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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과 동시에 드는 마음을 버리는 4가지 열쇠
본문 : 사도행전 24장 24~26절
며칠 뒤에 벨릭스가 유대 여자인 자기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내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관하여 바울이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바울이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해서 말할 때에, 벨릭스는 두려워서 "이제 그만하면 되었으니, 가시오. 기회가 있으면, 다시 당신을 부르겠소" 하고 말하였다. 동시에 그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하고 은근히 바랐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자주 불러내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도행전 24장 24~26절, 새번역>
혹시 중식당에 가면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중식당에 가면 늘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분명 짜장면을 먹으러 간 것이었는데, 메뉴판을 보는 순간 짬뽕이 맛있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행스럽게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짬짜면이 있어 주문하지만, 이상하게 그 짬짜면으로는 만족이 되지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를 선택하지 못했으니, 두 가지를 한 번에 주는 메뉴로 만족해야 하는데 무언가 부족하고 모자란 느낌이 드니 말입니다. 그래서 중식당을 나서면서 차라리 짜장면이나 짬뽕 중 하나만 먹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면서 스스로를 탓하기까지 하는 저는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동시에 품지 말아야 할 두 가지 마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한켠에 자리 잡은 경험이 한번쯤은 있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저는 사도행전 강해를 진행하면서, 특별히 ‘바울’을 보면서, 이런 두 마음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바울에 대한 존경과 바울에 대한 질투가 동시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울의 ‘믿음의 모험’에 진심 어린 박수가 나오면서도, 동시에 바울이 조금이라도 소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고난을 겪게 되면 ‘그래, 바울도 역시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라는 이상한 안도감도 생기는 질투의 마음도 제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두 마음을 품는 것은 ‘가식’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일부러 두 마음을 가져야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일부러 ‘다양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동시에 두 마음이 품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식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두 마음이 품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잘못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며 한 번 그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이런 자연스러운 고민을 로마서를 통해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1절, 새번역>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가식과 두 마음을 품는 것에 대해서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부러 다른 마음을 품는 가식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취하지도 말아야 할 ‘불신앙’입니다. 가식은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과 동시에 두 마음을 품게 된 것을 발견했다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변화가 시작되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믿음과 동시에 찾아온 마음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그 마음을 점검해서, 필요하다면 믿음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필요 없다면 조금씩 내려놓음으로 결국 믿음만이 자리 잡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이란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다른 마음을 버리는 여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24장 강해를 통하여 이 믿음과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을 품었지만 끝까지 믿음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벨릭스’입니다.
바울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의 도움을 받아 벨릭스 총독 앞에 안전하게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감옥이 아닌 헤롯 궁에 가두고 지키라는 특별한 혜택을 허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인의 입장이긴 했지만 꽤 괜찮은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가이사랴에 온 지도 5일이 지났습니다.
닷새 뒤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몇몇 장로와 더둘로라는 변호사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였다. <사도행전 24장 1절, 새번역>
정말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찾아와서, 그것도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이런 열정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과 연결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랬다면 유대인들에게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바울을 불러내어 벨릭스 앞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 일행은 최선을 다해 바울을 고소합니다. 혹여나 벨릭스 총독의 마음이 틀어질까 노심초사하며 먼저 벨릭스 총독을 향한 찬사를 보낸 후에 바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그가 성전까지도 더럽히려고 하므로, 우리는 그를 붙잡았습니다. <사도행전 24장 5~6절, 새번역>
이상하게 분명히 고소인데, 칭찬 같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요? 그동안 바울이 한 노력은 정말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바울의 선교여행이 파급력이 대단했다고 지금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둘로라는 변호사는 자신의 직업이 변호사라고 하기에 민망할만큼 누가 듣기에도 억하심정 외에는 ‘인과관계’와 ‘논리’가 없는 변호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소위 ‘팩트’가 없는 변호입니다. 그래서 총독이 그저 바울을 신문하여 보라고 권하게 되는 것입니다.
총독님께서 친히 그를 신문하여 보시면, 우리가 그를 고발하는 이유를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도 이에 합세해서,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도행전 24장 8~9절, 새번역>
하지만 벨릭스총독은 아나니아 일행의 고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울에게 오히려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허락하게 됩니다. 그러자 바울은 더둘로와는 다르게 ‘인과관계’와 ‘논리’, ‘팩트’를 가지고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총독님께서도 곧 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고발한 사람들은 내가, 성전에서나 회당에서나 성내에서, 누구와 논쟁을 하거나, 군중을 선동해서 모으거나,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들어서 고발하고 있지만, 총독님께 아무 증거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4장 11~13절, 새번역>
그리고 이 말에 이어 바울의 솔직 담백하고 멋진 신앙 고백을 들어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순간, 이 바울의 변호가, 벨릭스 총독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 일행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자세히 들여 다 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총독님께 이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4장 14절, 새번역>
첫째, 바울은 가장 먼저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 유대인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나 다른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이 믿고 싶은 말씀만 ‘골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마음을 버릴 수 있는 첫 번째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기준’으로 필터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필터링하지 않았다면 아나니아 일행 역시 진작에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선택했기 때문에 ‘회칠한 무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마태복음 23장 27~28절, 새번역>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존재하면 좋겠지만, 믿음과 동시에 말씀에 대한 거부감도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필터 삼아 거부감을 걷어내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의 거부감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필터링해 버리는 것은,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 앞에서의 신앙고백 두번째는, 바울은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이 다 같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자신은 그 부활의 희망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는 노력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데,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곧 그것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장차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15~16절, 새번역>
여기에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마음을 버릴 수 있는 두 번째 열쇠가 있습니다.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마음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이 없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가져도 되는 마음인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동시에 유지해도 되는 마음이라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조금이라도 거리낌이 생기는 마음이라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선한 양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늘 동일한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벨릭스 총독 앞에서도, 아니 그 누구의 앞에서도 그는 변함없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 일행을 어떻습니까?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의식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거리낌이 있어도 되지만,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자 노력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태복음 6장에서 3번씩이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동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선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마태복음 6장 1절, 개역개정>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5절, 개역개정>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16절, 개역개정>
그리고 바울 스스로도 언제나 이 마음을 품고 살면서 성도들을 권면했습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눈가림으로만 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답게 진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십시오. <에베소서 6장 6절, 공동번역>
정말 부활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삶’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또한 사람 앞에서 거리낌이 없는 선한 양심을 가지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간혹 오해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리스도인은 결코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온전해 지고자 삶에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바울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온전해지고자 믿음과 동시에 찾아온 마음을 버릴 수 있는 삶의 노력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거리낌이 없는 삶입니다.
세 번째로 신앙고백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오늘 이렇게 심문을 받게 된 최종 이유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자신이 ‘죽음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 후 이렇게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싸움으로 번진 ‘부활 논쟁’은 여전히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일어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들 가운데 서서 말하기를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관련된 문제 때문입니다' 하는 이 한 마디 말을 부르짖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 24장 21절, 새번역>
여기에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마음을 버릴 수 있는 세 번째 열쇠가 있습니다.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마음이 말씀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대로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이들이 이야기하는 부활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같은 소망이 있었긴 했지만, 바울이 이야기하는 성경에 기록된 부활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마음이 말씀과 관련된 것이라면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더 많은 묵상을 통해 믿음을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동시에 찾아온 마음이 말씀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신속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반대라면, 예수님의 삶과 반대라면, 하나님의 나라와 반대라면, 세상 것이라면, 세상에 속한 이야기라면, 세상의 방법이라면, 세상과 관련된 것이라면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벨릭스도 이 ‘도’와 관련된 일을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바울의 편을 들어주게 된 것입니다.
벨릭스는 그 '도'와 관련된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당신들의 소송을 처리하겠소" 하고 말하고서, 신문을 연기하였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명령하여, 바울을 지키되, 그에게 자유를 주고, 그의 친지들이 돌보아 주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24장 22~23절, 새번역>
이미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벨릭스는 그 도와 관련된 일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벨릭스의 마음에도 두 가지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의 현실’에 대한 마음과 동시에 믿음에 대한 관심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처음부터 벨릭스는 바울에게 계속 환대를 베풀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주 바울을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하여 바울이 설명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의 영향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며칠 뒤에 벨릭스가 유대 여자인 자기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내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관하여 바울이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바울이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해서 말할 때에, 벨릭스는 두려워서 "이제 그만하면 되었으니, 가시오. 기회가 있으면, 다시 당신을 부르겠소" 하고 말하였다. 동시에 그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하고 은근히 바랐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자주 불러내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도행전 24장 24~26절, 새번역>
바울은 벨릭스 앞에서도, 벨릭스가 듣기 좋은 말로 변형해서, 벨릭스의 마음에 들기 위한 어떤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로지 말씀을 통하여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바울은 실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듣자 벨릭스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자신의 현실’에 대한 마음과 동시에 믿음에 대한 관심, 그리고 동시에 두려움도 찾아오게 됩니다. 점점 더 벨릭스의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마음이 더 있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뇌물’을 받을 것을 은근히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바울을 환대해주는 것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시 흔하게 이루어진 일례대로 바울이 행동해 주길 바랐던 것입니다. ‘뇌물’은 오늘과 변함없이, 예전에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마음을 버릴 수 있는 마지막 네 번째 열쇠가 있습니다.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마음이 무엇인가 세상적인 댓가를 바라는 ‘욕심’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부터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엄청난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성령님이 나와 늘 동행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혜택입니다. 하지만 이런 유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는 대신 세상적인 대가를 바라는 ‘욕심’이라는 유익을 소망하고 있다면,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믿음과 동시에 ‘만사형통’이라는 욕심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라도 믿음과 동시에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를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라도 믿음과 동시에 ‘이 땅에서 보상받는 삶’에 대한 마음을 은근히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두 믿음과 동시에 갈 수 없는 마음들입니다. 모두 버려야 합니다. 믿음은 결코 만사형통이나 신분상승, 이 땅에서 보상받는 삶을 보장해 주는 프리패스권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입니다. 단 절망으로 치닫는 고난이 아니라 ‘영광을 위한 고난’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로마서 8장 17절, 개역개정>
오히려 ‘신분하강’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야 합니다. 종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가복음 10장 44절, 개역개정>
오히려 이 땅에서는 ‘핍박’이 있고, 저 ‘하늘에서의 보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누가복음 6장 22~23절, 새번역>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결코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동시에 세상의 유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심이 찾아온다면 다 버리고, 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살펴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말고 넘치는 하늘의 상을 받도록 하십시오. <요한이서 1장 8절, 현대인의 성경>
놀랍게도 벨릭스는 무려 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바울과 함께 이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믿음만이 남을 만도 한 대, 성경은 벨릭스가 믿음과 동시에 찾아온 마음들을 버렸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벨릭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2년을 헛되이 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벨릭스는 끝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걸 버리지 못했고, 유대 사람의 환심을 사면서 돌아오는 대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두 해가 지난 뒤에,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후임으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벨릭스는 유대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여, 바울을 가두어 둔 채로 내버려 두었다. <사도행전 24장 27절, 새번역>
사도행전 24장 강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강해를 시작하면서 이 믿음과 동시에 드는 두 가지 마음을 품었지만 끝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던 한 사람이 바로 ‘벨릭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벨릭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벨릭스를 통해 저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벨릭스를 거울삼아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24장 강해를 통하여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마음을 버릴 수 있는 4가지 열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기준’으로 필터링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필터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마음에 안착시키시길 소망합니다.
두 번째 열쇠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이 없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거리낌이 없는데 사람 앞에서는 있던지, 사람 앞에서는 거리낌이 없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거리낌이 있다면, 지금이 신앙을 정리정돈 해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 거리낌이 없어, 사람 앞에서도 거리낌이 없는 삶이되시길 축복합니다.
세 번째 열쇠는 말씀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인지 세상의 방법인지, 성령의 열매인지 육체의 열매인지, 하나님의 것인지 세상의 것인지, 하늘의 것인지 땅의 것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인간의 생각인지 잘 분별하시길 기대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열쇠는 무엇인가 세상적인 대가를 바라는 ‘욕심’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상’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버리지 못하고, 하늘의 채워짐을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대가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대가입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대가가 아닌 하늘에서의 상을 반드시 쟁취하시길 기도해 봅니다.
여기 이 4가지 열쇠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설명해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들은 그 말씀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2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결국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모든 마음들 중 오로지 말씀만이 함께 자리 잡아 결합되어 가는 여정이 ‘신앙’인 것입니다. 믿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모든 마음들이 말씀이 아니라면 함께 자리 잡지 못하도록 버려가야 하는 여정이 또한 ‘신앙’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고,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걷길 소망하는 길입니다. 축복의 길입니다. 영광의 길입니다. 우리 함께 이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8월 15일 주일 오후는 사도행전 24장 강해를 거울삼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귀한 시간으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부디 벨릭스와 같이 믿음과 동시에 찾아온 마음들을 버리지 못한 채 소중한 시간을 놓치게 되는 길을 걷지 않게 되시기를 간절히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잘 버림으로 말미암아 시편에 등장한 다윗의 고백이 오늘로부터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 축복하며 기대해 봅니다.
여호와여, 나에게 죄가 없음을 밝혀 주소서. 나는 깨끗하게 살아왔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굳게 믿었으며, 한 번도 두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시편 26편 1절, 쉬운성경>
마지막으로 믿음과 동시에 찾아온 마음들을 잘 버리고, 말씀과 결합하여 멋진 신앙을 이루어낸 믿음의 선배 ‘야고보’의 권면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야고보서 4장 8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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