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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스라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강들 사이의 [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으며,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그리스어이다. 이 말은 의미상 관련이 있는 히브리어 명칭인 아람-나하라임에 해당하는 말 같다. 실제로, 그리스어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은 “아람-나하라임”을 대개 “메소포타미아”로 번역하였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고대와 현대의 용법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기본적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고 남쪽으로 페르시아 만에서 북쪽으로 터키와 이란의 산지까지 펼쳐져 있는 지역 전체를 포함한다.
이 지역에는 바그다드의 남쪽까지 약 400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 고대 바빌로니아가 위치해 있던 충적 평야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바빌로니아를 제외한 북쪽에 있는 지역만이 메소포타미아로 불린다. 이 북쪽 지역은 여러 개의 분지를 포함하는, 기복이 많고 낮은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또한 바위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사도행전 7:2에는 그 명칭이 기원 1세기에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려 주는 증거가 있는데, 이 성구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실제로 거주한 곳은 바빌로니아의 도시인 우르였지만 그가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우르를 떠나라고 지시하셨다. 성서 기록은 데라가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와 손자 롯을 데리고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하였다고 알려 주는데, 데라가 이주를 인솔한 것으로 표현된 이유는 그가 가족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창 11:31; 12:1; 느 9:7.
우르는 일반적으로 무카이이르와 동일시되고 있는데, 그 위치는 유프라테스 강의 현재 물길의 서쪽으로서 바빌론에서 남동쪽으로 240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점이다. 그곳에 있는 폐허의 면적은 약 910 × 730미터이다. 한때 달의 신(神) 난나(혹은 신)에 대한 숭배의 중심지였던 이곳의 가장 두드러진 유적은 현존하는 신전 탑 곧 지구라트로서, 길이가 61미터, 너비가 46미터, 높이가 21미터이다.
현재는 유프라테스 강이 우르의 유적지에서 동쪽으로 16킬로미터쯤 떨어져 흐르고 있지만, 증거에 의하면 고대에는 유프라테스 강이 우르의 바로 서쪽에서 흘렀다.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인 앙리 고베르는 그의 저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아브라함」(Abraham, Loved by God)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아브람 시대에는 세 개의 큰 강(카룬,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이 세 개의 별도 하구를 통해 페르시아 만의 수역으로 흘러들었다. 여기서 우르라는 도시의 유적지가 ··· 유프라테스 강의 왼쪽[동쪽] 기슭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 두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원래 우르라는 도시 국가 출신인 아브람의 히브리 부족을 가리켜 ‘강 저편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968년, 8면.
또한 레너드 울리 경의 「우르 발굴」(Excavations at Ur)의 한 최신 개정판에서도 유프라테스 강이 분명히 우르의 서쪽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 책에서는 우르의 방어 체계에 관해 이렇게 기술한다. “이 거대한 요새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유프라테스 강이 (내려앉은 옛 물길에서 볼 수 있듯이) 서쪽 누벽(壘壁)의 기부를 따라 흐르고 있었고, 동쪽 누벽의 기부에서 50미터 가까이 떨어진 곳에는 넓은 운하를 파 놓았으며, 그 운하가 유프라테스 강에서 갈라진 지점은 이 도시 북단의 바로 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르는 삼면이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칼데아 사람들의’ 우르」 Ur ‘of the Chaldees’, P. R. S. 무어리, 1982년, 138면)
발굴자들은 우르에 있는 왕릉에서 금, 은, 라피스라줄리(청금석) 등의 값비싼 재료로 만든 물건들을 많이 발견하였고, 그 도시 초기의 수메르인 왕들과 여왕들이 시종이었던 남종·여종과 함께 묻혔다는 증거도 발견하였다.
우르에서 발굴된 개인 집들로 보이는 건물들(일부 사람들의 추정에 따르면 기원전 20-16세기의 것)의 폐허를 보면, 그 집들은 흰 칠을 한 벽돌집이었으며 포장된 뜰 주위에 방이 열서너 개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유적지에서 발견된 점토판 문서들 중 일부는 설형 문자를 가르치는 데 사용한 것이다. 또 다른 점토판들을 보면 그곳의 학생들이 곱셈표와 나눗셈표를 가지고 있었고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상당수의 점토판은 사업상의 문서이다.
이와 같이 우르의 발굴물들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 도시를 떠날 때 물질적으로 큰 희생을 하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다신적 우상숭배와 도덕적 수준의 저하로 참숭배의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주를 지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집트 문명과 이스라엘
이집트(Egypt)는 성서에 700번 이상 언급되어 있다. 구약에서는 이집트를 지칭하는 말로서 대개 미스라임(미츠라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창 50:11 비교) 따라서 함의 아들 미스라임의 자손들이 이 지역에서 우세하였거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 10:6)
오늘날에도 아랍인들은 이집트를 가리키는 말로 미스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시편의 몇몇 구절에서는 이집트를 “함의 땅”이라고 부른다.—시 105:23, 27; 106:21, 22.
이집트의 민족
이집트 민족은 함족으로서, 주로 함의 아들 미스라임의 자손이었을 것이다. (창 10:6) 바벨에서 흩어진 후에(창 11:8, 9), 미스라임의 자손들 중에서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등 많은 사람들이 북아프리카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창 10:6, 13, 14)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바드로스(바드루심의 단수형)는 상이집트와 동일시되며, 납두힘은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라고 여길 만한 얼마의 증거가 있다.
여러 씨족으로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인 인구가 있었다는 견해를 지지해 주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이 나라가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 구역(후에 노모스라고 불리게 됨)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역 분할은 이 나라가 한 명의 주된 통치자 아래 연합된 후에도, 사실상 이 제국이 끝날 때까지도 존속하여 정부 구조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하이집트에 20개, 상이집트에 22개, 도합 42개의 노모스가 있었던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지리적 차이와 관련이 있겠지만, 이집트의 전체 역사를 통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계속 구별되어 왔다는 사실도 원래 씨족에 따른 구분이 있었음을 지적해 주는 것일 수 있다. 중앙 정부가 약화되면서, 이 나라는 크게 그 두 부분으로 갈라지거나 심지어 여러 노모스의 많은 소왕국들로 분열되곤 하였다.
고대의 회화들과 미라의 모습을 근거로, 초기 이집트인들은 일반적으로 키가 작고 날씬하며, 흑인종은 아니면서도 얼굴색이 검은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고대의 회화들과 조각품들에서 상당히 다양한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언어 현대 학자들은 이집트어를 이른바 “셈·함 어족”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함 어족에 속한 언어이지만, 그 문법은 셈 어족 언어의 문법과 유사점이 많으며, 어휘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한 관련성을 볼 수 있지만, “이집트어와 모든 셈 어족 언어의 차이점은 셈 어족 언어와 다른 어떤 언어의 차이점보다도 훨씬 크며, 적어도 아프리카 언어와의 관련성이 더욱 엄밀하게 밝혀질 때까지는 이집트어를 마땅히 셈 어족 이외의 언어로 분류해야 한다”는 견해가 인정을 받고 있다. (「이집트어 문법」 Egyptian Grammar, A. 가디너, 런던, 1957년, 3면)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 신분을 숨길 때에 이집트 통역관을 통해 형들에게 말하였다.—창 42:23.
어쨌든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말미암아, 이집트에서 아주 오래전에 사용된 언어 형태가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 극히 어렵다. 그 한 가지 요인은 이집트의 문자 체계이다. 고대 비문들에는 그림 문자(상형 문자)를 이루는 부호들(동물, 조류, 식물, 그 밖의 물체들의 표상)과 기하학적 도형들이 사용되었는데,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문자 체계를 히에로글리피코스라고 불렀다.
음절을 표시하는 부호들이 생겨났지만 상형 문자를 보완하는 데 사용되었을 뿐, 결코 상형 문자를 대치하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그러한 음절들이 나타낸 정확한 음가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다. 일찍이 기원전 두 번째 천년기 중엽에 이집트에 관해 언급한 설형 문자 기록들을 통해 얼마의 도움을 얻게 되었다.
기원 6세기경에 이집트에서 사용된 이름들과 그 밖의 단어들에 대한 그리스어 표기와 그로부터 1세기쯤 후부터 나오게 된 아람어 표기들을 통해서도 해당되는 이집트어 단어들의 철자에 대해 얼마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어의 음운 체계를 재구성하는 일은 여전히 주로 콥트어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콥트어란 기원 3세기부터 사용된 이집트어의 한 형태를 말한다. 따라서 아주 오래전, 특히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거주하기 전에 사용된 고대 어휘의 원래 구조가 어떠하였는지는 어림짐작을 할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사용된 다른 고대 함 어족 언어들에 대한 지식도 오늘날 매우 제한되어 있으므로, 이집트어와 그러한 언어들의 관련성을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집트어 이외의 아프리카 언어로 된 서력기원전 시대의 비문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제반 사실은 언어의 혼란에 관한 성서 기록을 뒷받침하며, 함의 자손들로서 미스라임 계통인 초기 이집트인들은 셈 어족 언어와는 구별되는 특유의 언어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형 문자는 특히 기념물과 벽화에 기록을 새기는 데 사용되었는데, 거기에 부호들이 매우 세밀하게 새겨졌다. 특히 종교 문헌에는 서력기원이 시작될 때까지 상형 문자가 계속 사용되었지만, 가죽이나 파피루스에 잉크로 기록하는 서기관들은 필기체로 더욱 간편하게 쓸 수 있는 덜 복잡한 문자를 일찍이 개발하였다.
그러한 문자를 신관 문자라고 하는데, 뒤이어 특히 “제26왕조”라고 불리는 시기(기원전 7세기와 6세기)부터는 민중 문자라고 하는 한층 개량된 필기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의 문서들은 1799년에 로제타석이 발견된 후에야 비로소 해독되었다.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이 비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피파네스)에게 영예를 돌리는 한 포고령이 담겨 있는데, 기록 연대는 기원전 196년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은 이집트 상형 문자와 민중 문자와 그리스 문자로 되어 있으며, 그리스어 본문이 이집트어 해독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의 종교
이집트는 극히 종교적인 나라로서, 다신 숭배가 널리 퍼져 있었다. 도시와 성읍마다 “도시의 주”라는 칭호를 가진 자체의 토속 신이 있었다. 투트모세 3세의 무덤에서 발견된 한 명단에는 신의 이름이 740개쯤 들어 있다. (출 12:12)
흔히 묘사된 바에 따르면, 그 신은 여신과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갖게 되고, “그리하여 삼신이나 삼위일체를 구성하였다. 더욱이 그 아버지 신은 언제나 우두머리 신이었던 것이 아니라 때때로 지방의 주신(主神)이 여신으로 있는 동안에는 부군(夫君)의 지위에 만족하였다.” (「신 라루스 신화 백과사전」 New Larousse Encyclopedia of Mythology, 1968년, 10면)
우두머리 신들은 각각 일반인에게는 개방되지 않은 자기 신전에 거하였다. 제사장들이 신을 숭배하였는데, 그들은 매일 아침 찬가를 불러 신을 깨우고 씻겨 주고 입혀 주고 “먹여” 주었으며 그 밖의 시중을 들었다. (시 121:3, 4; 사 40:28 대조)
이러한 면에서 제사장들은 파라오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자들로 간주되었을 것이며, 파라오 자신은 살아 있는 신으로, 즉 라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 앞에 나아가 참 하느님의 명령을 전달할 때 나타낸 용기는 참으로 돋보이며,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에 순종해야 하느냐?’라고 경멸적으로 말한 파라오의 반응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출 5:2.
이집트에서 신전, 조상(彫像), 종교 그림, 기록물 등으로 된 고고학적 자료가 매우 많이 발굴되었지만, 이집트인의 실제 신앙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비교적 적다. 종교 문헌들은 매우 얼룩져 있고 단편으로만 남아 있어서 대개 절반 이상의 내용이 빠져 있다. 이집트인의 신들과 관습들의 성격에 대한 많은 이해는 추론에 근거한 것이거나 헤로도토스와 플루타르코스 같은 그리스 저술가들이 기술한 자료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이 일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집트 역사 전체에 걸쳐 지역적인 차이가 계속되었고 그 결과 흔히 서로 모순되고 복잡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전설과 신화가 생겨난 것으로 보아 그 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라 신은 75가지 이름과 형태로 알려져 있었다. 수백에 이르는 신들 중에서 실제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배를 받은 신은 비교적 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신들 가운데 일반인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은 삼위 혹은 삼신인 오시리스, 이시스(오시리스의 아내), 호루스(오시리스의 아들)였다.
다음으로 태양신 라를 비롯하여 달의 신, 하늘의 신, 공기의 신, 땅의 신, 나일 강의 신 등등의 “우주” 신들이 있었다. 테베(성서 지명은 노)에서는 아몬 신이 가장 유명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아몬라라는 이름으로 “신들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렘 46:25)
축제 때에는(렘 46:17), 신들이 시가행진을 하였다. 예를 들어, 제사장들이 종교 행렬에서 라 신의 우상을 운반할 때에, 사람들은 으레 복 받기를 기대하면서 거리로 나왔다. 이렇게 거리에 나오기만 해도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여긴 이집트인들은 라 신도 자기들을 계속 번영하게 해 줄 의무를 지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물질적 축복과 번영만을 위해서 라 신을 의지했을 뿐, 영적인 것은 전혀 구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주신(主神)들과 바빌론의 주신들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는데, 증거에 의하면 바빌론이 근원이며 이집트는 이어받거나 계속 보존하는 나라였다.
이러한 다신 숭배는 이집트인들에게 유익하거나 고무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영문, 1959년, 8권, 53면)은 이렇게 지적한다. “깊은 진리를 신비스럽게 담고 있는 불가사의한 교의들이 그들에게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전적·현대적 상상에 따른 것이다. 물론 아샨티족이나 이보족[아프리카 부족들]처럼 그들에게는 불가사의한 교의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불가사의한 교의들에 진리가 담겨 있었다거나 그 이면에 신비스러운 ‘믿음’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상 알려진 증거에 따르면 주술적이며 원시적인 미신이 이집트인의 숭배의 기본 요소였다. (창 41:8) 병을 예방하기 위해 종교적 주술을 사용하였으며, 영매술이 우세하여 “술사들”, “영매들”, “앞일을 예고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사 19:3)
염주, 호신부, “행운”의 부적을 착용하였고, 파피루스 조각에 주문을 기록하여 목에 걸고 다녔다. (신 18:10, 11 비교) 모세와 아론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였을 때, 파라오의 궁전에서 주술을 행하는 제사장들과 마술사들도 주술을 통해 그러한 기적을 흉내 내었지만 결국 똑같은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출 7:11, 22; 8:7, 18, 19.
동물숭배
그러한 미신적인 숭배로 말미암아 이집트인들은 동물숭배를 포함하여 아주 타락한 우상 숭배를 행하게 되었다. (로 1:22, 23 비교) 가장 유명한 신들 중 상당수가 사람의 몸에 동물이나 새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호루스 신은 매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토트는 따오기의 머리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원숭이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신이 실제로 동물의 몸으로 화신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아피스 황소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살아 있는 아피스 황소는 오시리스 신의 화신으로 간주되어 신전에서 사육되었고 죽으면 장례식과 매장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고양이, 비비, 악어, 자칼 같은 일부 동물들과 여러 새들은 특정한 신들과 연관되어 있어서 신성하다는 신앙이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실제로 이집트인들은 그러한 동물들을 수십만 마리나 미라로 만들어 특별한 묘지에 묻었다.
왜 모세는 이스라엘의 희생이 “이집트인들에게 역겨운”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는가?
이집트의 여러 지역에서 수많은 다양한 동물들을 경배하였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광야로 가서 희생을 바치게 해 달라는 모세의 주장에 힘과 설득력을 더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집트인들에게 역겨운 것을 그들의 눈앞에서 희생으로 바친다면, 그들이 우리를 돌로 치지 않겠습니까?” (출 8:26, 27)
이스라엘이 나중에 바친 희생의 대부분은 이집트인들을 매우 불쾌하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에서 태양신 라는 때때로, 하늘의 암소에게서 태어난 송아지로 묘사되었다.) 반면에 신들과 여신들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이집트의 모든 신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여 큰 굴욕을 안겨 주면서 자신의 이름을 그 땅 전역에 알려지게 하셨다.—출 12:12.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은 2세기 동안 이집트에 머무르는 동안 그러한 거짓 숭배에 오염되는 것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였다. (수 24:14) 이것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 얼마 안 되어 나타낸 잘못된 태도의 큰 원인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집트의 똥 같은 우상들”을 던져 버리라고 지시하셨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겔 20:7, 8; 23:3, 4, 8)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것은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의 동물숭배에 감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 32:1-8; 행 7:39-41)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로 전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숭배할 때 동물 형상이나 어떤 “우주” 천체와도 관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분명히 경고하셨다. (신 4:15-20)
하지만 여러 세기 후에 여로보암이 이집트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 되어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왕권을 얻고 숭배에 사용할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을 때 동물숭배가 다시 표면화되었다. (왕상 12:2, 28, 29)
모세가 기록한 영감받은 성경이 이집트의 그러한 우상 숭배와 미신에 의한 부패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영적·도덕적 특성들이 결여됨
일부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집트의 일부 종교 문헌들에서 어떤 식으로든 죄의 개념이 나타나는 것은 후에 셈족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죄의 고백은 언제나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영문, 1959년, 8권, 56면)은 이렇게 지적한다. “[이집트인은] 고백할 때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였다. 죄를 부정하는 고백이었으므로, 오누스 프로반디[입증의 책임]는 재판관에게 있었다. 장례용 파피루스에 따르면, 재판관은 언제나 혐의자에게 유리하게 판결하였다. 혹은 어쨌든 유리한 판결이 내려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있었다.” (시 51:1-5 대조)
고대 이집트 종교는 수많은 신들 중 하나나 여럿의 섭리를 통하여 바라는 결과를 얻으려고 고안된 의식들과 주문들을 위주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와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의 재위 중에 태양신 아톤이 거의 전적으로 숭배받았을 때 일종의 일신 숭배가 존재하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일신 숭배가 아니었다.
파라오 자신이 계속 신으로 숭배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에도 이집트 종교 문헌에는 윤리적 특성이 없었다. 태양신 아톤에 대한 찬가에는 생명을 주는 열기에 대해 아톤을 찬양하는 내용이 있을 뿐, 영적·도덕적 특성들에 대해 찬양이나 인식을 표현하는 내용은 전무하다.
그러므로 모세의 기록에 들어 있는 일신 숭배가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죽은 자에 대한 신앙
이집트 종교에서 매우 두드러진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염려와 죽음이라는 “변화” 이후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는 일에 대한 집착이었다. 영혼의 환생이나 윤회에 관한 신앙은 널리 퍼진 교리였다. 영혼은 불멸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인간 몸도 보존하여 영혼이 때때로 돌아와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믿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시신을 방부 처리하였다. 미라가 안치된 무덤은 죽은 자의 “집”으로 여겨졌다. 피라미드는 죽은 왕족의 대저택이었다.
죽은 자가 미래에 사용할 수 있도록 장신구, 옷, 가구, 식량 등 생활필수품과 사치품을 무덤에 저장해 두었고, 떠난 자를 악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사자(死者)의 서(書)”와 같은) 기록된 주문과 부적도 함께 두었다. (1권, 533면 사진 참조)
그러나 그러한 주문들은 죽은 자들을 인간 도굴범으로부터 보호해 주지도 못하였다. 도굴범들은 마침내 거의 모든 대분묘를 약탈하였다.
야곱과 요셉의 시신도 방부 처리되었지만, 야곱의 경우에는 주된 목적이 그 부자(父子)의 믿음의 표현대로 야곱의 시신을 약속의 땅의 매장지로 옮길 수 있을 때까지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요셉의 경우에는 이집트인들이 존경과 영예의 표시로 방부 처리를 하였을 것이다.—창 47:29-31; 50:2-14, 24-26.
이집트인의 생활과 문화
오랫동안 학자들은 이집트가 ‘가장 오래된 문명지’이며 인류 최초의 많은 발명품들과 진보의 근원지라고 설명해 왔다. 그러나 근래에 축적된 증거는 메소포타미아가 이른바 문명의 요람임을 지적해 왔다.
이집트인의 일부 건축법, 바퀴의 사용, 아마 그들의 그림 문자의 기본 원리, 그리고 특히 이집트 종교의 기본적 특징들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대홍수 이후 민족들의 흩어짐에 관한 성서 기록과 일치한다.
건축 부면에서 이집트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이른바 “제4왕조”의 파라오들인 쿠푸(케오프스), 카프레, 멘쿠레가 기자에 세운 피라미드들이다. 가장 큰 쿠푸의 피라미드는 기저 부분의 면적이 5.3헥타르이고, 꼭대기의 높이가 약 137미터(현대의 40층 건물에 해당함)이다.
계산에 따르면, 각각의 무게가 평균 2.3톤인 돌덩어리가 230만 개나 사용되었다. 그 돌덩어리들은 틈새가 몇 밀리미터 이내일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 맞추어졌다. 거대한 신전도 지어졌는데, 테베(성서 지명은 ‘노’; 렘 46:25; 겔 30:14-16)의 카르나크에 있는 신전은 사람이 지금까지 만든 원주 건축물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할례는 고대부터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행해진 일반 관습이었다. 성서에서는 이집트인들을 할례를 받은 다른 민족들과 함께 언급한다.—렘 9:25, 26.
교육은 제사장들이 운영하는 서기관 양성 학교들이 주로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서기관들은 이집트어로 기록하는 데 능숙했을 뿐 아니라 아람어 설형 문자에도 매우 익숙하였다.
이미 기원전 두 번째 천년기 중엽에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있는 종속된 통치자들이 아람어로 이집트 수도와 정기적으로 교신하였다.
이집트의 수학은 앞서 언급한 놀라운 건축술을 충분히 뒷받침할 만큼 진보해 있었으며, 기하학·대수학의 원리들에 관한 얼마의 지식이 있었음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모세가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로 교훈받았다’는 사실은 유의할 만하다. (행 7:22) 이집트에는 거짓 지혜가 많이 있었지만,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 지식도 활용되었다.
정부와 법은 인간 형태의 신으로 여겨진 파라오 혹은 왕을 중심으로 하였다. 파라오는 자신에게 종속된 자들 즉 장관들을 통해 그리고 봉건 영주들을 통해 나라를 다스렸는데, 왕의 세력이 약화된 시기에는 영주의 세력이 왕의 세력과 맞먹었다.
아마 영주들은 자기 영지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었으며, 따라서 성서에서는 특정한 시기에 관해 말할 때 “이집트의 왕들[복수]”을 언급한다. (왕하 7:6; 렘 46:25) 이집트인들이 남쪽의 누비아·에티오피아를 정복하자 그 지역은 “구스의 왕자”라고 불리는 부왕(副王)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페니키아에도 이집트의 부왕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이집트의 실제 법전으로 알려진 것은 전혀 없다. 법이 존재하였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노동을 시켜 벽돌을 만들게 하거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새로 태어나는 모든 남자 아이를 물에 빠뜨리게 한 파라오의 명령과 같은 칙령에 불과하였던 것 같다. (출 1:8-22; 5:6-18. 창 41:44 비교)
토지 소유자에게는 모든 농작물에 대해 세금이 부과되었는데, 이러한 제도는 제사장들의 땅을 제외한 모든 땅이 파라오의 재산이 된 요셉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창 47:20-26)
세(税)로서는 농작물이나 가축의 일부를 징수하였을 뿐 아니라 정부 사업이나 군 복무의 명목으로 노역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범죄에 대한 처벌로는 코를 자르거나 광산으로 유배시켜 노동을 시키거나 매로 때리는 일, 투옥과 사형 등이 있었는데, 사형에는 종종 참수형이 포함되었다.—창 39:20; 40:1-3, 16-22.
요셉의 이집트 생활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체류한 지 거의 2세기 후에, 야곱의 어린 아들 요셉은 미디안·이스마엘 대상에게 팔렸고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한 궁정 관리에게 다시 팔렸다(기원전 1750년). (창 37:25-28, 36)
나중에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설명한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그러한 일을 허락하신 것은 야곱의 가족이 극심한 기근의 때에 보존받을 수 있는 길을 준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창 45:5-8)
요셉의 생애 중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집트의 실상을 부인할 여지 없이 정확하게 보여 준다. (요셉 1번 참조) 관직명, 관습, 의복, 주술 사용, 그 밖의 여러 가지에 관한 자세한 묘사는 이집트 기념물, 그림, 기록 등을 통해 얻게 된 자료로써 확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셉이 이집트의 부왕(副王)으로 임명될 때 따른 절차는(창 41:42) 이집트의 비문들과 벽화들에 묘사된 것과 일치한다.—창 45-47장.
요셉이 형제들에게 식사를 베풀었을 때처럼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과 함께 먹기를 싫어한 것은 그들이 가진 종교적·인종적 교만과 편견 때문일 수도 있고, 그들이 목자들을 역겨워한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창 43:31, 32; 46:31-34)
후자의 태도는 단지 이집트의 계급 제도 때문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계급 제도에서는 목자가 최하층에 가까운 부류로 취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은 농경지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축지를 찾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반감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힉소스 시대”
많은 주석가들은 요셉이 이집트에 들어가고 요셉의 아버지와 가족이 이집트에 들어간 사건이 흔히 힉소스 시대로 알려진 기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메릴 웅거는 이렇게 논평한다(「고고학과 구약」 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1964년, 134면). “유감스럽게도, [이 기간은] 이집트의 역사 중 매우 불분명한 기간이다. 힉소스의 정복에 관한 이해는 매우 불완전하다.”
학자에 따라서, 힉소스 시대를 “제13왕조에서 제17왕조까지” 200년간의 통치 기간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제15왕조와 제16왕조”로 국한하여 한 세기 반 혹은 불과 한 세기의 기간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힉소스라는 이름의 의미를 “목자 왕들”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외국 통치자들”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힉소스가 속한 인종이나 민족에 대해서는 추측이 한층 더 구구하여, 코카서스 출신의 인도·유럽인이거나 중앙아시아에 살던 인도·유럽인이었을 것이라는 학설, 히타이트인이었을 것이라는 학설, 시리아·팔레스타인 통치자(가나안족이나 아모리족)였을 것이라는 학설, 아라비아족이었을 것이라는 학설 등이 제시되었다.
일부 고고학자들이 기술하는 바에 따르면, 이집트에 대한 “힉소스의 정복”은 북쪽의 유목 민족이 빠른 병거로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휩쓸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반면에 그 정복이 느리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다시 말해서,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나 반(半)유목민이 점차 유입되면서 이집트를 조금씩 서서히 장악하게 되었거나 신속한 쿠데타로 기존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세계」(The World of the Past, 5부, 1963년, 444면)라는 책에서, 고고학자 자케타 혹스는 이렇게 기술한다. “힉소스 통치자들이 아시아계 유목 민족의 원정을 통한 침략을 주도했다는 생각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힉소스라는 이름은 ‘고지대의 통치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셈족에 속한 유랑민으로서 무역과 그 밖의 평화적인 목적을 위하여 오랫동안 이집트에 와 있었다.”
이러한 설명이 현재 널리 퍼져 있는 견해를 잘 나타내는 것일 수 있지만, 그 “유랑민”이 이집트 땅을 차지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게 된다. 특히 이 기간에 앞서 “제12왕조” 시대에 이집트의 세력이 절정에 달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영문, 1956년, 14권, 595면)은 이렇게 알려 준다. “고대 저술가가 그들[힉소스인들]에 관해 기술한 세부 기록으로는, 요세푸스가 아피온에게 답변하는 내용 가운데서 인용한 유실된 마네토 작품의 신빙성 없는 본문밖에 없다.”
요세푸스가 마네토의 말임을 밝히면서 인용한 글이 힉소스라는 이름의 출처이다. 흥미롭게도, 요세푸스는 마네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고 하면서, 마네토의 기록이 힉소스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직접 관련시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요세푸스는 그러한 관련성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기록에 나오는 여러 가지 세부점을 강하게 반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힉소스의 역어로서 “왕-목자들”보다는 “포로된 목자들”을 더 좋아한 것 같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마네토는 힉소스인들이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이집트를 정복하여 도시들과 “신전들”을 파괴하고 살육과 황폐를 초래하였다고 설명한다. 힉소스인들은 나일 삼각주 지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이집트인들이 일어나 48만 명의 병력으로 처절한 장기전을 치르면서 힉소스인들의 주요 도시인 아바리스를 포위하였는데, 그 후에 이상하게도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인들과 합의를 하게 되어 자기들의 재산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무사히 그 나라를 떠나게 되었고, 그 결과 유대로 가서 예루살렘을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 I, 73-105 (14-16); 223-232 (25, 26).
동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그 통치자들의 이름들 앞에 “선한 신”, “레의 아들”, 힉-코스웻 즉 “외국 땅의 통치자” 같은 칭호들이 나온다. “힉소스”라는 용어는 힉-코스웻이라는 칭호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통치 직후에 기록된 이집트 문서들에서는 그들을 아시아인이라고 불렀다.
이집트 역사의 이 기간에 관하여, C. E. 드브리스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세속 역사와 성서 자료를 관련시키려고 하면서, 힉소스인들이 이집트에서 축출된 사건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난 사건과 동일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연대 계산에 따르면 그 두 사건을 동일시할 수 없으며, 다른 요소들을 고려해 보아도 그러한 가정을 지지할 수 없게 된다. ··· 힉소스인들의 기원은 불확실하다. 그들은 아시아의 어느 곳에선가 왔으며 대부분 셈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국제 표준 성서 백과사전」(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G. 브로밀리 편, 1982년, 2권, 787면.
요셉이 권세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유익을 얻게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므로, 우호적인 “목자 왕들”이라는 식의 어떤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 (창 45:7-9)
“힉소스” 개념의 실제 기초가 된 마네토의 기록은 일찍이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의 이집트 거주 기간에 자기들의 땅에서 일어난 일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어 설명해 보려고 한 데서 발전하게 된 왜곡된 전설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요셉이 대리 통치자의 지위에 올랐을 때 그 사건이 이집트에 미쳤을 엄청난 영향(창 41:39-46; 45:26),
요셉의 행정상의 관리로 말미암아 이집트인들이 자기 토지와 자신들마저 파라오에게 팔게 된 큰 변화(창 47:13-20), 그 후 이집트인들이 소출의 20퍼센트를 세금으로 바친 일(창 47:21-26), 이스라엘 사람들이 215년 동안 고센에 거주한 일, 파라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인구수나 힘에 있어서 원주민을 마침내 능가하게 된 일(출 1:7-10, 12, 20),
열 가지 재앙, 그로 말미암아 이집트 경제가 황폐되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신앙과 이집트 제사장들의 위신이 훨씬 더 큰 타격을 입게 된 일(출 10:7; 11:1-3; 12:12, 13),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처음 난 것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오게 된 일과 이집트 정예군이 홍해에서 멸망된 사건(출 12:2-38; 14:1-28)—틀림없이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이집트 당국은 설명을 시도해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이집트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중동의 여러 나라의 경우처럼 제사장들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서기관들이 받는 훈련을 제사장들이 감독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이집트와 그 백성에게 내리신 재앙에 대해 이집트 신들이 속수무책이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선전을 꾸며 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매우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한 선전으로 사실들이 심하게 왜곡되어 압제받은 자가 압제자로 둔갑되고 무고한 희생자가 위험하고 잔인한 공격자로 둔갑된 여러 경우들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근래의 역사 기록에서도 그러한 경우들을 볼 수 있다.
마네토의 기록(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온 지 1000여 년 후에 기술됨)은 요세푸스가 어느 정도 정확하게 보존했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이집트 생활에 관한 성서의 참된 기록의 기본적인 점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집트인들이 여러 세대를 통해 전해 온 왜곡된 전설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노예 생활 성서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압제하기 시작한 파라오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며(출 1:8-22), 모세와 아론이 나아가 상대한 파라오, 즉 이집트 탈출이 일어난 시대에 통치한 파라오의 이름도 알려 주지 않는다. (출 2:23; 5:1)
그리고 그 사건들은 이집트의 기록에서 고의적으로 생략되었거나 기록이 파기되었다. 그러므로 그 사건들이 세속 역사에 나오는 어느 왕조나 어느 파라오의 재위 기간에 있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이스라엘인 노동자들이 비돔과 라암셋 도시들을 세운 일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그들을 압제한 파라오는 (“제19왕조”의) 람세스(라메셋) 2세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흔히 있었다. (출 1:11)
그 도시들은 람세스 2세의 재위 기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고고학과 구약」(149면)에서 메릴 웅거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러나 전임자들의 업적을 가로챈 라암셋 2세의 악명 높은 관례를 고려해 볼 때, 그는 그 도시들을 단지 재건하였거나 확장하였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사실상 “라메셋”이라는 이름은 이미 요셉 시대에 한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던 것 같다.—창 47:11.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구출하시자 그 나라는 “노예의 집” 혹은 “쇠 가마”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는데, 성서 필자들은 이집트를 계속 그렇게 불렀다. (출 13:3; 신 4:20; 렘 11:4; 미 6:4)
40년 후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이 성서 사건을 이른바 아마르나 문서에 기술된 상황과 관련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문서는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27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나일 강가의 텔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되었다.
379개의 판으로 되어 있는 그 문서는 (헤브론, 예루살렘, 라기스의 통치자를 포함하여) 가나안과 시리아의 여러 통치자들의 서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많은 서한들에는 당시에 통치하던 파라오(일반적으로 아크나톤으로 여겨짐)에게 “하비루”(아피루)의 침입과 약탈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부 학자들은 “하비루”를 히브리인 즉 이스라엘 사람들과 동일시하려 하지만, 그 서한들의 내용 자체는 그 점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그 서한들은 하비루를 단순한 침입자들로 설명하는데, 때때로 그들은 도시들 간에 지역 내 경쟁을 벌이는 특정한 가나안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한다.
하비루의 위협을 받은 성읍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의 공격 범위를 훨씬 벗어난 레바논 북부의 비블로스가 포함되었다. 또한 그 서한들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치른 주요 전투들과 그들이 거둔 승리들에 비할 만한 묘사가 없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거주했던 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새겨졌으며, 그들이 기적을 통해 이집트 땅에서 해방된 일은 여호와의 신격의 뛰어난 증거로 자주 기억되었다. (출 19:4; 레 22:32, 33; 신 4:32-36; 왕하 17:36; 히 11:23-29)
따라서 “나는 이집트 땅 시절부터 너의 하느님 여호와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호 13:4. 레 11:45 비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에서 해방되어 여호와의 구출 능력에 대한 증거가 한층 더 제시될 때까지는 그 일을 능가할 만한 단일 상황이나 사건이 없었다. (렘 16:14, 15)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경험한 일은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에 기록되었다. (출 20:2, 3; 신 5:12-15) 그 일은 유월절 축제의 기초가 되었고(출 12:1-27; 신 16:1-3),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국인 거주자들을 대하는 면에서(출 22:21; 레 19:33, 34), 그리고 자신을 팔아 속박을 받게 된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면에서(레 25:39-43, 55; 신 15:12-15) 지침이 되었으며, 신성한 곳의 봉사를 위해 레위 지파를 선택하여 성별하는 일의 법적 기초가 되었다. (민 3:11-13)
출처: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docId=206728114&qb=7ZWY67mE66Oo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