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읍 장날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
김낙수(1880.1.19 ~ 1919.6.2)는 울주군 상북면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4월 2일 울산 언양(彦陽)시장에서 만세운동(언양의거)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 운동은 천도교도인 이무종,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최해선, 이규경 등에 의하여 계획 되었는데, 이들은 언양 장날인 4월 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동지규합에 나섰다.
그러나 3월 31일,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일제의 예비검속으로 천도교도 최해규 형제와 곽해진 등이 체포되었으나, 나머지 주동자들은 4월 1일 이규인의 집에서 밤이 새도록 태극기 42매를 제작하면서 계획을 강행하기로 결의 하였다.
특히 4월 1일 인근 양산읍에서 수천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이 계획을 전해 들은 김낙수는 4월 2일 언양읍 남부리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다.

이 때 긴급 출동한 일본경찰이 주동인물 몇 명을 언양주재소로 강제 연행하자, 김낙수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공포를 쏘며 시위대열을 해산시키려는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잔인한 발포로 말미암아 사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대열은 일단 해산 하였다.
그 후,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펼쳤는데, 결국 김낙수도 체포되었으며, 이해 5해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이해 6월 2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출처> 울산보훈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