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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산에서 길을 잃다, 덕숭산
1. 일자 : 2011. 8. 2 (화)
2. 장소 : 덕숭산(495m)
3. 행로 및 시간
[주차장(10:20) -> 일주문(11:30) -> 대웅전(11:42) -> (계단/계곡) -> 소림초당(11:03) -> 석불(11:08) -> 만공탑(11:13) -> 정혜사(11:24) -> 정상(11:48) -> (중식 –12:08) -> 바위전망대1(12:14) -> 바위전망대2(12:22) -> (길 헤맴) -> 달개비/무덤(12:52) -> 덕산온천 눈썰매장(13:17)]
4. 동행 : 홀로
< 덕숭산 산행을 준비하여 >
덕숭산은 충청도 예산 땅에 위치한 산으로 유서 깊은 수덕사를 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500m에도 미치지 못한 이 산이 산림청 100대 명산 반열에 오른 이유는 “지역 주민들이 소금강이라고 할 만큼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경관이 수려하고, 도립공원으로 지정(1973년)되어 있는 점 등을 감안하였다.” 하고 한다. 예전에 부근을 방문했을 때 기암괴석을 보지 못했고 도립공원이라는 사실이 국가적 명산으로 선정되는 데 중대한 영향을 주는가 하는 생각에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산에 올라 직접 그 이유를 살펴 보아야겠다.
늘 그렇듯이 이곳 저곳에서 정보를 찾아 나선다. 2008년 8월 월간 마운틴에 덕숭산 특집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영준 기자가 글을 썼다. 기사 헤드 제목이 ‘키 작은 산이 품은 드높은 지향’이다. 멋지다. 고수의 솜씨가 느껴진다. 덕숭산을 ‘드넓은 평야에
솟은 하나의 섬처럼 뚜렷하고도 단호하게 드높은 정신의 칼날’로 표현했고, 덕장의 풍모를 강조했다. 또한 ‘수덕사가
있어 덕숭산을 오르는 일은 등산이 아니라 사찰기행이요 걸음마다 나를 찾는 성찰기행이다.’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덕숭산에 오를 때 ‘높이에 천착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한다. 통찰력 있는 고수가 글을 쓰면
지역의 낮은 산도 매력 있는 명산으로 그려진다. 글의 힘이다.
이 산 초입에 위치한 수덕사에는 절의 내력만큼이나 유서 깊은
이야기들이 많다 한다. 절 집 곳곳에는 일제 강점기 우리 불교를 지킨 선불교의 대표적 스승,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이야기들이 주절이 주절이 남아 있을 것이다. 또한
조금은 속되지만‘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는 1960년대 꽤 인기 곡 이었고 이를 기념하고자 기념비까지 세워졌는데,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라는 불자들이 용납하기에는 과한 내용이 있어
결국 없애버렸다는 에피소드도 남아 있다. 수덕사에는 국보인 700살이
넘은 대웅전과 1080 계단이 있어 그 전설의 깊이를 품고 있으며, 덕숭산
정상에 서면 너른 예당평야가 한 눈에 들어올 것이다. 자! 이제
사찰기행 겸 나를 찾는 성찰기행을 떠나 보자.
< 희망사항 >
이번 산행을 준비하며 내겐 덕숭산 보다는 ‘수덕’이라는 이미지 더 강하게 다가 온다. 산에 미친 놈이라 그 좋다는 선암사, 송광사를 가면서도 그 명찰을 품고 있는 조계산을 먼저 떠올렸는데 수덕사는 예외다.
신혼 초 큰 애가 갓난아이 일 적에 부모님을 모시고 여름 피서 철에 서해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 수덕사 밑 수덕여관에서 숙박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서 일 것이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어느 글에 수덕여관이 꽤 고급 여관으로 묘사된 것을 기억하고는 부모님께 옛 정취도 느끼게 해 드리고 싶고, 개인적으로는 이응로 화백의 작품이 여관에 남아 있다 하여 일부러 찾았던 것이다. 실상은 숙박시설은 낡은 한옥 여인숙 정도의 수준이었고, 저녁 잠자리가 몹시 덥고 벌레들에게 아이가 물릴 까봐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여관 마당 한 켠에 이 화백께서 조각한 작품이 남아 있어 제작 현장에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었고, 부모님께서는 시설보다는 자식 손자와 여행을 왔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해 주셔서 고마웠다. 당시는 한 여름이라 아이를 데리고 수덕사와 그 뒤편 덕숭산에는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나중을 기약했는데 그 나중이 바로 오늘이 되었다.
수덕여관을 함께 갔던 그 갓난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벌써 15년 전의 이야기다. 그 땐 내 아내도 새댁이었고 부모님도 60대 초반이셨다. 세월은 어느덧 이처럼 빨리 흘러버렸다. 내 신혼에 부모님과 아이와 함께한 추억을 되새기며 당시 오르지 못했던 절과 산을 오늘 가보려 한다. 먼 훗날 이번 산행을 추억하며 웃음지을 수 있도록 많은 추억을 만들어 보고 싶다.
예산일대는 온천이 유명하다. 산행 후 더위에 지친 몸을 온천 물에 담궈 볼 마음과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새 아침을 맞는다.
< 예산 가는 길에 >
8시 50분, 조금은 애매한 시간에 길을 나선다. 휴가철 서해안 고속도로 정체의 악몽을 알기에 걱정스런 마음이 앞선다. 비봉IC 까지는 국도로 이동했고 이어서 올라 탄 고속도로는 예상외로 한산하다. 구름이 끼어 있기는 했으나 날씨도 좋다. 여름 내내 이어지는 폭우 소식에 하늘이 흐리기만 하여도 걱정이 된다.
서해대교를 지난다. 우측으로 예전에 보지 못했던 높다란 전망 탑이 솟아 있다. 바다가 보인다. 비록 잿빛이지만 드넓은 수평선이 기분을 밝게 해 준다. 당진의 들녘이 푸르름을 더 해 가고 있다. 예전 회사 만리포 야유회 때 가 본 기억이 있는 길을 따라 수덕사로 향한다.
10시 15분. 십 수년 만에 다시 찾은 수덕사 부근은 많이 번화해졌고 깨끗해 보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행장을 꾸린다.
< 수덕사에서 덕숭산 정상 >
주차장 옆 돌 틈에 핀 달맞이 꽃이 나를 반기며 배시시 웃는다. 꽃 말이 ‘기다림’인 이 꽃은 노란 꽃 잎을 수줍게 감싸 안은 모습이 매혹적이다. 햇살의 기세가 드세다. 달맞이 꽃과 짧은 인사를 하고 수덕사로 향한다.
< 달맞이 꽃, 비비추, 분꽃, 달개비 >
아스팔트로 단장된 수덕사 가는 길에는 비비추, 분꽃과 함께 다양한 형상의 조각 작품들이 이어진다. 그늘진 길에서 싱그러움을 느낀다.
< 일주문과 금강문 >
4개의 배 흘림 기둥이 인상적인 일주문을 지난다.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긴 이름이다. 일주문을 지나고부터 길은 제법 절 집의 풍치가 느껴진다. 너른 돌로 기단을 쌓고 다시 작은 돌을 쌓아 올리고 흙과 기와로 멋을 낸 돌담이 옛 절의 운치를 자아낸다. 금강문 안쪽에서 사천왕문 쪽으로 훤하게 이어지는 길이 원근감을 느끼게 하며 멀리 숲 뒤편으로 사라진다.
사천왕문 좌측으로 잘 생긴 칠층석탑이 보인다. 갑자기 볼 것이 많아지며 눈이 분주해진다. 수덕사의 심장부에 들어 온 것이다. 커다란 정자마루를 지나자 삼층석탑이 보이고 그 뒤편으로 700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대웅전이 서 있다. 문외한인 초보 산꾼의 눈에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큰 절의 아이콘 이기도 한 대웅전과 석탑을 배경으로 나의 흔적을 남긴다.
< 횡하정루 주변 모습과 대웅전 >
심우당 좌측으로 돌아든다. 대웅전, 청련당, 심우당 지붕이 만들어 내는 곡선의 미(美)가 발 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바위에 핀 담쟁이도 더 해져 멋진 풍경 하나를 만들어 낸다. 절 집의 지붕 곡선은 언제 보아도 환상적이다.
수덕사 경내를 벗어나자 짙은 숲 길이 이어진다. 본격적인 산 길이다.
< 수덕사 절 집의 지붕 곡선을 배경으로 >
산 길에 접어들기 무섭게 바로 계곡이 흐른다. 시원한 물의 냉각 작용으로 대기가 서늘하다. 여름 산행의 묘미 중 하나가 계곡 산행인데 그러고 보니 비 많은 이 계절에 제대로 된 계곡산행을 한 기억이 없다. 비록 짧은 수덕사 계곡이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긴 계단 길이 이어진다. 그 유명한 1080 계단이라는 곳이다. 지나는 아이를 바라보다 몸이 기우뚱하여 옆으로 자빠진다. 제법 동작이 컸던지 주위 사람들이 걱정 어린 모습으로 바라본다. 얼른 아무일 없는 듯 다시 길을 나서지만 창피함에 화가 난다. 내 스스로 성찰산행을 다짐했건만 초장부터 일그러진다.
< 소림초당과 미륵불 석탑 >
길 우측으로 초가 한 체가 덩그러니 서 있다. 소림초당이다. 작은 다리를 돌아 드니 입구는 출입금지, 고승이 하안거라도 하는 엄숙함이 보인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범상치 않다. 수행에 방해가 될 듯하여 무리하지 않고 돌아 나온다. 다시 모퉁이를 돌아드니 이번에는 커다란 석불이 서 계시다. 형상은 미륵불이다. 바위를 깎은 것이 아니고 주위의 돌을 가져다 만든 불상으로 주변에는 돌 이끼가 끼어 있다. 뒤 편 담쟁이와 함께 또 하나의 멋진 풍경이 완성된다.
< 만공탑에서 >
돌 계단은 계속 이어지지만 주위에 볼 거리가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 곧 만공탑에 도달한다. 일제 강점기의 선승(禪僧) 송만공 스님을 기리기 위한 석탑이다. 스님은 일제 암흑기에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견성암 등에서 참선하며 수도승들을 가르치신 조선 불교의 큰 어른이시다. 만공탑 앞은 너른 공터로 소나무 사이로 용봉산의 모습이 또렷이 조망된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 서늘한 숲의 기운이 상쾌하다.
< 응봉산과 전경 >
정혜사 앞을 지난다. 문은 열려 있으니 수행 중이니 출입을 삼가 해 달라는 문구가 보인다. 만공스님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 싶었지만 스님의 제자들이 들지 말라 하니 돌아설 수 밖에. 돌 담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사진 한 장을 찍고는 자리를 뜬다.
이어지는 숲 길, 고도가 정상에 가까워졌는데 하고 생각하는 차에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부지불식 간에 덕숭산 정수리에 도착해 버렸다. 출발 1시간 30분 만이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혼자 사진을 찍는 산꾼에게 강아지와 함께 산에 오른 모습을 담아 드리고 정혜사로 향하는 하산 길도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나도 그 때 그에게 길을 물었어야 했다.) 별 힘들이지 않고 100대 명산의 또 하나에 오른 것이다. 정상에서 바라 보는 예당평야와 가야산, 용봉 저수지는 연무로 그 모습이 흐릿하다. 아쉽다. 연무란 놈은 산 풍경바라기의 최대 적이다.
< 덕숭산 정상에서 >
< 정상에서 대치리 >
덕숭산 고스락에는 소나무와 돌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 오고 있다. 늘 아쉬운 것은 사진은 바람을 담지 못한 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의 느낌만이 바람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용봉산이 올려다 보이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김밥. 늘 먹는 음식이지만 그 맛이 싫지 않다. 시간은 이제 막 12시를 지난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마냥 한가하기만 하였다. 이후에 전개될 악몽은 그 전주도 없었다.)
12시 10분 하산 길에 나선다. 정상석 좌측, 서쪽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막연히 능선 길이겠지 하는 마음과 같이 길은 간간이 멋진 바위가 있는 평범한 길이다. 좌측으로 멀리 가야산이 보인다. 그 밑으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달리고 있고 그 끝에는 덕산터널이 보인다. 시원한 개방 감이 좋다. 길의 방향은 큰 염두를 두지 않는다. 어차피 길은 하나일 터이니 말이다. 고도가 조심씩 낮아진다. 가야산이 좀 더 가까워졌고 산아래 마을들이 초록의 기운을 뽐내고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속으로 440봉을 지나 능선 길에 제대로 들어섰다 하고 생각했다.)
12시 22분 작은 전망바위를 지나고부터 길이 희미해진다. 붉고 빛 바랜 리본 하나가 길잡이를 해 주고 있다. 앞쪽에 작은 산이 하나 있다. 길은 밀림과도 같은 빽빽한 숲 길이다. 언제부턴가 거미줄이 성가시게 한다. 사람이 다닌 지 오래된 길임에 틀림없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이키기엔 늦어버렸다. 막연히 좌측으로 가야 수덕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거미줄과 관목과 신발이 푹푹 빠지는 낙엽 과 사투를 벌이며 걷는다.
언제부턴가 붉은 리본도 사라졌다. 길은 이제 흔적도 없다. 우왕좌왕 하는 사이 나무 뿌리를 잘못 밟아 크게 자빠진다. 왼쪽 팔 안쪽에 깊은 상처가 난다. 안되겠다 하는 마음에 ‘1501 등산지도’에서 덕숭산 지도를 구매하고 GPS를 켜서 현 위치 파악에 나선다. 한참을 지나도 현 위치를 잡지 못한다. 고도는 서서히 낮아지는데 길의 변화는 없다. 관목 숲은 여전하다. 12시 50분. 파란 달개비가 피어 있는 웬 무덤에 도착했다. 30분 헤맴 끝에 만나는 인공의 흔적에 안도감이 들었다.
길은 여전히 험하다. 무덤을 지나며 거미줄은 없어 졌지만 이번에는 토끼풀이 발목을 아프게 한다. 젠장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지도를 본다. 추측컨데 수덕사 방향은 아니고 광천IC교 부근이 아닌가 싶다. 무덤에서 20여분 더 길 헤맴 끝에 저 아래 마을이 보인다. 그 안도감과 기쁨이란 설명하기 쉽지 않다.
‘덕산온천 눈썰매장’ 하산 끝 지점의 지명이다. 아니 그럼 내가 덕산온천까지 왔단 말인가 ‘한여름의 눈썰매장’ 도대체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인근 주민에게 수덕사 가는 길을 물으니 한심하다는 듯 걸어서는 못 간다 한다. 택시를 불러 준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주위를 살피니 대치리 산초마을 비석이 서 있다.
< 가야산과 서해안 고속도로 >
택시는 만만치 않은 요금을 요구하며 나를 수덕사 주차장 앞에 다시 데려다 놓았다. 오전의 그 달맞이 꽃이 날 맞으며 잘 다녀 왔냐고 묻는다. 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차로 바로 오른다. 미안하고 창피했다. 인사도 안 하고 그냥 온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이번 덕숭산 산행을 통해 몇 가지 다짐을 해 본다. 낮은 산을 얕잡아 보아 서는 안 된다. 길이 아니라 판단되면 반드시 곧바로 되돌아 가자. 그리고 GPS 궤적 추적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다.
< 에필로그 >
누군가 ‘사람은 정신의 먹이를 찾아 산을 오른다.’라고 했다. 적어도 오전엔 나도 키 작은 산이 품은 드높은 지향을 느끼며 사찰기행 겸 나를 찾는 성찰기행을 떠나 보려 했다. 하산 길에 한없이 어리석은 나를 보며 아직 산꾼으로는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반야(般若). 불가에서는 세계와 사물의 실상을 꿰뚫는 지혜를 일러 반야라 한다. 조바심으로는 반야를 체득할 수 없다. 늘 실상을 꿰뚫는 예리한 눈을 갖기를 바래 보지만 쉽지 않다.
최근 서울대 윤석철 교수의 신간에 빠져 있다. ‘삶의 정도(正道)’란 책으로 삶을 목적함수(내일의
열매)와 수단매체(오늘의 나무)로 설명하고 있다. 인상적인 구절 몇 가지를 옮겨 본다.
* 한 사회가 건강하게 단결(Solidarity)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수단매체.
1신뢰성 2투명성 3자기희생 능력.
*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다. 비트겐스타인.
파리통. 파리/인간의 한계.
* 공동 수렵을 위한 언어가 수단매체의 원조이다.
* There is some difference between loving and liking. 사랑의 감정은 자연의 섭리인 반면, 좋아함은 내면세계의 감정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변한다. 사랑을 받는
것만큼 좋아함을 받는 것도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높여야 한다.
* 판사/뉴욕시장 라과디아와 MB. 언어의 한계가
대북 정치력의 한계를 낳음.
* 철학자 칼 포퍼. '인생은 문제 풀이의 연속이며 최선의 선택보다 최악의 회피가 더 중요하다.'
* 한국은 3가지 수단매체의 고도화를 통해 성장.
1. The desire of the moth for the star.
쉘리의 낭만주의.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 이. 조선업은
현대건설이 더 부가가치 높은 사업분야로 진출하기 위한 수단매체였다.
2. 투자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능력.
3. 자연탐구, 과학과
기술개발
* 인체의 물질적 구성
- 산소 65, 탄소18, 수소10, 질소3, 칼슘1.5, 인1, 극소량의 유황 칼륨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 철 구리 망간 요오드,
노학자의 삶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평이하고 간결한 문체로 우리네 삶의 정도가 무엇인가를 수단매체와 목적함수라는 개념으로 풀어 나가는 능력에 감탄하고 또 감동한다. 아직 책의 1/5도 읽지 않았는데 이 정도이니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끼는 감동은 그 끝자리를 알 수 없겠다.
여름 휴가가 하루 이틀 지나고 있다. ‘직장인의 여름 휴가는 힘들게 일한 나의 노고에 대한 대가이니 내 자신의 휴식을 위해 써야 합니다. 가족도 좋지만 가족에게는 평소 주말에 잘 해 주면 되고, 이번 휴가는 자신을 위해 투자하세요.’ 라고 하던 어느 후배의 말을 끄집어 내여 스스로의 나태함에 면죄부를 준다. 이 휴가가 내게 삶의 재미를 찾아 줄 안식을 선물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