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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순의 종통 종맥 원문보기 글쓴이: ◐誠敬信◑
제 1 장
1. 구천상제님(九天上帝)께서 도력(道曆) 기원전(紀元前) 삼십팔년(年) 신미년(辛未年) 구월(月)십구일(日) 양력(陽曆) 십일월(月) 일일(日) 전라도(全羅道)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객망리(客望里) 현(現) 전라북도(全羅北道)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에 강세(降世)하시니 성(姓)은 강(姜) 본관(本貫)은 진주(晉州) 휘(諱)는 일순(一淳) 자(字)는 사옥(士玉) 호(號)는 증산(甑山)이시니라.
2. 상제(上帝)의 신격위(神格位)는 무극주(无極主) 구천응원(九天應元) 뇌성보화(雷聲普化) 천존상제(天尊上帝)이시며 인격위(人格位)는 강성증산상제(姜聖甑山上帝)이시니 삼계(三界) 최고위(最高位)이신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 강성상제(九天應元 雷聲普化天尊 姜聖上帝)시니라.
3. 객망리(客望里)는 상제(上帝) 강세(降世) 전(前)에는 선망리(仙望里)였으나 강세(降世) 후(後)에는 객망리(客望里)로 고쳐지고 화천(化天) 후(後)에는 신기리(新基里) 또는 신월리(新月里)로 변경(變更)되니라.
고부(古阜)에는 예로부터 전(傳)하여 오는 삼신산(三神山)이 있으니 이는 방장(方丈),영주(瀛州),봉래(蓬萊)의 삼산(山)이며 그 주산(主山)인 방장산(方丈山)의 산맥(山脈)이 동북(東北)으로 망제봉(望帝峰)을 이루고 다시 그 연맥(連脈)이 객망리(客望里) 뒤에서 시루(憎)산을 이루니라.
객망리(客望里) 근처(近處)에 연촌(硯村),강동(講洞),필동(筆洞),배장곡(拜將谷)과 부정(扶鼎),팔선(八仙),용곡(龍谷),용두(龍頭) 등(等)의 마을이 있느니라.
4. 상제(上帝)께서 현화인신(現化人身)하신 부주(父主)의 휘(諱)는 문회(文會) 자(字)는 흥주(興周) 도호(道號)는 진당대부(震堂大父)시니 용모(容貌)는 호상(虎相)이시며 음성(音聲)은 웅대(雄大)하시고 기골(氣骨)이 강장(强壯)하시며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셔서 그 위엄(威嚴)이 인근(隣近)에 떨쳐 당시(當時)에 성행(盛行)하던 적도(賊徒)들도 두려워 침범(侵犯)하지 못하니라.
5. 모주(母主)께서는 안동(安東) 권씨(權氏)시고 휘(諱)는 양덕(良德) 도호(道號)는 선정대모(宣政大母)시니 용모(容貌)와 성품(性品)이 단아(端雅) 온순(溫順)하셨으며 친가(親家)는 현(現)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팔선리(八仙里) 서산(瑞山)이니라.
6. 상제인신(上帝人身)의 시조(始祖)는 중국(中國)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라 하며 중시조(中始祖)는 고구려(高句麗)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휘(諱) 이식(以式)이시고 이십이대조(代祖) 휘(諱) 계용(啓庸)은 고려(高麗) 국자박사(國子博士)로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작(封爵)되셨으며 십육대조(代祖) 휘(諱) 회중(淮中) 호(號) 통계(通溪)는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병판(兵判)으로 징초(徵招)하였으나 불응(不應)하시고 십사대조(代祖) 휘(諱) 이온(利溫)은 도승지(都承旨)로서 연산조(燕山朝)의 혹화(酷禍)를 입으셨다가 중종(中宗) 반정시(反正時)에 진천군(晉川君)에 봉작(封爵)되시고 십이대조(代祖) 휘(諱) 세의(世義)는 충순위선략장군(忠順衛宣略將軍) 으로 고부(古阜)에 낙향(落鄕)하셔서 후손(後孫)이 한 곳에 사니라. 십일대조(代祖) 휘(諱) 우(雨) 십대조(代祖) 휘(諱) 윤상(允常), 구대조(代祖) 휘(諱) 영(穎)은 삼대(代)를 연(連)하여 사용(司勇)이셨으며 고조(高祖) 휘(諱) 위거(渭擧), 증조(曾祖) 휘(諱) 석장(錫章), 조부(祖父) 휘(諱) 한중(漢重)은 모두 선비로서 고부(古阜)에서 농업(農業)을 경영(經營)하셨으며 조모(祖母)는 의성(義城) 김씨(金氏)시니 상제(上帝) 인신(人身)의 세계(世系)는 십삼대조(代祖) 좌랑공(左郞公) 휘(諱) 부(父)의 종손(宗孫)이 시니라.
7. 선정대모(宣政大母)께서 서산리(西山里) 친가(親家)에 가 계실때에 하루는 하늘이 남북(南北)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서 몸을 덮고 천지(天地)가 광명(光明)하여지는 꿈을 꾸셨더니 이로부터 태기(胎氣)가 있으셔서 열석달만에 상제(上帝)를 낳으시니라.
8. 이때 대부(大父)께서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보시니 두 선녀(仙女)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산모(産母)를 간호(看護)하였으며 이상(異常)한 향기(香氣)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서광(瑞光)이 하늘에 뻗쳐 서 칠일간(日間)을 계속(繼續)하니라.
9. 상제(上帝)께서 차츰 자라시매 성품(性品)이 후유(厚裕)하시며 지혜가 총명(聰明)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경애(敬愛)를 받으시니라.
더욱 성장(成長)하시매 옥안(玉顔)이 원만(圓滿),준수(俊秀)하셔서 금산사(金山寺) 미륵불(彌勒佛)과 흡사(恰似)하시며 양미간(兩眉間)에 불표(佛表)가 있으시고 ★하순(下순)속에는 붉은 점이 있으시며 좌수장(左手掌)에는 임자문(壬字紋) 우수장(宇手掌)에는 무자문(戊字紋)이 있으시니라.
10. 유시(幼詩)부터 호생(好生)의 덕(德)이 많으셔서 나무심기를 즐기시고 유약(柔弱)한 초목(草木)이나 미세(微細)한 곤충(昆蟲)이라도 해(害)치지 아니하시며 위기(危機)에 빠진 생물(生物)이 있으면 반드시 구(救)하시니라.
11. 정축년(丁丑年)에 농악(農樂)을 보시고 흔감(欣感)하시더니 성장(成長)하신 후(後)에도 다른 구경(求景)은 아니하셨으나 농악(農樂)은 자주 구경(求景)하시니라.
12. 이 해에 대부(大父)께서 훈장(訓長)을 구(求)하셔서 상제(上帝)께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게 하셨는데 하늘 천자(天字)와 따지자(地字)를 가르칠 때에는 따라 읽으셨으나 검을 현자(玄字)와 누르 황자(黃字)는 따라 읽지 아니하시므로 훈장(訓長)이 만단개유(萬端改諭)하여도 종내(終乃) 읽지 아니하셔서 할 수 없이 그만 두니라.
대부(大父)께서 상제(上帝)께 그 연고(緣故)를 물으시니 말씀하시기를 『하늘 천자(天字)에 하늘의 이치(理致)와 따 지자(地字)에 땅의 이치(理致)를 알았사오니 더 배울 것이 없음이옵 니다. 타인(他人)의 마음을 알지 못한 훈장(訓長)이 가르치는 책임(責任)을 감당(堪當)하지 못하오리니 돌려보내사이다.』 하시므로 부득이(不得已) 그 훈장(訓長)을 보내시니라.
13. 기묘년(己卯年)에 대부(大父)께 청(請)하여 후원(後園)에 별당(別堂)을 짓고 홀로 거처(居處)하시며 외인(外人)의 출입(出入)을 금(禁)하시고 간일(間日)하여 까투리 한 마리와 비단(緋緞) 이척반씩(尺半式)을 구(求)하여 들이시더니 두 달 후(後)에 문득 어디로 나가셨는데 방(房)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라.
그 후(後) 집으로 돌아오셔서 자의(自意)로 외접(外接)에 다니시며 글을 배우시니라.
이때 유가(儒家)의 경서(經書)와 불가서(佛家書) 또는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涉獵)하시니라.
14. 서당(書堂)에서 한문(漢文)을 배우실 때 훈장(訓長)으로부터 한 번(番) 들으시면 고대 깨달으 시고 학우(學友)들과 더불어 글을 겨룰 때는 항상(恒常) 장원(壯元)을 하시니라.
하루는 훈장(訓長)이 다른 학부형(學父兄)에게 미움을 받을까 염려(念慮)하여 문장(文章)이 다음가는 학동(學童)에게 장원(壯元)을 주려는 뜻으로 글을 꼲았으나 또 상제(上帝)께서 장원(壯元)하시니 이는 훈장(訓長)의 내심(內心)을 미리 아시고 문체(文體)와 글씨를 바꾸어 분간(分揀)하지 못하게 하신 까닭이니라.
범사(凡事)에 이와 같이 혜명(慧明)하시므로 사람마다 신기(神奇)하게 여기니라.
15. 대부(大父)께서 정읍(井邑) 읍내(邑內)의 박부자(朴富者)에게 수백냥(數百兩) 빚이 있으셔서 독촉(督促)이 심(甚)하므로 걱정으로 지내시는데 상제(上帝)께서 대부(大父)께 청(請)하셔서 우선(于先) 오십냥(兩)을 준비(準備)하여 박부자(朴富者)에게 가서 돈을 주신 다음 그 사숙(私塾)에서 학동(學童)들과 함께 노시니라.
마침 훈장(訓長)이 운자(韻字)를 불러 학동(學童)들로 하여금 시(詩)를 짓게하니 상제(上帝)께서도 함께 짓기를 청(請)하셔서 낙운성시(落韻成詩)하시니 시격(詩格)이 절묘(絶妙)하므로 훈장(訓長)과 학동(學童)들은 물론(勿論) 박부자(朴富者)도 매우 기이(奇異)히 여기고 집에 머무르며 자질(子姪)들과 함께 글읽기를 권(勸)하니라.
상제(上帝)께서 그 권(勸)에 따라 수일간(數日間) 머무르시면서 빚을 걱정하시니 박부자(朴富者)가 언행(言行)의 일출(逸出)하심에 흠복(欽服)하여 드디어 빚을 탕감(蕩減)하고 문건(文件)을 불사르니라.
16. 하루는 대부(大父)께서 벼를 말리시는데 닭과 새떼가 몰려들므로 심(甚)하게 쫓으시니 상제(上帝)께서 보시고 만류(挽留)하시기를 『새짐승이 한 알씩(式) 쪼아 먹는 것도 살려고 함이오니 너무 심(甚)히 마옵소서. 금수(禽獸)를 애련(愛憐)하시는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곧 사람을 구(救)하는 마음이 아니오리까?』하시니라.
대부(大父)께서 듣지 않으시고 굳이 쫓으시더니 뜻밖에 백일(白日)에 뇌우(雷雨)가 대치(大致)하여 말리던 벼가 무수(無數)히 물에 표류(漂流)하니라.
17. 계미년(癸未年)에 대모(大母)께서 친(親)히 짜신 저포(紵布) 육십척(尺)을 상제(上帝)께서 마을사람 유덕안(兪德安)에게 들리시고 정읍(井邑) 장(場)에 팔러 가셨는데 덕안(德安)은 일이 있어 다른 곳에 가고 상제(上帝)께서 잠시(暫時) 저포(紵布)를 놓고 옆을 보시는 사이 잃으시니라. 덕안(德安)이 이 말을 듣고 찾았으나 날이 저물고 사람이 많아 찾을 길이 없어 귀가(歸家) 하시기를 청(請)하여도 듣지 아니하시고 즉시(卽時) 고창(高敞)으로 가시며 말씀하시기를 『내일(來日) 귀가(歸家)하리라.』하시므로 덕안(德安)이 할 수 없이 혼자 돌아오니라. 이튿날 상제(上帝)께서 저포(紵布)값을 가지고 돌아오셔서 대모(大母)께 올리시므로 온 집안 이 이상(異常)히 여겨 물으니『어머니께서 몸소 근고(根痼)하셔서 짜신 직물(織物)을 잃었으므로 얼마나 애석(哀惜)하실까 생각하고 오늘이 고창(高敞) 장(場)이라 나올듯 하여 바로 갔더니 다행(多幸)히 찾아서 팔았나이다.』하시니라.
18. 상제(上帝)께서는 본댁(本宅)이 가난하셔서 을유년(乙酉年)에 학업(學業)을 중지(中止)하시고 사방(四方)으로 주유(周遊)하시다가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笠岩面) 거사막(巨沙幕)에서 맥수기(麥收期)를 당(當)하여 남의 집 보리 거둠도 하시고 장성군(長城郡) 백양사(百羊寺) 부근(附近)의 부여곡(扶餘谷)에서 벌목(伐木)도 하시니라.
19. 여러 서당(書堂)으로 자주 다니시며 글을 읽으시는데 학문(學問)이 수일(秀逸)하시므로 혹(或) 누가 상제(上帝)께 글 쓸 일을 부탁(付託)드리면 써 주시되 반드시 끝에 한두 자(字) 쓸 만한 여백(餘白)을 남기시니라.
20. 정해년(丁亥年) 어느날 외가(外家)에 가셨을 때에 어떤 주정(酒酊)군이 상제(上帝)께 무고(無辜)히 패욕(悖辱)하였으나 아무 대항(對抗)도 아니하시더니 갑작이 어디서 큰 돌절구통이 주정(酒酊)군의 머리 위에 떨어져 덮어씌워 주정(酒酊)군이 그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니 그 사이에 다른 곳으로 가시니라.
21. 젊으셨을 때에는 기력(氣力)이 강장(剛壯)하셔서 힘겨루기 같은 놀이를 좋아하시더니 숙항(叔行)되는 되는 강성회(姜聖會)도 또한 그러하여 가끔 힘을 겨루시니라. 한 번(番)은 맷돌 밑짝의 중(中)쇠를 이로 물어 올리셨으며 어느 때에는 마당에 서서 발로 처마끝을 차기도 하시고 또 한 팔은 뒤로 땅을 짚으시고 발꿈치를 땅에 붙이신 채 장정 열 사람을 시켜 힘껏 허리를 누르게 하셨으나 요동(搖動)하지 않으시니라.
어느 때에는 여러 사람과 힘겨루기를 하시는데 돌절구를 머리에 쓰시고 상모(象毛) 돌리듯 하시니라.
22. 하루는 청도(淸道) 고개에서 명리(命理)를 판단(判斷)하시니 그 신통(神通)하심을 사람마다 감탄(感嘆)하니라. 어떤 사람이 운명(運命)을 여쭈자 상제(上帝)께서『복채(卜債)를 내어놓으라』하시니 그 사람 이 돈이 있으면서도 없다고 속이자『그대가 돈을 아끼는 거나 내가 재조(才操)를 아끼는 것은 마찬가지니라』하시며『사람이 복(福)을 받으려면 먼저 바른 말을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느니라.』하시니라.
23. 갑오년(甲午年)에 금구군(金溝郡) 초처면(草處面) 내주동(內住洞)의 처남(妻男) 정남기(鄭南基)의 집에 서당(書堂)을 차리시고 아우 영학(永學)과 이웃 학도(學徒)들에게 글을 가르치시니 그 교법(敎法)이 탁월(卓越)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칭송(稱頌)하니라.
24. 이 해에 고부인(古阜人) 전봉준(全琫準)이 동학당(東學黨)을 모아 의병(義兵)을 일으켜 시정(時政)치 에 반항(反抗)하니 세상(世上)이 흉동(洶動)하니라.
이 때에 금구인(금구인(金溝人)) 김형렬(金亨烈)이 상제(上帝)의 성예(聲譽)를 듣고 배알(拜謁)한 후(後) 당시(當時)의 소란(騷亂)을 피(避)하여 한적(閑寂)한 곳에 가서 함께 공부(工夫)하기를 청(請)하므로 서당(書堂)을 폐지(廢止)하시고 전주군(全州郡) 우림면(雨林面) 동곡(銅谷)의 구성산(九星山) 학선암(學仙庵)으로 가셨으나 그곳도 번잡(煩雜)하여 다른 곳으로 떠나시니라.
25. 오월(月) 어느 날 밤 몽중(夢中)에 한 선인(仙人)이 나타나서 『저는 후천진인(後天眞人)으로서 천지현기(天地玄機)와 세계대세(世界大勢)를 은밀(隱密)히 의논(議論)하고자 하옵는 바 먼저 무극(无極)의 체(體)를 설(說)하시면 후(後)에 태극(太極)의 용(用)으로 화(化)하리이다.』하니라.
26. 칠월(月) 어느 날 밤에 어두운 가운데서 원신(元神)을 묵운(黙運)하시더니 문득『월흑안비고 (月黑雁飛高) 선우야둔도(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欲將輕騎逐) 대설만궁도 (大雪滿弓刀)』라는 고시(古詩)가 불빛처럼 환하게 보이시니라.
이로 인(因)하여 동학군(東學軍)이 강설기(降雪期)에 낭패(狼狽)할 것을 사람들에게 예시(豫示)하시며 동학군(東學軍)에 가담(加擔)하지 말라고 효유(曉諭)하시더니 과연(果然) 이해 겨울에 동학군(東學軍)이 관군(官軍)에게 패멸(敗滅)하고 상제(上帝)의 말씀을 순응(順應)한 자는 화(禍)를 면(免)하니라.
27. 십월(月)에 태인(太仁) 동골의 동학(東學) 접주(接主) 안윤거(安允擧)를 방문(訪問)하시니 마침 닥뱀이 안필성(安弼成)이 한 마을의 동학신도(東學信徒) 최두연(崔斗淵)과 함께 와서 윤거(允擧)의 도담(道談)을 듣고 있으니라.
상제(上帝)께서 윤거(允擧)와 성명(姓名)을 통(通)하시고 말씀하시기를『동학군(東學軍)이 황토현(黃土峴)에서는 승리(勝利)하였으나 필경(畢竟) 패망(敗亡)을 미면(未免)하리니 이곳 동학군(東學軍)의 발원지(發源地)에 효유(曉諭) 하러 왔노라.
그대가 접주(接主)라 하니 삼가 전투(戰鬪)에 참가(參加)하지 않으므로써 무고(無辜)한 생민(生民)을 몰아 전화(戰禍)를 입게 하지 말라.
섣달이 되면 정녕(叮嚀)코 전패(全敗)하리라.』하시고 돌아오시니라.
윤거(允擧)는 이 말씀을 믿어 접주(接主)를 사퇴(辭退)하고 전란(戰亂)에 참가(參加)하지 않았으나 두연(斗淵)은 믿지 않고 접주겸(接主兼) 명사장(明査長)이 되어 군마(軍馬)를 인솔(引率)하고 출전(出戰)하니라.
28. 필성(弼成)은『남원(南原)으로 와서 종군(從軍)하라.』는 두연(斗淵)의 명령(命令)을 받고 이십일(日) 남원(南原)으로 가던 중(中) 전주(全州) 구이면(九耳面) 정자리(亭子里)에 이르니 상제(上帝)께서 길 가에 계시다가 보시고 말씀하시기를『그대가 올 줄을 알고 이곳에 기다렸으니 함께 가자.』 하시며 필성을 데리시고 임실(任實) 마군단의 주막(酒幕)에 이르셔서『날씨가 차니 여기서 기다리면 남원(南原)에서 만날 사람을 절로 만나게 되리라.』하시니라. 필성(弼成)이『노자(路資)가 부족(不足)하오니 두연(斗淵)을 만나야 하겠나이다.』하고 아뢰니『숙식(宿食) 걱정은 말라.』하시니라.
두어 시간(時間)이 지난 후(後)에 방포성(放砲聲)이 나더니 두연(斗淵)이 많은 군마(軍馬)를 거느리고 지나가며『남원(南原)으로 가지 말고 전주(全州)로 따라오라.』하니라.
상제(上帝)께서 필성(弼成)에게『군마(軍馬)의 뒤를 따라감이 불가(不可)하니 떨어져 천천히 가자.』 하시고 전주(全州) 수통목에 이르셔서『오늘은 전주(全州)에서 소란(騷亂)이 일어 살상(殺傷)이 있으리니 여기서 쉬고 내일(來日) 감이 옳으리라.』하시며 함께 수통목에서 쉬시니 라.
29. 이튿날 필성(弼成)과 함께 전주(全州)에 이르셔서 조용한 곳에 사관(舍舘)을 곳을 정(定)하시고 저녁에 필성(弼成)에게 말씀하시기를 『거리에 나가면 볼 것이 있으리라.』하시며 함께 한 곳에 이르시니 세 사람의 머리가 길바닥에 버려져 있으리라.
가르키시며 『저것을 보라. 이렇게 험난(險難)한 때에 어찌 경거망동(輕擧妄動)하리요.』하셨으나 필성(弼成)은 듣지 않고 이곳에서 상제(上帝)를 배별(拜別)하니라.
30. 그믐께 동학(東學)의 대군(大軍)이 전주(全州)를 떠나 경성(京城)으로 향할 때 필성(弼成)이 종군(從軍)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니 상제(上帝)께서 또 기다리셨다가 필성(弼成)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네가 이제 종군(從軍)하는 이 길이 크게 불리(不利)하니 각별(恪別)히 조심(操心)하라.』하셨으나 필성(弼成)은 상제(上帝)를 다시 배별(拜別)하고 종군(從軍)하니라. 진잠(鎭岑)을 지나 유성장(儒城場)터에서 쉬고 다음날 새벽에 청주병영(凊州兵營)을 진공(進攻)할 때 삼십리(里) 가량(假量) 못 미친 곳에 상제(上帝)께서 또 나타나셔서 필성(弼成)에게『너희 군중(軍中)에 한 중이 있느냐?』하시므로『있나이다.』하고 아뢰니『너는 이 길을 따르지 말라. 저 자(者)들이 요승(妖僧)의 말을 믿다가 멸패(滅敗)를 당(當)하리라.』하시니라 필성(弼成)이 여쭈기를 『이런 중대(重大)한 거사(擧事)를 어찌 불길(不吉)하게 말씀하시나이까?』하니『너는 어찌 나의 말을 믿지 않느냐? 내가 저들을 미워함이 아니라 저들의 불리함을 알고 한 사람이라도 화(禍)를 면(免)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시니라.
다시 여쭈기를『그러면 선생(先生)님께서는 무슨 일로 험난(險難)한 길을 이곳까지 오셨나이까?』하니『나는 동학군(東學軍)에 관여(關與)함이 아니라 너희들을 구(救)하러 옴이니라.』하 시니라.
31. 이때 형렬(亨烈)이 상제(上帝)께 인사(人事)를 드리니 형렬(亨烈)에게도 종군(從軍)하지 말라고 타이르시니라. 필성(弼成)과 형렬(亨烈)은 상제(上帝)의 말씀을 듣지 않고 종군(從軍)하여 청주병영(凊州兵營) 앞의 산(山)골에 이르니 좌우(左右)에서 복병(伏兵)이 일어나 포화(砲火)를 퍼부어 동학군(東學軍)의 죽는 자(者)가 수(數)를 헤아릴 수 없으니라.
필성(弼成)과 형렬(亨烈)이 황겁(惶怯)하여 송림(松林)속으로 도망(逃亡)가니 상제(上帝)께서 그곳에 계시다가『너희들은 잘 도망(逃亡)하여 왔도다. 이곳은 안전(安全)하니 안심(安心)하라.』하시니 형렬(亨烈)이 비로소 상제(上帝)의 지감(知鑑)에 감복(感服)하니라.
상제(上帝)께서 두 사람이 종일(終日) 먹지 못하여 허기(虛氣)를 이기지 못함을 보시고 돈을 내어주시며『저곳에 가면 떡집이 있으리니 주인(主人)이 없을지라도 떡값을 그릇에 넣어두고 가져오라.』하시므로 필성(弼成)이 명(命)하신대로 하니 상제(上帝)께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 먹이시니라.
32. 상제(上帝)께서 두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동학군(東學軍)이 양구(良久)에 쫓겨오리니 우리가 먼저 감이 옳으리라.』하시며 두 사람을 데리시고 진잠(鎭岑)에 이르셔서『동학군(東學軍)이 이곳에서 또 많이 죽으리라.』하시니라. 두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심(甚)히 불쾌(不快)하게 생각하므로 『저희들을 미워함이 아니라 사태(事態)의 기미(機微)를 말함이니 비록 듣기 싫을지라도 불쾌(不快)하게 여기지 말라.』하시고 산중(山中) 유밀(幽密)한 곳에서 쉬시더니 잠시(暫時) 후(後)에 총성(銃聲)이 일어나며 격전(激戰) 끝에 동학군(東學軍)이 많이 사상(死傷)하니라.
33. 이곳을 떠나 산(山)길로 드셨는데 목탁(木鐸)소리가 들리므로 찾아가시니 곧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니라. 상제(上帝)께서 말씀하시기를『해는 아직 이르나 더 가면 해(害)를 입으리니 이곳에서 자고 감이 옳으리라.』하시고 머무르시니라.
이윽고 사승(寺僧)이 와서 동학군(東學軍)이 노성(魯城)에 유진(留陣)하여 도망(逃亡)하는 군사(軍士)를 붙잡는다 하므로 필성(弼成)과 형렬(亨烈)이 크게 근심하니 『이곳에서 쉬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화(禍)를 피(避)하게 함이니 명조출정(明朝出程)하면 사고가 없으리라.』하시니라.
34. 익조(翌朝)에 갑사(甲寺)를 떠나시며 말씀하시기를『그대들은 이로부터 큰 화(禍)가 없으리니 각기(各其) 갈려 가도 되리라.』 하셨으나 두 사람은 두려워하여 상제(上帝)께 수행(隨行)하기를 원(願)하므로 하락(下諾)하시니라.
여산근처(礪山近處)에 이르셔서『읍내(邑內)를 지나면 옷을 빼앗기리라.』하시고 사잇길로 드셔서 고산(高山) 인내장터로 향(向)하시니라.
이때 여산읍(礪山邑)으로 지나는 동학군(東學軍)은 모두 읍내(邑內)에서 옷을 빼앗기고 벗은 몸으로 흩어져 가게되니 이는 전번(前番)에 동학군(東學軍)이 북상(北上)할 때에 읍민(邑民)의 옷을 빼앗은 보복(報復)이니라.
35. 전주(全州)에 이르셔서 두 사람을 각기(各其) 돌려보내실 때 노비(路費)가 없음을 걱정 하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곳에 있으니 염려(念慮)말고 돌아가라.』 하시므로 이에 상제(上帝)께 배별(拜別)하고 형렬(亨烈)은 동곡(銅谷)으로 필성(弼成)은 닥뱀이로 각기(各其) 돌아가니 라. 이 후(後)에 동학(東學) 전군(全軍)이 도망(逃亡)하여 와서 십이월(月) 십삼일(日)은 원평(院坪)에서 십오일(日)은 태인(太仁)에서 연전연패(連戰連敗)하여 퇴망(退亡)하니라.
36. 을미년(乙未年) 봄에 고부지방(古阜地方) 유생(儒生)들이 평란(平亂)됨을 축하(祝賀)하여 두승산(斗升山)에서 시회(詩會)를 여니 상제(上帝)께서도 임석(臨席)하셨더니 한 노인(老人)이 조용한 곳으로 모셔서 작은 책(冊) 한권(卷)을 올리므로 상제(上帝)께서 받아 읽으시니라.
37. 하루는 전주(全州) 소양면(所陽面) 송광사(松廣寺)에 가셔서 여러날 유련(留連)하시더니 어떤 중이 홀대(忽待)하므로 상제(上帝)께서 진노(震怒)하셔서 꾸짖으시기를『사망(邪妄)한 무리가 산(山)속에 불법(不法)을 빙자(憑藉)하고 백악(百惡)을 자행(恣行)하여 세간(世間)에 해독(害毒)을 끼치니 이 소굴(巢窟)을 뜯어 없애리라.』 하시고 법당(法堂) 기둥을 손으로 잡아 당기시니 기둥이 한자나 물러나니라. 사중(寺中)이 대경실색(大驚失色)하고 몰려와서 고두사죄(叩頭謝罪)하므로 노(努)여움을 그치시고 그대로 두셨더니 그 후(後)에 법당(法堂)을 여러 번(番) 수리(修理)하여도 물러난 기둥은 원상(原狀)대로 되지 아니 하니라.
38. 전주(全州)에 가셔서 백남신(白南信) 아우의 소실(小室)인 기녀(妓女)의 친가(親家)에 사관(舍舘)을 정(定)하시고 오래 머무르시더니 그 기녀(妓女)가 상제(上帝)의 준일(俊逸)하신 의표(儀表)를 흠모(欽慕)하여 하룻밤은 침소(寢所)로 들어오므로 너그러이 꾸짖어 보내시니라. 그 후(後)에도 누차(屢次) 찾아옴을 더욱 준열(峻烈)히 개유(開諭)하여 돌려보내시니라.
39. 정유년(丁酉年) 초(初)에 다시 남기(南基)의 집에 서당(書堂)을 차리시고 아우 영학(永學)과 형렬(亨烈)의 아들 찬문(贊文)과 이웃 학도(學徒)들을 가르치시니라.
이때 다시 유불선(儒佛仙), 음양(陰陽), 참위(讖緯)의 전적(典籍)을 섭렵(涉獵)하시고 말씀하시기를『이 또한 광구천하(匡救天下)에 도움이 되리로다.』하시니라.
40. 갑오란(甲午亂) 후(後)에 국정(國情)은 더욱 부패(腐敗)하고 세속(世俗)은 날로 악화(惡化)하여 관헌(官憲)은 포학(暴虐)과 토색(討索)을 일삼고 선비는 허례(虛禮)만 숭상(崇尙)하며 불교(佛敎)는 무민혹세(誣民惑世)만 힘쓰고 동학(東學)은 혁명(革命)실패(失敗) 후(後)에 기세(氣勢)가 꺾여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서교(西敎)는 세력(勢力) 신장(伸長)에 노력(努力)하니 민중(民衆)은 도탄(塗炭)에 빠져 안도(安堵)하지 못하고 사위(四圍)의 현혹(眩惑)에 의지(依支)할 곳이 없이 위구(危懼)와 불안(不安)에 동요(動搖)하므로 상제(上帝)께서는 개연(慨然)히 광구천하(匡救天下)의 뜻으로 주유(周遊)의 길을 떠나시니라.
41. 충청도(忠凊道) 연산(連山)에 이르셔서 역학자(易學者) 김일부(金一夫)에게 들리시니 일부(一夫)는 그 전야(前夜)에 꿈에 하늘로부터 사자(使者)가 내려와서 옥경(玉京)에 올라오라는 상제(上帝)의 명(命)을 전(傳)하므로 사자(使者)를 따라 옥경(玉京)의 요운전(曜雲殿)이라는 장려(壯麗)한 금궐(金闕)에 가서 상제(上帝)를 알현(謁見)한 일이 있었 는데 이제 상제(上帝)를 뵈니 그 용자(容姿)가 꿈에 옥경(玉京)에서 뵈었던 상제(上帝)와 같으시므로 매우 신이(神異)하게 여기며 공례(恭禮)로 맞아 요운(曜雲)의 호(號)를 드리고 흠앙(欽仰)하니라.
42. 여기서 며칠을 머무르신 후(後)에 다시 길을 떠나셨는데 노자(路資)로 인(因)하여 대통교(大通橋)의 한 서당(書堂)에서 명리(命理)를 판단(判斷)하시니 소문(所聞)이 공주(公州) 부중(府中)에 훤전(喧傳)되어 명(命)을 앙문(仰問)하는 사람이 운집(雲集)하여 들어 신통(神通)하신 판단(判斷)에 경복(敬服)하니라.
또 이 곳 사람들은 팔월(月) 가절(佳節)을 당(當)하여 소를 잡아 상제(上帝)께 헌공(獻供)하니라.
43. 다시 각지(各地)로 주유(周遊)하시다가 전주(全州)에 이르시니 부중(府中) 사람들이 신 인(神人)으로 우러러 뵈었는데 어떤 사람이 기녀(妓女) 자매(姉妹)를 자기(自己)의 딸이라 속이 고 명(命)을 물으니라.
상제(上帝)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왜 나를 속이느뇨?』하셨으나 그 사람이 바른대로 고(告)하지 아니하므로『이것은 화류(花柳)의 명(命)이라 이러한 천녀(賤女)를 딸이라 하니 그대가 실(實)로 천인(賤人)이로다.』하시니 그 사람이 탄복(歎服)하고 부끄러워하니라.
44. 이 후(後)로 전라(全羅), 경상(慶尙), 충청(忠凊), 경기(京畿), 강원(江原), 황해(黃海), 평안(平安), 함경(咸鏡) 팔도(道) 각지(各地)를 차례(次例)로 주유(周遊)하시니 박학광람(博學廣覽)하시고 타심통(他心通)이신 상제(上帝)의 혜식(慧識)에 모든 사람이 신인(神人)이시라고 칭송하니라.
45. 삼년을 주유(周遊)하시고 경자년(庚子年)에 북도(北道)로부터 고향(故鄕)에 돌아오셔서 시루산(山)에 조모(祖母) 산소(山所)를 면례(緬禮)하시니 이때 지사(地師) 유서구(柳瑞九)가 복지(卜地)하니라. 상제(上帝)께서 시루산(山) 상봉(上峯)에서 호둔공부(虎遁工夫)를 하시는데 마침 나무하러 온 사람들이 보니 방금(方今) 공부(工夫)하시던 자리에 대호(大虎)가 도사리고 있으므로 기급(氣急)하고 쫓겨와서 대부(大父)께『아드님의 공부(工夫) 자리에 큰 범이 앉아 있더이다.』하고 전(傳)하니라.
대부(大父)께서 당황(唐慌)하여 시루봉(峯)에 올라가 보시니 범은 보이지 않고 상제(上帝)께서는 태연(泰然)히 공부(工夫)하고 계시니라.
고부(古阜) 경무청(警務廳)에서 상제(上帝)께서 요술공부(妖術工夫)를 한다 하여 포교(捕校)들이 잡으러 오면 상제(上帝)께서는 삿갓을 쓰시고 안개를 지으시며 길 곁에 앉아 계셔도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니라.
46. 전주(全州) 이동면(伊東面) 전룡리(田龍里)의 이치안(李治安)이 구혼(求婚) 차(次) 충청도(忠凊道)로 향(向)하다가 주막(酒幕)에서 상제(上帝)를 만나 수인사(修人事)도 없이 하룻밤을 함께 유(留)하고 이날 떠나려 하매 상제(上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구혼(求婚) 차(次)로 길을 떠났으나 반드시 허행(虛行)이 되리니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전일(前日)부터 의혼(議婚)하던 매파(媒婆)가 와서 정혼(定婚)을 구(求)하리라. 만일(萬一) 이를 실기(失機)하면 혼로(婚路)가 막히리니 빨리 돌아가라.』하시니라.
치안(治安)은 상제(上帝)께서 자기(自己)의 사정(事情)을 밝히 아시고 가르치심을 신기(神奇)하게 여겨 비로소 성명(姓名)을 고(告)하고 상제(上帝)의 처소(處所)를 자세(仔細)히 물은 다음 집으로 돌아가니 과연(果然)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라.
47. 얼마 후(後)에 치안(治安)이 상제(上帝)의 신성(神聖)하심을 흠앙(欽仰)하여 자기(自己) 집으로 모셔오니라. 이 때 치안(治安)의 아들 직부(直夫)는 그 마을 이장(里長)으로서 마침 마을 인구(人口)를 긴급(緊急)히 조사(調査) 할 일이 있는데 상제(上帝)께서 영산수법(靈算數法)으로 호수(戶數)와 남녀인구(男女人口)를 일러 주시고 삼일(日)안에 한 사람이 줄것을 말씀하시니라. 직부(直夫)는 믿지 아니하고 온 마을을 돌아 낱낱이 조사(調査)하니 과연(果然) 한 가구(家口) 일인(人)도 틀림이 없었으며 또 삼일(日)만에 한 사람이 사망(死亡)하므로 비로소 상제(上帝)의 신이(神異)하심에 감복(感服)하고 부자(父子)가 함께 상제(上帝)를 숭봉(崇奉)하니라.
48. 신축년(辛丑年) 여름에 본댁(本宅)으로 돌아오셔서 선대(先代)의 공명첩(空名帖)을 불사르시니라. 선경부인(宣敬夫人) 정씨(鄭氏)께서 말씀드리기를『이제는 그만 눌러 앉으셔서 남 과 같이 집에서 재미(재味)있게 살림에 힘을 쓰사이다.』하시니 『그렇게 소인(小人)다운 말이 어디 있느뇨?』하시고 이로부터는 본댁(本宅)에 자주 들리지 아니하시니라.
49. 상제(上帝)께서 이때에 이르셔서 종전(從前)의 경륜(經綸)과 법술(法術)만으로서는 세상(世上)을 광구(匡救)할 수 없고 오직 자유자재(自由自在), 무애무구(無碍無拘)한 권능(權能)으로라야 함을 깨달으시니라. 이에 전주(全州) 모악산(母嶽山)의 대원사(大願寺)에 들어가셔서 주지 박금곡(朴錦谷)에게 명(命)하여 칠성각(七星閣)의 조용한 방(房) 한 간(間)을 치우게 하시고 수도(修道)하시며 출입문(出入門)을 밖으로 잠그게 하시고 문(門)틈 조차 밀봉(密封)하셔서 사람의 출입(出入)을 금(禁)하시니 금곡(錦谷)은 상제(上帝)께서 너무 오래 불음불식(不飮不食)하심이 염려(念慮)되어 초조(焦燥)히 지내니라.
50. 이와 같이 사십구일간(日間)을 두문수도(杜門修道)하시더니 칠월(月) 초(初)오일(日) 자시(子時)에 두우성(斗牛星)이 섬광방전(閃光放電)하고 오룡(龍)이 허풍(虛風)하며 천지(天地)가 뒤눕는 중(中)에서 탐음진치(貪淫瞋癡)의 사마정(魔精)과 제귀악령(諸鬼惡靈)을 극복(克服)하시고 몸소 삼계(三界)의 무극주(无極主)로서 구천상제님(九天上帝)의 당체(當體)이심을 대오(大悟) 자각(自覺)하시니라.
이때 천궤지축(天軌地軸)이 일시(一時)에 진동(震動)하는지라 금곡(錦谷)이 놀라 상제공부실(上帝工夫室)에 올라가 문(門)틈으로 들여다보니 천안(天顔)이 일광(日光)같이 빛나고 실내(室內)가 백주(白晝)처럼 밝으므로 저도 모르게 합장부복(合掌俯伏)하니라.
51. 밖으로 나오신 상제(上帝)께서는 장기간(長期間) 불면불식(不眠不食) 하셨으나 조금도 초췌(憔悴)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옥안(玉顔)은 주옥(珠玉)같이 윤기(潤氣)가 나시고 안광(眼光)은 샛별같이 빛나시니라. 다만 의복(衣服)이 너무 남루(襤褸)하시므로 금곡(錦谷)이 급(急)히 본댁(本宅)으로 사람을 보내어 의복(衣服)을 가져오게 하니 본댁(本宅)의 선경부인(宣敬夫人)은 항상(恒常) 상제(上帝)께서 불고가사(不顧家事)하심을 불만(不滿)히 여기던 중(中)이므로 의복(衣服)을 내어놓으며 불경(不敬)한 말을 하시니라.
금곡(錦谷)이 그 의복(衣服)을 받아 상제(上帝)께 올리니『이 옷에 망령(亡靈)스런 여사가 붙었으니 속(速)히 버리라.』하시며 받지 않으시니라.
금곡(錦谷)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그 사유(事由)를 전(傳)하니 선경부인(宣敬夫人)이 황공(惶恐)하여 참회(懺悔)하고 새로 옷을 보내니 그제야 가납(嘉納)하시니라.
52. 상제(上帝)께서 대각(大覺)하신 후(後)에 금곡(錦谷)이 시좌(侍坐)하여 여쭈기를『선생(先生)님께서 제 일을 한 말씀 하교(下敎)하여 주시기를 원(願)하나이다.』하니 말씀하시기를『그대는 전생(前生)에 일광대사(日光大師)인데 그 후신(後身)으로 대원사(大願寺)에 오게 되었 으니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의 중수(重修)라.
그대의 수명(壽命)이 요(夭)할 수(數)나 내 이제 구십세(歲)가 넘도록 연장(延長)하여 주리라.』 하시고 이 후(後)에는 복서명리(卜筮命理)의 학술을 말씀하지 아니하시니라.
53. 이해 겨울에 비로소 본댁(本宅)에서 삼계공사(三界公事)를 행(行)하시며 창문(窓門)에 는 종이를 바르지 아니하시고 방(房)에 불을 때지 아니하시며 홑옷을 입으시고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시며 칠일간(日間)을 지내시는데 벼 말리는 뜰에 새조차 내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은 외포(畏怖)하여 문(門) 앞으로 지나다니기를 꺼려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