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이유?
명성황후는 1876년 청나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일본과 수교를
맺습니다. 1868년 미국과 수교할 기회가 있었으나 당시는 흥선대원군이
고종대신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기였고 청국의 속국으로 벗어나 조선보다
22년 먼저 개항한 일본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불평등 조약임을
알고도 일본과 수교를 맺습니다. 그 이후 1882년 미국과 독일, 영국
1884년 러시아, 프랑스와 수호조약을 맺게 된면서 조선은 국제 무대에
올라서게 됩니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개방하기도 하면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야욕을 더욱 더 불태우기 위한 하나의 조약에 지나지 않았죠. 일본의
간섭과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이라고 주장하며 야욕을 들어내자 명성황후는
조선이 살길은 이이제이(외세로부터 외세를 물리친다)정책외에는 조선이
외교적으로 살아남기 힘들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본과 청나라의 간섭이 더욱더 심해지며 국내에서 야욕을 들어내자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세계열강들과 조약을 맺으며 조선을
문호를 개방하여 선진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인해 장호원으로 피신갔을 때 청나라의 계략으로
명성황후는 다시 대궐에 환궁하면서 일본과 김옥균의 계략으로 일어난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일본간의 조선을 향한 다툼이 심해지자 명성황후는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미국을 끌어들여 미국의 일부 사람들에게
조선에서 막대한 이익과 궁궐 내에서의 권한도 부여하면서 청, 일본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갑니다.
1894년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협박하고 노골적
으로 명성황후의 권력이 막강해지자 일본은 반협박적으로 명성황후에게
정치에 나서지 말라고 강요를 합니다. 1894년에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서 결국 일본이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일본이 청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요동반도를 차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시 영국과 세계최강을 자부하던 러시아가 제동을 겁니다.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죠...
러시아는 당시 시베리아 철도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에 국운을
걸고 있었지요. 그런데 일본이 급부상하며 요동반도를 차지하여 자신들의
남하정책에 제동을 걸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하라고 협박을 합니다.
명성황후는 이렇게 세계의 정세가 러시아가 최고라고 판단하고 일본을 견
줄 수 있는 파트너로 러시아를 선택하게 됩니다. 1894년 이노우에 가오루에 의해 친일내각을 수립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선정책을 바꾸며 친일파 내각으로 단행한 것을 명성황후는 칙령을 발표하며 당시 세계 최고이던
러시아를 끌어들여 1년 전 이노우에가 단행했던 친일내각을 친미, 친러 등
서구인과 개화파 내각으로 완전히 교체하고 친일내각을 100% 갈아치우며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압박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은 세계 최강인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까지 자신들을 협박하여
결국 요동반도를 내주게 되고 조선에서의 그들의 입지도 거의 백지화 됩니다. 이렇게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인아거일책(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견제함)과 친미 등 세계 강대국들을 모두 총동원하여 일본을 압박하고 급기야 일본이 조선에 발도 못붙일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자 1895년 초부터 명성황후 제거설이 나돌았습니다.
당시 한성신보 사장이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고바야가와 히데오는 훗날 민비시해기(그가 지은 책)란 책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당시 우리로서는 대표적 인물 명성황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밖에는 방책이 없었다. (중략)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명성황후의 가는 자가 없었으니, 명성황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결론은 우리가 명성황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조선에서의 입지는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다."
위의 내용만 봐도 당시 일본이 생각하던 명성황후는 실로 무서운 존재를 넘어서 거의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결국 그들을 명성황후를 새벽 3시쯤 광화문에 도착하여 5시쯤 광화문에 도착하여 6시쯤 명성황후를 건청궁 내에서 찾아내어 앞마당으로 끌어낸 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잔인하게 시해한 뒤 옥호루에 시신을 보관하다 뒷 숲으로 시체에 석유를 뿌려 난자하게 시해한 뒤 능욕도 저지릅니다.
글들은 1896년 초에 히로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풀려납니다. 일본 정부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개입 한것은 만천하에 들어난 사실이니 일본 정부로서는 56명의 시해범을 처벌할 수 없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