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등」을 꿈꾸는 사나이. 「제너시스」의 尹洪根(윤홍근·48) 회장이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이다. 제너시스는 BBQ라는 상표로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닭고기 가공업체다. 현재 우리나라 기업 가운데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일류 기업」이라면 三星電子(삼성전자)가 있다. 세계 일류 기업인 三星電子도 아직 세계 1등 기업은 못 된다. 그런데 창업 8년밖에 안 된, 이제 겨우 중소기업의 틀을 갖춘 업체의 사장이 「세계 1등」을 꿈꾸다니. 처음엔 좀 허황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수치가 말해 주는 尹회장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창업 8년 만에 1400여 개 賣場(매장)을 개장, 지금도 300여 명이 점포를 내기 위해 대기 중, 5000만~7000만원을 투자하는 10평 미만의 소점포에서 월 600만~700만원의 수익.
이와 함께 시장 잠재력이 가장 큰 중국에 성공적으로 진출, 이미 사업을 시작했다. 중국 賣場은 2010년까지 1만 개 개점을 목표로 잡고 있다. 중국 진출 첫해인 2003년엔 北京과 上海를 중심으로 100개의 점포를 개설, 18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고, 5년 후인 2007년엔 중국 전역 5000개의 매장에서 9억 달러, 2010년까지는 1만 개의 매장에서 18억 달러까지 매출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성장속도가 맥도널드보다 2배 이상 빨라
BBQ의 중국진출 의의는 큰 자본투자 없이 無形(무형)자산인 브랜드와 기술을 판매하여 로열티를 받는다는 점이다. 중국의 합작기업과 맺은 계약에 따른 러닝 로열티(Running Royaltyㆍ판매액에 따른 로열티) 2~3%와 매출이익을 합산할 때, 예상되는 외화 수입은 2007년 1억1000만 달러, 2010년에는 2억2000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제니시스」 측은 예상하고 있다.
중국뿐 아니다. 미국, 캐나다, 일본, 독일, 스페인, 이집트,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세계 10여 개국으로부터 마스터 프랜차이즈(브랜드와 상품명, 노하우를 제공하고 로열티를 받는 것) 賣場을 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으나, 제품을 현지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관리할 사람이 없어서 賣場을 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제너시스가 세계 식품 프랜차이즈 업계의 1등 자리에 올라설 것으로 예상하는 시기는 2020년. 창립 25주년이 되는 해다. 점포수 1000개를 돌파하는 데 맥도널드가 14년 걸렸는데, 제너시스는 4년 걸렸다. 세계 진출도 맥도널드는 15년 걸렸지만, 제너시스는 7년 걸렸다. 맥도널드에 햄버거대학이 생긴 것은 22년 만이었지만, 제너시스의 치킨대학은 5년 만에 설립됐다.
현재 맥도널드 가맹점이 세계에 3만2000개가 있다. 창립 25주년까지는 全세계에 5000개밖에 안 됐다. 제너시스는 2010년까지 1만~1만5000개 개점을 목표로 잡고 있으며 창립 25주년인 2020년에는 全세계에 가맹점 5만 개를 운영할 계획이다.
한때 「음식 전문기자」 소리를 들은 바 있는 필자가 BBQ를 먹어 보고 내린 판단은 이 정도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데 전혀 손색이 없는 상품이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회사가 클 것 같다는 느낌을 가장 강력하게 심어 준 사람은 CEO 尹洪根 회장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고생하며 자란 사람이라, 웬만한 어려움은 잘 견뎌 낼 것 같았고, 결코 노사분규가 생길 것 같지 않은 획기적인 사원복지제도를 갖춰 놓고 있는 점이 신뢰가 갔다.
株當 가치 100만원짜리 주식 20%를 직원들에게 無償 증여
尹회장은 『최상의 직원 만족이 진정한 고객감동을 이끈다』는 신념으로 同種업계 최고대우를 약속, 본사 170명, 지역사업자와 계열기업까지 350명에 달하는 직원들에게 일류 기업 못지않은 급여를 주고 있다. 창립 때부터 매년 10% 임금인상이 이루어졌고, 2001년에는 40%, 2002년에는 30%를 인상해 줬다. 대졸 초임 사원의 연봉은 연말의 특별상여금을 포함, 약 2800만원 정도, 8년차 사원은 5000만원 내외라는 것이 제너시스 관계자의 말이다.
이와는 별도로 尹회장 개인 소유의 회사 주식 20%를 무상으로 직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 회사의 자본금은 10억원인데 비해 社內 留保(유보)금이 190억원에 이르고 있다. 가맹점까지 합친 연간 매출액은 2002년 3200억원 정도인데, 순익이 연간 50억원이 넘는다. 매출액으로 따지면 순익률이 높은 것 같지 않지만, 투자액 대부분이 가맹점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임을 감안하면 많은 편이다.
국세청이 감정한 주당 1만원짜리 이 회사 주식의 실질가치는 60만원, 증권시장이 성장성까지 감안하여 산정한 시장가치는 100만원 정도라고 한다. 결국 尹회장은 국세청 감정가격으로 120억원, 證市 산정가격으로는 200억원어치의 주식을 사원들에게 거저 나눠 줬다는 얘기다. 현재 尹회장의 지분은 51%, 초기 투자자에게 준 지분이 29%다.
1955년 전남 순천에서 尹在鈺(윤재옥)-徐玉子(서옥자) 부부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尹회장은 순천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후, 1975년 광주 조선大 무역학과에 들어갔다. 그는 천성적으로 활달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즐기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공부에 매달렸다. 아버지가 고교 3년 때, 작고하면서 가세가 기운 탓에 장학금을 받아야만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大를 전체수석으로 졸업했다. 대학 은사들은 학자의 길을 걷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홀어머니와 아직 학생인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어릴 때부터의 꿈이 「기업주」
군대문제는 1기 학사장교에 지원, 합격함으로써 해결했다. 장교라서 월급도 나왔고, 리더십과 승부근성이 있던 그의 적성에도 딱 맞았다. 강원도 원통에서 39개월간 복무했다.
광주상고 교사로 잠시 일하다, 1984년 주식회사 미원(현 대상그룹)에 입사했다. 가족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 역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 제 몫을 한 것 같아 스스로 대견스러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선 잠재된 야망이 살아 있었다. 어릴 때부터 키워 오던 꿈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그의 부친이 서울에 갔다가 책가방과 운동화를 사 왔다. 「검정고무신」에 허리춤에 찬 「책보」를 등교 차림새의 표준으로 알고 있던 그로선 큰 문화충격이었다. 책가방엔 어깨에 맬 수 있도록 끈이 둘 달려 있고, 책을 쉽게 넣고 뺄 수 있을 뿐 아니라 도중에 튀어나오거나 흘러내리지 않도록 자물통 비슷한 것이 달려 있었다.
조금만 뛰어놀아도 엉덩이께로 흘러내리거나 매듭이 풀어지는 책보는 도저히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윤기까지 반지르르 흘렀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런 물건들을 어디에서 만드는지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만든다고 일러줬다. 그는 그때 생각했다.
『아, 회사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물건을 만드는 고마운 곳이구나. 나도 그런 물건을 만드는 회사를 가져야겠다』
그 후로 그의 꿈은 대통령, 의사, 판검사가 아닌 기업의 주인이었다. 어찌 보면 철부지의 백일몽이었는지 모르지만, 점차 머리가 굵어 성인이 됐고, 그것도 월급봉투 하나로 엄혹한 현실을 헤쳐나가야 할 직장인이 되었건만 그의 꿈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일단 가정 형편상 회사원으로 출발했지만 「언젠가는 꼭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되고야 말리라」라는 내면의 소리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입사 때부터 경영자의 시각과 마인드를 갖자고 다짐했다. 「사장의 눈엔 어떻게 비칠까?」하는 고민을 하면서 일을 했다. 때문에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고 윗사람에게 인정도 받게 되었다. 덤으로 「과장 같은 신입사원」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입사 후에 처음 맡은 업무는 닭을 포함한, 동물 사료용 곡물의 수입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대부분의 구매업자들은 곡물 판매상을 상대할 때 값을 무조건 깎고 보자는 식으로 나갔다. 그는 그 관행을 과감히 버리고 가격을 절대 깎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웠다. 언뜻 들으면 망하기 딱 좋은 전략이지만, 오히려 깎기에만 집착하는 것이 「소탐대실」이라고 생각했다.
창업 때, 직원들에 선언한 세 가지 약속의 사연
나름대로 마련해 둔 복안은 의외로 간단했다. 사료곡물을 구입할 때 값을 깎지 않는 대신, 고급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사료에 쓰이는 곡물은 주로 옥수수나 소맥 등인데, 그 생산량과 가격은 수출국의 기후변화나 정치·경제적 상황 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는 정보를 미리 수집해서 가격이 저렴한 시기를 골라 곡물을 수입하는 전략을 세웠다. 값을 깎지 않자, 판매상들은 앞다투어 관련정보를 그에게 주었고, 그 덕분에 경쟁 업체들보다 싼 가격에 곡물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히딩크 감독의 말처럼 「여전히 배가 고팠다」. 사실 그는 수출입 담당 부서보다 영업 부서로 가고 싶었다. 고객과 직접 접촉하는 살아 있는 현장 속으로 뛰어들고픈 욕구가 강했다. 하지만 축산과 출신이 아닌 탓에 기획실로 발령이 났다. 그는 기획실 근무를 또 하나의 기회로 삼았다. 그곳에서 1년을 보내며 회사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었고, 회사 운영의 큰 틀을 배울 수 있었다.
사실 그 시기는 그와 가족들에겐 어둡고 긴 터널이기도 했다. 그는 입사 직후, 부인이 마련해 온 신혼집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 학사장교 동기생 4명과 함께 판촉물을 만드는 회사를 차렸으나 실패했다. 그는 2000만원이라는 큰 빚을 떠안았고 그의 가족은 월셋집을 전전하게 되었다. 월급의 3분의 1은 사업 실패로 인한 빚을 갚는 데로 지출됐다.
빚 때문에 아파트를 처분하고 월셋집을 경기도 군포에서 구했는데 출퇴근 시간이 4시간이 넘었다.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은 그의 부인이었다. 자신이 마련해 온 집을 팔아 빚을 갚을 때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고, 늘 묵묵히 「하숙생 家長」 뒤를 따라 주었다.
가끔 기사를 자청한 부인이 모는 차 안에서 부족한 대화시간을 보충할 수 있었고, 토요일에는 당직을 자청, 부인과 아이들을 회사 근처로 오도록 하여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느 기업이 내 능력을 지금 월급의 2배로 산다면 남들보다 5배 이상의 일을 할 텐데」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짐했다. 만일 기업을 직접 경영한다면 사원들에게 다른 기업 2배 수준의 임금을 줄 것이고, 집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주겠으며, 정년퇴직 후까지 老後보장을 해주겠다고 말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자면 무리한 내용일 수도 있지만 이 세 가지 다짐은 여전히 변함없는 그의 경영철학이고 그 철학을 실천해 가고 있다.
첫 번째는 同種업계 최고 수준의 급여 지급으로, 세 번째는 주식 무상양도로 해결했다. 두 번째 집 문제는 회사가 안정되는 대로 연차 계획을 세워 사원들에게 社宅을 지어 줄 생각이다.
「마니커」 영업부장으로 닭고기와의 인연 시작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가 흘린 땀과 눈물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3년 만에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했으며, 곧이어 경기도 이천 사료공장의 총무과장으로 옮겨 갈 기회가 생겼다.
이천 공장 총무과장으로 부임해 보니, 총무, 생산, 영업의 세 부서 중 총무과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했다. 그는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업이고 다음은 생산이며 총무는 그 둘을 도와주는 보조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업부서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대리점 사장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도 들어보고, 고충처리센터도 만들었으며, 품질관리와 신용관리, 법무관리 등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약간의 오해와 시기도 있었지만, 그의 마케팅 전략을 공장 직원들이 전적으로 동의해 주었고 대리점의 불평도 점점 사라져 생산라인엔 활기가 넘쳤다.
그 결과, 부임 3년 만에 판매량이 세 배 증가했으며, 영업실적, 생산성, 품질에서 모두 대상을 차지하는 쾌거도 이룩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그는 새로 중국에 세워질 사료공장의 사장으로 내정되었다. 중국行은 이천行 이상의 기회와 도전일 것 같아 가슴이 설♥다. 하지만 그 무렵 미원이 부도가 난 닭고기 업체 「천호 마니커」를 인수하면서 그의 중국행은 취소되었다. 1993년 말, 중국 발령이 내정되었는데 1994년에 「마니커」의 영업부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실망이 컸지만 영업 부서에서 일하고 싶었던 그는 흔쾌히 「마니커」 영업부장으로 옮겨 갔다. 닭고기와의 인연은 이렇게 사료에서 출발해 깊어져 갔다.
「마니커」의 1일 평균 판매량은 부도 전, 5만 마리였으나, 부도 후에는 1만 마리도 채 되지 않았다. 첫 출근을 해보니 영업직 직원은 단 3명만 남아 있었다. 우선 업무파악에 들어갔다. 제대로 된 서류도 없고, 미수금만 잔뜩 쌓여 있었다. 하지만 목표만큼은 3개월 내에 기본 5만 마리 이상을 판매하겠다는 것으로 설정했다.
1994년 2월 업무보고 때 이런 내용을 브리핑했더니 사장과 임원들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었다. 「마니커」의 품질과 미원이라는 브랜드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리점 사장들을 끈질기게 설득, 「마니커」는 그해 4월에 4만 마리, 5월엔 5만 마리, 6월에는 6만 마리 판매를 돌파했고, 7~8월엔 1일 10만 마리 판매를 달성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런 추세라면 당초 계획대로 3년 후엔 1일 20만 마리 판매의 위업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형 점포로 승부 결심
그가 장담했던 대로 「마니커」는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면서 업계 매출순위 톱을 넘볼 정도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절에 쌓았던 닭고기에 관한 정보와 지식은 지금까지도 그에게 큰 자산이 되고 있다.
「마니커」 영업부장으로 일하다 보니 닭고기 시장의 판세를 잘 읽을 수 있었다. 3년 후 하루 20만 마리 판매를 달성하려면 물량 소화를 위한 치킨 전문점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때마침 미원은 外食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와 그는 추진 방법에 이견이 있었다. 그는 치킨이라는 상품 특성에 걸맞은 소형점을 주장했고 회사는 그룹 이미지에 어울리는 대형점을 주장했다.
당시에 KFC 같은 대형 패스트푸드점 하나 여는 비용은 20억원. 반면 거기에서 팔 수 있는 닭고기는 많아야 하루 200마리 남짓했다. 투자비용에 비해 실익이 적었다. 당시 멕시칸이나 페리카나 같은 10평짜리 소형 치킨점에서는 하루 30마리 정도를 팔았다. 20억원짜리 대형매점 하나보다 5000만원짜리 소형 점포 40개의 이익이 훨씬 컸다.
회사의 윗분들을 설득했으나, 일부 중역들의 계속적인 반대에 부딪혀 사업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미원이라는 브랜드 이미지, 미원연구소가 개발한 맛, 「마니커」라는 생산라인. 이 3박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는 「중대 결심」을 했다. 평생을 함께 하기로 「桃園結義(도원결의)」한 군대 동기생 두 명과 막내동생에게 「출정」 채비를 갖추라고 일렀다.
성공할 자신은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일었던 게 사실이다. 부인과 강릉으로 여행을 떠났다. 바다를 보며 많은 고민을 했다. 역시 부인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를 믿겠다면서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돌아와선 社內(사내) 사업가 제도의 도입을 회사에 건의했다. 「마니커」는 판매처가 필요하고 그는 미원이라는 브랜드가 필요하니 서로 돕자는 게 그 골자였다. 일부 중역들이 회사의 이미지 실추를 염려하며 가로막았지만 「마니커」의 사장이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1995년 여름, 尹회장은 드디어 자기 사업을 하게 됐다. 사업을 시작하려니 문제는 역시 자금이었다. 일단 오랜 막역지우와 부인의 도움으로 기초자금을 마련하고, 여러 선·후배들에게 사업계획서를 보여 주면서 성의껏 설명했더니 2000만원에서 5000만원의 투자를 해주었다.
1995년 자본금 5억원으로 「제너시스」 창업
1995년 9월1일 자본금 5억원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열심히 기도했다. 사업이 성공하면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고 어려운 이웃과 나누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그런 그에게 「제너시스(Genesis·창세기)」라는 회사명을 지어 주었다.
2개월의 준비기간은 피가 마르고 애간장이 타는 시간이었다. 그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라는 성경 구절을 읊조리면서 일을 계속 밀고 나갔다. 브랜드명을 「BBQ(Best Believable Quality)」로 정했다. BBQ를 상표로 정한 것은 약간의 사연이 있었다.
대형 점포를 만들라는 林昌郁 미원 회장의 지시에 맞서 尹회장이 소형 점포로 승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미원 측은 미원이나 「마니커」라는 상표를 쓰지 않는 조건으로 社內 기업을 만들도록 승낙했다.
독자 생존용으로 고안해 낸 것이 BBQ였다. BBQ는 바비큐라는 숯불구이를 연상케 했고, 「가장 믿을 만한 품질」이라는 의미도 좋았다. 본래는 BFQ(Best Favorite Qualityㆍ가장 맛있는 품질)를 생각했으나 音韻(음운)이 맞지 않아 BBQ로 작명했다고 한다. 尹회장은 지금도 作名을 잘 한 것이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尹회장은 회사 설립 초기부터 매뉴얼을 만들고 판매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역점을 뒀고 가맹점 교육도 준비했다. 가맹점 지원을 위해 초기부터 본사 직원을 30명이나 두었다.
무엇보다 미원연구소에서 개발한 독특한 맛이 있었기에 자신은 있었다. 미원은 BBQ 제품을 개발하면서 1회에 약 1000명씩 30~50회(약 3만~5만명) 맛을 시험했다. 남녀노소, 전국 각지의 누구에게도 좋은 맛이라야 했기 때문이다.
대개 어떤 맛이든 99%까지는 맞추기 어렵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1%가 모자라면 맛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 실패한다는 것. 따라서 마지막 1%를 맞추기 위해 수없는 실험을 되풀이한다. 이런 실험을 거듭한 결과, 찾아낸 맛으로 만든 제품인 만큼 인프라는 확실하게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10월에 가맹점 모집 광고를 냈다.
광범위한 맛 테스트와 표준화가 필수
닭고기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을 때 왜 하필 닭고기냐는 반응이 많았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치킨 시장은 포화 상태고, 때문에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치킨 시장은 「공백 시장」이라고 봤다. 기존 치킨점은 치킨을 안주의 하나로만 취급하는 호프집이 대다수였다. 호프집에서 치킨을 판매할 경우, 가족 단위의 이용은 힘들다. 그런데 치킨은 바로 여성과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이런 이유로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BBQ 치킨은 그 맛과 독특한 마케팅 전략 때문에 날로 성장했다. 그는 한 달에 점포 25개를 개설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업계 최초로 고적대와 도우미를 동원해 이벤트 행사를 지원하고, 본사 직원이 전국을 돌면서 각 점포에 1주일간 상주, 점포 운영의 기틀을 잡았다. 그 결과 사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1995년 말 16개이던 가맹점이 6개월만인 1996년 6월 28일 100호점 개점이라는 기록으로 이어졌다.
물론 100호점 탄생까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부 가맹점 사장들이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비자에게 품질과 신뢰로 호소하기보다는 재료비를 낮춰서 낮은 가격으로만 승부를 걸자며 반발한 것이다.
그는 그들을 일일이 만나서 좋은 제품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이해시켰다. 가맹점 설득에 업무의 최우선을 두었다. 가맹점의 납득과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고객에게도 확신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BQ 자체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품질」을 뜻하지 않는가.
이렇게 가맹점의 동의와 고객의 신뢰를 얻는 데 최선을 다한 결과, 그해 12월 200호점이 탄생했고, 다시 1년 뒤엔 430호점, 1998년 3월엔 500호점을 개설했다.
尹회장은 BBQ의 고속 성장이 단순히 運 때문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단일 품목으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박사 연구원을 보유, 맛을 개발하고 품질을 관리·개선하고 있으며, 제품 하나를 개발하면 2만 명 이상의 일반인이 試食을 통해 맛을 시험한다. 치킨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음식으로, 성, 연령, 지역,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이의 입맛에 맞아야 한다. 때문에 맛 테스트와 표준화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역시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닭고기를 한 마리씩 먹는다. 그가 맛에 확신이 서야만 고객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너시스의 이 모든 노력과 노하우는 초창기부터 운영해온 세계 유일의 「치킨대학」을 통해 체계적으로 전수되고 있다. 치킨대학은 가맹점 사장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들었다.
프랜차이즈 사업은 본사가 정한 매뉴얼대로 음식을 만들고 품질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교육이 필요하다. 경기도 이천 7만2000평의 부지에 마련된 치킨대학은 매주 40~50명이 5일 내지 2주일씩 교육을 받는다. 중국 가맹점이 늘어나면 현지 교육원이 생길 때까지 이들도 한국에 데려다 당분간 교육을 시킬 예정이다.
하루 닭 소비량 10만 마리… 전국 생산량의 10%
프랜차이즈 사업은 절대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게 아니다. 브랜드화, 마케팅, 운영시스템, 물류시스템, 자금과 조직력, 이 모두가 잘 맞아떨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제너시스의 프랜차이즈 사업은 새로운 한국형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승승장구하던 사업도 IMF 사태 앞에서는 고비를 맞았다. 사료 원료가 수입되는 상황에서 환율 급등은 큰 부담이었다. 우선 편지를 보내 가맹점 사장들을 안심시키고 간담회와 현장방문을 통해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모두들 아껴야만 살아 남는다고 외치면서, 적극적인 판촉투자에 역점을 두었다. 물론 뼈를 깎는 원가절감 노력도 있었지만 모든 여력을 제품개발과 판촉에 쏟아 부었다.
브랜드 이미지 提高를 위해 TV 광고도 동원했다. 서서히 투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때마침 일기 시작한 창업 붐이 겹치면서 가맹점이 크게 늘었다.
소비자의 가벼워진 주머니 사정도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했다. 쪼들려도 外食 횟수가 곧바로 급감하는 게 아니라 일단은 싼 품목으로 전환되는 법. 저렴한 닭고기 소비가 증대되는 건 당연했다. 危機(위기)는 危險(위험)과 機會(기회)의 조합어라고 한다. 그는 위험을 기회로 바꿀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연달아 시련이 덮쳤다. 가장 큰 것이 자연재해였다. 1998년 여름, 공장이 수해를 당했다. 생산라인 중단으로 가맹점에 닭을 공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방에서 아우성이었다. 외식사업에서 고객의 주문에 응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맹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잠시 휴업하도록 했다. 그리곤 밤낮으로 복구작업에 매달렸고 그 덕분에 2週 이상 걸린다는 당초 예상을 깨고 3일 만에 대부분을 재가동할 수 있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어려움이 연달아 밀어닥쳤다. 불가분의 협력관계에 있었던 미원 「마니커」가 매각된 것이다. 새로운 「마니커」사는 BBQ 상표를 내놓을 것을 종용했다. 6개월이나 끈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결국 일부 비용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BBQ 상표는 지키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BBQ는 설립 4년 만인 1999년 10월, 국내 프랜차이즈 최초로 가맹점 1000호점을 돌파해 프랜차이즈 업계 신화를 창조했고, 2003년엔 1400개의 매장을 가진 국내 최대 프랜차이즈 업체로 성장했다.
제너시스가 소비하는 닭은 하루 10만 마리. 우리나라의 닭 소비량은 2002년의 경우, 38만t이었다. 1kg짜리로 환산하면 3억8000만 마리(1인당 8마리)다. 제너시스는 1일 전국 닭 생산량 100만 마리의 10%, 치킨점에서 사용하는 60만 마리의 16%를 소비하고 있다.
중국 최대의 민영기업 「東方希望」과 합작 성공
닭은 국산 新鮮肉(신선육)만 쓴다. 수입 냉동육을 쓰면 맛이 60%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닭을 키우는 농가에 연간 700억원을 벌게 해주고 있다는 계산이다.
선진국에 비하면 소비량이 아직 5분의 1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한약과 관련된 낭설이 해명되고 닭요리가 개발되면 소비량은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닭은 3低1高 육류로 꼽힌다. 우리 몸에 해로운 지방질, 콜레스테롤, 칼로리 등 세가지가 3대 육류(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중에서 가장 낮은 반면, 필수 아미노산 함유량은 가장 높다. 한약을 먹을 때, 닭고기가 해롭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닭의 영양가가 워낙 높다 보니까 우리 몸이 가진 영양분 흡수의 한계 때문에 한약의 약효가 제대로 발현되지 않아서 동시에 먹는 것을 금해온 것이라고 한다.
尹회장은 국내시장이 포화상태를 이루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크기가 무한대에 가까운 중국 시장을 노크했다. 중국 진출을 위한 합작 상대로 처음 접촉한 회사는 중국 국영기업인 H그룹. 하지만 H그룹의 미국 합작회사인 K그룹의 반대로 합작에 실패했다. 하지만 尹회장은 실망하지 않고 중국 최대 민영기업인 東方希望(동방희망) 그룹과 합작을 시도했다. 희망그룹은 제너시스와 마찬가지로 사료사업에서 출발했으며 검소한 경영으로 유명한 회사였다.
그는 자신을 갖고 희망그룹 劉永行(유영행) 회장을 만났다. 그가 닭고기 사업에 관한 설명을 하자, 劉회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2시간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곤 말미에 프랜차이즈 사업의 핵심 포인트에 해당하는 질문 몇 개를 던졌다. 점포의 위치선정, 가격 전략, 매장의 크기, 가맹점에 필요한 시설비, 마케팅 전략(배달의 有無 포함) 등이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劉회장은 이미 北京에 진출한 KFC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보다 소형 매장이 낫다는 생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尹회장은 프랜차이즈에 대해 문외한인 劉회장이 핵심만 짚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보고 반드시 중국 진출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2002년 10월 劉회장은 극비리에 후계자인 아들과 단 둘이 한국을 방문해 BBQ 가맹점들을 둘러봤다. 그런 후 합작사업은 급속도로 진척됐다. 절반씩 투자해서 자본금 500만 달러의 합작회사를 설립, 중국에서 BBQ 브랜드로 닭고기 패스트푸드점을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지난 6월28일 두 개의 점포가 동시에 문을 열었다.
『2020년 全세계에 점포 5만 개 문 열겠다』
희망그룹의 인지도와 브랜드 파워, 제너시스의 프랜차이즈 경영 노하우를 결합시킨다면 2010년까지는 1만 개의 BBQ 매장을 개설할 수 있을 것으로 尹회장은 확신하고 있다. 중국의 1인당 닭 소비량은 4~5마리. 선진국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양이다. 따라서 앞으로 늘어날 여지가 많다. 페킹덕이 유명해서 중국인들은 오리를 많이 먹는 것 같지만, 1인당 연간 오리 소비량은 1마리도 안 된다.
다른 외국 진출도 시간문제다. 다만 준비기간이 필요할 뿐이다. 중국 시장도 3년간 준비했다. 프랜차이즈는 비용 때문에 규격화된 맛을 낼 수 있는 공장과 원재료, 매뉴얼을 현지화해야 한다. 본국에서 조달하려면 비용이 너무 든다. 중국에 진출할 때도 양념에 들어가는 마늘, 케첩을 현지에서 찾느라고 2년이 걸렸다. 사람의 입맛을 맞추고 BBQ 고유의 맛을 찾기가 어렵다.
거기에다 현지화를 위한 사람 교육도 보통 일이 아니다. 다른 프랜차이즈와 달리, 가맹점과 본사가 영원히 끈을 잇고 살아야 하는 것이 BBQ사업의 숙명이다. 원료를 대 주고, 제품이 제대로 고객들에게 전달되는지 중간관리자(슈퍼바이저)가 정기적으로 일일이 체크를 해야 한다. 중간관리자 한 사람을 키우는 데만 2~3년이 걸린다.
세계 10여 개국으로부터 마스터 프랜차이즈 요청도 받고 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시간이 필요한 실정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와 입맛이 비슷한 스페인의 요청이 가장 끈질겨 내년 초 가맹점을 낼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스페인에 진출하면 그곳을 베이스 캠프로 삼아 입맛이 비슷한 다른 라틴국가와 중남미로 시장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반응이 좋기 때문에 회사 설립 25주년이 되는 2020년엔 제너시스가 全세계에 5만 개의 가맹점을 가진 세계 최대ㆍ최고의 프랜차이즈 그룹이 될 것이라고 尹회장은 자신 있어 한다.
프랜차이즈는 선진국형 유통기법이자, 혁신적인 경영기법이다. 더구나 부존자원이 필요 없는 지식산업이다. 따라서 이런 프랜차이즈 산업이 정착·활성화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들이 구비되고 정비돼야 한다는 것이 尹회장의 소망이다.
한국식 닭고기 요리 표준화 위해 「닭 익는 마을」 창업
尹회장은 BBQ 사업이 안정을 찾게 되자, 사업다각화 계획을 실천에 옮길 때라고 생각했다.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변신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차기 프로젝트는 바로 한식 외식사업. 1999년 한식 닭고기 패밀리 레스토랑인 「닭 익는 마을」을 세상에 내놓았다. 韓食이 외식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표준화, 시스템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닭 익는 마을」은 朴木月 시인의 작품 「나그네」 중 「술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이라는 구절에서 따 왔다.
닭의 가장 맛있는 넙적다리살을 이용해 소갈비와 똑같이 만든 숯불갈비, 순살 양념갈비, 고추장 불갈비, 주물럭, 닭칼국수 등의 품목을 개발했다.
한식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맛 표준화 작업. 「한식은 손맛」이라는 편견이 두터워서 차별화된 특색을 알리는 게 쉽지 않았다. BBQ 치킨에 비해 성장 속도가 더뎠고 가맹점 사장들의 불만도 터져 나왔다.
하지만, 참숯 닭불구이 전문점으로 특화시켜서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다. 현재 가맹점은 120곳. 닭요리도 삼겹살과 갈비를 대체할 수 있는, 韓食의 주류로 자리잡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구워 먹는 것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이 주로 많이 찾는다. 점포수가 500개만 넘어서면 한국의 닭고기 食문화가 바뀔 것으로 제너시스 측은 전망한다.
2003년엔 우동·돈가스 전문점인 「U9(유나인)」 브랜드도 새롭게 선보였다. 전문 인력을 일본 현지에 파견해 맛을 연구,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퓨전 우동과 돈가스를 개발했다. 젊은 층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尹회장은 1985년 중매로 결혼한 부인 金恩京(42)씨와 사이에 慧雄(혜웅), 景源(경원), 智源(지원) 등 1남2녀를 두고 있다.●