思想)', 불타(佛陀)는 '자비제중(慈悲濟衆)', 공자(孔子)는 '충여일관(忠恕一貫)', 소크라테스는 '지덕합치(知德合致)', 예수 그리스도는 '애인여기(愛人如己)', 마호메트는 '신행필용(信行必勇)'으로써 연결하여 육성일체(六聖一體)를 구상한 것이다. 1919년 2월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의 밀명을 받아 일본 동경으로 파견되어 조선의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8독립선언의 계기를 조성하면서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19년 4월 10일 3・1독립운동 이후 국내 서울에서는 조선민국 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고 정도령(正都領)에 손병희(孫秉熙), 부도령(富都領) 및 내각총리경(內閣總理卿)에 이승만(李承晩)으로 내각을 구성할 때 그는 교통무경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과 함께 혁명당(革命黨)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기 위한 임시헌장(臨時憲章)과 임시의정원법(臨時議政院法)을 제정하여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이 개회됨으로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구성되자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정보통신과 군자금 모집, 송금
23 최익현(崔益鉉) 대한민국장 1962 의병 경기 포천
최익현(崔益鉉) 1833. 12. 5~1906. 11. 17(음)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菴)
최익현의 본은 경주로서 최치원(崔致遠)의 후예이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抱川郡 內北面) 가채리에서 대(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資質)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 하였다.
가세가 가난하여 4세 때 단양(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옮겨다니며 살았다. 1846년 14세 때 부친의 명에 따라 화서 이항노(華西 李恒老)의 문인이 되었는데 면암이라는 호는 화서에게서 받은 것이다. 23세 때 명경과(明經科)에서 갑과(甲科)로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중 면암은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계열의 위정척사(衛正斥邪)이었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면암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이는 1868년의 시폐4조(時弊四條)의 상소와 1873년의 오조상소(五條上疏)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결과 대원군(大院君)을 하야(下野)시킬 수 있었으나, 그 역시 유배당하여 제주도와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후로는 관직에서 오르지 않았지만 1895년 명성황후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상소를 통한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미 1875년 개항(開港)에 반대하여 이른바 "지부복궐 척화의소(持斧伏闕 斥和議疏)"를 상소한 바 있지만 1906년까지 30편의 상소를 올려 시종일관(始終一貫) 위정척사 사상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개항에 대한 면암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1875년 상소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번 화친을 맺는 날 저 적(賊)의 욕심은 물화(物貨)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물화는 사치 기완(奇玩)하고 수공생산품(手工生産品)이어서 그 양이 무궁한 데 반하여 우리의 문화는 모두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는 토지생산품으로 그 양이 유한합니다. 따라서… 교역을 한다면 우리의 심성(心性)과 풍속은 패퇴할 뿐만 아니라 그 양은 틀림없이 일년에도 수만에 달할 것이니…… 이에 따라 나라 또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와같은 그의 사상은 말년에까지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이 굴절될 우려가 있는 관직생활을 끝까지 거부하고 있으며 심지어 면암의 상소에 의해 결정적으로 실각의 계기가 마련되었던 대원군이 1894년 재집권하게 되었을 때, 개항에 대하여 같은 견해를 표명한 면암을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1895년 6월 상소를 올려서 일본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개화의 모순을 지적하였는데 이 때문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그들에게 영향력이 큰 면암을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하였으나, 면암은 응하지 않았다. 1898년 의정부 찬정(議政府 贊政)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에 임명되었으나, 수무비 명대의(修武備 明大義) 등의 시무책 12조를 들어서 상소하였을 뿐 응하지 않았다. 1904년 노일전쟁(露日戰爭)이 일어나자 고종이 다시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날로 기울어가는 국운(國運)을 좌시할 수 없어 고종을 알현하고 오조수차(五條袖箚)를 상주(上奏)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2차례나 감금된 상태에서 드디어 을사조약이 늑결되었다. 이에 항의하여 민영환(閔泳煥)이 자결하자, 면암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을미사변 때의 역적이 실로 만고의 대역적임은 말할 것도 없읍니다만, 이 을사 5적들은 그 죄가 오히려 아비나 임금을 죽인 것보다도 더 심한 것입니다. 지금 이런 대역적들을 오히려 용납하여 일시라도 천지 사이에 그대로 살아 있게 할 것이겠습니까. 저 5적들이 비록 외세에 의지하여 군부(君父)를 협박하는 것이나 역시 폐하의 신하인데, 어찌 차마 이 역적들과 더불어 같은 하늘을 이고 아직도 처벌을 내리지 않나이까……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죽어 가는 말이라고 하여 귀에 흘려버리지 마시고, 속히 국적을 토멸하는 동시에 허위 조약을 거부하라는 신의 요청을 단행하여 국가의 멸망을 돌이켜 다시 보전할 수 있게 하소서. 신은 통곡하여 숨이 끊길 듯함을 어쩔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삼가 이만 아룁니다. 이상의 상소를 통한 평화적 항일구국운동으로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무력투쟁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 때 면암은 74세의 고령이었다.
1906년 2월 면암은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처음에 상경하여 일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일인들의 방해로 상경하지 못하였다. 다시 판서 이용원(判書 李容元)・판서 김학진(判書 金鶴鎭)・관찰사 이도재(觀察使 李道宰)・판서 이성렬(李聖烈)・참판 이남규(參判 李南珪)・곽종석(郭鍾錫)・전 우(田愚)에게 편지를 보내어 함께 국난을 타개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면암은 문하생 최제학(崔濟學)을 전 낙안군수(樂安郡守) 임병찬(林炳瓚)과 연락케 하여 전라도에서 거의(擧義)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의 의병활동은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은거지인 포천을 탈출하여 태인에 이른 것이 1906년 3월 24일, 거유 면암의 부름에 호응한 인물은 이정규(李正奎)・김 준(金準, 泰元)・조재학(曹在學)・이양호(李養浩) 등이었다. 기우만(奇宇萬)과도 만나 거사를 상의하기도 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궐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문인들을 중심으로 동맹록(同盟錄)을 만들게 하니 4월 10일 현재 113명에 이르렀다. 4월 13일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 궐기를 위한 강회(講會)를 열어 당일에 80명의 호응을 얻고 각지의 포군들을 모집하여 무기를 준비하였다. 창의(倡義)에 앞서 민영규(閔泳奎)를 통하여 기병소(起兵疏)를 올려 그 목적을 천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오를 갖추고 4월 13일 태인읍으로 들어가니 군수 손병호(孫秉浩)는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쉽사리 태인을 접수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수비케 하였다. 이 때 일본영사관에는 16개항의 죄목을 들어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 이튿날(14일) 정읍(井邑)으로 진군하니 군수 송종면(宋鍾冕)이 의병을 맞이하였으며, 이곳에서 다시 무장을 강화하고 의병 소모(義兵 召募)의 방을 붙여 100여 명의 장정이 증원되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내장사(內藏寺)에 유진(留陣)하니 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많은 포수들이 호응하여 의진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5일 구암사(龜巖寺)를 거쳐 16일 순창읍으로 들어갔다. 17일 곡성(谷城)읍으로 진주하였다가 18일 중진원(中津院)을 지나 남원(南原)으로 진군하려는 데 남원은 이미 방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길을 돌려 순창으로 회군하였다. 그러는 동안 의병부대는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때 전주의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순창 군수 이건용(李建鎔)이 일병을 거느리고 습격해 왔다. 19일 새벽 면암은 임병찬에게 명하여 접전케 하였으나 길이 어긋나 교전은 없었다. 얼마 후 순창 군수가 면암을 찾아왔다. 면암은 그의 목을 베이고자 하였으나 임병찬의 만류로 중지하고 선봉장으로 삼았다. 그간에도 사방에서 애국 청년들이 몰려와 군사의 수는 800여명으로 늘었으나 무장을 갖춘 사람은 200여 명에 불과하였다. 20일 새벽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의병을 해산하라는 황제의 칙지(勅旨)와 고시문을 보내왔다. 면암은 기병소(起兵疏)를 올렸으니 곧 황제의 비답(批答)을 받게 될 터인즉 일개 지방관찰사가 간여할 바가 아니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 때 이미 옥과(玉果)와 금산(錦山)에 관군과 일병들이 출진하고 포위망을 형성하여 사면으로 공격하여 왔다. 면암은 그들을 맞아싸우고자 하였는데 척후병의 보고에 의하여 그들이 일인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로 구성된 관군임이 판명되었다. 당시 의병들이 당면하였던 난제(難題)는 관군과의 접전이었다. 의로운 의진의 행군을 막는 자는 모두 일인들의 앞잡이이므로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일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면암은 한국인이 한국인을 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의진을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모두 흩어지고 22명이 남아서 면암을 호위하고 있었다. 관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8시경 정시해(鄭時海)가 유탄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21일 새벽 면암과 호위 유생 12인이 남았고, 관군이 사면으로 포위해 들어왔다. 이때 이들은 경전(經典)을 돌아가며 외우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22일 광주 고문관 강도행차랑(綱島幸次郞)의 심문이 있었고, 23일 전주 진위대 김희진(金熙鎭)과 일병에 의하여 압송되었다. 면암과 임병찬은 가마에 타고 나머지 11인은 줄지어 묶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면암을 끝까지 따라간 유생들은 임병찬을 비롯하여, 고석진(高石鎭)・김기술(金箕述)・문달환(文達煥)・임현주(林顯周)・유종규(柳鍾奎)・조우식(趙愚植)・조영선(趙泳善)・최제학(崔濟學)・나기덕(羅基德)・이용길(李容吉)・유해용(柳海容)이었다. 서울에 있는 일군 사령부에 갇혀 6월 26일 형을 받게 되었다. 면암은 감금 3년, 임병찬은 감금 2년형을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7월 9일 대마도에 도착하니 이미 홍주(洪州)의진에서 체포된 80명중 9인이 유배되어 와 있었다. 정산(定山)의 이 식, 예산(禮山)의 남경천(南敬天), 보령(保寧)의 유준근(柳濬根), 홍주(洪州)의 안항식(安恒植), 부여(扶餘)의 이상두(李相斗), 남포(藍浦)의 최중일(崔重日), 홍주(洪州)의 신보균(申輔均), 신현두(申鉉斗), 비인(庇仁)의 문석환(文奭煥) 등이었다. 여기에서 면암을 비롯한 11인은 시를 지어 우국지정과 불우한 처지를 달랬다. 면암은 이 시기에 수 십 편의 시를 남겼다.
기자(箕子)가 오실 적에 도(道)도 함께 따라와서/기성래시도기동(箕聖來時道己東)
일본이나 서양이나 그 범위에 들었거늘/부상약목범위중(扶桑若木範圍中)
모르매라 조물주는 무슨 심사로/미지조물록하사(未知造物錄何事)
나더러 대마도를 보라 하는지/사아종관마도풍(使我終觀馬島風)
일인 경비대장에게 심한 모욕을 받은 후 면암은 단식으로 자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임병찬으로 하여금 황제께 올리는 유소(遺疏)를 받아쓰게 하였다. 일인들이 놀라 자신들은 경비책임만 있을뿐 음식은 한국 정부가 보낸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함께 유배된 의사들이 울면서 식사를 권하는 바람에 마침내 단식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74세의 노령으로 거친 의병생활과 감금 유배 그리고 단식 등으로 받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충격 때문에 득병한지 1개월만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때가 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이었다. 면암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하자 애국시민들은 철시(撤市)를 했고 남녀노소가 유해 앞에서 통곡을 했다. 상여가 마련되어 정산(定山) 본가로 운구하는 데 곳에 따라 노제(路祭)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에 10리밖에 운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상주(尙州)에서 새재(鳥嶺)로 가는 길을 택할 수 없어서 김천(金泉)으로 나와 열차로 운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을 추서하였다.
24 한용운(韓龍雲) 대한민국장 1962 3・1운동 충남 홍성
한용운(韓龍雲) 1879. 7. 12~1944. 5. 8
호: 만해(萬海) 속명: 봉완(奉琓) 법호: 용운(龍雲)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이며 불교인(佛敎人)이다.
처음에는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으로 들어갔다. 한때 만주 간도성(滿洲間島省) 등을 다니며 광복운동을 하다가, 1905년(광무 9)에 인제(麟蹄)의 백담사(白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후 출가 입산하여 백담사에 오는 애국 지사에게 조국없는 백성의 비애와 앞날의 광복운동에 대한 방책을 설득시켰다. 1910년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박탈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군관학교(軍官學校)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유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佛敎學院)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해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에는 서울의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에 앞장 서는데 힘썼고,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문화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4일,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한 최 린(崔麟)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또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해인사(海印寺)의 승려인 백용성(白龍城)에게 이 계획을 알려, 불교도로서 적극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승낙을 받고 민족대표로 서명할 인장을 위임받았다. 그는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 했으나, 독립선언서로 표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여기에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첨가하여 더욱 그 결의와 의미를 강하게 하였다. 27일에는 다시 최 린을 방문하여 스스로 민족대표자로 서명 날인하고, 백용성으로부터 위임받은 도장으로 서명 날인하여 주었다. 이튿날인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서에 따른 제반준비 사항에 대한 최종 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인 민족대표를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을 겸임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투쟁사상 고취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5 허위(許蔿) 대한민국장 1962 의병 경북 선산
허위(許蔿) 1854. 4. 1~1908. 9. 27
자: 계형(季馨) 호: 왕산(旺山)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출신이다.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유생으로서 제1차 의병전쟁에 참여하였고, 제2차 의병전쟁에는 관료출신자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의병장으로서는 드물게 해외경륜도 있었으며, 따라서 서구문물의 우월성을 절감한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화의지를 지닌 선구적 인물이었다. 1897년 3월 이은찬(李殷贊)・진사 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와 더불어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양제안(梁濟安)을 선봉장으로 삼아 김천(金泉) 장날을 이용하여 장정 수백명을 모집하여 금산군(金山郡) 기고소(器庫所)의 병기(兵器)를 압수해서 금산과 성주(星州) 사이에 의병을 벌려 놓고, 원근에 격문을 발송해서 군사를 모집했다. 그러나 아직 세력을 굳히기도 전에 대구의 관병이 성주를 치고, 이어서 경성과 공주의 관병이 합세하여 이은찬과 조동호를 사로 잡아갔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서 진천(鎭川)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근신(近臣) 전경운(田慶雲)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의병을 해산시키라 권고하므로 부득이 장졸들을 타일러 제 고장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안타까웠던 마음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호남 삼월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어떻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그 이후 세상을 등질 뜻을 갖고 방산옹(舫山翁)을 따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초야(草野)에 묻혀두지를 않았다. 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왕에게 "허위의 경륜하는 것과 포부는 세상에서 관중(管中)과 제갈량(諸葛亮)이라 일컫사오니 불러서 쓰시는 것이 바로 이 때가 아니겠습니까”하고 아뢰어 1899년 3월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왕의 부름을 받은 허위는 "벼슬하는 것은 나의 근본 뜻이 아니지만, 외적을 쓸어 없애지 않을 수가 없고, 국가를 회복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내 장차 시험하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관로에 들어선 그는 그 다음달에 성균관 박사가 되고 1904년에는 주차일본공사 수원(駐箚日本公使 隨員),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 평리원 수반 판사(平理院首班判事)를 거쳐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이 되었다. 이어서 그해 8월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제수되자, 국가의 폐단을 없애고 벼슬길을 맑게 할 것을 주장하는 다음의 시무10조를 건의하였다.
첫째 :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를 것.
둘째 : 군정(軍政)을 닦아서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
세째 : 철도를 증설하고, 전기를 시설하여 교통과 산업에 이바지할 것.
네째 : 연탄을 사용하여 산림을 보호 양성할 것.
다섯째 : 건답(乾畓)에는 수차(水車)를 써서 물을 대도록 할 것.
여섯째 :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며, 또 육축(六畜)을 기르도록 힘쓸 것.
일곱째 : 해항세와 시장세를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시켜 장사군에게도 공평한 이익을 얻도록 할 것.
여덟째 : 우리나라 지폐의 폐단이 심하니 은행을 설치하여 금・은・동전을 다시 통용시킬 것.
아홉째 :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 것.
열째 : 관직(官職)으로 공사를 행하고 실직(實職) 이외에는 차함(借啣)하는 일을 일체 없앨 것.
이상에서 미루어 보아 그는 다른 위정척사론자들과는 다른 개화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이로써 그가 처음에 관직에 발을 딛게했던 바의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을 건의했으나, 이미 정부가 그의 시무안을 받아들일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소(疏)를 올려 사직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10월에 이정소 의정관(釐正所議正官)이 되고 다음해 3월에는 비서원승(秘書院承)이 되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내한하자 나라의 형편은 더욱 위급해져 갔다. 마침 독일인 요관(要官) 중 한 사람을 만나 그에게 무기를 빌려 받을 것을 약속하고, 민모(閔某)와 함께 의논 독일에 갈 것을 꾀하였으나, 민의 위약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그는 최익현(崔益鉉)・김학진(金鶴鎭)과 더불어 격문을 살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투옥되었다. 김(金)은 하루, 최(崔)는 이틀만에 석방되었으나, 그는 4개월동안 일본사령부(日本司令部)에서 온갖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다시 소를 올려 관직을 사양하였다. 서울을 떠나 지례(知禮)의 삼도봉(三道峰) 아래 두대동(頭大洞)에 은거하였다. 그러는 중에 5조약(五條約)이 맺어졌다. 울분을 금치못하고 있던 차에 1907년 4월 어느 사람이 와서 임금의 글을 전했다. 거기에는 다만 거의(擧義)라는 두 글자가 써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것이 곧 의대조(衣帶詔)이다. 이미 고종황제가 순종에게 양위한 융희 원년의 일이었다. 뿐만아니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고, 7조약(七條約)이 체결되었다는 말을 듣고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抱川)・연천(漣川)・적성(積成)・삭녕(朔寧)・철원(鐵原)・양주(楊州) 등지에서 벌려세워 강화(江華)를 향해 내려갔다. 이때 부하 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基羽)・권중설(權重卨) 등이 여러번 적진을 깨뜨리니 경기의병의 이름이 크게 떨쳤다. 이에 국내의 지사들에게 연락하여 양주(楊州)에서 모이니 군대가 도합 만여명에 이르렀다.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총대장을 삼고, 허위는 군사장(軍師長) 즉 작전참모가 되었다. 그간의 전력을 통해 그의 병술(兵術)과 전략이 뛰어났음이 인정된 것이다. 이인영의 헌병조서에 보면 이때 양주에 집결한 13도 의병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라창의대장(全羅倡義大將) 문태수(文泰洙)(일명 문태현(文泰鉉)),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충청) 이강년(李康秊),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강원) 민긍호(閔肯鎬),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경상) 신돌석(申乭石), 관서창의대장(關西倡義大將)(함경) 방인관(方仁貫),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경기・황해) 허위(許蔿) 등이다. 즉 허위는 군사장 겸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으로서 경기도와 황해도의 의병을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허위의 작전계획에 의하면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해 각 의병대가 분산하여 서울로 향하되, 같은날 동대문 밖에 집결하기로 기약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허위는 몸소 결사대 삼백명을 인솔하고 서울 성문밖 30리 지점에 이르렀고, 이어 다른 부대가 뒤따라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사전에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대한매일신보」같은 신문은 이 일이 있기 이미 두달 반 전에 이를 크게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대비책은 철저하여 그들은 양주 의병의 진로를 차단하는 한편, 한강의 선박 운항을 일체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기까지 했다. 이같은 삼엄한 일본군 수비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일부병력은 세검정을 거쳐 자하문 밖에 이르렀다. 그런데 허위의 선착부대는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으며, 마침 이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듣고 뒷일을 허위에게 부탁하고 귀향하니 의병의 주력부대는 흩어져 물러서고 말았다. 바로 1908년 2월 28일 음력 1월 말의 일이었다. 13도 연합 의병 부대의 서울 공략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 주력부대는 속속 임진강 유역으로 집결하여 1907년 이래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던 조인환・권준(權俊)・왕회종(王會鍾)・김진묵(金溱默)의병 부대와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곳으로 이동 합류해 온 의병부대는 허위를 비롯하여 박종한(朴宗漢)・김수민(金秀敏<民>)・김응두(金應斗)・이은찬(李殷瓚) 의병 부대였다. 이들은 허위를 총대장으로 삼아 의병 부대를 재정비함으로써 여기에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가 발족을 보게 되었다. 연합 의병의 총대장이 된 허위는 그후 계속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를 지휘하면서, 군율(軍律)을 정하고, 군표(軍票)를 발행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軍器)를 제조하게 하였다. 한편 연안 지방민에게 납세를 명하고, 미곡 반출의 정지를 호소하여 군량 확보를 도모하였다.
1908년 4월에 또 13도의 의진(義陣)에 통문(通文)을 내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의 국내적 결속을 공고히 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해외로는 박사 경현수(慶賢秀)를 청국혁명당(淸國革命黨)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청하였다. 5월에 부하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으로 하여금 태황제의 복위・외교권 회수・통감부 철거 등의 30개조에 달하는 한국민의 기본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국내외의 외교적・정치적 의병운동 선전뿐 아니라, 경기도를 돌면서 의병전쟁을 전개하여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이때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꼭 이루어 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왜적과 함께 살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즉 의병전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 목숨을 던져 항쟁을 계속한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연천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완용(李完用)이 사람을 보내어 외부대신(外部大臣)을 주겠다고 유인하였다. 휘하의 군사들이 심부름 온 사람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보낸 사람이 죽일 사람이지, 온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하며 되돌려 보냈다. 그 이튿날 밤 헌병 40명에 의해 포위당하여 끝내 체포되니 1908년 5월 천둥치고 비가 크게 내리는 날이었다. 얼마후 서대문 감옥에 이송되었는데 일본인 명석소장(明石少將)이 허위의 경력・이력 그리고 충군애국(忠君愛國)과 동양평화에 대한 탁월한 경륜, 한학과 역학에 대한 깊은 조예 등을 알고 모든 백성들의 사표라 해서 마음 속으로 공경하고 복종했다. 이때 명석(明石)과의 문답 중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오.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앉아서 볼 수가 없어서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의병을 일으킨 뜻은 단순한 화이관(華夷觀)에서가 아닌 것임은 이로써 명백해졌다고 하겠다. 명석이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9월 27일 교수대에 올라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총대장 허위가 순국한 후에도 이곳 의병들은 더욱 고무되어 게릴라 항전을 보다 강력히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