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굶어도 사진은 찍는 흑인들...현상소 북적"
"여기 사람들은 밥은 굶어도 사진은 찍으려 듭니다. 돈이 얼마 들든 문제가 아닙니다."아비장에서 10년 넘게 사진현상소를 운영해온 송인석(宋仁錫.51)씨와 박영규(朴英奎.51)씨는 "요즘도 카메라를 메고 나가면 그냥 '나 좀 찍어 달라'는 흑인이 많다"고 말한다.
아비장 시내 현상소 70여곳 가운데 한인 소유는 30군데. 물량으로 따지면 이곳 사진 시장의 70%쯤을 한인들이 장악하고 있다.특이한 점은 이들 현상소마다 적게는 몇십명에서 많게는 100명이 넘는 영업사원을 두고 있다는 것.
속칭 '찍사'라고 불리는 사진사들이 바로 단골손님이자 영업사원이다. 이들은 저마다 카메라 2∼3대와 휴대전화까지 갖추고 있다. 연락을 받으면 때맞춰 고객에게 달려간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필름 한통을 다 찍으면 현상소를 찾는다. 뽑은 사진은 고객에게 배달까지 해준다. 이들 단골 사진사를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현상소의 매상이 좌우된다.사진사들 가운데는 정부 행사나 관공서 모임마다 전속으로 따라다니는 실력파도 있다.
결혼식이나 잔치 자리, 장례식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이들의 영업활동 무대다. 사진 1장에 보통 500∼1000세파프랑(900∼1800원)씩 받는데, 현지인들로서는 상당히 큰 돈이다.서부아프리카에서 사진현상소를 처음 차린 사람은 천막제조업을 하던 조동순씨(인터뷰 참조)였다. 1980년대 초 그는 처음 '타이가(Tiger)'라는 이름으로 나이지리아에 진출했다.
이후 '타이가'는 인근 코트디부아르(83년)와 세네갈,카메룬,콩고민주공화국(89년) 등 5개국으로 뻗어나갔다. 타이가에서 일하다 각지로 독립해 나간 기술자만 어림잡아 30∼40명이나 된다."초기에는 100% 현찰장사였어요. 손님이 왕이 아니라 주인이 왕이었습니다. 필름을 받을 때 아예 돈부터 먼저 받았으니까요. 사진을 뽑으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하던 시절, 1∼2시간만에 곧바로 사진을 받아볼 수 있으니 얼마나 인기가 좋았겠습니까."80년대부터 검은 대륙 곳곳에 컬러사진 열풍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서도 몇대밖에 없던 최신 일제 현상기계가 한국인의 손으로 아프리카 곳곳에 퍼져갔다. 흑백사진만도 신기하게 여겨지던 때 속성으로 뽑아주는 컬러사진의 인기는 자못 폭발적이었다.현상소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이 몰려 하루종일 북적댔다. 당시 사진관을 운영한 사람들은 90년대 초반까지는 예외없이 떼돈을 벌었다. 돈이 매일 가마니로 쌓일 정도여서 이를 헤아리는 일조차 큰일이었다고 한다.흥미롭게도 한인 가발업체가 보급한 가발도 현상소 번창에 큰 몫을 했다. 흑인여성들은 가발을 쓰면 늘 자신의 달라진 용모와 머리 스타일을 사진에 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번창한 것도 이제 옛날 얘기처럼 들린다. 한인은 물론 곳곳에 현지인이 운영하는 현상소가 불어난 탓이다. 게다가 1994년 세파프랑이 2분의 1로 평가절하되면서 마진폭도 곤두박질했다. 예전엔 한인들이 사진 색깔의 농도 등을 잘 맞춰줘 인기를 누렸지만 요즘은 기계가 워낙 좋아져 한국인의 손재주도 빛을 보기 어려워졌다.아비장의 한인들은 현상소끼리의 과당경쟁을 피하려고 먼저 진출한 한인업소가 있으면 1㎞ 거리 안에서는 개업하지 않기로 자율규제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 현상업에 뛰어드는 이들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외국인이나 현지인이 부근에서 개업하는 것은 막을 도리가 전혀 없었다.
이래저래 현상업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특히 현지인들이 차린 현상소는 인건비가 워낙 싸 한인업소의 경쟁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현상업에 종사해온 한인들 대다수는 요즘 심각하게 업종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자금이나 기술력이 있다면 하이테크분야나 TV-컴퓨터-비디오 수리, 선반분야, 제지공장 등이 유망하다고 보지만 워낙 낯선 분야여서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실정이다.타이가 상사의 박영규 사장은 몇년전 그릇공장을 세워 멜라민 소재의 접시 쟁반 컵 등 60여종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동차와 차량 부속, 중고차 매매, 옥수수를 소재로 제과쪽으로 선회한 한인도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아프리카에 사진현상소 개척한 조동순 '타이가'회장
아프리카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진출한 업종은 단연 사진현상업이다. 나라마다 몇곳 또는 수십곳씩 한인 현상소가 있으니 검은 대륙 전체적으로는 수백곳이 된다.이 분야의 원조(元祖)는 1981년 나이지리아에 진출한 조동순씨. 그가 이 사업에 착안한 것은 우연한 계기 때문이었다.
1981년 말 천막 수출건으로 나이지리아를 찾은 그는 필름 몇통을 라고스의 현상소에 맡기려다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인구 1억이 넘는 나라의 수도인데도 아직 흑백필름만 취급할 뿐 컬러사진을 현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컬러 필름은 멀리 프랑스나 영국까지 보내야 현상이 되는데 빨라야 15∼20일은 걸린다는 것이다.얼마 뒤 조씨는 라고스에 일제 미니 컬러현상기 '노리쓰'를 들여다 놓고 '타이가' 현상소를 차렸다. 필름을 맡기면 그날로 사진을 뽑아볼 수 있는 속성 현상기였다."이른 아침부터 필름을 맡기려는 사람들이 50∼100m씩 줄을 섰지요. 현상소 문을 닫으면 저녁부터 밤 1시, 2시까지 돈을 세야 했습니다."중소기업의 기술과 순발력은 당시 아프리카 순방중 나이지리아에 들른 전두환 대통령을 놀라게 했다.
오찬회동때 찍은 사진이 그날 만찬장에 앨범으로 꾸며져 전달됐기 때문이다. 전 대통령은 이후 아프리카에 진출한 사진현상소의 활약상을 곳곳에서 칭찬했다고 한다.조씨는 부근 코트디부아르와 세네갈 카메룬 콩고민주공화국에도 현상소를 차렸다. 여기서 모은 돈으로 1988년 카메룬 야운데에 백화점을 세웠다. 이즈음 그는 관리가 힘들어진 각지의 사진현상소를 인수 희망자에게 넘겼고, 현상소는 우후죽순처럼 불어났다.한국상품을 주로 취급하며 한 2년쯤 승승장구하던 카메룬 백화점은 값싼 중국상품이 재래시장에 밀려들면서 적잖은 타격을 입게 된다.
1992년부터 그는 백화점 운영을 현지 한인에게 맡기고 임대료만 받고 있다.30년 가까이 천막 제조-수출업체 '타이가'를 운영해온 조씨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과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의 돔을 제조해 납품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고희의 나이에도 그는 서울 방배동의 사무실에 꼬박꼬박 출근한다. 2008년 올림픽이 열리는 중국에서 대형 경기장의 돔을 타이가 제품으로 장식하는 게 요즘 그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