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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박근혜 당선된 날 민족일보 조용수는
진관 스님 추천 0 조회 35 13.12.19 11: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2월 20일. 박근혜 후보가 제18대 대통령 당선증을 받던 날이다. 51년 전 그날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어떤 청년이 억울하게 ‘사형증’을 받았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사형 집행 재가가 떨어진 것이다. 이 청년은 바로 그 다음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그 청년, 당선증 안겨준 1570만 어떻게 생각할까?

 

당선증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는 영상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51년 전 그 청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자신을 죽인 박정희를 용서했을까? 그 박정희의 딸에게 대통령 당선증을 안겨준 이 땅의 국민 1570만 명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청년이 다른 진보 인사와 함께 사형이 집행되던 그 순간, 가족들은 서울형무소 정문 밖에서 면회를 요청하고 있었다. 군부와 교도소측은 사형 집행 사실을 감추려 했지만 형 집행 소식이 알게 된 가족들은 오열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억울한 청년의 가족이 흘린 눈물을 짤막한 기사 한 줄에 담았다.

 

“한편 조용수의 친동생(현재 가족은 이 사람뿐이라고 함)이라는 청년이 ‘오늘 아침에도 면회까지 하였는데 사형을 집행한다니...’하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동아일보/1961.12.21)

 

 ▲고 조용수의 형집행 사실을 보도한 신문 (동아일보 1961.12.22)

 

고 조용수. 해방과 6.25동란, 그리고 이승만 정권과 5.16 쿠데타 등 격동의 세월을 짧게 살다간 이 땅의 지식인이자 언론인이다. 1930년 당시 경남 진양의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진주중학교를 다니며 학생연맹에 가입해 우익계열로 활동하기도 했다.

 

5.16 희생제물 고 조용수, 32살에 형장의 이슬로

 

일본 민단과 인연을 맺은 건 1952년 일본 유학 때. 민단에서 활동하며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형이 선고된 조봉암 선생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그는 용공과 친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1959년 12월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북송방침에 반대해 철로에 누워 북송열차를 가로막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고 조용수를 비롯한 민단청년결사대의 활약을 이렇게 치하했다.

 

“반공친대한민국계 거류민단의 약 200명이 철로에 주저앉거나 들어누워서 동경에서 출발한 북송가족들을 실은 열차를 니이가다 역으로부터 오백 밖에서 멈추게 했다.”(동아일보/1959.12.12)

 

▲재일동포 북송열차를 가로막기 위해 철로를 막고 시위를 벌이는 민단청년.

이 시위의 주동자 중 한명이 고 조용수였다. (동아일보/1959.12.13)

 

1960년 6월 4.19혁명으로 진보진영의 재건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귀국한 고 조용수는 혁신계 인사들이 창당한 사회대중당 후보가 돼 경북 청송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이후 어용 언론으로 인해 민의가 차단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진보정론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민족일보>를 창간한다.

 

1961년 2월 13일 창간호를 낸 <민족일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몇달 만에 발행부수가 5만부를 넘어선다. 이 정도면 <서울신문> 등 정부기관지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진보언론사 사장 조용수는 기득권 세력과 보수세력의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면 정부의 <민족일보> 탄압은 새발의 피였다.

 

박정희, 남로당 조직원 폭로해 목숨 건진 그 솜씨로...

 

창간호를 낸 지 3개월 만에 5.16쿠데타라는 ‘비극적 운명’과 조우한다. 5월 18일 군부가 그를 전격 체포하면서 그와 그가 창간한 신문은 ‘박정희 군부’의 먹잇감이 된다. 조봉암의 비서 이영근의 지령으로 조총련으로부터 1억환을 받아 혁신계 기관지를 발행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게 죄목이었다.

 

모두 꾸며낸 얘기였다. 박정희 군부는 고 조용수 사장을 66일간이나 불법 구금해 놓고 이 동안에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을 만들어 국가보안법을 소급적용했다. 황당한 짓을 벌인 것이다. 기소된 지 3개월 만에 사형 판결이 났고 50일 뒤 ‘박정희의 재가’로 형이 집행됐다.

 

사법살인이었다. 박정희 군부가 생사람을 잡은 것이다. 미국이 남로당 군사총책 경력 보유자인 박정희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잡으려면 ‘희생제물’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박정희는 여순 사건 당시 남로당 조직원 정보를 폭로해 목숨을 보전했던 예전 그 솜씨를 발휘한다.

 

▲<민족일보> 1961.4.19일자 (출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용공분자 색출이라는 미명하에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인사들을 보란 듯이 제거하는 것으로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호도하고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목적에 부합되는 대상 중 하나가 고 조용수와 <민족일보>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흐루시초프의 꼭두각시” 이 사람이 간첩?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박정희를 진보적 성향의 인물로 판단했던 것 같다. 쿠데타를 통해 진보정권이 들어서면 <민족일보>도 잘 될 거라는 기대도 가졌으니 말이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가 남로당 구미군책으로 경찰에 의해 사살됐고, 박상희의 딸과 결혼한 ‘쿠데타의 오른팔 김종필’ 또한 개혁적 성향의 군인이라는 소문이 그를 안심하게 만든 것일까? 그는 먹잇감인 된 줄도 모른 채 5.16 다음 날 쿠데타 세력에 우호적인 사설을 쓰기도 했다.

 

“우리는 거듭 내치 외교에 획기적인 일신이 있고 민주적인 조명이 있기를 강조함으로써 이 획기적인 군사위원회의 혁명과업 수행에 더 많은 영광이 있기를 바라는 바다.”(민족일보 사설/1961.5.17)

 

체포당하던 날 아침 그는 쿠데타 군부가 조총련 간첩으로 지목한 일본의 이영근과 통화를 한다. 둘은 ‘5.16거사가 <민족일보>와는 아무 상관없는 쿠데타’라고 결론을 내리고 크게 염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고 조용수 사장의 친동생인 조용준 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쿠데타의 대상이 민족일보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잠시 공포 분위기에서 겁을 주다가 풀어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형님 본인도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영영 풀려나지 못했다. 그가 쿠데타 세력의 덫에 걸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정황과 증거는 많다. 북한정권을 ‘북괴’로, 김일성을 ‘흐루시초프의 꼭두각시’라고 부른 사람을 ‘북한을 찬양 고무한 자’로 낙인 찍은 건 집권에 혈안이 돼 있던 쿠데타 세력이었다.

 

<민족일보>의 청산을 빌미삼아 중앙정보부가 고인의 가족 재산까지 강제로 몰수하기도 했다. 1966년 고인의 부친이 당시 김종필 공화당의장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유족 측이 2대의 승용차 등 압수물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시간만 끌던 중정이 나중에는 재산 모두를 처분했다고 통보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동료간첩'은 민정당 의원...훈장까지, 혐의 조작의 증거

 

고 조용수와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민족일보> 간부들은 감형이 돼 풀려나 공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송지영은 1969년에 출소해 민정당 국회의원, KBS 이사장, 광복회 부회장 등을 지냈고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안신규는 민족통일촉진중앙회 최고의원을 지냈다. ‘간첩과 내통한 조용수 일당’의 이력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혐의가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 증거다.

 

조총련 자금을 끌어댄 간첩으로 몰렸던 이영근은 이후 박정희와 수차례 만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지속하다가 1990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재일교포에게 반공의식을 고취시킨 공로를 기리겠다’며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간첩’에게 훈장이라니. 이는 곧 이영근의 간첩혐의 역시 조작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영근의 간첩혐의가 조작된 거라면 고 조용수는 당연히 무죄다.

 

2006년 진실화해위는 “군사혁명재판소가 조 사장에게 사회대중당 간부로서 북한에 고무 동조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지만, 조 사장은 사회대중당의 간부가 아니고 사설을 통해 북한을 고무 동조하지 않았다”며 밝혔고, 동생 조용준 씨는 이를 근거로 재심을 청구했다.

 

2008년 서울중앙지법은 고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국가가 99억원을 유가족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누명은 벗었지만 32세 청년의 생떼 같은 목숨을 앗아간 저들의 만행과, 그동안 겪었을 유가족들의 고통은 영원히 기억돼야 한다.

 

 

당선인의 5년, 속죄제의 제주 같은 자세이여야

 

가슴이 먹먹해 ‘박근혜 당선인’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고 조용수 사장 유가족 같이 오랜 세월 고통 속에 살아온 이들도 많다. 또 그 사건들을 기억하는 국민들 가슴에도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있다.

 

그러니 당선인이 잘 해야 한다. 먼저 피울음 나는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한다. 겸손 없이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진정 화해하려면 아픈 역사와 눈물 앞에 몸을 낮춰야 하고,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국민들의 가슴 속 응어리와도 소통해야 한다.

 

임기 5년. 당선인은 단지 그냥 대통령이 아니라 '특별한' 대통령이어야 한다. ‘박정희 18년’의 과오와 상처, 눈물과 원한을 씻어내는 속죄제를 집전하는 제주의 자세로 직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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